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와 카사노바 비교 / 카사노바의 비극: 젊었을 때는 그의 춤과 우아함에 사람들이 감탄했는데 Dux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3. 사드와 카사노바를 비교하면

둘 다 18세기의 유명한 libertine이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다른 유형이야.


사드카사노바
출생17401725
신분프랑스 고위 귀족베네치아 출신 모험가
성생활의 이미지금기·권력·폭력·극단유혹·연애·모험
여성과의 관계성적 대상화가 극단적연애와 개인적 매혹을 중시
남성과의 성행위실제 기록 있음성적 경계가 유동적인 에피소드 존재
감옥생애 약 27년 감금유명한 베네치아 감옥 탈출
대표작《120일》, 《Justine》, 《Juliette》《내 생애의 이야기》
노년Charenton 수용Dux 성의 사서
사망1814, 74세1798, 73세

가장 큰 차이는 카사노바에게 섹스는 인간관계와 인생의 모험이고, 사드에게 섹스는 인간과 사회를 해부하는 철학적 실험도구가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카사노바의 회고록을 읽으면 도시, 음식, 도박, 여행, 돈, 지식인, 귀족, 여자, 사기, 탈출 같은 18세기 유럽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 강해.

사드는 반대로 세계를 점점 폐쇄해버려.

성 → 방 → 성(城) → 감옥 → 규칙 → 신체 → 욕망

으로 압축시켜서 인간을 극한상태에 넣지.


4. 카사노바의 말년도 생각보다 행복하지 않았다

1785년, 60세가 된 카사노바는 보헤미아의 Dux 성에서 Waldstein 백작의 사서가 됐어. 연봉도 있었고 먹고살 걱정도 해결됐으며 거대한 귀족 저택에서 생활했으니 물질적으로 처참한 말년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위대한 회고록 Histoire de ma vie를 집필한다.

그런데 정신적으로는 꽤 비참했어.

젊었을 때 유럽의 왕족·귀족·예술가·지식인들과 어울리고 파리, 베네치아, 런던, 빈,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을 돌아다니던 사람이 이제 보헤미아 지방의 성에 틀어박힌 노인이 된 거니까.

게다가 성의 하인들이 그를 별로 존중하지 않았어.

카사노바가 남긴 불평을 보면 거의 코미디야.

커피를 제대로 안 만든다.
마카로니를 제대로 요리하지 않는다.
개가 밤에 짖는다.
나를 작은 식탁에 앉힌다.
귀빈에게 나를 소개하지 않는다.
마부가 나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하지 않는다.

이런 것까지 화냈어.

한때 유럽을 휘젓던 사람이 지방 성에서 “왜 하인이 나에게 제대로 인사를 안 하지?” 하면서 분노하는 노인이 된 셈이야.

그는 우울감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글을 하루 10~12시간씩 쓰면서 ‘검은 우울’에 삼켜지는 것을 막았다는 자신의 설명도 전해진다.

하지만 바로 그 고독 덕분에 《내 생애의 이야기》가 탄생했어.

1798년 6월 4일, 73세로 Dux에서 사망했다.


5. 그렇다면 사드의 말년은 불행했나?

나는 “불행했지만, Charenton 시절 전체가 비참했던 것은 아니다”가 가장 정확하다고 봐.

1803년부터 1814년까지 그는 자유인이 아니었어. 재판을 통한 정상적인 형벌도 아니라 나폴레옹 정권이 위험한 외설작가라고 보고 사실상 행정적으로 가둬놓은 상태였지. 사드처럼 자유와 자의성을 중시하는 인간에게 이것 자체가 엄청난 불행이야. BnF도 그의 마지막 감금이 Justine, Juliette 등의 출판 때문에 이루어졌다고 정리한다.

그런데 감옥 안의 생활조건만 보면 의외로 괜찮았어.

