한강교 폭파와 김창룡의 배후였던 제임스 하우스만, 그리고 차길진 (?)과의 뜬금없는 연관성

 

[차길진의 마이웨이 25] 내가 받은 특종상

승인2008.07.23l수정2008.07.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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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르포기자로서 받은 특종상이 하나 있다. 1991년 9월4일자 시사주간지 토요신문에는 전 주한 미군사령관 고문 제임스 H 하우스만을 최초 인터뷰한 ‘하우스만 특별인터뷰-대한민국 창군 비화’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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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35년 간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군 총참모장의 특별고문, 미국국방부 한국담당관, 주한 미8군사령관 특별고문 등을 역임한 한국 정보통이다. 입을 안 열기로 소문난 고집불통 미국 노인을 설득해 특종 인터뷰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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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르포기자로 활동하고 있을 무렵, 나는 통역사와 함께 하우스만을 만나기 위해 미국 텍사스 오스틴으로 갔다. 번화한 거리, 잘 정비된 시설 등 오스틴은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도시였다. 하우스만은 해방 후 미 군정당국 대위로 근무하면서 국군 창설에 깊이 관여했으며, UN군 사령관 특별고문, 8군사령관 특별보좌관 등 약 40년 동안 한국의 군 정보 관련 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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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입니다.” 하우스만의 집은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했다. 다만 그의 남다른 한국 사랑을 보여주듯 집둘레에 무궁화가 활짝 피어있었다. ‘찰칵’ 무궁화를 찍는 사이, 하우스만이 나와 우리를 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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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수천 번 연습이라도 한 듯 우리 쪽 예상 대답과 거의 일치하는 말만 했다. 지금은 은퇴한 정보계의 거물이지만 한·미 양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기로 다짐한 듯했다. 할 수 없이 나는 하우스만을 자극하기로 했다. 옆에 통역사가 있었지만 하우스만을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말은 통역하지 않을 것 같아 아예 서툰 영어지만 내가 직접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처음 쓰는 영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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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가까이 한국에 계시면서 한국말을 하나도 할 줄 모른다고 하시니 정말 유감입니다. 당신 같이 한국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한국을 배후조종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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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하우스만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못한다는 한국말로 유창하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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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말 하지 마시오. 그레이하운드 버스가 승객을 가득 태우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 앞의 차가 섰다고 급브레이크를 밟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많은 승객을 태운 버스라면 앞의 차를 박고서라도 전진해야 승객이 다치지 않소. 당시 한국은 그런 상황이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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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아주 치밀한 인물이었다. 장시간의 인터뷰 중 한국어에 능통하면서도 영어를 구사했고 한국에 익숙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한국적 습관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유창한 한국말이 들통난 하우스만은 그제야 내 작전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웃었다. 그는 정보를 캐기 위해 일부러 무례하게 굴었던 나를 오히려 ‘솔직한 사람’이라며 좋아했고 뉴저지 에디슨 시티 출신의 재즈가수였던 부인은 ‘Will you release me?(나를 놓아주실래요?)’란 노래를 멋진 피아노 반주와 함께 들려주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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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인터뷰에서 하우스만은 대한민국 건국에서부터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통령의 성격을 이렇게 분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약점을 교묘히 이용한 인물이며, 박정희 대통령은 즉흥적인 성격이라 껄끄러운 사이였고, 전두환 대통령은 우회할 줄 모르는 정통 군인이며, 노태우 대통령은 덕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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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국에서 받은 선물들이라며 청화백자 등 한 눈에 봐도 국보급 자기들을 보여줬지만 그때 나는 골동품보다 정보가 더 중요했기에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우스만은 먼저 떠난 아들과 딸, 그리고 정신과 질환을 앓고 있는 딸을 위해 기도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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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우스만을 다시 만난 것은 2006년이었다. 건강검진을 위한 여행을 떠난 첫날 우리 일행은 텍사스 오스틴에 도착했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그의 집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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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의 부인도 떠난 집엔 무궁화만 쓸쓸히 피어있었다. 막 발길을 돌리려던 찰나, 하우스만 영가가 나를 불렀다. “차 법사, 오랜만이오.” 극적인 재회였다. “이젠 죽었으니 내가 가진 비밀로부터 자유롭고 싶소.” 자유로운 나라 미국. 그러나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비밀들이 태어나고 있다. 겨우 모래더미 속에서 작은 모래알 정도의 비밀을 밝힌 정도지만 이것을 시작으로 역사의 미스터리 퍼즐을 하나씩 맞춰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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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암미래연구소대표 www.hooam.com경남연합일보 abz3800@gn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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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 그때 그 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⑤

(5)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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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0일 정부, 긴급대책회의 열어 '토벌사령부' 광주에 설치

정일권,백선엽 등 참여..박정희도 작전참모 보좌 역할로 참여

3.8선 경비 제외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 토벌작전에 투입

해군,부산5연대 여수 상륙 작전 감행... 시민군 총력전 저지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여수여중학교 주둔, 살육 본격

소련군이 노획해 공개한 당시 영상에는 공격, 피난,불타는 장면 등 담겨



가운데 인물이 송호성 사령관, 그 왼쪽 박정희, 오른쪽은 풀러 대령. 칼 마이던스의 사진 자료 주철희 제공

여순항쟁 발발. 일명 ‘반란’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부와 국방부는 10월 20일 미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의 요청으로 이범석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긴급대책회의를 개최한다. 그리고 10월 21일 광주에 반군토벌전투사령부(이하 토벌사령부)를 설치한다. 토벌사령부의 사령관은 송호성이다. 대다수 기록에 송호성의 계급을 준장으로 표기한다.

당시 국군의 지휘부는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장교가 장악하고 있었다. 송호성은 보기 드물게 광복군 출신이다. 광복군 시절 ‘장군’이란 호칭을 국군에서도 그대로 불렀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계급을 준장으로 표기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에는 별을 단 사람이 없었다. 즉 준장 이상 계급이 없었다. 1948년 12월 10일 최초의 준장이 탄생한다. 김홍일, 채병덕, 이응준, 송호성, 등 육군 4명과 해군의 손원일 등 대령 5명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여순항쟁 72주년 특집 "1948,그때 그자리 '여순항쟁의 길'을 걷다" 는 10편에 걸쳐 연재됩니다.

(1) 봉기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진 14연대

(2) 봉기군, 여수역으로 향하다

(3) 북상길에 오른 봉기군

(4) 함성으로 가득한 여수 시내

(5) 바다로 들어오는 토벌부대

(6) 굽이친 길에서 만난 전투

(7) 포격으로 불타는 여수시내

(8) 남녀노소 학교로 모여들다

(9) 손가락총에 피로 물든 여수

(10) 만성리 형제묘의 진실

38선 경비병력 제외, 가용 모든 병력 토벌작전 투입

토벌사령부(사령관 송호성 대령) 휘하에 제2여단(사령관 원용덕 대령)과 제5여단(사령관 김백일 중령)을 배속시켜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나선다. 비행대(L형 연락기 10대) 김정렬 대위와 수색대(장갑차) 강필원 대위도 배속된다. 제5여단 김백일 중령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당시 비리 연루 혐의로 보직이 없었으나, 여순항쟁이 발발하면서 제5여단장에 부임한다.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한 경험이 작용했다.

