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수에즈 위기가 시사하는 것: 빅터 로스차일드는 친정인 영국과 이스라엘 대신 미국과 소련을 택해 세계의 균형축을 맞췄다 / 이 사건은 미국이 이스라엘의 사주를 받아 움직인다는 유태자본 음모론이 얼마나 개소리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수에즈 위기는 1967년이 아니라 1956년이야. 이스라엘·영국·프랑스가 이집트를 공격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강력한 압력으로 철수했다. 영·프군은 1956년 말, 이스라엘군은 버티다가 1957년 3월까지 시나이·가자에서 철수했다.
미국의 목적은 단순히 “이집트를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냉전 전략상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의 침공이 미국에 오히려 손해라고 판단한 거야.
가장 중요한 이유는 아랍권을 소련에 넘겨주지 않는 것이었다. 나세르는 이미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한 소련권 무기 도입 등으로 모스크바와 가까워지고 있었어. 그런데 미국이 영·프의 식민주의적 군사개입을 지지하면 이집트뿐 아니라 사우디·이라크·시리아 등 아랍 세계 전체에서 **“서방 = 식민제국”**이라는 인식이 강화되고 소련이 반식민주의의 후원자로 등장할 수 있었다. 미 국무부의 공식 역사도 이 점을 핵심 이유로 든다.
또 하나는 헝가리 사태였어. 하필 거의 같은 시기에 소련군이 헝가리 혁명을 무력 진압하고 있었다. 미국은 “강대국이 작은 나라를 군사력으로 침공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소련을 맹비난하면서, 동시에 영국·프랑스가 이집트를 침공하는 것은 묵인할 수 없었어. 그러면 미국의 반소 선전 자체가 위선으로 보이게 되니까.
그리고 아이젠하워에게는 동맹국이 미국 몰래 전쟁을 벌였다는 것 자체도 큰 문제였어.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비밀리에 세브르 협정을 맺었다. 계획은 대략
이스라엘이 시나이 침공 → 영·프가 양측에 운하에서 물러나라는 최후통첩 → 이집트가 거부 → 영·프가 ‘운하 보호’를 명분으로 개입
이라는 짜고 치는 구조였어. 미국은 사전에 이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입장에서는 NATO 핵심 동맹인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몰래 중동에서 전쟁을 시작해 미국을 소련과의 대결 위험에 끌어들이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웠지. 실제로 미국 정부는 소련이 이집트를 지원하기 위해 직접 개입할 가능성까지 우려했다.
그래서 미국은 말로만 반대한 게 아니야. 특히 영국에 엄청난 금융 압박을 가했다. 당시 파운드화가 공격받고 영국의 외환보유액이 빠르게 줄어들었는데, 미국은 IMF 지원 등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압박했다. 경제적으로 취약했던 영국은 미국의 지원 없이는 버티기 어려웠고 결국 휴전에 동의했다.
이스라엘에도 아이젠하워는 상당히 강경했어. 1956년 11월 벤구리온에게 직접 서한을 보내 UN 결의에 따라 이집트 영토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불응하면 미·이스라엘 관계가 손상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스라엘이 계속 버티자 결국 미국의 압력으로 1957년 3월 철수했다.
여기서 중요한 역설이 하나 있어.
아이젠하워는 나세르를 좋아해서 구해준 게 아니야.
오히려 수에즈 사태가 끝난 뒤 미국은 영국·프랑스가 약화되면서 생긴 중동의 권력 공백을 미국 자신이 차지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바로 1957년 아이젠하워 독트린으로 이어진다. 미국은 중동 국가에 경제·군사원조를 제공하고 필요하면 미군까지 투입해 소련의 영향력 확대를 막겠다는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아주 냉정하게 요약하면:
영국·프랑스: “나세르를 제거하고 수에즈 운하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자.”
이스라엘: “시나이의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티란해협 봉쇄를 제거하자.”
미국: “너희가 이렇게 하면 아랍 세계를 소련에게 선물하는 꼴이다. 그리고 중동 질서를 결정하는 주도권은 이제 영·프가 아니라 미국에 있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수에즈 위기는 영국·프랑스가 더 이상 미국의 뜻을 거슬러 독자적으로 세계적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 됐어. 특히 영국에는 제국의 시대가 끝났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고, 이후 중동에서 서방의 중심축도 런던·파리 → 워싱턴으로 급격히 이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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