Charenton에서 사드는 좋은 방과 작은 서재를 사용했고, 창밖으로 녹지와 Marne 방향을 볼 수 있었으며 공원을 자유롭게 산책했다. 사람들을 자기 방에 초대하거나 다른 환자를 방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원장 Abbé de Coulmier가 사드를 상당히 보호했어.

사드는 여기서 평생 좋아했던 연극을 본격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약 200석짜리 극장이 생기고 환자와 전문배우들이 함께 공연했으며, 파리 상류층이 구경하러 올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건 사드에게 상당히 중요했어. 젊었을 때부터 그는 사실 소설가만큼이나 극작가로 성공하고 싶어 했던 사람이거든.

그리고 오랜 동반자 Marie-Constance Quesnet도 계속 곁에 있었다. 그녀는 자유롭게 Charenton을 드나들었고 사실상 함께 거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1800년대 중반의 사드만 떼어놓으면 상당히 기묘해.

국가에 의해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데 → 좋은 개인실이 있고 → 애인이 곁에 있고 → 책을 읽고 글을 쓰고 → 극단을 운영하고 → 파리 상류층이 자기 공연을 보러 온다.

심지어 그는 여기서도 계속 장편을 썼어.

그래서 1803~1808/10년 무렵은 사드의 전체 감금생활 가운데 상당히 견딜 만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어.

하지만 마지막 몇 년은 다시 나빠진다.

의사 Royer-Collard가 사드의 특혜와 연극치료를 강하게 비판했고, 정부의 압력이 커졌어. 1810년에는 종이와 펜을 빼앗고 독방에 두라는 명령까지 내려졌고, Coulmier가 일부 특혜를 다시 회복시켜주기는 했다. 결국 1813년 연극공연이 공식적으로 금지된다.

사드는 이미 70대였고 극도로 비만했으며 건강도 악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1814년 12월 2일 죽었어.


그래서 사드와 카사노바의 최후를 비교하면 묘하다

카사노바는 자유인이었지만 자신의 말년을 일종의 감옥처럼 느꼈고,
사드는 실제 수용자였지만 그 안에서 작은 문화적 왕국을 만들어냈다.

카사노바는 Dux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기 인생 최고의 작품을 썼고, 사드는 Charenton에서 연극을 만들고 글을 쓰며 자기 주변에 작은 사회를 구축했어.

둘 다 젊은 시절의 자유분방한 성생활과 모험은 끝났지만 창작욕은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고.

그래서 사드의 말년 전체를 “정신병원에서 비참하게 죽었다”고 요약하는 건 상당히 왜곡이라고 봐. 반대로 “나름 행복하게 잘 살았다”도 지나쳐.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유를 박탈당했다는 근본적인 불행 속에서, Coulmier의 보호 아래 연극·집필·동반자 관계를 통해 상당한 자율성과 사회적 역할을 되찾았고, 마지막 몇 년에는 그마저 다시 축소된 노년이었어.

어쩌면 사드 인생 전체를 생각하면 꽤 역설적인 결말이야. 평생 사회가 자신을 통제하는 것에 저항했던 사람이 결국 사회가 만든 폐쇄시설 안에서, 그 시설의 극작가·연출가라는 역할을 얻어 마지막 전성기 비슷한 것을 한 번 더 경험하고 죽었으니까.

아, 네 질문은 “카사노바가 왜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남의 성에서 월급 받는 사서가 될 수밖에 없었느냐”였지. 그 부분부터 정확히 답할게.

카사노바는 왜 돈이 없어졌나?

핵심은 평생 안정적인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카사노바는 귀족처럼 살았지만 원래 귀족 대지주가 아니었어. 배우 집안 출신이었고, 그의 화려한 생활은 토지에서 매년 임대료가 들어오는 사드 같은 세습 귀족의 경제구조와 달랐어.

