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나스 제멜바이스 (예외주의적 낙관주의자) vs. 조지프 리스터 (행동주의적 낙관주의자) / 손씻기 주장해 결국 정신병동에 수감된 제멜바이스 - 대중과 과학계 기성권력의 무지를 보여준 사건

 https://www.bbc.com/korean/news-49916415

 

‘손씻기’를 주장하다가 미친 사람 취급받은 19세기 의사

제멜바이스는 병균이 알려지기 전 시대에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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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제멜바이스는 병균이 알려지기 전 시대에 손을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게재 시간

아픈 이를 병원에 데려가는 게 최선책은 아니던 시절이 있었다.

19세기 이야기다. 이때는 병원이 감염의 온상이었고, 오직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근원적인 치료만 제공하는 곳이었다.

당시엔 집에서 치료받는 게 훨씬 안전했다. 병원의 사망률은 집보다 서너 배씩 높았다.

죽음의 집

소변과 토사물, 여러 체액으로 가득한 병원.

당시 병원은 냄새가 어찌나 지독한지, 근무자들이 손수건으로 코를 막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때 의사들은 손이나 수술 도구를 잘 씻지 않았다. 수술실 역시 그 안에서 일하는 외과의사만큼이나 더러웠다.

병원이 "죽음의 집"이라고 불린 이유다.

1975년 미국 토마스 이킨스가 그린 '그로스 클리닉'. 위생적인 수술 환경을 도입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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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975년 미국 토마스 이킨스가 그린 '그로스 클리닉'. 위생적인 수술 환경을 도입하기 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세균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남자가 감염 확산을 막기 위해 과학을 활용하려 했다.


헝가리 출신의 의사, 이그나스 제멜바이스였다.

그는 1840년대 비엔나에 있는 산부인과 병동에서 손 씻기로 사망률을 낮추려고 노력했다.

지금의 시각에서 봤을 때는 가치있는 일이었지만 당시 동료들은 그를 악마로 취급했다.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끝내 그는 "산모들의 구세주"로 남게 됐다.

세균에 무지한 시대

제멜바이스가 일하던 비엔나 종합병원은 다른 병원들처럼 죽음의 그림자가 병실을 떠돌던 곳이었다.

세균이 위험하다는 건 19세기 후반에야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병원의 위생 상태가 감염 확산에 기여한다는 생각은 당시 의사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은 '죽음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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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런던의 세인트 조지 병원은 '죽음의 집'이었다

뉴욕 대학의 의학 역사학자인 바론 H. 레너는 BBC에 "오늘날에는 세균이나 박테리아의 존재에 관해 알지 못하는 세상을 떠올리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는 '독기'라는 부식성 물질 입자가 공기 중의 유독한 증기를 타고 전해지면서 질병이 퍼진다고 믿고 있었다."

불균형

출산 과정에서 질이 파열된 산모들이 특히 감염 위험이 컸다. 상처가 나면 환부는 의사들이 옮겨온 박테리아에게 이상적인 서식처가 됐다.

제멜바이스는 비엔나 종합 병원 내 분만 클리닉 두 곳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두 곳은 시설에선 차이가 없지만, 굉장히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곳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돌보는 곳이고, 다른 한 곳에선 산파들이 산모를 돌봤다.

The Agnew Clinic (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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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889년 토마스 이킨스의 '아그뉴 클리닉'. '그로스 클리닉'과 다르게 의사들이 흰 가운을 입고 수술을 한다

의대생들이 관리하는 곳에서는 1847년 기준, 산모 1000명당 98.4명의 사망률을 기록했다. 산파들이 돌보는 곳의 사망률은 1000명당 36.2명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이 차이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단순히 "더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시기적절한 사망?

산모를 다루는 방식 때문에 산부인과 내 산모 사망 원인 대다수를 차지했던 산욕열(분만으로 인해 생식 기관에 생긴 상처에 세균이 침입 및 감염을 해 고열을 내는 질환)이 더 득세하는 게 아니느냐는 의심이 있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이러한 정설을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그해 제멜바이스의 동료 한 명이 해부 실험을 하다 손이 잘려 사망했다. 이 사건이 그에게 단서를 제공했다.

