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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복: "이런 걸 주다니..." 탈북 후 처음 라면 대접 받은 북한 과학자가 보인 의외의 반응; 90년대 처음 '탈북'이란 단어를 퍼뜨린 사람이자 민간인/탈북자 최초로 삐라 뿌린 사람; 1980년대 북한 자동차 80%는 일제고, 나머지는 소련제였다; 아우슈비츠에는 자살이란 개념이 성립할 수 없었다 - 자살률이 매우 낮았다; 집단농장이 아닌 개인농장을 하니 생산량이 700% 향상 - 김일성은 이걸 알고도 일부러 무시; 에도 막부가 사람들을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만 만들어 통치를 유지했던 것과 비슷; 나를 위해 새벽 5시에 가게를 여는 것이 자본주의의 힘; 88 올림픽 때문에 공산주의가 붕괴했다; 소련 잉그리아, 폴란드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동독에서는 넘어오고

엉터리 음모론자 인드라는 일본 근대화를 99% 국제투기자본 작품, 1%를 요코하마 요시와라 유곽 기생들 탓으로 두나, 이는 그의 확증편향에서 비롯된 무지와 편견일 뿐이다; 냉정히 말해 당대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우수했기 때문에 근대화를 더 빨리 받아들인 것도 인정을 해야한다; 난학의 영향을 받은 에도 막부는 이미 1774년에 스기타 겐파쿠의 근대적인 해부학 도서인 '해체신서'를 펴낼 정도였다 - 사람 몸을 해부하여 탐구한다는 것은 유교국가인 조선에서는 상상도 못했을 일;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묘사된 에피소드도 생각해봄직한데, 1853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일본에 쳐들어왔을 때,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 때문에 애타게 동행하고 싶어하는 일본인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에 페리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메이지유신 전까지 보수적인 존황양이파도 적지 않았지만, 영국과 미국에 쓴맛을 본 사쓰마, 조슈의 지배자들은 수구보수꼴통이 득세했던 조선보다 훨씬 더 빠르게 자신들의 무능함을 깨닫고 태세전환을 해서 서구화 개혁을 추진했던 것이다; 1868년, 1870년 두번에 걸쳐 번역된 헨리 휘턴의 "만국공법"과 1866-70년 사이 세번에 걸쳐 출간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당대 일본의 베스트셀러였다 - 그만큼 개화기 당시 일본인들은 서구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컸고, 중국, 조선에 비해 개항에도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하여 국제투기자본은, 감히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침략을 단행했던 역사를 지닌 그 섬나라를 아시아 대리통치의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대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더 우수했다면, 파트너 관계는 일본이 아닌 조선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 그러나 당대 조선은 오일장에서 보듯 상업발달이 미비했으며, 일본에 비해 비위생적이어서 한양 곳곳에는 똥무더기가 천지였으며, 서민들의 직업윤리는 나태하고 게을렀으며, 지배층은 흥선대원군과 민비, 안동김씨 가문에서 보듯,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고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갇혀 있었다 - 명나라 황제를 모시는 만동묘를 애지중지하던 것이 당대 조선 선비들의 수준이었다; 정한론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조차 조선이었다; 청나라 황제만 사용할 수 있는 '황'皇이나 명령을 뜻하는 '칙'勅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고 메이지 정부의 사신접견을 거부했던 것이다; 물론 일본 애들이 이런 반응이 나올줄 예상하고 일부러 저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나간 것이긴 하지만, 급변하던 당대 정세를 수수방관했던 조선 측 잘못도 분명 있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보다 빨리 근대화하며 조선을 먹을 수 있었던 이유: 참근교대, 은제련과 광산업, 농산물 선물거래, 네덜란드와의 교역 / 17세기 후반 ~ 18세기 초반의 경제호황이었던 겐로쿠 시대 / 그러나 빈부격차와 높은 세율 때문에 조선과 일본의 농업인들 중 어느쪽이 더 윤택했는지는 비교하기가 쉽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