젊고 중년일 때는 도박, 금융사업, 복권사업, 후원자, 외교·정보활동, 각종 프로젝트를 통해 돈을 벌었고 때로는 상당한 돈을 손에 넣었지만, 동시에 도박·여행·좋은 옷·숙박·음식·여성·사교생활에 엄청나게 소비했어. 한마디로 고소득과 고소비가 반복됐지만 자산을 만들어놓지 않은 사람에 가까웠지.

더 결정적인 문제는 인맥이 곧 그의 자본이었다는 것이야.

젊은 카사노바에게는 “어느 도시로 가도 나를 받아줄 귀족·부자·외교관이 있다”는 네트워크가 있었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후원자들이 죽고 세대가 바뀌고, 자신도 여러 나라에서 문제를 일으켜 추방당하면서 선택지가 계속 줄어들었어. 현대 연구자 Leo Damrosch도 그가 영국·독일·러시아·스페인 등 여러 곳에서 사실상 쫓겨나거나 떠나야 했고, 1785년 베네치아에 돌아온 뒤에도 다시 문제를 일으켜 떠나야 했다고 설명한다.

특히 베네치아가 치명적이었어. 카사노바는 원래 1756년 베네치아의 Piombi 감옥에서 탈출한 뒤 추방생활을 했지만 훗날 귀국을 허가받았어. 그런데 귀국 후 다시 정치·사회적 분쟁에 휘말렸고 풍자문을 써서 유력 귀족을 공격하면서 1783년 다시 베네치아를 떠나야 했다.

그러니까 50대 후반의 카사노바에게는

세습재산 없음 + 저축 거의 없음 + 수입 불안정 + 막대한 소비습관 + 늙어감 + 과거 후원자들의 사망 + 여러 지역에서 평판 악화 + 베네치아에서도 다시 떠남

이 한꺼번에 온 거야.

그 상태에서 빈으로 갔다가 Joseph Karl von Waldstein 백작을 만났고, Waldstein이 보헤미아 Dux 성의 도서관장 자리를 제안했어. 실질적으로는 일이 많지 않은 sinecure(명예직에 가까운 자리)였어.

카사노바 입장에서는 엄청난 타협이었지만 동시에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어.

고정수입 + 무료에 가까운 좋은 거처 + 식사 + 대형 도서관 + 귀족 후원자 + 마음껏 글 쓸 시간.

실제로 카사노바 자신도 Dux에서 이전까지 자신에게 없었던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수입, 편안한 거처, 평온, 큰 도서관”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건 Dux에 가서 가난해진 게 아니라, 이미 경제적으로 막다른 곳에 몰렸기 때문에 Dux로 간 것이야.

그리고 그 생활이 싫어서 몇 번 떠나려고 했는데도 계속 돌아왔다. 이유 역시 Waldstein 밑에 있으면 경제적으로 안정됐기 때문이라고 Dux 자료가 설명한다. 그의 봉급은 빚을 갚으면서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러니 젊은 카사노바의 화려함은 우리가 생각하는 “부자가 돈을 쓰는 삶”이라기보다 “엄청난 사회적 능력으로 계속 다음 돈과 다음 후원자를 만들어내는 삶”이었어. 그 능력의 시장가치가 노화와 함께 무너지자 자산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난 거지.


나폴레옹은 자유주의자였는데 왜 사드를 싫어했을까?

여기서는 “나폴레옹 = 자유주의의 전도사”를 조금 분해해야 해.

나폴레옹은 분명히 프랑스혁명의 특정 자유주의적 성과를 유럽에 확산시킨 사람이야.

법 앞의 평등, 봉건적 특권의 폐지, 종교적 관용, 능력주의적 관료제, 재산권, 법전의 통일 같은 측면에서는 엄청난 근대화의 전파자였지.

하지만 표현의 자유·언론의 자유·정치적 자유까지 최대화하려는 고전적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어.