비행정찰대(1948년 10월 27일 촬영된 영상에서 갈무리) 자료 주철희 제공

제2여단에는 대전 제2연대(이명재 소령) 2개 대대, 대구 제6연대(연대장 김종갑 중령) 1개 대대, 군산 제12연대(연대장 백인기 중령, 부연대장 백인엽 소령) 3개 대대, 마산 제15연대(최남근 중령) 1개 대대 등이 배속된다. 제5여단에는 전주 제3연대(연대장 함준호, 부연대장 송석하 소령) 2개 대대, 광주 제4연대(연대장 이성가 중령) 3개 대대가 배속되어 토벌작전을 전개했다. 또한, 토벌사령부에서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정일권 대령, 정보국장 백선엽 중령, 정보과장 김점곤 소령 등이 참모로서 사령관을 보좌하면서 토벌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박정희는 작전참모를 보좌하는 역할로 작전에 참여한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전투사령부에 배속되지 않은 별도의 부대가 있었다. 여수의 어르신들이 기억하는 김종원 부대이다. 봉기군과 시민의 대응이 정부가 예측한 것보다 강력해지자 10월 22일에 부산 제5연대를 추가 배치한다. 이는 38선 경계부대인 서울 주둔 제1연대, 춘천 제8연대, 강릉 제10연대와 제주도 진압작전 중인 제9연대와 제11연대 그리고 봉기를 한 제14연대를 제외하면 총 10개 연대 중 대전 이남의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을 토벌작전에 투입했음을 의미한다. 제5연대 1개 대대는 김종원 대위의 지휘아래 해군 함정을 타고 작전에 나선다.

상륙작전에 나선 해군 함정(1948년 10월 27일 촬영된 영상에서 갈무리) 자료 주철희 제공

당시 대한민국 국군 작전통제권은 미국에 있었다. 따라서 토벌사령부에는 작전ㆍ정보ㆍ군수업무를 지원하는 미군 군사고문이 배치되면서, 토벌작전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로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 임시군사고문단의 주요한 임무는 장비를 비롯한 병참물자 지원이었다. 토벌작전에 관여한 미군 주요 고문은 할리 풀러(Harley E. Fuller) 대령, G-3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 G-2의 존 리드(John P. Reed) 대위, 트리드웰(J. H. W. Treadwell) 대위, 프례(Robert F. Frey) 대위 등이다.

해군,부산5연대 여수 상륙 작전 감행... 시민군 총력전 저지

이와 함께 정부에서는 10월 22일 여수․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군법에 의해 사형 및 기타에 처한다고 밝혔다. 이 계엄령은 제5여단 김백일 중령의 명의로 되어 있다 보니 김백일이 독자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 계엄령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25일 정부는 계엄령을 차후 승인한다.

계엄령 선포문 자료 주철희 제공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라는 포고문에서 제14연대 ‘반란’은 국법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고 명했다. 10월 23일 이승만 대통령도 일반 국민에게 경고문을 발표했다.

토벌사령부가 먼저 공격에 나선 곳은 순천이다. 10월 22일 순천의 주요 거점 장악하고, 23일 순천을 완전점령한다. 이 시간 해군과 부산 제5연대는 여수 상륙작전에 나선다. 당시 부산신문 정영모 기자는 “23일의 제1차 상륙기도 시는 반항도 맹렬했을 뿐 아니라 해안지대에 모자를 씌운 「허수아비」를 내세워 관군의 공격 목표를 교란할 전술을 썼다”(1948년 10월 30일)고 보도했다. 이 전투는 해군 이상규 소령이 지휘하는 충무공호 외 6척의 해군부대와 제5연대에서 선발된 중화기 부대가 주동이며 김종원 대위가 지휘했다.

해군과 제5연대가 제1차 상륙작전을 시도했던 종포 앞바다 ⓒ박성태 2020

해군과 제5연대가 상륙작전을 시도했지만, 시민군의 맹렬한 대응에 실패한다. 1차 상륙작전에서 국군은 부산 제5연대 소속 중위 박태서(군번 10661, 일명 박타조)와 사병 2명이 전사하고, 사병 2명이 부상 당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호국전몰용사 공훈록>에는 당시 전사한 박태서는 일계급 특진으로 수록되어 있으나, 사병 2명은 없다. 1차 상륙작전에 실패한 해군과 제5연대는 25일 다시 상륙작전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박금만 작가가 그린 해군과 5연대의 제1차 상륙작전의 전투장면 ⓒ박금만

백두산 호랑이 김종원 여수여중학교 주둔, 살육 본격

10월 26일 토벌사령부가 여수 총공격에 나서고, 오후 늦은 시간에 구봉산․장군산․종고산 등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서국민학교에 본부를 설치한다. 그리고 27일 여수 시내 주요 지점에 공격에 나선다. 해군과 제5연대도 합세하여 27일 새벽에 공격에 나선다.

당시 해군과 제5연대 공격을 인용하면 “여수방면에 집결된 해상국군은 10월 27일 새벽부터 여수에서 4키로 떨어진 돌산부근 지점에서 행동을 개시하고 이상규 소령이 지휘하는 충무공 외 6척의 해군부대와 공동작전을 하는 한편 육상 관군과 밀접한 연락하에 상오 8시 45분을 기하여 전 여수의 반란군에 대한 총공격에 들어갔다. 이 관군부대는 제3여단 제5연대에서 선발된 기관총수로서 조직된 중화기부대가 주동이며 김종원 대위가 지휘하의 관군부대는 방금 LST 2호함에서 함포사격 중에 있다.”

이날 김종원 대위는 함상에서 조준기 없는 81밀리 추격포 2문을 갑판 위에서 설치하고 포격을 했다. 이 포격으로 토벌부대 제12연대 5중대 중대장(안정수 중위, 군번 12452)과 이공윤 이등중사(군번 0402860)가 전사했다. 제12연대 병사들은 상륙 대원들에게 죽일 놈들이라고 아우성을 쳤다. 제5연대는 10월 27일 상륙에 성공 후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여수여중학교에 주둔한다. 제5연대는 여수여중학교(현 여수여자고등학교)에 주둔하면서 종산국민학교에 설치된 군기사령부의 협력자 색출에 관여하며 김종원은 악랄한 악행을 자행한다.

해군 함정에서 여수시내로 함포를 쏘는 장면, 멀리 또 다른 함정이 보인다.(1948년 10월 27일 촬영된 영상에서 갈무리) 자료 주철희 제공

해군과 제5연대가 10월 27일 상륙작전 공격은 영상으로 촬영됐다. 여수신항에서 여수구항으로 이동하면서 공격한 영상이다. 촬영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6․25전쟁 중 소련군이 노획하여 공개됐다. 이 영상에는 여수시민들이 피난하는 장면, 시내가 불타는 장면, 해군 함정 공격 장면, 토벌군의 시내 수색 장면, 체포된 시민의 모습 등이 담겼다.