이것이 당시 볼 수 없었던 죽음의 원인 '화농연쇄상구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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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이것이 당시 볼 수 없었던 죽음의 원인 '화농연쇄상구균'이었다

그때만 해도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특히 해부용 칼이 피부에 내는 상처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위험했다. 가장 노련한 해부학자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찰스 다윈의 삼촌도 아이의 시신을 부검하다 상처가 생겨서, 고통받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빈에서 동료의 사망을 본 제멜바이스는 그 발병 원인이 산욕열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머리를 굴렸다. "해부실에 있던 의사들이 '사체에서 나온 입자'를 분만실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있을까?"

1840년 자크 피에르 메이그리의 '누벨 데모'에서 보여주듯 의사들은 출산 과정에서 손을 사용했지만, 이것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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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840년 자크 피에르 메이그리의 '누벨 데모'에서 보여주듯 의사들은 출산 과정에서 손을 사용했지만, 이것처럼 깨끗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해부실에 있다가 산모를 돌보기 위해 곧바로 분만실로 향한 많은 의대생들을 관찰했다.

당시에는 해부할 때 아무도 장갑이나 보호장비를 착용하지 않았다. 해부 수업을 마친 의대생들이 옷에 살점과 피 묻은 휴지를 묻힌 채 병동을 드나드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병원을 찢어 놓다

반면 산파는 출산 전 수술이나 해부를 하지 않았다.

이것이 미스터리의 열쇠가 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세균 문제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병원 안 일상적 불결함에 대처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제임스 Y. 심슨은 정기적으로 병원을 헐고 새롭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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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제임스 Y. 심슨은 정기적으로 병원을 헐고 새롭게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제임스 Y. 심슨(1811-1870)은 인간에게 클로로포름의 마취성분을 도입한 최초의 의사다. 그는 교차 감염을 통제할 수 없다면, 병원을 주기적으로 파괴하고 다시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세기 가장 유명한 외과의사 중 한 명이자 '수술 기법의 과학(Science and Art of Surgery, 1853)'의 저자인 존 에릭 에릭슨은 "병원이 일단 치유 불가능한 혈액에 오염된다면(혈액에 의해 감염된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소독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치 개미들이 차지해서 허물어진 벽이나 구더기 나오는 치즈를 소독하는 일과 같다"라고 썼다.

제멜바이스는 이처럼 극단적인 조치까지 필요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산욕열은 시체의 '감염 물질'에 의한 것이라고 결론 내린 후, 그는 병원에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을 가득 담은 대야를 설치했다.

제멜바이스는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에서 손씻기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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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제멜바이스는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에서 손씻기를 제안했다

해부실에 있다 분만실로 가는 의사들은 산모를 돌보기 전에 소독액을 사용해 손을 씻게 했다.

그러자 이듬해인 1848년 의대생 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1000건당 12.7건으로 급감했다.

보상없는 승리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산욕열이 해부용 시신 접촉에 따른 감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다.

레너는 "그가 실제로 이런 말을 한 게 아님에도, 제멜바이스가 항상 의대생이 산모를 죽여왔다고 말한 것처럼 됐다"며 "그래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사실 소독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산부인과에만 일반화됐다.

때로는 자기주장을 개진하다가 부정적인 결과만 얻는 경우도 많다.

제멜바이스 역시 이 주제를 담아 출판한 책도 몇 차례 부정적인 비평을 받았다. 제멜바이스는 이에 반발하며 비판자들을 맹렬히 비난했고,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을 "암살자들"이라고 낙인찍었다.

논란이 일자 비엔나 병원은 제멜바이스의 고용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제멜바이스는 고향인 헝가리로 돌아와 부다페스트에 있는 스젠트 로쿠스 병원의 산부인과 병동에서 무보수로 명예의사 일을 했다.

그 병원과 제멜바이스가 나중에 교수로 부임한 페스트 대학의 산부인과 병원은 그와 인연이 닿기 전 산욕열이 창궐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에 대한 반발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료들이 인정하지 않자, 제멜와이스의 분노는 더욱 커져갔다.

그가 죽은 후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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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그가 죽은 후에야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1861년, 그의 행동은 조금씩 균형을 잃었고, 결국 4년 뒤 제멜바이스는 정신병원에 갇혔다.

그의 동료 중 한 명이 제멜바이스에게 새로운 의료기관을 방문해보자고 설득했고, 그를 비엔나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다.

이후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들이 그를 심하게 폭행했다. 그리고는 구속복을 입히고 어두운 방에 그를 가뒀다.

