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기자본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2: 로스차일드의 미국 공화당 장악의 시작 / MI6-OSS 커넥션 / IBM & 듀폰 & GM 커넥션 / 친소 & UN 계열 카네기 평화재단-Root, Clark & Bird-Dewey Ballantine 커넥션 / 수에즈 위기-UN-친소-나세르 커넥션 / 록펠러계 (넬슨 록펠러, 윈드롭 올드리치, 프레스콧 부시, 존 포스터 덜레스, 데이비드 록펠러 NEED, 록펠러 브라더스 펀드) 커넥션

 

 


로스차일드 자본이 민주당 대통령을 몇 차례나 장기집권시키고(프랭클린 루즈벨트가 3선 임기 도중 사망하는 바람에 부통령이었던 트루먼이 그 후임이 되었는데, 이 기간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공화당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던 이유는, 1950년대 아이젠하워 정부 이전까지 미국 공화당을 완전히 장악하기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독단적인 행동'을 하는 반체제 인사들이 늘상 공화당으로부터 나왔던 것이다.


1. 윌슨 정부 때 (1910년대)  베르사유 조약 비준을 거부하고, 국제연맹 가입에 반대했으며, 고립주의, 또는 독자주의 노선으로 가자고 주장했던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이었던 헨리 캐봇 롯지와 윌리엄 보라 상원의원, 

2. 연방준비은행 제도를 반대하고, 미국 월가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에 자금을 댔다고 주장했으며, 1927년 McFadden Act을 통해 은행 본사가 속한 주에만 지점을 만들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고 (이러한 규제는 록펠러 계열 은행들이 1950년대까지 국내 모기지에만 집중하고, 해외 영업은 유로달러에만 의존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루즈벨트 정부가 유태인들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주장했던(네오리얼리즘[신현실주의]라는 용어를 만든 헨리 모겐소 등이 그 예였다) 루이 맥패든 상원의원 (그의 죽음에는 독살설 음모론이 있다),

3. 1930년대 유태인들(=로스차일드 가문)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배후였다는 주장을 펼친 '나이위원회'의 제럴드 나이 상원의원,

4. 1950년대 루즈벨트-트루먼 정권이 소비에트 스파이(=로스차일드 스파이)로 가득하며, 이들 세력이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기획했다고 주장한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원 등 .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도너번은 영국 MI6 지시로 미국 정보 부서 OSS를 창립한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처칠과 친하게 지냈다. OSS가 MI6의 부속기관이었다는 증거는 여러군데서 발견되는데, 특히 OSS 본부가 록펠러센터에 있는 MI6 사무실 바로 위층에 위치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윌리엄 도노반은 록펠러 가문과 친한 사이인 앨런 덜레스에게 OSS 업무를 맡겼다. 루즈벨트 정권의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과 트루먼 정권의 국무부/국방부 장관 조지 마셜, 그리고 훗날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는 OSS를 찬양했다. 이들 모두가 MI6 이중간첩으로 봐도 무방하다.

 

 

 

1. Root, Clark & Bird와 그 후손들이 만든 Dewey Ballantine으로 이어지는 월스트리트 법률회사는 체스터부터 아이젠하워 정권 때까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Root, Clark & Bird의 창립자 엘리후 루트(Elihu Root)의 친구가 시어도어 루즈벨트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였다. Root의 회사에서 일했던 헨리 스팀슨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정부의 전쟁장관이었고, 스팀슨 밑에서 일했던 것이 트루먼 정권의 국무부 장관이 되는 딘 애치슨으로, 애치슨은 로스차일드계 듀폰의 간부를 지냈다. 스팀슨과 애치슨 인맥이 트루먼 정부의 국무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조지 마셜이다Felix Frankfurter (딘 애치슨의 스승이자 헨리 스팀슨의 부하이며  Root 회사의 John Marshall Harlan II의 지인)는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친구였다. 아이젠하워는 카네기 평화재단 출신으로, Ballantine 회사 출신인 공화당원 Thomas E. Dewey가 1952년 자금을 후원했고, 대통령이 되자 Ballantine 출신인 John Marshall Harlan II을 대법관으로 임명. Dewey 다음으로 아이젠하워 정권에서 공화당을 이끌 게 되는 것이 바로 넬슨 록펠러.


2. 이 회사는 하버드 법대 출신들이 독식했다.