글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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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 미군부 작품

[서평] 재야 사학자 김상구의 '5.16 청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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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 연휴기간 소설이 아닌 760여 쪽에 달하는 우리의 현대사를 읽었다. 정말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흥미가 있었다. 국정농단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출판됐기 때문이다. 평소 알고 지낸 저자가 지난 20일 전화를 걸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밝힌 책이라고 전해 몰입을 해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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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사학자 김상구 씨가 최근 출판한 <5.16청문회>(2017년 12월, 책과나무)는 5.16쿠데타와 미군부, 여자 편력과 육영수 여사, 측근의 행태 등 박정희와 관련한 모든 내용을 디테일하게 조명했다. 1917년 11월 4일 출생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올해로 출생 100주년을 맞았고, 태어난 해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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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저자는 이 책에 이어 박근혜와 최순실을 조명하는 <박근혜·최순실 청문회>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어 출판 시기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5.16청문회>의 핵심은 ‘5.16 쿠데타는 미군부의 작품이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5.16 쿠데타의 진실을 말하는 증언들을 토대로 이를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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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이틀 뒤인 5월 18일 미8군 캠퍼스 안에 있는 하우스만의 집을 방문해 “혁명위는 하우스만 당신 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당신네 혁명이오”라고 했다. 사실 하우스만은 무엇보다 친일, 부일배를 중심으로 국군을 만들었는데, 국군을 창설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도 ‘한국군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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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후인 6월 13일 NSC회의에서 당시 케네디 미대통령은 “어떤 세력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했던 현재의 시점에선 부차적인 문제이며, 중요한 것은 권력을 쥔 자들이 미국에게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이다”라고 해 쿠데타 정권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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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61년 7월 21일 미8군 사령관 밴틀리트는 김종필과 장태화의 면담에서 “혁명이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되고 여러분이 실패하지 않도록 본관이 보장하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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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미군부는 1945년 9월 8일 미군정이 들어온 이후 70여 년간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개입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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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이승만 남한 단독정부, 한국전쟁과 정전, 4월 혁명과 민주당 정권 출범과 몰락, 5.16 쿠데타 등이 그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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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다섯 번의 쿠데타를 계획했다. 1952년 부산정치파동 시기에 이종찬, 이용문 등과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의 사주로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미국무부와 합참이 이승만 체제 유지를 결정함으로써 미수에 그쳤다. 두 번째는 1960년 5월 8일 김동하를 비롯한 만주군관학교 출신들과 박정희그룹이 계획했으나 4.19혁명으로 무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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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는 민주당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육사 8기와 5기 출신들이 데모진압 훈련인 비둘기 작전을 도용해 음모를 꾸몄지만, 61년 4월 19일 기대했던 소요가 일어나지 않음으로 쿠데타는 불발됐다. 네 번째는 5월 12일 비둘기작전을 훈련한다는 명분으로 소요와 관계없이 군대를 출동시키기로 했으나 일부 계획이 정부에 누설돼 불발됐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다섯 번째 음모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5.16 쿠데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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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만 이상의 군대를 가진 민주당 정권이 전군의 0.5%정도인 3400여명의 군인을 동원한 극소수 군인들에게 정권을 탈취 당했다는 것은 믿기지 않은 수수께끼이다. 대통령 윤보선, 총리 장면, 육군참모총장 장도영, 제1군사령관 이학림 등 쿠데타의 주모자인 박정희의 동향을 훤히 알고 있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이상한 쿠데타였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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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을 가진 유엔군사령관이자 미8군사령관인 매그루더와 대리대사 그린이 쿠데타 첫날인 1961년 5월 16일 오전 10시경, <미국의 소리>와 <AFKN>을 통해 장면 정부 지지를 선언했음에도 쿠데타가 성공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쿠데타 배후에 두 사람을 능가한 힘이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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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1948년 연말 숙군과정의 여파로 인해 그는 좌익 경력과 함께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개인사생활 면에서도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킨 인물이었다. 문제는 사전기획이든 사후승인이든 미국이 박정희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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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저자는 박정희에 대한 미국CIC비밀요원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 전 박정희의 이력이 의혹투성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그는 북경, 천진에서 8개월 정도 머물렀으나 그동안의 행적을 제대로 규명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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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사생도 시절 교장대리 이치업 살인미수사건 주범이었으나 처벌받지 않았다. 육사생도대장 시기 발생한 훈련생 2명 사망사건 역시 군부는 박정희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48년 숙군 과정에서 김창룡이 박정희의 구명을 상신했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별 연관이 없는 하우스만이 박정희 구명운동에 나선 것도 석연치 않다, 전쟁 중 전격적으로 치러진 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도 수상하다. 당시 좌익전력이 있는 박정희가 별다른 공훈 없이 소장까지 진급한 점도 규명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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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박정희 사생활은 어땠을까. 첫 번째 처 김호남과 낳은 딸 박재옥의 호적을 정리하지 않은 채 이현란과 3년 가까이 동거(사실혼)를 했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출생한 아들이 요절했다는 것은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는 점이다. 이현란과의 실질적인 결혼 생활을 포함해 육영수와 세 번째 결혼을 서둘렀다. 박정희와 육영수는 1950년 8월 첫 만났고, 10월 약혼, 12월 12일 결혼을 했다. 첫 부인 김호남과의 이혼은 약혼한 다음 달인 11월에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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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육영수의 결혼식 날 허억 대구시장이 주례를 했는데, ‘신랑 육영수 군과 신부 박정희 양은...’ 신랑신부의 이름을 뒤바꿔 부른 주례 실수담은 두 사람의 결혼을 유명하게 만든 화제꺼리가 됐다. 신부 측에서는 결혼을 반대한 옥천 갑부 장인 육종관은 참석하지 않았고 참석한 사람은 장모 이경령과 동생 육예수 둘 뿐이었다. 신랑측 주도로 결혼식이 이뤄져 신부 육영수는 시종일관 얼굴이 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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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결혼 청첩인은 오덕준, 조재천, 신상묵, 이성조, 손희선, 박춘식 등 6명으로 열린우리당 의장을 지낸 신기남의 부친인 신상묵도 포함됐다. 신상묵은 대구 사범 5기로 박정희의 1년 후배였기에 절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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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으로 한창 논란이 벌어졌다.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에 의해 열린우리당 의장인 신기남의 아버지 신상묵이 일제 문제가 불거졌다. 처음 폭로가 나왔을 때 신기남은 신상묵이 일제강점기에 교사로만 재직했다고 밝혔고, 이로 인한 거짓 해명 논란 끝에 신기남은 열린우리당 의장직을 사퇴한다. 송재천이 증언한 ‘신상묵은 오장계급이 달린 헌병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있었는데, 대전에서 일본 헌병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본문 중에서-