그로부터 2주 후 젬멜 바이스는 오른손에 난 상처에서 시작된 감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47세 때였다.

그는 루이 파스퇴르, 조셉 리스터, 로버트 코치와 같은 의료계 개척자처럼 변화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제멜바이스는 훗날 재조명됐다. 오늘날 손 씻기는 병원에서 감염을 예방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됐다. 

 

 

 

 

다른 뜻 아이콘   리버스: 1999에 등장하는 마도학자에 대한 내용은 제멜바이스(리버스: 1999)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Ignaz Semmelweis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이그나츠 제멜바이스
본명
이그나츠 필리프 제멜바이스 (독일어)
Ignaz Philipp Semmelweis
셈멜베이스 이그나츠 퓔뢰프 (헝가리어)
Semmelweis Ignác Fülöp
출생
사망
1865년 8월 13일 (향년 47세)
국적
직업
산부인과 의사, 과학자
학력
배우자
Weidenhofer Mária (1857년 ~ 1865년)
1. 개요2. 생애
2.1. 몰락
3. 사후 재조명4. 기타

1. 개요[편집]

이그나츠 제멜바이스는 독일계 헝가리인 산부인과 의사이자 과학자이다. 감염병을 야기하는 세균의 존재를 인지한 최초의 인물이다.

2. 생애[편집]

부다페스트의 독일계 헝가리인 가정에서 태어난 제멜바이스는 1837년 빈(Wien) 대학에 입학, 처음에는 법학을 전공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의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빈 병원의 산부인과에서 조수로 일하던 의사 제멜바이스는 당시 산부인과에서 분만을 받은 산모의 사망율이 산파에 의해 분만을 받은 산모의 사망율보다 비상식적으로 높다[1]는 사례를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이럴 만했던 것이, 이 시기 서유럽 의학계에는 미신민간요법의 영향을 받은 원로 의료인들의 파벌을 중심으로 나쁜 공기(miasma)가 질병을 일으킨다거나, 체액의 균형을 맞추면 질병이 낫는다는 식의 아무런 논리도 과학적 증거도 없는 주장들이 난무했다. 세균바이러스가 감염을 일으킨다는 이론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기에 아무도 감염 방지를 위해 손을 씻지 않았고, 따라서 실습에 나선 어린 의대생들은 물론이고 곧 은퇴를 앞둔 늙은 베테랑 의사들까지 모두, 조금 전까지 해부실에 있다가 시체를 만졌건 뭐건 그 더러운 손을 맨손 그대로 산모의 질구에 넣고 만져가며 분만을 도왔으며 의복에 묻은 피와 살점을 제대로 닦지도 않았던 야만의 시절이었다.[2] 이중 출산 과정에서 질이 파열된 산모들의 환부는 의사들이 옮겨온 박테리아들의 이상적인 서식처가 됐다. 반면 집에서 출산한 경우의 사망률이 병원에서 출산한 경우보다 크게 낮았던 이유는, 산파는 출산 전 수술이나 해부를 하지 않았고 출산 시 외부인을 출입금지 시키고 끓는 물과 깨끗한 헝겊을 준비해 출산을 돕는 등 오히려 의사들보다 위생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이다.

제멜바이스는 산욕열의 발생 원인이 의사들이 시체를 부검하면서 외부의 분해된 동물-유기 물질로 인해 독성물질이 전염되는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고, 부검과 산부인과 진단 전에는 염소 처리된 석회 용액으로 손을 깨끗이 세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3]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주장대로, 해부실에 있다 분만실로 가는 의사들은 산모를 돌보기 전에 소독액을 사용해 손 씻기를 하게 시켰고, 이듬해인 1848년 의대생 병동의 산모 사망률이 1000건당 12.7건으로 급감했다.#