3. 이 회사가 자문한 회사들이 다 로스차일드 계열.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모건의 AT & T와 모건스탠리, 그리고 로스차일드-쉬프의 에이전트였던 철도왕 해리먼 등. 해리먼 가문 인맥이 체스터/클리블랜드 대통령. 클리블랜드는 베어링, 모건 가문과도 관련이 있다. 해리먼 가문은 뱅크 오브 어메리카 은행과 관련이 있고, 딘 애치슨이 일한 적이 있던
Covington & Burling 역시 뱅크 오브 어메리카의 제휴 법률회사다.
 [Covington & Burling은 월가 유수의 법률 회사로, 다음의 기업들과 관련이 있다: 이스트먼 코닥, GE, 지오다노, 하비 데이비슨, IBM, 마이크로소프트, 모건스탠리, 전미농구협회, 전미축구리그, 프록터 & 겜블 등. 모두 구 로스차일드계다.]


4. 이 법률 회사 출신들이 카네기 평화재단, UN, 알져 히스, 에드가 스노우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에서 보듯, 유태계 로스차일드 가문이 지배한 소비에트와 관련이 있다. 딘 애치슨 등은 빅터 로스차일드 스파이였던 알져 히스의 소비에트 스파이 혐의에 대해 법정에서 열심히 변론했다.


5. 이 법률 회사들은 월가 법률 회사 최초로 유태인들을 고용했고, 시어도어 루즈벨트 시절 반독점법을 밀어붙혀 록펠러 가문을 압박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유태인 루이스 브랜다이스는 딘 애치슨의 스승격인 인물이었다.


6. 엘리후 루트, 시어도어 루즈벨트, 조지 마셜 등 노벨상과도 관련이 있다.


7. 엘리후 루트는 1918년 설립된 미국외교협회의 창립멤버다. 록펠러, 해리먼 가문 역시 로마클럽, 미국외교협회와 관련이 있다. 미국외교협회 역시 1970년대 이전까지는 로스차일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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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폰은 로스차일드가 세운 아이젠하워 정부 연줄로, 1950년대 미국 고속도로 이권 사업을 따낸다. 모건의 GM 역시 사업 이권을 따낸다. 듀폰은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원자력 사업에도 손을 댄다.

 

 

* 아이젠하워 정부-GM/듀퐁/록펠러 커넥션
Charles Wilson then the president of GM as the Secretary of Defense
Francis Dupont of the Rockefeller-connected DuPont family as Chief Administrator of Federal Highways

Rail travel declined a startling 84% between 1945 and 1964.

 


응. GM(General Motors)과 J.P. Morgan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깊은 관계가 있었어. 다만 시대를 구분해야 해. General Motors

특히 1910~1920년대 초 GM의 재편 과정에서 J.P. Morgan 계열 금융자본의 역할이 컸다.

GM 창업자 William C. Durant가 1910년 심각한 자금난에 빠지자 은행단이 GM의 재무통제권을 장악했고, 이후 1915년 Durant가 다시 지배권을 되찾았다. 그리고 1920년 Durant가 두 번째로 밀려날 때에는 DuPont 계열과 J.P. Morgan & Co.가 중요한 금융적 역할을 했다.

다만 이후 GM의 지배구조에서 더 직접적으로 중요한 존재는 DuPont 가문이야. Pierre S. du Pont가 GM 회장을 맡았고 DuPont는 한때 GM 주식의 상당 부분을 보유했다. Alfred P. Sloan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GM은 전문경영인 중심의 거대기업으로 발전했고.

그래서 네가 앞에서 물었던 아이젠하워의 국방장관 Charles E. Wilson과 연결하면 재미있는 구조가 생겨.

Wilson은 아이젠하워 정부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GM 사장/CEO였어. 1953년 국방장관 인준 과정에서 GM 주식을 대량 보유한 것이 문제가 되어 처분했고, 이때 유명한

“For years I thought what was good for our country was good for General Motors, and vice versa.”

발언이 나왔지.

그러므로

J.P. Morgan ↔ GM

이라는 역사적 금융관계는 실제 존재하지만,

J.P. Morgan → GM → Charles Wilson → Eisenhower

처럼 Morgan이 Wilson이나 아이젠하워를 지휘했다는 식의 직접적인 지배관계로 연결하면 증거를 넘어가게 돼.

오히려 1950년대 아이젠하워 주변의 기업·금융 네트워크를 보려면 J.P. Morgan 하나보다 Morgan / Rockefeller / Brown Brothers Harriman / DuPont / GM을 각각 분리해서 누가 누구와 실제로 이사회·은행·정부직으로 연결됐는지 보는 게 정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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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의 나세르 정부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일어난 수에즈 전쟁(제 2차 중동전쟁, 1956년 10월 29일~11월 3일) 역시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지배하던 빅터 로스차일드의 계획이었다. 나세르는 사석에서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경제적 압력이 자신을 구했다고 말했지만, 공식적으로는 소련 흐루시초프 서기장에게 감사를 표한 바 있다.