신상묵은 친일파 중 악질로 손꼽히고 있다. 일본헌병 시절 항일독립군들을 무수히 고문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독립지사를 탄압했던 친일 모리배들이 해방 후 경찰 혹은 군인으로 변신해 빨갱이 잡기의 명수로 거듭나는 사례 중의 하나로서 김창룡·노덕술 등과 비슷한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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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결혼 청첩인의 한사람인 조재천의 이력은 흥미롭다. 박정희가 결혼할 무렵 경북도지사로 근무하다 51년 관료생활을 마감하고, 훗날 민주국민당과 민주당 소속 3선 의원으로 활약하며 야당 중진이 됐다. 4.16혁명이후 법무장관, 내무장관 등을 역임했고, 5.16 쿠데타로 인해 정치가의 꿈이 좌절됐다. 이후 민주당 부총재와 총재를 거치면서 박정희 공화당과 투쟁하던 1970년 7월 5일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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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보수주의자였으나 ‘황태성 생존설’을 계속 주장하는 등 박정희와의 투쟁으로 많은 주목을 끈 대표적인 야당인사였다. 비록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됐으나 이승만 박정희와 맞서 싸운 야당 경력은 그의 친일 이력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만한 활약이었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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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고 육영수 여사는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 당시 육영수 여사는 ‘청와대 안의 야당’의 이미지가 각인됐다. 특히 74년 8월 15일 사망한 후, 학과 목련의 이미지가 추가 돼 신화처럼 포장됐다. 박정희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던 김대중 대통령도 국민회의 총재시절 ‘누구보다 인간적인 장점이 많은 여성’으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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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야당 총재와 5선 의원의 경력을 가진 박순천 여사도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 국민장 장의위원’의 자격으로 조사를 썼다. “목련과같이 청초하여 선녀같이 고이 승천하실 줄 알았던 여사께서 그 무지막지한 폭도의 흉탄에 가시다니 이게 원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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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누구 못지않게 수난을 당했던 고은 시인은 <만인보> 중 유영수 편을 실었다. “그녀는 영롱한 새소리로 하얀 이빨 시려 불행을 돕는 마음을 일으켜 행복했으나 그 새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녀는 꽃도 새도 아닌 백자항아리로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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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많이 흘러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으로 전국이 탄핵열풍으로 들끓고 있던 2016년 11월, 김종필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처숙모인 육영수에 대해 의외의 발언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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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이 세다. 욕심이 많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 불우한 사람 돌본다는 이미지는 대통령 부인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하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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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한 기자가 김종필 전 총재에게 “육 여사의 신화가 깨질까 봐 걱정이 된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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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 훈려조차 받지 못한 학도병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을 때 대통령, 장성, 국회의원, 국무위원 등 고위관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 안전을 보장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역사적 진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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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전쟁 중 박정희의 행적은 어땠을까.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해 혼란 중 그해 12월 12일 9사단에 근무한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한다. 9사단 근무이전 박정희의 이력은 현역소령에 복귀해 육본전투 정보과장(1950년 7월)을 맡는다. 이후 중령 진급(1950년 10월)과 동시에 육본수송작전관(1950년 9월), 9사단 참모장 전보(1950년 10월) 등이다. 인천상륙작전, 서울수복, 38선 돌파, 평양탈환, 압록강 물마심 등 국군이 자랑하고 있는 달콤한 기억이 박정희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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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가 전투에 참여한 흔적은 중공군이 참여한 이후인 9사단장 참모장 시절이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9사단은 급조된 부대로서 인민군 패잔병 소탕, 빨치산 토벌 등의 작전만을 수행한 탓에 실제적인 전투경험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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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쓴 강정구 전 동국대 사회학과교수는 “지은이 김상구 선생은 비강단 재야 사학자로서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어느 누구보다 절감하고 분노하면서 이성과 천착으로 이승만, 기독교와 아메리카 제국, 김구, 김두한 등에 대한 성역을 허물고 허울을 벗겨 내는 작업을 해 왔다”며 “개인적으로 여러 가지 힘든 조건 속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의 허물기와 벗기기는 더욱더 탄력을 받고 있어 경이롭기 짝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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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무명의 사범학교 학생, 무능한 군인이었던 박정희의 5.16 쿠데타가 미국 군부와의 결탁 속에 이뤄지고, 이런 결탁이 가능한 바탕이 일본 패망과 거의 동시에 시작된 천하의 기회주의자 박정희 본인의 미국의 끄나풀로 되살아나기와 지속적인 미국 가랑이 밑을 기어 다니기 등이었음을 추론, 방증, 증명하고 있다”며 “박정희 개인에 대한 수수께끼와 박정희 지배 18년간의 한국사에 불가사의했던 수많은 의문들이 일부 밝혀지는 쾌감 또한 소홀치 않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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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상구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종교비판자유실현시민연대(종비련)·종교법인법추진시민연대(종추련) 등에서 활동했다. 종교인의 소득세 문제를 사회 문제화하는데 일조했다. 역사는 이데올로기, 종교, 정치권력과 관계없이 정확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저서로 <김두한 출세기>, <김구 청문회>, <전쟁과 기독교>, <다시 분노하라, 이승만 숨겨진 친일행적>, <믿음이 왜 돈이 되는가>, <범재 김규홍과 3.1절>, <예수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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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전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최초 인터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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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 35년간 정보·군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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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도중 차길진 편집위원(좌측)과 포즈를 취한 하우스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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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 전 주한미군사령관 특별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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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H.하우스만(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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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한국에서 살았던 미국인 노인이다. 타향살이 10년이면 몸도 마음도 변하고, 타향도 고향처럼 여겨진다고. 하지만 적어도 하우스만씨에게만은 이 말이 적용되지 않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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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세월을 한국에서 보냈지만 결코 「한국화」될수도, 또 되어서도 안되는 독특한 「그 무엇」이 하우스만씨에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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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총참모장의 특별고문, 미육군성 정보과 한국담당관, 주한미8군사령관 특별고문 등 그가 맡았던 직책과 직위가 너무나「미국적」이어야 했기 때문에, 섣불리 한국적시각으로 맞닥뜨리는 사안을 분석하거나 처리해서는 안되었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적인 것에 동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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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인 입장에서 파악한다면 그는 미국편에 서서 국익(國益)을 위해 한국을 이해했던 것이 정확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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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비즈니스나 선교목적을 위해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사람들의 경우는 오래지않아 한국인 못지 않은 언행을 하고 또 그것을 자랑삼아 겉으로 드러내기 마련인데도, 하우스만씨는 기자와의 장시간 인터뷰에서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적습관」을 끝까지 숨기려는 치밀한 면모를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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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면에서 그가 얼마나 직업정신이 투철한 인물이며 35년간 수행해온 직책의 특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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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史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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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씨는 한마디로 한국현대사의 변천과정을 역사의 중심부에서 지켜본 몇 안되는 외국인 중 한사람이다. 어쩌면 거의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를 정도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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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는 해방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사(韓國史)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국에 군사 정치적 정보자료를 공급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한몫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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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의 한국내 군사 정치적 상황판단이 그대로 미국의 한국정책에 반영돼 한국역사의 맥락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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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일을 수행해 오는 동안 하우스만씨의 주변에는 수많은 한국내 요인들이 맴돌았으며 그들로부터 여러가지 「상황」을 수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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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난 것은 지난달 28, 29일 이틀간 이었고, 그자리에는 부인도 함께 배석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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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주 주칭사가 있는 오스틴의 하우스만씨 자택에서였다. 그의 자택근처에는 미육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군인들을 위한 병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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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병원은 은퇴한 군인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퇴역군속은 물론 은퇴한 정보원출신들이 주변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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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와의 인터뷰에는 임선하씨가 통역을 맡아주었다. 임씨는 지난 1946년 하우스만씨가 한국에 처음왔을 때부터 그와 친분을 맺어온 사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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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이 인터뷰에서 하우스만이라는 인물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초점을 맞추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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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국내에서 해온 일과 친분을 맺어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정도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인격이나 나라를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된다는 점을 부각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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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유대 증진에 공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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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가 한미유대증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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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림씨(전 건설부장관)는 그를 평가하기를 「우리들이 젊었을 때는 우리의 길손이 되어 이끌어 주었으며 이제 황환이 된 지금은 묘지로 가는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이 나라(한국)건국의 산 증인으로 지금 이자리에 참석하신 한분한분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하우스만이 한국을 떠날 때 있었던 송별연에서 이한림씨가 한 송별사 중에서)고 했을 만큼 은인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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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전 대통령 노태우씨(당시 보안사령관)도 그에게 극찬의 감사문을 써주기도 했다(임선하씨가 받아적은 내용-사진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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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분명 미국인이고 한국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일한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때문에 그로부터 어떤 자료를 얻으리라는 기대보다는 인간 하우스만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성장과정이나 학력 배경을 통해 실질적으로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친 사람인가를 추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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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 장롱과 하와이무궁화 그리고 한국무궁화가 있는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은 7월 28일 황혼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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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완벽한 성품」은 차고(車庫)에서부터 읽을 수 있었다. 차고에는 노란색 테니스공이 천장으로부터 매달려 있었는데 이것은 차를 주차시킬 때 차창에 공이 닿을 때까지만 파킹하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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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인터뷰에 잘 응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방어적 자세로 일관했으며 이같은 그의 태도를 예상하고 우회적으로 그의 부인 버트여사(78세)와 먼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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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져온듯한 동양매듭과 이승만 정일권 박정희씨 등과 찍은 사진 그리고 미국정부로부터 받은 문관에게 주는 최고훈장 등이 장식된 거실에서 버트여사와 마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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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여사의 건강은 매우좋지않아 보였다. 그녀가 앉은 소파옆에는 2년 전 암으로 죽은 딸의 사진이 꽃다발에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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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여사는 남편 하우스만보다 다섯살이나 많은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결혼 초기를 회상했다. 이어서 자연스럽게 하우스만의 감춰진 부분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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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획특집은 (사)후암미래연구소 차길진 대표의 1991년 기고문을 바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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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미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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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4년 12월 26일 글쓴이: 김 관후