제멜바이스의 주장은 당시 의학계를 뒤집어 엎는 획기적인 발견이었으며, 매우 적은 비용으로 다수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효율적인 해결법이었다. 비록 제멜바이스의 이론이 후대에 실제로 발견, 검증된 세균과 바이러스의 감염 방식과 완벽하게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세균에 대한 지식 자체가 전무하던 시대에[4] '시신이나 환자 등 유기체에서 유발된 어떤 미시적인 입자가 질병을 발생시킬 수 있으며, 이런 소입자로 인해 발생하는 질병은 단순한 손씻기만으로도 상당수를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을 놀라운 직관과 자신이 수집한 통계적 사례를 분석하여 추론해낸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앞서간 천재들 대부분이 그러하였듯, 이 발견은 되레 제멜바이스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형선고가 되어버렸다. 제멜바이스는 실증적인 통계를 제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선 제멜바이스가 '의대생이 산모를 죽여왔다'고 말한 것처럼 받아들였다(실제로 이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이런 일이 벌어진 가장 큰 이유는 만약 제멜바이스의 주장을 인정하면 의사들의 과실로 산모들이 사망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에는 원로 의사들의 정치력이 워낙에 강력했기에 이러한 관습은 절대적인 진리로 통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관습과 대치되는 새로운 이론을 받아들이려 하는 의료인들은 제대로 된 연구 지원조차 받을 수가 없었다.[5] 유럽 의료계의 권력층에게 제멜바이스는 '별 볼일 없는 헝가리 촌놈 주제에 우리들에게 금은보화를 안겨다 주는 헤게모니아를 붕괴시키려 하는 위험한 불순분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덤으로 비판자들을 맹렬히 비난했고, 손을 씻지 않은 의사들을 "암살자들"이라고 낙인찍는 제멜바이스의 불같은 성격은 안 그래도 불리하던 그의 처지에 기름을 끼얹었다. 제멜바이스가 근무하던 빈 대학 병원의 산부인과 책임자이자 제멜바이스의 상사이던 요한 클라인은 기존 관행과 전통적 의료 방식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대단한 보수주의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클라인이 보기에 제멜바이스는 '급진적 이론으로 기존 체계를 완전히 뒤집고 유명해지기 위해 사고를 치고 다니는 풋내기'였고, 이에 둘은 지속적으로 충돌하다[6] 결국 클라인은 제멜바이스의 재계약을 거절하였다.

한편으로는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인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인에 대한 인식 악화도 그의 소외에 한 몫했는데, 제멜바이스 자신은 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으나, 그의 형제 중 일부가 혁명에 가담했다가 처벌받았으면서 제멜바이스의 평판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럼에도 일부 젊은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였고, 제멜바이스에게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대조 시험을 엮어 책으로 출간하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멜바이스는 증거를 모으고 책을 통해 지지자들을 끌어모으려 하기보다는 적극적인 강연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알리려 하였고, 그렇게 조금씩 지지층을 모으려던 참에 갑자기 빈을 떠나 고향인 부다페스트로 돌아가 대학 교수직 및 병원 산부인과 책임자 지위에 올랐다. 이에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를 지지하던 동료들은 그에게 크게 실망했다.

부다페스트에서 재직하던 당시 제멜바이스는 자신의 이론을 강하게 추진하였고 실제로 산모들의 사망률은 낮아졌다. 그러나 지나칠 정도로 강압적 태도를 보인 탓에 병원 직원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논문이나 저서 등의 명확한 근거 없이 무작정 이론을 설파하기만 한 탓에 지지자를 그다지 늘리지도 못했다. 결국 1860년 동료들의 강권에 못 이겨 자신의 의견을 담은 책을 서술하긴 했으나, 자신의 주장이 인정받지 못하며 쌓인 울분과 분노가 너무 컸던 탓인지 원체 감정적으로 서술한 탓에 그 결과물은 대동소이한 말의 난잡한 반복이었고 또 자신의 의견보다 기존 의학계에 대한 심한 비난[7]과 자신의 견해를 무시하여 산모를 죽게 한 의사들에 대한 세세한 사례가 더 많은 암울한 '묵시록'이었다.

그러다 보니 제멜바이스의 지지자들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비판자들은 저서의 논리적 결함이나 허점, 격앙된 어조를 지적하며 제멜바이스를 궁지에 몰아갔다. 영국의 의사이자 생리학자인 윌리엄 하비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급진적인 체순환 이론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처세술과 설득을 통해 지지자들을 모았고, 저서에서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며 학계를 설득하여 결국 자신의 이론을 주류 이론으로 이끌어 낸 것과 대조되는 부분이다.[8]

