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덩후이와 김영삼의 차이점 / 리덩후이와 친일

 응. “자국 현대 정치체제를 바꾼 정도”만 놓고 보면 리덩후이(李登輝)는 김영삼보다 한 단계 더 거대한 인물로 평가할 만하다. 다만 둘이 맡았던 역사적 과제가 달랐다는 점이 핵심이야.

가장 큰 차이

한 문장으로 하면:

김영삼은 이미 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이 이루어진 한국에서 군부 권위주의의 잔재를 청산한 대통령이고, 리덩후이는 권위주의 체제의 최고권력자가 된 뒤 그 체제 자체를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대통령이다.

김영삼이 1993년 대통령이 됐을 때 한국은 이미 1987년 직선제 개헌, 1988년 평화적 정권 출범, 1992년 경쟁적 대통령 선거를 경험한 상태였지.

반면 리덩후이가 1988년 장징궈 사망으로 총통직을 승계했을 때 대만에는 아직 1940년대 중국 본토에서 선출되어 수십 년간 자리를 유지하던 이른바 '만년국회', 국민당 일당우위 권위주의 체제, 중국 본토 수복을 전제로 만들어진 비상체제 등이 남아 있었다.

리덩후이 시대에 이게 본질적으로 뜯어고쳐진다. 1991년 **동원감란시기(動員戡亂時期)**를 종료하고, 중앙 의회를 전면 재선거하게 만들었으며, 지방자치를 제도화하고, 타이베이·가오슝 시장 직선제를 도입하고, 최종적으로 총통 직선제까지 만들었다. 

그리고 1996년:

대만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총통을 뽑았고, 그 선거에서 리덩후이 자신이 당선된다.

이게 김영삼과 가장 큰 차이야.

그래서 대만에서 김영삼보다 중요한가?

나는 현대 국가의 형성이라는 기준에서는 그렇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봐.

김영삼의 업적도 엄청 크지.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지방자치 전면 실시 등으로 한국의 문민화를 크게 진전시켰다.

그런데 리덩후이는 거기에 더해서 “누가 이 나라의 주권자인가”와 “대만이라는 정치공동체가 무엇인가” 자체를 바꾸는 과정의 중심에 있었다.

장제스 시대의 논리는 대략:

우리는 중국 전체를 대표하는 중화민국 정부이고,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

였어.

리덩후이 시대를 거치면서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실제 통치하는 곳은 대만이며, 대만 주민이 선거를 통해 이 정부를 구성한다.

라는 체제로 바뀐다.

1999년에는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特殊的國與國關係」, 즉 **“특수한 국가 대 국가 관계”**라고까지 규정한다. 그는 동시에 이것을 공식적인 대만 독립선언과는 구분했다. 

이 사고방식은 이후 표현은 달라졌어도 대만 정치에 상당한 유산을 남겼다. 

리덩후이의 독특한 포지션

여기서 리덩후이가 굉장히 재미있는 인물이 돼.

그는 반체제 민주화 운동가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민당 엘리트였고,

장징궈 → 리덩후이

라는 정권 내부의 공식적인 후계구도를 통해 부총통이 됐고, 장징궈가 죽자 헌법에 따라 총통이 된 사람이야. 

그러니까 한국으로 억지로 조합하면:

노태우의 권력 승계 방식 + 김영삼의 문민화/개혁 역할 + 김대중 시대까지 이어진 민주주의 제도 정착

을 한 사람에게 어느 정도 합쳐놓은 것에 가까워.

그런데 이것조차 부족해.

리덩후이에게는 한국 정치인들에게 거의 없는 **“국가 정체성 재구성”**이라는 역할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야.

그의 핵심 정책과 역할

크게 보면 네 가지다.

① 민주화·헌정개혁

가장 중요한 업적. 비상통치 체제를 종료하고, 만년국회를 없애고, 의회를 실제 대만 주민이 선출하도록 바꾸고, 지방선거와 총통 직선제를 확립했다. 총통 임기도 4년, 1회 연임으로 재설계됐다. 

② 대만화(本土化)

국민당은 원래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정당이었고 국가 엘리트도 외성인 중심이었다.

