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Showing posts with the label 일본

일본에 취업하러 가는 한국사람들이 늘어난 이유 / 안분지족을 추구하는 일본 서민들 / "You can do it"의 미국인들 vs "넌 거기까지"의 일본인들 / 못하면 가지마, 대학 갈 능력 안되면 가지마 분위기의 일본 가정들; "넌 할 수 있어"하고 장려하는 집은 엄청 특이한 집; 일본의 뿌리깊은 신분제 에서 기인하는 현실주의 영향인가

한국인과 일본인의 허세 어떻게 다를까? (feat. 스시, 기모노, 다도, 관광지) 일본도 한국처럼 굉장히 남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 국제사회 동향 및 정치에 관심이 많은 한국인과 개인적 쾌락에 초점을 맞추는 일본인들! 일본사람들은 인간관계가 참 냉정하고 정이 없다! 엔화가 싸서 일본에 관광객이 몰린다구요?;일본 듣보잡 소도시까지 외국인 관광객이 넘치는 이유 (아주 사소한 것에도 의미 부여해 관광지화) 일본생활 21년 고수가 말하는 일본에서의 취업, 물가, 육아, 교육, 부동산까지 한국과 일본생활의 장단점 냉정 비교!

변화를 싫어하고, 책임지기 싫어하는 일본에서 '정정'의 화두를 던진 아즈마 히로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사회=아버지 없는 사회 -> 모든 종류의 권위에 대한 저항 -> 비트족, 제임스 딘, 태양족과 미유키족 (일본)의 등장 / 학생 운동, 석유 파동과 연합적군사건을 거친 뒤 나타난 오타쿠의 등장과 지배적 문화규범의 해체 (아즈마 히로키)

일본 추리소설 읽을 땐 3대 기서와 주간문춘 선정 20세기 걸작 미스터리 베스트 10을 중심으로 읽어야

폭력의 시대, 국회의원이 된 야쿠자 보스 [호라 아사노스케]

삼성 물산의 모태는 미쓰이 물산, 신라호텔의 모태는 오쿠라 호텔, 그리고 신세계백화점의 모태는 미츠코시 백화점; 사실 더 깊숙히 연원을 따지고 보면 유태자본-로스차일드의 물산, 호텔, 백화점에 기원을 둔다

잡종이 창조적이다 - hybridity잡종성의 중요성; folk/race가 중심이 아닌 아닌 individual (indivisible과 같은 어원을 공유함을 주목하라!)이 중심이 될 때 잡종이 나오고, 잡종이 나와야 창조성이 꽃피는 문화가 발전한다; 김정운 교수의 지적처럼, "창조는 편집이다. 편집이 가능하려면 편집의 재료가 다양해야한다. 미국이 여전히 강한 이유는 바로 이 편집의 재료가 아주 다양하기 때문이다. 잡종성을 포기하는 순간, 미국의 리더십은 끝난다"; 중국이 미국을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아무리 인구를 무기로 협박해도 편집의 재료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 지극히 폐쇄적인 딥시크에서 보듯 말이다; 미국과 비슷한 이민국가인 캐나다 뿐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의 번영 역시 이러한 잡종성에 기반해있다; 일본이 또다른 예다 - 야나기 무네요시의 지적처럼, 일본은 아스카, 나라 시대에 한국 문화로부터 큰 은혜를 입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자 쇼토쿠 태자 명령으로 만들어진 호류지 역시 시텐노지와 함께 백제 목조 건축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이 수당사, 견당사를 통해 끊임없이 외국의 앞선 문물을 도입하고 자기식으로 재해석하려고 할 때, 또 1853년 페리 제독의 침략 이후 서구화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자기식으로 재해석하려고 할 때, 일본의 문화는 융성하고 중국과 조선의 문화를 아득히 압도했다; 그러나 1940년대 미국과의 국력 차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거나, 1980년대 버블시대에 Japan as Number One의 자만심에 도취해있을 때는 얼마 안 가 처참하게 몰락했다; 일본은 외래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하이브리드가 될 때 국운이 융성하는 특성을 지닌 나라다; 이것은 또한 영국이나 일본처럼 고립된 섬나라의 운명이기도 하다; 하여, 이어령은 일본은 축소지향이 되지 않고 팽창적이 될 때 국운이 몰락한다고 경고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태인들은 왜 뛰어난가? 왜 그들은 전세계 인구의 0.2%만 차지하지만, 노벨상 수상의 22% (노벨경제학상의 경우 40% 이상)를 차지하는가? 소스타인 베블런은 그 이유로 "그들이 소외된 주변인이었기 때문"이라 해석했다; 유태인, 보헤미안, 오스트리아인으로서의 3중의 정체성을 토로한 구스타프 말러처럼 말이다; 이를 창조적 회의론creative scepticism이라 한다; 불교와 검도에서 수파리(守破離)를 말하듯, 창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파괴해야하고, 상식처럼 통용되는 모든 진리를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 이러한 작업에는 인싸보다는 아싸, 즉 소외된 주변인이 되는 것이 유리하다; 오랑캐 진이 중국을 통일했듯이, 변방인 조슈와 사쓰마가 명치유신을 일으켰듯이,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가 되어 전유럽을 통일했듯이, 객가 출신인 덩샤오핑이 권력을 쥐었듯, 중심은 주변부에서 창출되는 법이다; 이어령이 강조한 필록테테스의 비유처럼, 결국은 남들과는 다른 "상처받은 자"가 문명의 중심이 되어 세상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는 것이다