이 전쟁은 로스차일드의 세계정부나 다름 없었던 UN의 긴급군(UNEE)이 시나이 반도를 점령했고, 역시나 유엔 주도로 휴전이 되었다. 또한 이 전쟁의 결과로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 성공과 함께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철수했고 (1956), 영국의 앤서니 이든이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이스라엘군이 철수하고 (1957), 이스라엘이 티란 해협을 확보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승리). 이 전쟁의 더 중요한 의의는 영국이 초강대국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미국이 대신 차지했다는 것이며, 나세르의 이집트가 소비에트에 편입되면서 미소 냉전 구도가 더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두 로스차일드가 원하던 바였다.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란 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던 영국, 프랑스의 수에즈 운하에서 로스차일드가 지배하는 소련의 수에즈 운하로 소유권이 변경된 것에 불과하다.

 

  

넬슨 록펠러는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상당히 중요한 일을 했다

이건 생각보다 관계가 깊어.

Nelson Rockefeller는 아이젠하워 취임 직후인 1953년 정부조직 자문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새로 만들어진 **보건·교육·복지부(HEW) 초대 차관(Under Secretary)**이 됐다. 1953~54년 재임했다.

형식적으로는 장관 Oveta Culp Hobby 밑의 2인자였지만 실제 영향력이 상당했다는 증언도 있다. 노동계 지도자 George Meany는 훗날 사실상 Rockefeller가 HEW를 운영했다는 취지로 회고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1954년 백악관으로 이동했다는 것이야.

그는 Special Assistant to the President for Foreign Affairs, 즉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외교문제 특별보좌관이 되어 1955년까지 일했다. 특히 냉전 심리전·외교정책과 군축 문제에 관여했고, 아이젠하워의 유명한 Open Skies(상호 항공정찰) 구상 개발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5년 제네바 정상회담에도 아이젠하워와 동행했다.

그러니까

“록펠러 가문이 아이젠하워 행정부와 관계가 없었다” → 틀림

이고,

“넬슨 록펠러가 아이젠하워를 뒤에서 조종했다” → 그렇게 단정할 증거 없음

이야. 정확히는 넬슨 록펠러 개인이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상당히 높은 위치에서 국내정책과 외교정책 모두에 관여했다고 보는 게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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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록펠러

In 1952 President-Elect Dwight D. Eisenhower asked Rockefeller to Chair the President's Advisory Committee on Government Organization to recommend ways of improving efficiency and effectiveness of the executive branch of the federal government. Rockefeller recommended thirteen reorganization plans, all of which were implemented. The plans implemented organizational changes in the Department of Defense, the Office of Defense Mobilization and the Department of Agriculture. His recommendations also led to the creation of the Department of Health, Education and Welfare. Rockefeller was appointed Under-Secretary of this new department in 1953. Rockefeller was active in HEW's legislative program and implemented measures that added ten million people under the Social Security program.[19]

In 1954 he was appointed Special Assistant to the President for Foreign Affairs (sometimes referred to as Special Assistant to the President for Psychological Warfare). He was tasked with providing the President with advice and assistance in developing programs by which the various departments of the government could counter Soviet foreign policy challenges. As part of this responsibility he was named as the President's representative on the Operations Coordinating Board, a committee of the National Security Council. The other members were the Undersecretary of State, the Deputy Secretary of Defense, the director of the Foreign Operations Administration, and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director. The OCB's purpose was to oversee coordinated execution of security policy and plans, including clandestine operations.[20]

Rockefeller broadly interpreted his directive and became an advocate for foreign economic aid as indispensable to national security. Most of Rockefeller's initiatives were blocked by Secretary of State John Foster Dulles and his Under Secretary, Herbert Hoover Jr., both traditionalists who resented what they perceived as outside interference from Rockefeller,[21] and by Treasury Secretary George M. Humphrey for financial reasons.[22] However, in June 1955 Rockefeller convened a week-long meeting of experts from various disciplines to assess the U.S. position in the psychological aspects of the Cold War and develop proposals that could give the U.S. the initiative at the upcoming Summit Conference in Geneva. The meeting was held at the Marine Corps school at Quantico, Virginia, and became known as the Quantico Study. The Quantico panel developed a proposal called "open skies" wherein the U.S. and the Soviet Union would exchange blueprints of military installations and agree to mutual aerial reconnaissance. Thus military buildups would be revealed and the danger of surprise attacks minimized. It was a counter proposal to the Soviet proposal of universal disarmament. The feeling was that the Soviets could not refuse the proposal if they were serious about disarmament.[23]