리덩후이는 대만 출생 본성인으로서 국민당과 국가기관의 권력구조를 점차 대만 현지 사회 중심으로 전환시켰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늘날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사람 중에서도 국민당 출신 리덩후이를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③ '중국을 대표하는 정부'에서 '대만의 정부'로

법적으로 중화민국이라는 국호와 헌정체제는 유지했지만, 정치적 실체를 중국 본토 중심에서 대만 중심으로 옮겼다.

1991년 공산반란 비상시기를 종료한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사실상 “우리가 중국 본토를 되찾기 위해 공산당과 내전 중”이라는 국가적 전제를 폐기하는 과정이었다. 리덩후이 자신도 이를 양안의 군사대결을 평화적 교류로 전환하는 계기로 설명했다. 

④ 경제·국가 현대화

6개년 국가건설계획, 경제활성화 프로그램, 12대 중점사업 등을 추진했다. 다만 리덩후이의 역사적 명성이 경제정책보다는 민주화·대만화·헌정개혁에서 압도적으로 크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아주 거칠게 도식화하면,

장제스 = 이승만 + 박정희
장징궈 = 박정희 후기 + 노태우
리덩후이 = 김영삼 + 노태우의 일부 + 김대중의 일부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특히 리덩후이의 특이한 점은 장제스가 만든 국민당 권위주의 체제에서 최고권력자가 된 사람이 결국 그 체제를 해체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야.

그래서 김영삼과 닮았지만 역사적 스케일이 조금 다르다. 김영삼이 '한국 민주주의의 중요한 완성자 중 한 명'이라면, 리덩후이는 '현대 민주 대만이라는 정치체제의 설계자 중 가장 중요한 한 명'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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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동후이가 일본 사무라이 옷을 입고 코스프레 사진을 찍은 이유는?

아마 네가 말하는 사진은 두 종류 중 하나라서 구분해야 해.

첫째, 젊은 시절 리덩후이(李登輝)가 일본식 복장을 하고 있는 유명한 흑백사진이라면, 그건 나중에 정치적 목적으로 “사무라이 코스프레”를 한 사진이 아니다. 학생 시절 실제로 검도(劍道)를 수련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당시 대만은 일본 통치기였고, 리덩후이는 일본식 교육을 받았으며 검도를 배웠다. 해당 사진도 “중학생 시절 일본식 복장을 하고 검도를 하던 리덩후이”로 설명되어 있다.

둘째, 네가 말하는 게 노년의 리덩후이가 일본 무사/검도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이건 2004년 11월 대만단결연맹(台聯·TSU)의 입법위원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정치적 퍼포먼스였다. 당시 83세였던 리덩후이는 일본 만화 《魁!!男塾》(사키가케!! 오토코주쿠)의 이미지를 차용해 일본식 검도·무사 차림으로 등장하여 TSU 후보들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다.

그런데 왜 하필 사무라이였느냐가 더 재미있는 부분이다. 단순히 웃기려고 고른 복장이 아니라 리덩후이 자신의 사상적 자기이미지와 상당히 잘 맞았다.

리덩후이는 젊어서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의 《Bushido》를 읽었고, 이후에도 무사도를 충의·용기·인(仁)·예(禮)·성실·명예와 특히 ‘실천’의 윤리로 높게 평가했다. 대만 국사관의 리덩후이 구술사 자료에도 아예 「日治教育和武士道精神」(일제시기 교육과 무사도 정신)이라는 별도 인터뷰가 남아 있을 정도다.

그래서 노년의 무사복 사진은 대략

선거용 화제성 + 자신의 검도 경험 + 일본 문화적 정체성 + 자신이 중시하던 ‘무사도적 인간상’

을 한 이미지에 합친 정치 퍼포먼스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이 때문에 당시에는 상당히 논쟁적이었다. 친중·반리덩후이 진영에서는 이를 그의 지나친 친일 성향의 증거라고 공격했고, 실제로 중국의 반일 단체가 2004년 말 그의 방일에 항의하면서 그 무사복 선거 포스터를 불태우는 시위까지 했다.

그러니까 그 유명한 노년 사진이라면 “그냥 일본 좋아해서 재미로 사무라이 코스프레했다”가 아니라, 본인이 오랫동안 자신의 윤리적 이상으로 이야기했던 ‘무사도’를 시각적으로 자기 캐릭터화하면서 동시에 TSU 선거운동에 활용한 것에 가깝다.

