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물질적 요소 대 정신적 요소의 비율은 1 대 3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는 전시작전통제권의 환수를 찬성하지만, ‘소위 좌파’ 정부에서의 환수에는 반대한다. “전쟁에서 물질적 요소 대 정신적 요소의 비율은 1 대 3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역사적 사례들은 무기와 물자가 아무리 훌륭해도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에 대한 확신과 집단적인 항전 의지가 부족하면, 그 압도적인 무기들이 순식간에 적의 전리품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혹은 전쟁터에서 버티게 만드는 정신력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나라와 가치를 지키겠다는 “애국심과 명분”, 적을 향한 “적개심”, 곁에 있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 “전우애”, 그리고 지휘관과 국가에 대한 “신뢰”가 촘촘히 조화를 이루어 완성되는 거대한 결속력이다. 정신력 결속력을 만드는 내용을 질문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왜 싸우는가?”, “누구와 싸우는가?”, “누구와 함께 싸우는가?”, “누구의 지휘를 받는가?”, “이길 수 있는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이 다섯 가지 질문에 주저함이 없이 분명한 답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소위 좌파’ 정권하에서는 대한민국이 전쟁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본다. ‘소위 좌파’ 정권은 이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주적이 없는 군대가 되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국무위원 가운데 몇 명은 북한을 주적이 아니라고 한다. 북한은 대한민국을 파멸하려고 남침 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일 뿐만 아니라, 엄연히 핵 위협을 하는 상황인데도 그런 북한을 주적이라 부르지 못한다. ‘소위 좌파’ 정권에서는 북핵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고, 미국과 북한의 문제로 보거나, 심지어는 대통령이 나서서 북핵을 눈감아주거나 감싸주려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나는 지난 5년 동안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측의 입장을 가지고 미국하고 싸워왔고, 국제무대에서 북측의 입장을 변호해 왔다.”고 했으며,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헌법으로부터 “전쟁을 선포하고 강화를 맺을”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고, 군 통수권자의 자격을 가진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발언이다. 주적의 무기 개발을 눈감아주고, 변호해주고, 오판할 뿐만 아니라, 주적을 주적이라고 말도 못 하는 판에 전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소위 좌파’들은 북한을 따르거나, 변호하는 데 열심이면서, 북한을 주적이라 부르지 못한다. 현 정권의 국방부 장관이 방위 출신에다가 탈영 의혹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병적 기록을 공개하지도 못한다. 명예와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친 지도자가 되었다. 치졸하고 안쓰러운 형상이 되었는데,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따를 수 있겠는가? 어떤 병사가 자신만도 못해 보이는 이런 한심한 리더의 명령을 목숨 바쳐 따르겠는가. 이런 종류의 리더가 병사들을 통솔하여, 전쟁에서 이긴 사례는 인류 역사에 단 하나도 없다. 이런 국방부 장관이 “국가를 보위”하는 사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가? “국가 보위”나 명예로운 리더십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가 아니고서야 이런 정도의 사람을 국방부 장관에 둘 수는 없다. ‘소위 좌파’들은 이런 국방부 장관을 둔 대통령을 절대 지지한다. 전쟁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증명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소위 좌파’ 리더들이 “싸우지 않는 상태” 그 자체를 평화로 착각하는 맹목적 평화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소위 좌파’들은 맹목적 평화주의에 길들어진 나머지, 안보 위기 때마다 도발을 감행한 상대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고, 억지력을 강화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와 한미 동맹에 긴장 조성의 책임을 돌리는 역전된 논리마저 버젓이 유통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강(自强)의 의지와 압도적인 무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 상대의 “선의에 구걸”하는 유화에 불과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소위 좌파’들은 혹시 겁을 먹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맹목적 평화주의에 빠져 있다. 그간 ‘소위 좌파’ 정부에서는 ‘평화’라는 미명 하에 국가 안보의 보루인 군의 무형 전력과 대적관을 지속적으로 약화시켰다. 한미연합군사훈련의 축소 및 유예로 실전적 연합 대비 태세의 이빨을 빼놓는가 하면, 군 정신전력 교육 교재에서 조차 주적 명시를 유보하거나 삭제하며 군 고유의 야성과 대적 경계심을 크게 희석시켰다. 이러한 기강 해체의 정점은 자국 안보의 사상적 기반마저 흔드는 상식 밖의 사건들로 나타난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운영하는 국방부 산하 전쟁기념사업회가 초·중·고 교사 대상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중국의 항미원조(抗美援朝)기념관 탐방 일정을 추진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항미원조기념관이 어떤 곳인가. 6·25전쟁의 불법 남침을 부정하고, 중공군의 참전을 미국에 맞서 북한을 도운 정당한 전쟁으로 미화하며 대한민국을 침략한 역사 왜곡의 최전선이다. 자라나는 세대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침략자의 6·25관과 왜곡된 주장을 견학시키려 했던 이 충격적인 시도는, 대한민국 안보 기관의 정체성과 역사관이 얼마나 심각하게 오염되고 변질하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평화라는 낭만적 환상에 매몰되어 침략자의 논리까지 받아들이는 이러한 행위는 군의 무형 전력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가장 위험한 자해 행위다. 