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기자본과 로버트 맥나마라가 일부러 미국 자동차 시장을 말아먹고 일본 자동차 시장을 키워주었다는 식의 음모론을 펼친 인드라의 엉터리같은 분석 / 실제로 맥나마라의 포드시절은 대성공이었고, 사장 취임 후 한달만에 바로 퇴임하고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 / 또한 포드사가 위기를 겪게 되는건 맥나마라 퇴임 후 10여년이 훨씬 더 지난 1970년대의 일 / 그리고 포드사 경영 실패는 헨리 포드 2세의 책임이 크다
헨리 포드 2세의 전성기는 아메리칸 머슬카의
전성기와 거의 일치한다. 상술한 머스탱의 대성공도 머슬카 시장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었고 1950~1960년대 부유하고 풍요로운
미국 중산층의 삶은 곧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1973년 1차 석유파동, 1979년 2차 석유파동을 거치며
미국 소비자들도 기름 먹는 하마인 머슬카보다는 좀 더 연비에 신경 쓴 차량을 원하게 된다. 포드도 해외에서 포드 유럽지사의
개발에 노력을 경주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970년대는 포드뿐만 아니라 미국차 전체가 주춤하는 동안 독일차와
일본차가 약진하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포드 컴퍼니에서 평생을 바쳐 헌신해 오며, 포드 머스탱, 링컨 컨티넨탈 마크 III, 포드
에스코트 등을 개발해 온 핵심 인재인 리 아이어코카와 의견충돌을 빚었고[3] 포드 핀토가 인명까지 경시하는 수준의 단가절감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연달아 벌어지며 잘 팔리지 않자 결국 1978년 7월 13일에 그를 해고했다. 그리고 아이아코카는 헨리 포드 2세 사후인 1980년대에 포드의 숙적이자 당시 파산위기에 있던 크라이슬러로 옮겨 포드 모터 컴퍼니에게 화끈하게 복수한다.
헨리 포드 2세는 계속되는 실적부진과 고령 등을 이유로 1979년에는 포드 컴퍼니의 CEO에서 물러나고 이듬해인 1980년에는 회장[4]직에서도 물러나 완전히 은퇴한다. CEO 및 회장 자리는 조카[5]인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1957 ~ )가 물려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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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아코카는 연비가 개선된 소형 일본차, 특히 혼다의 소형 엔진을 채용한 모델을 선보이자는 전략을 세웠지만 헨리 포드 2세는 이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때 포드에서 구상하고 있었던 미니밴 프로젝트 미니맥스도 기존 스테이션 왜건의 판매량을 깎아먹을 것이라는 이유로 개발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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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전역한 맥나마라는 처음에는 하버드 대학으로 돌아가 연구활동을 하려 했으나, 친구의 권유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인하여 포드에 입사하였다. 그 당시 포드의 고위관리자 1000명 중 대졸자는 10명에 불과하였으므로, 포드는 지식을 갖춘 전문 경영인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육군에서 만난 텍스 손튼이 주도한 10명의 통계분석팀의 일원으로 포드에 입사 원서를 냈고 시험[5]을 거쳤다. 맥나마라의 증언에 의하면 이 10명의 일원들은 역대 최고점수를 기록하였다고 한다. 헨리 포드 2세는 이들 전원을 채용했다.
그리고 맥나마라는 업계에서 침체에 빠져 있던 포드를 구시대적인 기업 구조 차원에서부터 싹 뜯어고치기 시작했고, 그 개혁은 성공하여 이들은 Whiz Kids로 불렸다. 또한 마케팅 면에서도 개혁을 일으켰는데, 1950년대에 주력으로 삼았지만 쓸데없이 부담스러운 포드 링컨 시리즈나 에드셀 대신 작지만 생산비가 저렴하여 가격 경쟁에 유리한 포드 팰컨 세단[6]을 히트작으로 키워냈고, 링컨 컨티넨탈은 1960년대를 대표하는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이렇게 포드의 중흥을 이끈 맥나마라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1960년 11월에는 44세의 나이에 포드 가문 外 인사로는 최초로 사장까지 올랐으나, 사장 취임 한 달 만에 미국 국방장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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