결국 병원에서 해고당한 그는 정신병동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의 행동이 조금씩 균형을 잃기 시작하자 페르디난트 리터 폰 헤브라를 비롯한 동료들이 제멜바이스에게 새로운 의료기관을 방문해 보자고 속여서 그를 비엔나 정신병원으로 데려간 것이었다. 제멜바이스가 상황을 눈치채고 도망치려 하자 경비원들이 그를 심하게 폭행하고는 강제로 구속복을 입힌 뒤 어두운 방에 그를 가뒀다. 그로부터 2주 후 제멜바이스는 오른손에 난 상처에 세균이 감염되어 패혈증으로 사망했다.[9] 세균에 저항할 기초를 제시한 위인이 아이러니하게도 세균으로 살해당하고 만 것이다. 이 정신병원 이야기가 와전되어서 제멜바이스가 자신의 이론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절망한 나머지 정신병을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3. 사후 재조명[편집]

제멜바이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10년이 지나 프랑스의 루이 파스퇴르가 세균의 존재를 증명하였으며 이후 산욕열이 세균 감염으로 인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이 입증되며 세균과 감염병의 관계가 완벽히 정리되었다.

〈상처는 절대 소독하지 마라〉를 집필하고 이시오카 제1병원 흉터치료센터장을 역임한 나츠이 마코토는 그의 책에서 제멜바이스가 그토록 당시 학회에서 배척당한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다.
학회 전체가 제멜바이스의 주장에 맹렬하게 반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신들의 학설이 부정당하게 된 의학계의 주류 인사들이 권위를 지키기 위해, 손만 씻으면 산욕열을 박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권력으로 뭉개버린 것이다.

제멜바이스의 사례를 보면 당시의 의사들은 의료적 지식에 대한 지식의 미비라는 수준을 넘어서 고압적이고 오만하며 스스로 발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매우 경직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병원의 환경은 일부 지성인들 사이에서 감옥과 유사하거나 감옥보다 더 불결한 곳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될 정도였으며, 병원에 가서 치료 받는 것보다 자신들의 집에서 치료 받는 것이 생존률이 더 높았다. 병원에서 외과적인 수술이나 처치를 받았을 경우 감염 등으로 인해 환자가 2차 피해를 입는 경우가 무려 64%가 넘었다. 그러니까 병원에서 치료 받으면 사망까진 아니더라도 괴사 등의 신체적 장애를 입을 확률이 두 번 중 한번보다 더 높았다는 소리다. 제멜바이스의 발견은 인류 의학이 더 진보 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으므로 이 점 자체를 근본 단계부터 부정했던 당시 의사들에게는 그 이전의 의료 행위로 인한 문제는 몰라도 그 이후의 의료 행위로 인한 문제에는 엄연하게 책임이 있다.

실제로도 제멜바이스 사후에 조지프 리스터가 소독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여 이에 대한 압도적인 안정성과 사례 데이터가 우후죽순으로 쌓였지만, 단지 절차가 까다롭고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끝까지 소독 따위는 안 하겠다는 의사들이 태반이었다. 클로로포름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환자들의 고통을 줄이는 마취 의학의 기본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제임스 영 심슨마저도 리스터의 항균의료 체계에 대해 파스퇴르의 연구까지 부정하면서 연구 결과가 미비하고 쓸데 없으며 오히려 위험하다며 거부했고 1867년경에 리스터의 논문에 대해서 공개적인 비판까지 했다. 이 양반이 산부인과 의사로써 산모들에게 위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얼마나 당시의 의료계가 개판으로 굴러갔는지를 알 수 있다. 심지어 그 뒤로 연구 결과가 쌓여서 파스퇴르의 세균학이 실질적으로 정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끝까지 이를 거부했다. 때문에 심슨은 클로로포름을 적극적으로 의료에 도입했던 마취의학의 창시자이면서도 높은 평가를 전혀 받지 못했다. 심슨이 담당했던 환자들이나 산모의 사망률에 대한 공식적인 자료는 없지만, 당시의 다른 의사들의 평균적인 사망률을 보았을 때는 10~15%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4. 기타[편집]

  • 제멜바이스의 출판물은 〈제멜바이스의 발견〉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관리되고 있다.#
  • 제멜바이스 사후 '시대의 관념과는 정반대의 진실이 제공되었을 때, 이를 의도적으로 부정하는 현상'에 대해 '제멜바이스 반사작용(Semmelweis reflex/effect)'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창안되었다.[10]
  •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있다. 한국 학생들이 헝가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한국에서 의사 국가고시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노리고 수능을 우회하기 위해 유학한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알려졌다.韓 의사 국가고시 볼 수 있는 ‘헝가리 의대行’ 늘어... ‘편법’ 비판도 하지만 들어가기는 쉬워도 영어와 암기력이 수준급이 아닌 이상 졸업하기는 힘들다는 현실에 막혀서 돌아오는 한국 학생들이 꽤 많은 편이다.