오히려 집권하면서 언론과 출판을 강하게 통제했다. 나폴레옹 체제는 정치적 저술뿐 아니라 문학까지 검열했고, 1810년에는 내무부 산하에 출판·서적 검열기관(Direction Générale de l’Imprimerie et de la Librairie)까지 설치했다. 정권이나 제도에 관한 공개적 비판 역시 강하게 억제했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식 자유주의는 대략

법 앞에서 평등한 개인 + 재산권 + 세습특권 철폐 + 능력주의 + 종교적 관용
BUT 강력한 국가 + 사회질서 + 가족질서 + 검열 + 권위

라는 조합이야.

여기에 사드를 집어넣으면 충돌할 수밖에 없어.

사드는 단순히 “성적으로 자유롭게 살자” 정도가 아니잖아.

《Justine》《Juliette》에서 밀어붙이는 것은

무신론 → 기독교 도덕의 파괴 → 결혼·가족질서 조롱 → 성적 금기의 전면적 부정 → 범죄와 살인의 철학적 정당화 → 강자가 약자를 이용하는 것을 자연의 논리로 설명

하는 수준이야. 특히 《Juliette》에서는 악덕을 행하는 주인공이 계속 성공하고, 반대로 덕을 지키는 Justine은 계속 파괴된다. BnF도 바로 이 대비를 작품의 핵심으로 설명한다.

이건 나폴레옹이 원하는 혁명 이후의 새로운 질서와 정반대야.

나폴레옹은 구체제를 파괴한 혁명의 성과를 법전과 국가제도로 고정하여 사회를 다시 안정시키려는 사람이었고, 사드는 혁명이든 왕정이든 그 밑에 존재하는 도덕 자체를 끝까지 폭파시키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둘을 재미있게 표현하면:

나폴레옹:
“구체제의 낡은 제약에서 인간을 해방시킨 다음 새로운 합리적 질서를 만들자.”

사드:
“그런데 왜 거기서 멈추지? 신도 없고 자연에 도덕도 없다면 왜 욕망 자체를 제한해야 하지?”

나폴레옹 입장에서는 후자가 자유의 완성이 아니라 사회해체로 보였을 가능성이 매우 커.

실제로 그의 정권은 사드를 그냥 비평한 정도가 아니었어. 1801년 사드는 다시 체포됐고 이후 죽을 때까지 자유를 되찾지 못했다. BnF 자료는 나폴레옹이 재판 대신 사드를 정신이상자로 취급하여 종신 수용하게 했다고까지 요약한다.

그래서 만약 나폴레옹이 실제로 《Justine》이나 《Juliette》 일부를 직접 읽었다면, 나는 마음에 들었을 가능성보다 강한 혐오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봐.

다만 흥미로운 점은 둘에게 공통점도 있다는 거야. 둘 다 계몽주의·혁명 이후의 세계에서 태어난 극단적인 개인주의적 인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 개인의 해방은 결국 국가와 법의 질서 안으로 들어가야 했고, 사드는 그 마지막 울타리마저 “왜?”라고 묻고 부숴버렸어.

그래서 사드는 왕당파보다 오히려 나폴레옹식 근대국가에도 위험한 인간이었던 거야.

Waldstein 이 그런 제안을 한 이유는? 그리고 하인들이 막 대해도 Waldstein 에게 처우개선 등을 요구할 수 없었던 이유는? / 나폴레옹의 종교는?

응.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어. Waldstein은 카사노바에게 실제 도서관 노동력이 절실해서 고용한 게 아니야. 거의 ‘후원’에 가까운 명예직을 만들어준 것이야.

Waldstein은 왜 카사노바를 거둬줬나?

Joseph Karl von Waldstein은 상당히 지적 호기심이 강한 귀족이었고, 특히 연금술·카발라·마술·비전학 같은 분야에도 관심이 있었어. 카사노바 역시 이런 분야에 엄청난 지식과 경험담을 가지고 있었고.