엉터리 음모론자 인드라는 일본 근대화를 99% 국제투기자본 작품, 1%를 요코하마 요시와라 유곽 기생들 탓으로 두나, 이는 그의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무지와 편견일 뿐이다; 냉정히 말해 당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우수했기 때문에 근대화를 더 빨리 받아들인 것도 인정을 해야한다; 난학의 영향을 받은 에도 막부는 이미 1774년에 스기타 겐파쿠의 근대적인 해부학 도서인 '해체신서'를 펴낼 정도였다 - 사람 몸을 해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묘사된 에피소드도 생각해봄직한데, 1853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일본에 쳐들어왔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에 애타게 동행하고 싶어하는 일본인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에 페리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메이지유신 전까지 보수적인 존황양이파도 적지 않았지만, 영국과 미국에 쓴맛을 본 사쓰마, 조슈의 지배자들은 수구보수꼴통이 득세했던 조선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고 태세전환을 해서 서구화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1868년, 1870년 두번에 걸쳐 번역된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과 1866-70년 사이 세번에 걸쳐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당대 일본의 베스트셀러였다 - 그만큼 개화기 당시 일본인들은 서구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컸고, 중국, 조선에 비해 개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하여 국제투기자본은, 감히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침략을 단행했던 역사를 지닌 그 섬나라를 아시아 대리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더 우수했다면, 파트너 관계는 일본이 아닌 조선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 그러나 당대 조선은 오일장에서 보듯 상업발달이 미비했으며, 일본에 비해 비위생적이어서 한양 곳곳에는 똥무더기가 천지였으며, 서민들의 직업윤리는 나태하고 게을렀으며, 지배층은 흥선대원군과 민비, 안동김씨 가문에서 보듯,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고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갇혀 있었다 -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를 애지중지하던 것이 당대 조선 선비들의 수준이었다; 정한론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조차 조선이었다; 청나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皇이나 명령을 뜻하는 '칙'勅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메이지 정부의 사신접견을 거부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애들이 이런 반응이 나올줄 예상하고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간 것이긴 하지만, 급변하던 당대 정세를 수수방관했던 조선 측 잘못도 분명 있던 것이다.

국제투기자본과 일본제국의 철도: 1872년 세워진 일본 최초의 철도는 주일공사 해리 파크스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베어링계 영국 자본인 오리엔탈 뱅크 (1851년 영국 동인도회사에 이어 아편무역의 특허장을 받은 것이나 (당대 아편무역은 베어링이 장악했다-로스차일드가 장악한건 1880년대 이후), 홍콩에서 은행 중 최초로 지폐를 발행한 것이나, 1890년대 베어링 위기 속에서 파산한 것에서, 베어링과의 관련성을 유추해볼 수 있다)의 자금 및 Edmund Morel 등 영국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건설되었다

김정운 "창조적 시선" 정리 2

김정운 “창조적 시선” 정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