<김관후의 4·3칼럼> (38)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 제임스 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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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 제임스 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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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민에게 고함/….(중략)….일본천황의 명령에 의하여 나의 지휘하에 있는 승리에 빛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를 점령한다…..(중략),…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국육군부대 총사령관 미육군대장 더글라스 맥아더.’-맥아더 포고 제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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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21일/ 경비대 조사업무 개시/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작전: 제주도: 매우 적은 횟수의 활동보고. 게릴라에 대한 작전 계속. 제주도에 대한 경비대의 조사업무가 개시됨./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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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28일/ 김정식 중령 체포/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반대분자: G-2소속 김안일(Kim Ahn Il) 소령은 3개월 동안 애월면에 머문 공산주의자로 의심받는 김정식(Kim Jong Sirck) 중령을 체포하였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대위주한미육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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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rry Hausman; 1918~1996)은 1918년 2월 28일 미국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그는 나이 16세에 형의 이름을 빌어 군에 지원하였다. 5보병 연대에 배치되었고, 1940년 자신의 이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되었다. 1941년 1월 24일 소위로 진급했고, 아이오와주 데스 모인항에 여성보조군(Women’s Army Auxiliary Corps; WAAC’S) 형성의 임무를 맡고 차출되었다. 레오나드 우드 항구에서 활동했던 75보병 사단에 배치되어 벌지전투에서 부상병을 영국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고, 작전장교로 289보병연대 1대대에 S-3에 배치되기도 하였다. 한국에 오기 직전까지 펜실바니아 군사행정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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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7월 26일, 28세의 나이로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도쿄의 맥아더사령부를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는 해방공간에서 태평양미국육군총사령관이다. 미군정(美軍政,military administration) 3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기본 통치 방침인 ‘맥아더 포고’를 발표하였다. 그 전문(前文)에서 맥아더는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大本營)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戰捷軍)은 본일(本日)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지역을 점령함”이라고 선언하였다.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한국에 진주하였다는 미국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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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처음, 조선경비대를 창설하는 것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춘천8연대에 배치되어 연대를 훈련하고 조직하고,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베로스(Russel D.Barros) 대령의 보좌관역할을 수행하였다. 남한군대는 경찰예비대(constabulary)로 출발했다. 일본 육사출신이거나 만주군 출신으로 일본제국주의 군대를 위해 복무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우스만은 광복군 출신들을 상당히 무시했다. 그들이 일본군 출신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공산주의자를 적대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베로스 대령이 제주도사(島司)로 발령이 난 후, 사실상 조선경비대 총사령관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전국을 순회하면서 누구나 조언을 구하는 ‘한국통’이 되어 갔다. 그의 마음에 들면 승진할 수 있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생명도 내놓아야 했다. 하우스만의 마음에 차고 안 차고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가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가 아닌 가였다. 하우스만이 좋아했다 해도 공산주의자로 밝혀지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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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스만은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최종 명령자인 것으로 지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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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하우스만은 대통령, 국방장관, 육군참모총장, 미고문단장 등이 참여하는 군사안전위원회에 참가했다.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하면서 임시군사고문단이 만들어지자, 군사고문단장과 국군 참모총장 사이의 연락 임무를 맡았고 이승만을 면담하는 일도 잦아졌다. 이승만은 “군대에서 당신 명령을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알려 달라, 그를 교체하겠다”라까지 하우스만을 신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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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정일권, 백선엽, 이형근 세 사람을 ‘내 어금니’라 부르며 국방을 책임질 든든한 사람이라고 여겼고, 정일권을 참모총장, 백선엽을 1군사령관에 임명하고는 이형근에게 줄 자리가 없자, 결국 합동참모본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이형근을 임명했다. 이 세 사람은 이승만대통령의 측근이었지만, 하우스만과 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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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한 사람의 키 큰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1960년대까지 한국정치의 배후무대에서 정력적으로 활약했다. 일국의 대통령을 움직일 수 있었고, 남한 ‘국군의 아버지’로 자칭했다. 군사쿠테타 세력들 정착에도 관여한 인물, 친일파 장교들을 유독 선호하고 그 출세를 도운 인물, 이승만의 동족 대학살 현장 어디든지 나타나 진두지휘한 인물 제임스 하우스만. 박정희 쿠테타를 미국에 가서 설득한 인물, 전두환 쿠테타를 미국에 이해시킨 인물, 그가 바로 제임스 하우스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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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대신에 한국인을 멸시하는 ‘gook’이라 부른 사나이. 제주4·3당시 동족 토벌에 앞장 선 박진경을 암살한 문상길이 처형당하자 처형대에 다가가 문상길 중위의 머리에다 권총을 한 번 더 쏜다. 군대 좌익 색출작업을 시행하면서, 무고한 양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살하고 그것을 녹화해 훈련용 교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제주도 양민 20여명의 총살을 지시한 일에 대해 문책하던 미국 대사에게 “몇 개 월 전에는 민간인 200명 죽이는 것도 보통이었는데 20명 죽인 것이 무슨 문제냐”고 대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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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얘기하는 ‘한국군의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학살의 방조자이자 수행자’이다.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라는 커밍스의 하우스만에 대한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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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전두환 정권이 안정화되는 1981년 7월 1일 군사고문직을 그만 두고 한국을 떠나면서 “긍지를 느꼈지만, 사랑을 키워온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고 한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하우스만은 1987년 영국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가리켜 “일본인보다 더…야비한 놈(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이라고 하였다. 백색 미국인으로 야비한 황인종의 나라 한국에 와 적색 공산주의자의 씨를 말리는 법을 가르쳐 준 하우스만, 그는 부시가 태어나고 주지사를 지냈던 ‘남성의 고향’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1996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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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21일/ 파괴분자에 대해 재판 / 사면계획/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반체제분자:/ 파괴분자들에 대한 재판, 기간 1월 1일~3월 15일/ 피고: 장교 78명, 사병 174명, 민간인 1명, 총 253명/ 결과: 유죄 225명, 무죄 27명, 보류 1명/ 선고: 사형 6명, 6개월에서 종신 노역 9명/ 사면계획: 제주도. 기간 2월 26일 현재: 반체제 민간인 2,200명이 제2연대 본부로 인계되었다. 매일 많은 수가 이 사면계획에 참여될 것이다./작전: 제주도: 게릴라 사망 58명, 포로 27명. 한국군 사망 18명, 부상 4명. LMG 2정, M-1 9정, 카빈 8정 회수./한국 해군: 제주도에 대한 경계강화 명령. 4척이 현재 제주도 해역을 순찰중. 해군 함선들이 제주도에 구호물자를 수송하는데 사용되었음. 주요 물품: 신발, 옷감 1,800야드, 다용도 식품 60박스(박스 당 70파운드), 의약품 100파운드./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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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진경 대령 암살사건 조사차 제주에 온 통위부 고문관 로버츠(왼쪽) 준장1948.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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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 연대장과는 절친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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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제주4·3 토벌작전 당시 무장대원들을 몇 명이나 체포했는지, 몇 명이나 죽였는지, 부상자는 몇 명인지 등을 체크하는 일도 하우스만의 일이었다. 1948년 6월 18일 새벽, 9연대에서는 문상길 중위가 그의 부하와 함께 박진경연대장을 사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박진경의 장례는 6월 22일 6월 22일 오후 2시 경비대 총사령부에서 부대장으로 치러졌다.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은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문상길은 “부하들이 암살했다.… 내가 주모자가 됐다. 어쨌든 박대령의 죽음은 당연하다”고 감옥에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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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경은 영어를 잘 해 미군으로부터 신임을 받았다. 군정장관 딘(William. F.Dean)은 그를 총애하여 직접 진급 계급장을 달아주러 제주도로 내려올 정도였다. 