Prince de Ligne가 남긴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이야. Waldstein과 카사노바가 베네치아 대사의 식탁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Waldstein이 마술·Agrippa 같은 이야기를 꺼냈고, 카사노바가 자기도 그 분야를 잘 안다고 반응했어. 그러자 Waldstein이 사실상

“그럼 나랑 보헤미아로 갑시다. 나는 내일 떠납니다.”

라고 제안했다고 해. 당시 카사노바는 돈도 여행도 모험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고 제안을 받아들였어.

즉 Waldstein 입장에서 카사노바는 재미있는 인간 그 자체였던 거야.

60년 동안 유럽을 돌아다니며 왕족·귀족·철학자·도박꾼·사기꾼·여성들과 얽힌, 언어와 문학과 철학과 비전학에 박식한 사람이잖아. 실제 전기자료도 Waldstein이 그의 풍부한 지식 때문에 카사노바에게 매력을 느꼈고 곁에 두기 위해 사서로 임명했다고 설명한다.

현대 연구자 Leo Damrosch도 이 자리를 실제 업무가 거의 없는 sinecure, 즉 사실상의 명예직이라고 설명해.

그래서 관계를 현대적으로 비유하면

“내 도서관 관리자가 필요하다” → X

“이 재미있고 박식한 노인을 내 집에 두고 생활을 보장해주자. 직함은 도서관장으로 하자.” → O

에 가까워.


그러면 Waldstein에게 “당신 하인들이 나를 개판으로 대한다”고 말하면 되잖아?

실제로 말했다. 그리고 Waldstein도 상당히 참아줬어.

이게 앞 답변에서 빠진 중요한 부분이야.

하인들이 카사노바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역설적으로 카사노바가 특혜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는 일반 하인이 아니면서 성에 살고, 봉급을 받고, 때로는 자기 요리사도 있었고, 숙식이 제공되고, Waldstein의 마차와 마부도 이용할 수 있었어.

그런데 카사노바는 다른 직원들을 자기보다 아래 계급의 하인으로 취급했어. 반대로 직원들 입장에서는

“저 늙은 외국인은 실제로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백작이 돈 주고 먹여 살리면서 우리한테 귀족 행세한다.”

는 반감이 생긴 거지. 연구자료도 직원들이 그의 특권적 지위를 시기했고 시대착오적인 궁정예법을 경멸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서로 악순환이 생겼어.

카사노바가 하인을 깔봄 → 하인들이 카사노바를 골탕 먹임 → 카사노바 격분 → Waldstein에게 항의 → 하인들이 더 싫어함.

실제로 관리인 Faulkircher와의 갈등은 아주 심했어. 카사노바는 그가 자신을 모욕해서 스스로 Dux를 떠나게 만들려고 한다고 장문의 편지까지 썼어.

그런데 Waldstein에게도 한계가 있었어.

첫째, Waldstein은 Dux에 자주 없었다. 그래서 카사노바가 실제로 매일 부딪치는 사람은 백작이 아니라 집사·요리사·마부 같은 직원들이었어.

둘째, 카사노바의 불평 중에는 실제 모욕도 있었지만 카사노바 자신의 극도로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에서 나온 것도 많았어. Prince de Ligne가 기록한 목록만 해도 커피, 우유, 마카로니, 폴렌타, 개 짖는 소리, 마부, 와인이 늦게 나오는 것, Waldstein이 먼저 아침인사를 하지 않은 것, 도서관 책을 자기에게 말하지 않고 빌려준 것, 마부가 모자를 벗지 않은 것까지 있어.

즉 Waldstein 입장에서는

“직원들이 Casanova를 괴롭힌다”

“Casanova가 또 화났다”

를 매번 구별해야 했던 거야.

그리고 Waldstein은 대체로 카사노바 편을 많이 들어준 편이야. 그래서 카사노바가 그렇게 오래 Dux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있어. 카사노바가 1795년 결국 Dux를 뛰쳐나가 다른 직장을 찾아보는데 아무도 그를 governor, librarian, chamberlain으로 고용하지 않았다. Waldstein은 그 소식을 듣고 카사노바가 결국 돌아올 거라고 웃었다고 한다. 실제로 돌아왔어.