 

 

 

리덩후이는 실제로 죽을 각오로 전쟁에 자원입대했나? 목적이 머였지? 입신양명?

그렇다. 리덩후이(李登輝)는 실제로 상당한 정도로 ‘죽을 수도 있다’가 아니라 ‘죽음과 직접 대면하겠다’는 생각으로 일본군에 자원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훗날 본인이 반복해서 그렇게 설명했다. 단순한 입신양명이나 장교 경력 확보가 주목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중요한 게, 그는 편한 병과를 원한 게 아니라 일부러 보병을 지원했다는 점이다. 리덩후이는 훗날 “최전선에서 생사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보병을 지원했다”며, 그 이유를 생과 사의 경계에서 어떻게 개인/자아를 확립할 것인가를 생각하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더 극단적인 일화도 있다. 병과를 묻는 일본군 장교에게 보병을 원한다고 했고, 자료에 따라서는 이등병으로 보내달라고까지 요구했다고 전한다. “왜 그렇게 힘든 곳에 가고 싶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였다. 다른 기록에는 그가 전선 보병을 희망한 이유를 “죽음과 한판 겨뤄보고 싶다(想要與死亡來場較量)”는 취지로 말했다고 나온다.

그럼 왜 그랬나?

가장 큰 동기는 입신양명보다는 철학적·실존적 자기단련에 가까웠다.

젊은 리덩후이는 당시 생명, 죽음, 자아가 무엇인지에 상당히 집착하고 있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전 쓴 글에서도 군대를 고통을 견디며 자신을 연마하고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이르는 데 필요한 곳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21세 전후의 리덩후이 머릿속에는 대략 이런 사고가 있었던 셈이다.

책으로 생사를 고민하는 것보다 실제로 죽을 수 있는 최전선에 들어가서 죽음과 맞닥뜨려 보겠다.

굉장히 당시 일본 청년 엘리트 특유의 실존주의 + 선(禪) + 무사도적 자기수양이 섞인 사고방식이다.

동시에 일본인으로서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의식도 실제로 있었다. 이 부분을 빼면 안 된다. 리덩후이는 훗날 자신과 형 리덩친(李登欽)이 당시에는 의심할 여지 없이 “일본인으로서 조국을 위해 싸웠다”고 회고했다. 형은 해군 특별지원병으로 참전했다가 필리핀에서 전사했다.

심지어 훗날 그는 당시 자신과 형 모두 젊었고 이상에 불타서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죽기를 바랐다는 취지로 회고하기도 했다. 다만 나이가 든 뒤에는 그 이상과 전쟁의 현실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동기를 굳이 비중별로 개념화하면 나는 이렇게 보겠다.

① 생사와 직접 대면해 자아를 확립하려는 철학적 욕구 > ② 무사도·선과 연결된 자기단련/명예관 + 당시 일본인으로서의 애국심 > ③ 젊은이 특유의 영웅적·낭만적 죽음에 대한 동경 >>> ④ 입신양명

특히 입신양명이 주목적이었다면 일부러 보병·이등병을 원했다는 행동이 잘 설명되지 않는다. 장교 코스나 안전하고 경력에 도움이 되는 병과를 찾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군은 그의 희망을 그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고사포(대공포) 병과로 배치되어 예비사관학교를 거쳐 소위가 되었고, 나고야에서 종전을 맞았다.

그리고 이 경험은 노년의 리덩후이가 자신의 정치적 담력을 설명하는 방식에도 남았다. 그는 총통으로서 민주화·본토화를 추진하면서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젊은 시절 실제 생사의 경계를 경험했던 것을 직접 꼽았다.

그래서 젊은 리덩후이를 이해할 때는 “출세하려고 일본군에 들어간 식민지 엘리트”보다는 “철학책·선·무사도에 심취해서 실제 죽음 속으로 들어가 자신의 존재를 시험해보려 한 21세 청년”이라는 이미지가 본인의 기록에는 훨씬 가깝다. 다만 이는 상당 부분 노년의 자기회고에 의존하므로, 당시의 복합적인 동기를 100% 그대로 복원한 것이라고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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