박진경은 이에 부응하여 15세 아이를 사살하는 등의 무차별 체포작전을 폈고, 이는 도민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박진경을 쏜 군인은 “박 대령의 30만 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공격에 대해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고 재판정에서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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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살형은 집행되었으며 문상길과 부하들은 총살장에서도 평소와 별다른 점이 없이 하나님께 “우리들의 영혼을 받아들이시고 우리들이 뿌리는 피와 정신이 조국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하여 밑거름이 되게 하소서”하고 기도 드렸다. 그리고 최후에는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한 후 ‘양양한 앞 길을’하는 군가를 부르면서 형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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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관하고 있던 미군사고문단 하우스만 대위가 다가가 넘어진 문상길 시체에다 자기 피스톨을 꺼내 난사했다. 공산주의자는 죽여도 좋다는 하우스만의 반공주의는 끈질긴 것이었다. 하우스만 대위는 경비대 정보책임자로 박진경 대령과 절친한 친구였으며 미군정장관 딘 장군에게 박진경을 추천한 장본인이었다. 문상길의 처형은 군 내부 좌익세력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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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28일/ 포로 279명 체포/ 발신: 미군사고문단장/ 수신: 주한미군 사령관/ 미군사고문단 주간활동/ 한국 육군/ 작전: 좀더 간략한 보고서를 제출하기 위하여 향후의 작전에 관한 보고는 다음 세 곳의 주요 지역에 대하여 작성될 것이다. 38선, 남한, 제주도/ a. 38선: 이번 주 다섯 차례의 사건에 보고되었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적: 사망 18명. 부상, 실종 및 포로 없음 국군: 사망 1명. 부상 1명. 실종 및 포로 없음/ b. 남한: 보고된 사상자는 다음과 같음. 게릴라: 사망 113명. 부상 및 실종 없음. 포로 36명 국군: 사망 116명. 부상 15명. 실종 및 포로 없음 c. 제주도: 세 차례의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결과보고. 게릴라: 사망 3명. 부상 및 실종 없음. 포로 279명/ 국군: 사망, 부상, 실종 및 포로 없음/ 한국 해군/3월 21일 네 척의 함선들이 한국 육군부대를 제주도 근해의 작은 섬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그곳에 피신해 있는 게릴라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4척의 배가 제주도 근해를 순찰하고 있으나 잠입자들은 없었다.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주한미육군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USAFIK) 주간활동요약(Weekly Activities) 1948. 9. 13~1949.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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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치와 하우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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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국무회의에 미국인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서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승만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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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송요찬(宋堯讚)의 고문이기도 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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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 몰락 후, 장면(張勉)은 하우스만에게 군사자문 역할을 부탁하였다. 하우스만이 장면을 도우면 안 된다는 미국의 결정은 장면 정권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면은 학생과 혁신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력 또한 갖고 있었다. 바로 등장한 박정희(朴正熙)와 육사8기생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는 미국에게 확실히 새로운 카드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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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1960년 3월 1일, 군부 내의 쿠데타 기도를 상부에 보고했다. 박정희는 여순사건 때 작전참모였다. 그는 여순사건이 진압된 뒤에 군부 내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11월에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남로당 조직체계를 밀고하고 하우스만과 김창룡·원용덕·백선엽 등의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이 구명운동으로 생명을 건졌다.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5월 18일 박정희는 미8군 하우스만의 집을 찾아갔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와 만난 뒤 바로 자진에서 미국으로 날아가, 미 육군 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무성, CIA에 박정희와 한국 상황에 대해 브리핑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에 대한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 보답으로 미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공로표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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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1981년 한국 땅을 떠났다. 1946년에 한국에 왔으니 참으로 긴 세월이었다. 전두환·노태우라는 2세대 군부인맥은 그 후에도 10년이 넘게 남한을 통치했다. 하우스만이 한국 땅을 떠날 때, 노태우 육군중장은 하우스만을 불러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는 기념패를 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임스 H. 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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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한국과 친구들을 떠나면서 매우 큰 슬픔을 느꼈다. 그가 느낀 긍지는 무엇이고, 그에게 한국은 무엇이며 그의 한국인 친구들은 누구였을까? 거기에 또 김창룡(金昌龍, 1920~1956)이 있다. 일본군 부사관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여순 사건의 진압과 한국 전쟁에 참여한 김창룡.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육군 특무부대 지휘관이었으며, 여순 사건과 관련해서 체포된 박정희 소령을 수사하기도 했다. 함경남도 출신이며,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군 부문에 포함이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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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은 이승만을 직접 면담하고, 그의 두터운 신임을 얻으면서 군대 내부에 침투한 빨갱이에 대한 사냥을 자행했다. 김창룡의 뒤에는 이승만이 있었지만, 김창룡은 하우스만에게도 직접 보고하고 있었다. 김창룡과 하우스만은 반미·반일 성향을 가진 공산주의 박멸에 뜻을 같이하고 있었고, 열성적이었다. 김창룡은 보도연맹원 학살 등 한국전쟁을 전후한 민간인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한 인물로서 ‘스네이크 김’으로 악명을 떨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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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현장에서 죽이는 것이 진보인 것으로 믿었던 사람. 이런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김창룡이 ‘스네이크’였다면, 하우스만은 이 뱀이 활개치고 놀 수 있는 공간과 담력을 키워준 ‘대사형(大蛇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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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요하지 말라는 신문과 라디오방송과는 달리 정부요인들은 이미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고 수많은 시민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한강교는 폭파되고 만다. 다리 위에는 4,50 여대의 차량과 수많은 피난민들이 메우고 있었으나 비명지를 틈도 없이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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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한강교 폭파를 지시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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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 다음날 오후,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국회에 출석하여 ‘서울 사수’를 공언했다. 그 시간 국방부 선무방송 지프차가 서울 시가지를 누볐다. “국군은 38선 이남으로 내려온 적을 격파했습니다. 평양은 내일 중에 함락될 것입니다. 서울 시민들은 안심하십시오.” 그 시간 T-34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은 국군을 매섭게 몰아붙이며 서울을 공격방향으로 거침없이 진격해 왔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생방송으로 호언장담하는 선무방송을 했다. “어제 새벽에 침입한 적은 우리 국군의 반격으로 지금 후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군은 총반격전을 개시하였던 바, 차제에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우리 민족의 숙원인 국토 통일을 완수하고야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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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7일 새벽 1시 긴급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되었고,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전황설명은 뒤로 한 채, 수원 천도가 확정되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 이승만은 경무대를 빠져나와 서울 역에서 특별 남행 피난열차를 탔다. 6월 27일 오전, 국회에서 의원들이 정부의 서울 천도 결정도 모른 채 본회의에서 ‘서울 사수’를 결의한 뒤 곧장 의원 대표가 경무대를 방문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그들은 참담하게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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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대통령이 서울을 떠난 뒤인 그날 밤 서울중앙방송에서는 ‘서울 사수’를 호소하는 이 대통령의 담화가 전국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 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중입네다. 국민 여러분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기를 바라는 바입네다. 나 리승만은….” 이승만의 담화를 대전방송국에서 녹음하여 전화로 서울중앙방송국에 보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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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은 28일 새벽 1시 무렵, 인민군 탱크가 미아리 방어선을 막 돌파하였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폭파 지시를 내렸다. 그 명령에 따라 공병들이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한강대교를 비롯한 3개의 철교는 큰 폭음과 함께 폭싹 주저앉았다. 그 폭파 시간은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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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파된 한강교량 중 일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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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로 허겁지겁 피난봇짐을 싸들고 한강 인도교 위에 몰려든 약 800명의 피난민들은 그 자리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즉사하거나 수장되고 부상을 입었다. 