[1] 의대생들이 관리하는 곳에서는 1847년 기준, 산모 1000명당 98.4명의 사망률을 기록했다. 산파들이 돌보는 곳의 사망률은 1000명당 36.2명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이 차이가 남자 의대생들이 산모를 단순히 "더 거칠게" 다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2] 그러다 보니 산욕열로 사망한 산모를 부검하던 중 메스에 손이 베인 의사가 똑같은 감염에 시달리다 며칠 못 가 사망하는 일도 발생하곤 했다. 제멜바이스는 해당 의사의 시체를 부검한 뒤 죽은 산모의 시체와 마찬가지로 고름과 부패한 피부 조직을 발견하였고 이는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게 된다.[3] Zwei offene Briefe an Dr. J. Spaeth, Professor der Geburtshilfe an der k. k. Josefs-Akademie in Wien, und an Hofrath Dr. F. W. Scanzoni, Professor der Geburtshilfe zu Würzburg ,Semmelweis, Ignác Fülöp https://www.gutenberg.org/ebooks/40261[4] 19세기 중반에는 '독기('장기'라고도 번역)'라는 부식성 물질 입자가 공기 중의 유독한 증기를 타고 전해지면서 질병이 퍼진다고 믿고 있었다.[5] 이 같은 억압의 시대가 탄생시킨 또 다른 이론이 "현 의료체제로는 감염을 피할 수 없으니 병원을 주기적으로 파괴 후 다시 지어야 한다."라고 말했던 제임스 Y. 심슨 같은 부류다. 미생물학이 제대로 정립되기 이전에는 근대 의학이라고 관습적인 경험에 의존했던 당시 대체의학과 큰 차이가 있었던 건 아니다. 제멜바이스와 존 스노우, 루이 파스퇴르 등이 출현하는 19세기 중후반이 되면서 대격변한 것이다.[6] 물론 클라인을 위시한 기득권층 의사들의 패악질이 심각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제멜바이스의 태도가 지나치게 공격적이었기에 더 큰 반발을 불러온 면도 없진 않다. 클라인은 제멜바이스 병동의 산욕열 사망률이 낮은 것은 자신이 새로 설치한 환기 장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7] 저서를 보면 당시 의사들을 학살자 혹은 살인의 방조범으로 규탄하는 수준의 문장이 왕왕 등장한다. 일단 당시 의사들의 위생에 대한 인식은 궤멸적이라 상기한 것처럼 집에서 산파에게 맡겨 분만하는 것보다 병원에서 의사가 맡아 분만하는 것이 사망률이 더 높을 정도였던 것은 맞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다른 의견을 지닌 학계를 설득해야 하는 입장에서 이들을 살인자라고 매도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방법이 아니다. 물론 제멜바이스만 일방적으로 잘못했다고 볼 수만도 없다. 명색이 의사라는 자들이, 환자들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도 자신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당시 의사들은 제멜바이스의 말을 따라 고치기는커녕 변명하고 아집을 부리기 바빴다. 결과적으로 학계의 교차검증 절차가 구체화되지 않았던 시기였던 것이 비극을 불러왔던 것이다.[8] 16세기 이전에는 로마 시대 의사였던 갈레노스의 이론에 따라 혈액이 간과 심장에서 만들어진 뒤 정맥을 통해 온 몸을 느리게 흐르며 영양분을 공급하며, 동맥과 정맥은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론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이에 의심을 품은 하비는 해부와 연구, 그리고 유명한 '결찰사(ligature)' 실험을 통해 혈액은 동맥과 정맥을 연속적으로 타고 흐르며, 심장은 혈액이 지속적으로 체내에서 순환할 수 있는 펌프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9] 사실 환자를 치료한답시고 냉수 마찰과 관장을 사용하던 19세기 당시 정신병원의 열악한 수준을 생각해 보면, 저런 위생 문제 같은 게 아니었어도 제멜바이스는 어차피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10] Mortell, Manfred; Balkhy, Hanan H.; Tannous, Elias B.; Jong, Mei Thiee (July 2013). "Physician 'defiance' towards hand hygiene compliance: Is there a theory–practice–ethics gap?". Journal of the Saudi Heart Association. 25 (3): 20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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