즉 카사노바 자신도 알고 있었던 거야.

“여기가 싫다. 하지만 70세 가까운 나에게 이런 조건으로 먹여 살려줄 사람은 Waldstein밖에 없다.”

그래서 하인들과 죽어라 싸우면서도 Dux를 완전히 떠나지 못했던 거야.


나폴레옹의 종교는?

이건 아주 흥미로워. 공식적으로는 로마 가톨릭교도였어.

코르시카에서 가톨릭으로 세례받고 성장했고, 1801년 교황 Pius VII와 Concordat를 체결해 혁명으로 파괴된 프랑스 가톨릭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복구했다. Concordat에는 프랑스 정부가 가톨릭을 “프랑스 시민 대다수의 종교”로 인정한다고 명시돼 있어.

하지만 개인적으로 독실한 정통 가톨릭 신자였느냐 하면 상당히 의심스럽다.

젊은 나폴레옹은 계몽주의, 특히 Rousseau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종교를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제도로 보는 경향이 강했어. Napoleon.org의 연구도 그가 개인적으로 종교적 열정이 강했던 것은 아니며, 자연종교적 관념과 계몽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한다.

말년에 Saint Helena에서 한 발언들을 보면 자신을 일종의 “존중하는 불가지론자”처럼 묘사하기도 해. 그는 자신의 불신앙 덕분에 여러 종교를 공평하게 대할 수 있었다면서도 종교를 도덕과 사회질서의 기반이라고 봤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표현은:

공식적 정체성 → 가톨릭

개인적 철학 → 계몽주의·회의주의/자연종교적 성향이 강함

정치적 입장 → 종교는 사회질서 유지에 반드시 필요

이야.

이걸 앞의 사드와 연결하면 둘의 차이가 아주 선명해져.

사드도 계몽주의와 유물론의 영향을 받았지만 “신과 종교를 없애고 그 도덕적 결과까지 끝까지 밀어붙이자”는 쪽으로 갔어.

나폴레옹은 반대로 대략 “내가 교회의 모든 교리를 믿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수천만 명이 사는 사회에는 종교와 도덕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지. Napoleon.org도 Bonaparte가 종교적 평화를 시민적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해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실제로 《Juliette》 같은 사드의 작품을 읽었다면, 무신론 자체보다도 ‘종교를 제거한 다음 도덕·가족·성적 규범·살인 금기까지 해체해버리는 결론’에 훨씬 큰 거부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 그건 나폴레옹이 만들고 싶었던 강력하고 합리적으로 조직된 근대사회와 정반대였으니까.

 

 

 

 

그리고 카사노바가 왜 그렇게 됐느냐

여기가 내가 앞에서 제대로 답하지 못한 부분이야.

카사노바가 “하인이 왜 나에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지 않아?” 수준의 일에 격분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노년기에 사회적 지위가 붕괴했는데 자의식은 젊은 시절 그대로였기 때문이야.

젊은 카사노바의 삶을 생각해봐.

그는 왕과 왕족을 만나고, 대귀족과 식사하고, 볼테르를 만나 논쟁하고, 유럽의 살롱을 돌아다니고, 돈을 벌었다 잃고, 도박하고, 결투하고, 여성들을 유혹하고, 감옥에서 탈출하고,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했어.

즉 그의 자아는

“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유럽 상류사회의 사람이다.”

라는 데 구축되어 있었어.

그런데 Dux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뒤집혀.

그는 돈이 없었고 Waldstein 백작의 봉급에 의존하는 고용인이었어. 더 이상 자기 집도 아니고, 백작의 성에서 먹고사는 처지였지.