국군은 퇴로를 잃게 되어 개전 당시 10만여 명이었던 병력과 장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치명상을 입었다. 6월 28일 오전 11시 30분, 인민군 선발대는 중앙청을 점령했다. 인민군은 가장 먼저 서대문 형무소와 각 경찰서에 수감된 4천여 명의 정치범들을 석방시키고, 즉각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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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교 폭파의 진짜 명령자는 누구인가? 당시 참모부장이었던 김백일은 하우스만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사실상 하우스만이 미군 최고 책임자였다. 하우스만이 한강교를 건너자마자 다리는 폭파되었는데, 하우스만이 단지 행운아였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한강다리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참모부장 김백일-공병감 최창식-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윤영 당시 사회부장관은 회고록에서 “26일 심야 국무회의에서 이범석 국무총리가 처음으로 제안, 이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다”고 밝혀 한강교 폭파가 참모총장보다 윗선에서 결정됐음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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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병 고문이었고 나중에 충무무공훈장까지 받았던 크로포드(Richard I. Crawford) 육군소령은 폭파 당시 최창식은 자신과 같이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고, 나중에 최창식의 누명을 벗겨주려 했으나 하우스만이 입 다물고 있으라고 말했다고 증언하였다. 크로포드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최병덕 참모총장에게 폭파 지시를 내린 것은 ‘미군 장교’였고, 그는 국군 참모총장의 고문이었다고 증언했다. 한강교 폭발로 서울시민 몇 백 명의 생명을 일시에 빼앗은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우스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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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년 8월29일 ‘국치일’에 분열식을 하는 조선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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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14연대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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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조선인민의 아들, 노동자, 농민의 아들이다.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지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제주도 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직전에 조선사람의 아들로서 조선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인민의 권리를 위하여 총궐기하였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철퇴’-제주도출동 거부 병사위원회 성명서(1948년 10월 21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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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츠 사령관이 대위 계급에 불과한 내게 이런 중책을 맡긴 것은 한국군 사정을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실 경비대의 강점·약점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로버츠 고문단장이 내게 부여한 공식 명령은 4가지였다. 첫째, 한국군사령부가 사태 진압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하면 즉각 작전통제권을 직접 관장할 것. 둘째, 기동작전사령부를 구성하고 적절한 감독 행위를 할 것. 셋째, 결과를 신속히 고문단본부에 보고할 것. 넷째, 면밀한 작전 계획을 세워 이를 성공적으로 이행할 것 등이었다. 나는 20일 하오 2시30분 정일권과 함께 비행기로 광주에 내렸다.’-하우스만· 정일화 공저, 『한국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한국문원, 1995),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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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여수읍 신월리 제14연대에서는 비상나팔 소리와 곧이어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빨치산 활동을 본격화시킨 여수14연대 반란사건의 신호탄이었다. 흔히 ‘여순반란사건’으로 불려지고 있는 사건. 제주도 진압작전을 더욱 잔혹스럽게 만든 한 요인이 된사건. 그날은 14연대 제1대대가 제주도에 증파되는 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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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가 창설되고, 대토벌전을 앞둔 준비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연병장에는 출동준비를 마친 제1대대뿐만 아니라 2․3대대 병사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대 인사계 지창수(池昌洙) 상사가 나타나 대원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도선을 돌파하여 남쪽으로 진격중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호응 북진하여 미국의 괴뢰들을 소멸시켜야 한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인민해방군이 된다. 그래서 조국통일을 볼 때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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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경비대1연대 장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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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연대는 순식간에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10월 20일 새벽 5시께 반란군은 여수경찰서를 비롯해 여수읍내 각 관공서와 중요기관을 모두 점령했다. 날이 밝자 통근열차 편으로 순천 방면으로 진격, 오후 3시께 순천마저 완전 점령했다. 순천에 파견 중이던 14연대 2개 중대도 반란군에 가세하고 말았다. 반란군은 광양․구례․곡성․보성 등 주변지역으로 확산돼 나갔다. 여수시내 거리에는 ‘제주도출동 거부 병사위원회’나 ‘인민해방군 사령관’ 명의의 낯선 벽보들이 나붙기 시작했고, 오후 3시께에는 중앙동 로터리에서 ‘인민해방군 환영 시민궐기대회’라는 집회가 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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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의 테러로 말미암아 수백 명의 경찰, 관리, 지주가 죽었다. 미국의 G-2 소식통들은 경찰에 대한 공격이 ‘많은 지역주민들을 만족시켰다’고 보고했다. 반란이 실패한 후 정부군은 예상대로 끔찍한 보복을 했다. 반란군은 인근 도시들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시민들이 시가행진을 하며 붉은 깃발을 흔들고 구호를 외쳤다. 대중집회에서 읍 인민위원회가 재건되었으며, 체포된 많은 경찰과 몇몇 정부관리들, 지주들, ‘우익들’ 등을 재판하고 처형하기 위해 ‘인민재판’이 진행됐다. 연설자들은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 대신 1945년의 용어를 사용해 ‘조선인민공화국’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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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아침 주한미군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여순사건에 대한 대책을 모색하기 위해 비상회의를 소집했다. 이범석 국방장관,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채병덕 국방부 참모총장을 비롯한 몇몇 한국군 고위장교와 미 군사고문단 장교들이 참석했다. 반군토벌 사령관에는 송호성 준장이 임명됐다. 그러나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 미군 대위였다. 그는 한국군 총사령관 고문자격으로 바로 광주에 급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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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선발 진압부대로 광주 4연대를 뽑아 투입했다. 토벌작전에는 거의 모든 가용 병력이 투입되었다. 결국 반란군 3개 대대를 토벌하기 위해 4배에 가까운 병력이 동원되었다. 기갑연대․항공대․경찰기동대도 투입됐다. 진압군의 개인화기는 일제 38식, 99식에서 모두 M-1 소총으로 교체됐고 미24군 탄약고로부터 81㎜ 박격포와 60㎜ 박격포, 경기관총(LMG) 등이 속속 배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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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압군은 10월 23일 순천을 탈환했다. 27일 오후에야 여수읍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반란군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는 여수지구 1천2백명, 순천지구 4백명에 달했다. 진압군에 의해 상당수의 반란군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주력 1천명 가량이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백운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미 고문단은 게릴라를 섬멸하기 위해서 토벌사령관에게 소위 ‘4F전술’을 시달했다. 하우스만은 이 작전개념에 대해 ‘찾아서-고정시킨 후-싸워서-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단어의 첫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용어라고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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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TS’ 마크를 단 조선경비사관 생도들이 무기점검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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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의 지시로 전국적으로 숙군의 선풍이 일었다. 특별조사반을 이끈 김창룡(金昌龍)의 ‘활약’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1949년 7월에 막을 내린 이 대숙군의 결과 모두 4,749명의 장병이 처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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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반란은 제주항쟁 진압에 대한 거부임과 동시에 그 지역 인민들과 좌익들이 자신들의 목표가 계속 좌절된 데서 비롯된 폭발이었다. 한 반란군측 신문은 미국의 점령에 대항해 ‘3년간의 투쟁’을 언급했고, 모든 미국인들이 즉각 한국에서 떠날 것을 요구했다. 진압을 조직하는 데 관계한 핵심인물인 제임스 하우스만은 순천의 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여러 명의 친정부 민간인들까지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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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미국 국무부 관리는 수년 후에 쓴 글에서 이승만이 1949년에 창립한 ‘국민보도연맹’을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공세’에 크게 이용한 ‘교묘한 장치’라고 기술했다. 사실 그것은 정치범들을 수용할 강제수용소를 설치하고, 조금이라도 반정부 또는 좌익활동을 의심받는 사람들에게 ‘전향’과 ‘재교육’ 활동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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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S. Joseph Hagenmayer, J. Hausman, 78, Army Advis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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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 Joseph Hagenmayer, INQUIRER CORRESPONDENT

