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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영국도 울고갈 프랑스 개자식들의 만행 1 - 아이티를 중심으로 / 드레퓌스 사건은 유태계 곡물재벌 드레퓌스 가문에 협조한 에밀 졸라 작품인가 / 자크 시라크: 아프리카가 없었다면, 프랑스는 선진국이 될 수 없었다 / 프랑수아 미테랑: 아프리카가 없으면 프랑스는 21세기를 살아갈 수 없다 (1957) / 아이티 GDP의 10배를 식민 배상금으로 내놓으라고 협박했던 프랑스 - 약 200년간 아이티 고통의 원인이 된다 / 미국, 프랑스, 캐나다, 브라질, 칠레, UN이 함께 모여 아이티 쿠데타를 일으키다 (아이티 오타와 계획); 프랑스 구식민지 아프리카 14개국 외환의 85%를 보유한 프랑스 재무부 - 인출도 마음대로 못한다;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는 프랑스에 비하면 양심적; 세파프랑을 거부한 기니, 토고, 말리, 부키나파소 등 지도자들의 운명; 이 영상에서의 멍청한 자주인라디오의 호언장담과 다르게 루블 가치는 우크라전 이후로 많이 하향안정화되었다

국제투기자본과 베르사유 조약, 독일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그리고 나치 독일의 발흥1: 베르사유 조약에 조인한 영국 측 필립 사순, 미국 측 대표 폴 워버그 - 로스차일드계; 미국과 독일에서 각각 중앙은행장이었던 워버그 형제는 빌헬름 쿠노를 독일총리로 임명; 인플레로 똥값이 된 독일 경제 장악한 국제투기자본; 국제투기자본의 히틀러와 나치당 지원은 제2차 대전 준비용; 독일 중앙은행장 얄마르 샤흐트와 영국 중앙은행장 몬태규 노먼의 재임기간이 거의 겹치는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 록펠러 스탠더드 오일은 히틀러 대선자금 지원; 그 외에도 지멘스, Bosch, 티센 등이 히틀러에게 자금 지원; BIS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의 서방세계 자금 통로 - CIA 아버지인 앨런 덜레스도 역할; 존 포스터 덜레스, Sullivan & Cromwell, 카네기 재단, 시티 오브 런던은 독일 중앙은행 총재 샤흐트에게 30억 달러 지원; 미국 자본 I.G. 파벤이 나치 독일을 키웠고, Zyklon-B를 만들었으며, 그것으로 유태인을 학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도 기업도 모두 이 학살에 동참한 것이다

재미 한국인 사업가들만 돕는 모임; 조선인들도 협력이 가능할까?

지난 10일(현지 시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현장을 취재하던 알자지라 방송국 소속 취재진 다섯 명이 이스라엘 군의 폭격을 맞아 숨졌습니다. 이들은 지난 2023년 이래 가자 지구의 참극을 기록하던 언론인이었습니다.; 히틀러와 동급인 네타냐후, 나치 독일과 동급인 오늘날의 이스라엘

인드라 2: 베어링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나폴레옹을 지원해서 최대한 전쟁을 오래 끌려고 했다 -면직물 주요 납품처가 군대였기에 나폴레옹 전쟁이 필요했고, 그 최대 공급처는 베어링 가문이었다; 베어링은 이 시기 프랑스로 밀수했지만, 로스차일드는 유통을 해보려다 큰 손실을 입었다; 1800년 나폴레옹의 프랑스 중앙은행 설립에 관여한건 호프 가문과 베어링 가문; 1802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프리메이슨이 된 것은 인맥관리용 - 코헨 가문과 결혼한 것도 도제 수업을 받기 위함; 1803년 루이지애나 매각 대금이 베어링 중재로 나폴레옹에게 들어왔다; 1807년 스코틀랜드 롯지를 부추겨 영국의 노예무역 금지를 통해 영국의 힘을 약화시켰다 (또는 자유주의자 나폴레옹의 '역린'을 건드려 식민지 팽창전쟁 대신 유럽대륙 전쟁에만 몰두하게 했다) - 프랑스 대동방 랏지가 스코틀랜드 의식을 채택했던 것은 베어링을 지지했다는 뜻; 스코틀랜드 의식이란 솔로몬 의식인데, 이스라엘 핀켈슈타인 주장에 따르면, 이에 대한 어떤 고고학적 증거가 없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6% 이자율 붙여 미국 국채 독점판매했던 베어링; 1810년 러시아가 대륙봉쇄령 파기한 것은 베어링 가문-나폴레옹 간 은밀한 동맹에 파열음이 난 것; 1813년 유나이티드 그랜드 롯지 오브 잉글랜드 (UGLE) 통합은 모던파+고전파 통합시킨 베어링의 작품; 1815년 2월의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도 베어링의 후원으로?; 나폴레옹 전쟁 끝나고, 대량 납품처가 사라진 영국에서 농업공황이 온다 - 이 때 베어링이 찾은 대안이 미국 남부 노예 노동을 통한 면직물 무역; 카자르 유태인은 19세기에 가서야 유럽에 진입했고 아슈케나짐이나 세파르딤과 서로 다른 유대교 전통으로 시나고그를 따로 운영했다; 1823년 영국 영란은행 회의록에 등장한 네이선 로스차일드; 1820년대 베어링 가문은 친프랑스 스페인어권 프리메이슨 독립운동 세력을 남미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페루)에서 지원했고 (프리메이슨 볼리바르가 대표적 예), 로스차일드는 브라질 페드루 왕자 등 그 반대세력을 지원; 1825년 공황은 로스차일드의 농간에 의해 베어링이 패배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