In March 1955 Rockefeller proposed the creation of the Planning Coordination Group, a small high level group that would plan and develop national security operations, both overt and covert.[24] The group consisted of the Undersecretary of State, the Deputy Secretary of Defense, the director the CIA, and Special Assistant Rockefeller as chairman. The group's purpose was to oversee CIA operation and other anti-communist actions. However, State Department officials and CIA Director Allen Dulles refused to cooperate with the group and its initiatives were stymied or ignored.[25] In September Rockefeller recommended the abolishment of the PCG, and in December he resigned as Special Assistant to the President.

Vice President Nelson Rockefeller (right) with Secretary of State Henry Kissinger, January 3, 1975.

In 1956, he created the Special Studies Project, a major seven-panel planning group directed by Henry Kissinger and funded by the Rockefeller Brothers Fund, of which he was then president. It was an ambitious study created to define the central problems and opportunities facing the U.S. in the future, and to clarify national purposes and objectives. The reports were published individually as they were released and were republished together in 1961 as Prospect for America: The Rockefeller Panel Reports.

The Special Studies Project came into national prominence with the early release of its military subpanel's report, whose principal recommendation was a massive military buildup to counter a then-perceived military superiority threat posed by the USSR. The report was released two months after the October 1957 launch of Sputnik, and its recommendations were fully endorsed by Eisenhower in his January 1958 State of the Union address.[26]

This initial contact with Kissinger was to develop into a lifelong relationship; Kissinger was later to be described as his closest intellectual associate. From this period Rockefeller employed Kissinger as a personally funded part-time consultant, principally on foreign policy issues, until the appointment to his staff became full-time in late 1968. In 1969, when Kissinger entered Richard Nixon's administration, Rockefeller paid him $50,000 as a severance payment





윈드롭 올드리치 영국대사

In 1953, he became US Ambassador to the UK under President Dwight D. Eisenhower, and he remained in London until 1957. He belonged to and served on the boards of many charitable organizations.

 


 

 

조지 H. W. 부시의 아버지 프레스콧 부시는 아이젠하워 시대의 현역 상원의원

Prescott Bush는 금융계 출신이었고 Brown Brothers Harriman의 파트너였다.

이게 중요한 이유가 있어.

Prescott Bush는 1952년 코네티컷주 연방상원의원에 당선돼 1963년까지 재임했어. 즉 아이젠하워 대통령 재임기 거의 전체에 걸쳐 공화당 상원의원이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도 아이젠하워 계열에 가까웠다. 태프트식 고립주의보다는 국제주의적 동부 공화당 establishment에 속하는 인물이었어.

그래서 인맥 구조를 보면 꽤 흥미롭지.

Brown Brothers Harriman / Wall Street
→ Prescott Bush
→ 공화당 동부 국제주의 세력
→ Eisenhower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Rockefeller 가문
→ Nelson Rockefeller
→ Eisenhower 행정부 HEW 차관
→ 대통령 외교특별보좌관

이라는 연결이 동시에 존재해.

 

 


존 포스터 덜레스는 공화당 아이젠하워 정부 시절 국무부 장관을 역임했는데, 
록펠러재단 이사장(1935-1952)을 지냈다. 그의 동생이 'CIA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런 덜레스이다. 앨런 덜레스는 데이비드 록펠러의 친구로, 1950년대 CIA에서 여러 공작들을 함께 했으며, 박정희가 일으킨 5.16 쿠데타의 배후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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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펠러 2세 또한 국제연맹에 활발하게 참여한다.

 

그리고 이 국제연맹을 계승한 유엔(국제연합)의 본부는 뉴욕에 있는데, 바로 록펠러 2세가 기증한 땅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러니 UN과 로스차일드, 록펠러의 연관성은 땔래야 떌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샌프란시스코 유엔회의에 참가한 미국 대표단에는 CFR 회원이 47명이나 있었는데, 여기서 '수석 자문' 역할을 한 사람이 록펠러 가문의 친구 존 포스터 덜레스였다. "엄청난 성취에 고무된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에 그를 국무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이를 이전까지 대통령의 권한으로 여겨져 온 외교정책을 스스로 주도하라는 명령으로 간주했다."고 <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논평했다.

 

 


NEED는 아이젠하워가 honorary chairman

록펠러계로 전향한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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