POSTED: October 1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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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H. Hausman, 78, who joined the Army at age 16 and was credited as being the ``father of the Republic of Korea Army,'' died Saturday in Austin, Texas, where he was liv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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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age, using his older brother John's birth certificate, Mr. Hausman joined the Army in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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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his career in the military, Mr. Hausman rose through the ranks from private to lieutenant colonel. In World War II, he saw extensive battlefield action with the 75th Infantry Division and received a Purple Heart after being wounded during the Battle of the Bulge. He also received the Bronze 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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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1946, Mr. Hausman, a captain at the time, was stationed in Korea as an adviser to Korean constabulary forces. By then he was considered an expert in strategic intellig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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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ring two extended tours of duty in Korea, Mr. Hausman was the military, economic and political adviser to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cluding its military chief of staff and its president. He also served as adviser to the U.S. ambassador and to the U.S. Eighth Army Command, said his son James H. Hausman 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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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litzer Prize-winning author John Toland referred to Mr. Hausman as ``the father of ROK Army and adviser to ROK Chief of Staff Chung Il-kwon'' in his 1991 book In Mortal Combat Korea, 1950-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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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 was a key character of that entire conflict . . . a very disciplined man . . . and the local people trusted him,'' Toland said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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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Hausman's impact in Korea was felt early on. In 1948, he was awarded the Legion of Merit for his role in helping put down the Yosu Rebellion, a Communist-led insurrection among Korean fo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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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ime he was reassigned to the Pentagon in March 1951, Mr. Hausman had received an Oakleaf Cluster for his Bronze Star, the Korean Chungmu Distinguished Service Medal, a presidential commendation from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U.S. Air Med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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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Washington, he served first as the chief of the Korean Strategic Intelligence Section in the Pentagon and later worked in Far East intelligence. He returned to South Korea in 1956 as special adviser to the U.N. Command's commander in chief and to the U.S. Eighth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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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ter retiring from the Army in 1960, Mr. Hausman remained in South Korea until 1981 as an adviser to the Army and the United N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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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addition to his son, he is survived by a daughter, Ruth Ann; seven grandchildren; four great-grandchildren; and a sister. He was the widower of Bertha W. Dick Hausman and the father of the late Elizabeth C. L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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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eral services were yester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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