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8.13 역사 속으로 사라진 크아
내가 크레이지 아케이드 (약칭 크아)를 처음했던건 2001년이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일이다.
이 게임이 내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 온라인 게임이 되었다. (나는 앞으로 온라인 게임을 할 생각이 없다.)
2001년~2007년에는 밤을 새서 하기도 하고, 7년동안 중독 상태에서 고생하기도 했던, 너무나도 많은 추억이 있던 게임을 섭종 (서버종료) 전에 몇년만에 마지막으로 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내게는 추억인 동시에, 어린시절의 소중한 기억들을 오로지 게임으로만 채우게 만든 만악의 원흉이기도 한 애증의 게임이었다.
2015년 섭종된 큐플레이를 하던 때의 추억도 떠올랐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유저들은 서로 조롱하면서 말싸움을 하다가도 마지막에 나갈 때는 "잘 지내라"는 훈훈한 멘트를 남기고 떠났고, 대다수가 확성기로 아쉬움을 표시했다.
기억에 남았던 유저들
1. 며칠 전: 생판 본 적도 없던 나를 게임 몇판했다고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르던 예고 다니던 말투가 귀여운 고3 학생. 나는 게임을 끌 때 "잘 지내. 사랑해"하고 말하고 나갔다. 붙임성이 좋아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아이처럼 보였다.
2. 섭종날, 오후에 조기퇴근하고 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한, 사이가 좋아 보이던 50대 사장과 직원. 직원의 아이디가 "이봉원박미순" 이어서 웃겼다. 둘이 사이가 좋고 대화가 끊이지 않은 것을 보아 다니기 좋은 회사처럼 보였다. 나는 사장에게 월급을 많이 주냐고 물었고 그는 당연한듯이 "물론"이라고 대답하길래 나는 "월 600은 줘?"라고 물었고 그는 "..."하고 대답했다. 미순이가 레디를 하지 않을 때 나는 그녀에게 "미선이 쉬해?" 하고 묻기도 했다. 그들이 나의 나이를 묻자 나는 "속살"이라고 대답해줬다. 다른 유저 한명은 자신의 나이가 "굳은살"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게임 도중, 루찌가 터지는 보너스맵에서 돈을 열심히 먹자 두 사람 중 한명이 내게 "이제 곧 없어지는 게임인데 뭘 그렇게 열심히 먹냐"고 했고, 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렇게 따지면 다 죽는데 뭐하러 열심히 살아?" 그들은 웃으면서 수긍했다.
여기에 바로 인생의 비밀이 숨어 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이자 게임이며, 개별유저들의 정체성이 서버종료와 함께 사라진다고해도, 서버가 돌아가는 동안에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결국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만, 그 과정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을 느낄 수 있고, 생명이 살아있음을 즐길 수 있다. 신비주의적 terms로 말하자면,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브라흐만의 아트만으로서의) '체험' 그 자체에 있다.
게임 한판한판에 목숨거는 유저들이 많지만, 사실은 게임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너무 과몰입할 필요도 없고, 동시에 허무주의에 빠져 모든 것을 부정할 필요도 없다. 게임을 잘한다고 해봤자 게임에 불과할 뿐이요, 게임을 못한다고 해봤자 게임에 불과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게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최선을 다해 플레이해야하는 것이다.
3. 유저 한명은 내게 "이렇게 게임을 잘하시는데 종료되니 섭섭하시겠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게임중독을 예방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나의 2001~2007년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게임 같은 것은 없어지는 편이 낫긴 하다.
4. 마지막 ID로 130판을 정도 한 뒤, 마지막으로 한판을 했던 애는 93년생 닭띠였다. 그는 크아가 종료되서 아쉽다고 했다. 게임에서 나갈 때 나는 그에게 "슬퍼할 필요 없어. 사랑해"하고 말하고 나갔다. 그가 93년생 닭띠라는 점에서 기묘한 상징성을 느꼈다. 그와 마지막판을 플레이하고 게임을 끄기에 좋은 타이밍이었다.
크아의 섭종일날 풍경, 고등학교의 졸업식 풍경, 텅 빈 학교의 풍경, 군대 전역일의 풍경, 회사 퇴사일의 풍경, 또는 누군가의 죽음과 장례식 풍경과 같이, 시작이 있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며, 그렇기에 인생의 매순간이 통렬한 것이다. 찰나찰나의 순간을 치열하게 산 기록들이 더 많이 쌓여갈수록, 더 좋은 인생이 완성된다. 끝이 있기에 매순간순간이 소중해질 수 있는 것이며, 그 순간의 고유한 분위기가 특별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남는 것은 사진 몇 장 내지는 머릿 속의 기억 뿐이지만, 더할나위없이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없는 마음으로, "살아있어서 좋았노라. 이 모든 것을 경험해볼 수 있어서 좋았노라"하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크아의 섭종일 ㅡ 이날이 마치 인생 전체의 요약과도 같았다고 하면 과장일까?
적어도 나는 매우 의미심장하게 인생 전체를 통찰해볼 수 있었다. 나는 매순간을 ㅡ 특히 앞으로 몇년간은 ㅡ 정말 치열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보았다. 그 순간 밖에 할 수 없는 일 ㅡ 그것에 진력해야한다.
나폴레옹처럼 세계의 패권을 거머줘야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 모래시계 속 모래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ㅡ 가급적이면 최대한 젊은 나이에 ㅡ 승부를 봐야한다.
한 마디 더 사족을 덧붙이자면, 언젠가 서버가 종료되서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해도, 어딘가에 기존 코드와 데이터베이스가 남아있는 한 그것은 다른 형태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는 운영자(절대자)의 의도에 달려있다. 사업의 수익성 내지는 수지가 맞을 것 같으면 부활할 수 있고, 용도폐기가 더 적합하면 영원히 부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추억소환용 이벤트로 단기간 짧게 부활하다 다시 사라질 수도 있다.
인간이 죽고나서 어떤 형태로 다시 태어날지, 또는 어떤 형태로 전체에 흡수될지 역시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의 의도에 달려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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