Prince de Ligne의 설명도 정확히 이 부분을 짚어. 카사노바는 자신의 “dependent position and utter poverty”, 즉 남에게 의존하는 처지와 완전한 빈곤을 의식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유럽의 왕들과 대화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엄을 더 필사적으로 지키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인이 모자를 벗지 않는 사건은 카사노바에게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었던 거야.

그의 머릿속에서는

“하인이 인사를 안 한다”
→ “나를 하찮게 본다”
→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인가?”

가 되어버리는 거지.

그리고 실제로 그가 남긴 굉장히 인상적인 말이 있어.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하다.”

Prince de Ligne가 기록한 말이야.

이 한 문장이 말년 카사노바를 거의 설명해.

거기에 시대 자체가 그를 버렸다

이것도 굉장히 중요해.

카사노바는 1725년생이야. 젊은 시절의 세계는 가발, 실크 옷, 궁정예법, 귀족 살롱, 결투, 후원자, 절대왕정의 세계였어.

그런데 노년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어.

Louis XV는 죽었고 Louis XVI는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귀족문화 자체가 구시대의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취급되기 시작했어.

그런데 카사노바는 여전히 옛날 방식으로 화려하게 옷을 입고, 방에 들어가면서 정교하게 절하고, 미뉴에트를 추고, 옛 귀족식 예법을 요구했어.

Prince de Ligne의 기록을 전하는 자료에는 정말 잔인한 장면이 나와.

젊었을 때는 그의 춤과 우아함에 사람들이 감탄했는데 Dux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웃었다.

즉 카사노바는 단순히 늙은 게 아니라,

자기가 성공했던 세계 자체가 역사에서 사라지는 것을 살아서 본 사람이야.

그래서 점점

과거의 카사노바
유럽 전역을 여행함 → 왕족과 대화 → 여자들의 관심 → 사교계 인물 → 자유롭게 이동 → 모험

에서

노년의 카사노바
보헤미아 시골 → 돈 없음 → 백작에게 의존 → 하인들과 싸움 → 여자에게 매력 잃음 → 외국어 때문에 조롱 → 몸은 쇠약

으로 바뀐 거야.

그런데 자존심만은 과거의 카사노바 그대로였어.


성적인 노화도 그에게 굉장히 컸다

이건 카사노바라는 인간에게 특히 잔인했어.

그 자신이 72세 무렵 이렇게 썼어.

“나이가 열정을 진정시킨 것은 그것을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심장은 늙지 않았다.”

그리고 늙어서 더 이상 젊은 시절 같은 “어리석은 짓”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고도 썼어.

욕망과 기억은 젊은데 몸만 늙어버린 것이야.

사드와 상당히 재미있는 대비가 생겨.

사드는 70대에도 Madeleine을 찾고 성적 행동을 기록하지만, 카사노바는 자신의 성적 능력이 사라지는 것을 아주 명확하게 노화와 상실로 인식했어.


그래서 회고록을 쓴 이유도 여기와 연결돼

Dux의 현재가 견디기 어려워지니까 과거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일종의 정신적 피난처가 됐어.

그의 의사가 권태와 우울을 완화하려면 회고록을 써보라고 권했다는 기록이 있고, 카사노바 자신도 우울할 때 글을 썼다고 남겼어.

그래서 《Histoire de ma vie》는 단순한 자서전 이상의 의미가 있어.

현재의 카사노바:
가난한 70세 사서, 하인에게 무시당함.

글 속의 카사노바:
25세, 30세, 40세. 베네치아 감옥을 탈출하고 파리에서 돈을 벌고 유럽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이 자신에게 매혹됨.

글을 쓰는 동안에는 다시 그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카사노바의 말년을 단순히 “괴팍한 노인이 됐다”고 보는 것보다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준 세계·신분·육체·매력을 거의 동시에 잃은 사람이 사소한 존중에 병적으로 민감해진 것’으로 보는 게 훨씬 설득력 있다고 봐.

특히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하다”는 그의 말이 거의 완벽한 자기진단처럼 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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