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19세에 아침이슬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만든 김민기/ 아로는 조센징들의 정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매우 싫어하고 비판적으로 보지만 (좌든 우든 얼간이들밖에 없다), 이 곡은 정치를 떠나서 위대한 곡이다 / 아침이슬만큼은 아니지만 김민기가 만 26세에 작곡한 상록수 역시 좋은 곡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HIU9fpXVTk&list=RDqHIU9fpXVTk&start_radio=1

 https://www.youtube.com/watch?v=qLg0erjLdxY&list=RDqLg0erjLdxY&start_radio=1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김민기가 〈아침이슬〉을 작곡한 것은 1970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그는 만 19세였습니다. 1951년 3월 31일생이어서, 1970년 작곡 당시에는 생일 전후에 따라 만 18~19세였고, 일반적으로 스무 살의 청년으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정리하면:

  • 김민기 출생: 1951년 3월 31일
  • 〈아침이슬〉 작곡: 1970년
  • 당시 나이: 만 18~19세
  • 1971년 양희은의 데뷔 음반에 수록되면서 대중에게 크게 알려짐 

즉, 20살도 채 되기 전에 한국 대중음악사의 전설적인 곡을 만든 셈입니다. 놀라운 건 그때 김민기가 서울대 회화과 학생이었다는 점이죠. 

 

 

 

5. 해석[편집]

가사의 의미와 시대적 배경을 제외하고 봐도 음악적으로 매우 훌륭한 명곡이다. 김민기의 중후한 중저음으로 풀어내는 담담하면서도 서글프고 숙연한 아침 이슬과, 양희은의 힘찬 목소리로 풀어내는 가슴이 뜨겁게 달궈지는 힘찬 아침 이슬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고, 수많은 후배 가수들과 일반 시민들의 목소리로 풀어낸 아침 이슬까지, 누가 불러도 기분이 각자의 개성이 반영된 명곡다.

가사의 해석을 떠나 작곡적인 측면에서는 혁명적인 구조를 하고 있다. 유행을 노리는 전형적인 노래 구조인 A-A'-B-A 구조[3]에서 벗어나 A-A'-B-C 라는 새로운 구조를 하고 있다. 또한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4도인 F음(파)으로 불안정하게 시작하고, 클라이맥스(B) 이후에 메인 테마(A)로 돌아오지 않고 또 다른 새로운 테마(C)로 진전하며 끝나버린다.[4] 이는 메인 테마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킴으로써 앨범 판매를 부추기는 A-A-B-A의 구조가 아니었기에, 1971년 처음 이 곡이 김민기의 앨범에 발표되었을 때에는 비명도 못 지르고 3천 장의 앨범도 판매하지 못한 채 시장에서 묻혔다.

양희은 버전 '아침 이슬'의 멜로디 라인은 시각 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12현 기타로, 코드 라인은 원곡자 김민기가 클래식 기타로 쳤다.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가 바라는 어떤 내용이 그 시대의 어울리는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날 거예요. 아침 이슬 같은 것이 제가 뭘 계산을 해서 의도를 해서 그렇게 많이 불렀던 것이 아니듯이."
- 김민기,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기폭제가 될만한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보냐는 질문에

 



음악평론가 강헌의 증언에 의하면, 이 구절은 김민기가 어느 날 술을 마시고 공동묘지 근처에서 자다가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서 깨어났을 때의 경험을 그저 가사로 옮긴 것일 뿐이었다고 한다. 이후 2018년 김민기 본인이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서울대 미대 입학 후 집이 정릉에서 수유리 우이동(당시 수유동) 쪽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 무덤도 몇 개 있는 야산이 있었는데, 거기 있던 반지하창고를 생애 처음 개인 작업실로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거기서 밤새 그림 작업하다가 막힐 때면 기타 잡고 노래를 만들다 다시 그림 그리고 왔다갔다 했는데, 그때 만들어진 곡이 아침이슬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엔 만들고 보니 맘에 들지 않았는지 악보를 버렸는데, 그 전에 들은 양희은이 자신이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해 허락한 것이 히트를 친 것. 그래서 김민기 본인은 이 곡이 군사정권에 의해 금지곡 지정이 된 것을 두고 웃기는 얘기라는 씁쓸한 감정을 토로했다.

1978년 유신 정권 시절 청년 이수만이 밤무대에서 금지곡인 아침 이슬을 불렀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을 뻔한 적도 있었다. 애초에 이수만은 아침 이슬을 만든 김민기와 동아리 활동도 함께 한 서울대 후배이기도 해서 평소부터 알고 지내던 형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전적 지원을 한 적도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김민기가 사망한 2024년에도 조문하러 가서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그리고 〈상록수〉를 만들었을 때 나이는?

이건 명확합니다.

김민기는 1951년생이고, 〈상록수〉는 1977년에 작곡했습니다. 

따라서 1977년 당시 만 25~26세, 통상적으로 26세라고 보면 됩니다.

특히 1977년 당시 김민기는 부평의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만들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아침이슬〉은 19~20세 무렵, 〈상록수〉는 26세 무렵에 만들었다는 겁니다. 정말 젊은 나이에 한국 대중음악사에 남을 곡을 두 곡이나 만든 셈입니다.

 

 

 

 

“서소문에 범진사라고 있었어. 보안사 취조실. 들어가니까 하사관들이 딱 들고 오는 게 사각형 각목이었는데 걔네는 베테랑들이지. (패는 시늉) 다다다닥… 그때 아, 내가 죽는구나. 그런 느낌을 처음 받았어. 한참 맞다 보니까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패는 놈들 모습이 슬로비디오로 보이는 거야. 나 죽는 거, 아픈 거는 감각이 멀어지고. 근데 걔네들한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구. 한없이 미안해지는 게, ‘나 때문에 이들이 를 짓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어.
(중략) 나중에 운동권 애들한테도 그랬어.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아간다.’ 나중에 보니까 박정희 무지하게 미워하던 놈들이 박정희 비슷하게 되더라고. 내 참, 별 얘기까지 다 하네.(웃음)”

민주화 운동을 하다 끌려가 고문을 당했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찾아봤는데, “김민기의 부모가 그의 활동을 못마땅해했다”라고 단정할 만한 직접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알려진 가족사를 보면 조금 복잡합니다.

김민기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희생되어 김민기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가 홀로 10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니는 교육을 많이 받은 인물이었고, 조산원으로 일하면서 자녀들을 부양했습니다. 

따라서 김민기가 대학생 시절 음악을 하고, 이후 군사정권에 의해 탄압받고, 노동운동·민중문화 활동에 관여했던 시기에 아버지가 그의 활동을 어떻게 평가했는지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경우에는 제가 지금 확인한 자료들에서는 “아들의 음악·사회운동 활동을 못마땅해했다”는 직접적인 회고나 발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반대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다만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있습니다. 김민기의 어머니 역시 일제강점기에 여성 교육을 받고 사회적 활동을 했던 상당히 독립적인 사람이었다는 점입니다. 연희전문에 진학했다가 조선인 차별에 항의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에서 조산원 자격을 취득했고, 귀국 후 조산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부모가 아들의 위험한 활동을 못마땅해했다”는 식으로 김민기 가족사를 해석할 만한 근거는 현재로서는 부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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