이런 자해 행위를, 다른 곳도 아니고, 바로 국가 보위를 책임지는 국방부에서 하고 있다. 이들에게 대한민국을 보위하겠다는 의지가 있어 보이는가. 군을 약화시키려는 ‘소위 좌파’ 정권의 가장 치명적인 결과는 군의 뿌리이자 미래 전력의 핵심인 장교 양성 기관마저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시도로 드러난다. 최근 강행되고 있는 육·해·공군 3군 사관학교 통폐합 논의가 대표적이다. 학령인구 감소나 합동성 강화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정치적 유불리에 따른 군 약화시키기와 육성 기관의 힘 빼기에 불과하다. 사관학교 통폐합은 단순한 행정 구조 개편이 아니라 군 고유의 전문성과 정체성을 내부에서부터 파괴하는 위험한 안보 자해 행위다. 특히, 군인 사기의 핵심인 “전통”과 “명예심의 뿌리”를 모두 지워버리겠다는 자해적 시도이다. 제복 입은 영웅을 키워내는 요람을 해체하고 장교들의 사기와 자부심을 꺾는 행위는 결국 대한민국 안보 전선을 완전히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소위 좌파’들은 지속적으로 군의 야성을 꺾고, 약화시켜왔다. 이처럼 ‘소위 좌파’ 정권은 전쟁을 감당할 야성에 관심도 없고, 오히려 맹목적 평화주의에 갇혀 야성을 없애버리려 해왔다. ‘소위 좌파’ 정권은 전쟁을 감당할 의사도 없고, 능력도 없어 보인다. 6.25에 대하여 침략자의 관점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는 국방부인데, “국가 보위”에 무슨 관심이나 있겠는가. 이는 돌출적인 일이 아니다. ‘소위 좌파’들은 반미, 친중, 종북, 반-대한민국 이상이 아니다. ‘소위 좌파’들의 적대감은 침략자들을 향해서는 이미 사라졌고, 어찌된 일인지 오히려 친밀감을 보이려고 비굴할 정도로 안달이다. 오랫동안 봐오지 않았는가. 대한민국의 건국 세력과 산업화 세력에게 보이는 ‘소위 좌파’들의 적대감은 침략자들을 향한 적대감보다 훨씬 크다. ‘소위 좌파’들이 동맹국인 미국에 보이는 적대감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전시작전통제권”에서 악센트를 “전시”에 두고 읽는다면, ‘소위 좌파’ 정권이 전쟁을 감당할 의사와 능력이 없고, 군을 계속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적대감을 침략자보다는 동맹국에 더 맹렬하게 표출하는 것을 볼 때,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나는, 전쟁이 났을 경우에, ‘소위 좌파’ 정권에서, 전시의 작전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과 동맹을 위해서 통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기 매우 어렵다. ************************** 아래는 정신적 자산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함을 증명하는 역사적 사례들이다. 위의 글의 논거로 삼기 위해 자료 삼아서 정리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남베트남군의 공군력은 보유 수량 기준으로 세계 4위 수준이었고, 군수물자 역시 북베트남 및 베트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풍족했다. 그러나 남베트남 정권 내부의 심각한 부패, 리더십 상실, 지휘관들의 무능으로 인해 군대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미군의 공중 지원이 끊기자마자 지휘관들이 가장 먼저 도주했고, 군인들은 "우리가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명분을 잃었다. 그 결과 1975년 북베트남의 대공세 때, 압도적인 무기를 보유하고도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궤멸당하고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마찬가지로 송나라는 경제력과 인구에서 금나라를 압도했으나, 정신력과 국방 의지가 약해서 패망하였다. 당시 송나라는 세계 최고의 경제력과 문화를 자랑하던 거대 제국이었다. 인구, 화약 무기 기술, 재정 규모 모두 유목민 부족 국가였던 여진족의 금나라보다 훨씬 앞섰다. 그러나 송나라 조정은 문치주의에만 빠져 군사를 무시했고, 상층부는 평화 타성에 젖어 “돈으로 평화를 사면 된다”는 안일한 의식에 지배당했다. 군대는 싸울 의지를 잃었고, 침략이 시작되자 지도층은 지레 겁을 먹고 혼란에 빠졌다. 결과적으로 수도 개봉이 허무하게 함락되며 황제(휘종, 흠종)가 포로로 잡혀가는 치욕적인 정강의 변을 겪었다. 이 사례들이 던지는 경고는 명확하다. 최첨단 첨단 무기와 풍족한 물자는 승리의 필요조건일 수는 있어도 결코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무기를 쥐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결국 '사람'이며, 그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지, 명분, 그리고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철로 만든 전차라 한들, 내부에서 정신적 결속이 무너진 군대에게는 그저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반대로 눈앞의 물자와 무기에서는 압도적으로 열세였지만, 불굴의 항전 의지와 독창적인 전략으로 기적 같은 승리를 일궈낸 역사적 사례들도 수없이 존재한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에 놓였던 1597년 명량해전이 대표적이다. 원균의 칠천량 패배로 수군이 사실상 괴멸된 상태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남은 것은 단 13척의 판옥선뿐이었다. 133척이 넘는 왜군의 대함대 앞이라는 절대적 절망 속에서도,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군대의 사기를 결집했다. 그리고 울돌목의 험한 조류와 지형을 활용해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적선을 괴멸시키며 남해의 제해권을 되찾아왔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 중심의 그리스 연합군은 시가지가 불타고 수도를 빼앗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자유와 조국 수호라는 강렬한 열망으로 뭉쳤다. 그리스군은 약 370여 척의 함선으로 1,000여 척에 달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유인해 격파함으로써 서양 문명의 기틀을 지켜냈다. 근현대사에서도 1939년 핀란드가 소련에 맞서 싸운 겨울전쟁이라는 신화가 있다. 전차 6,500대와 100만 대군을 앞세운 거대한 붉은 군대에 맞서, 전차 30여 대뿐이던 소국 핀란드는 특유의 불굴의 정신인 시수(Sisu)로 전 국민이 단결했다. 스키를 탄 위장 유격대와 화염병 하나로 소련 전차를 부수며 3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안긴 끝에 결국 국가의 독립을 지켜냈다.
이스라엘다윗과 골리앗
불리해도.월스트리트.
개구리 don’t give up
반대사레미국 gdp
일본 근성론 츠지 마사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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