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1991년 국제투기자본-인도는 소련 (빅터 로스차일드)과 중립 (버트런트 러셀 계열 자와할랄 네루의 제3세계론) 사이에서 줄타기; 반면, 국제투기자본-파키스탄 ISI는 미국 CIA (데이비드 록펠러)와 더 긴밀했다; 록펠러는 파키스탄을 이용해 아프간 무자헤딘을 지원하고, 인도와 소련을 압박했다; 그러나 냉전 이후 이 구조가 서서히 뒤집힌다; 중국이 미국의 최대 전략경쟁자로 부상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오랫동안 가까운 파키스탄보다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거대한 인도의 전략적 가치가 훨씬 커졌기 때문이다 2
미국이 인도 대신 파키스탄과 오랫동안 손잡앗던 이유는?
맞습니다. 냉전기의 큰 그림에서 보면 미국은 인도보다 파키스탄을 훨씬 더 명확한 ‘동맹국’으로 취급한 기간이 길었습니다. 핵심 이유는 이념보다는 지정학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독립 직후 두 나라가 선택한 외교노선입니다. 네루의 인도는 미국 진영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비동맹주의(Non-Alignment)**를 내세웠습니다. 반면 파키스탄은 적극적으로 미국의 냉전 동맹망에 들어왔습니다. 1954년 SEATO, 1955년 **Baghdad Pact(후일 CENTO)**에 가입했습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 편에 확실히 서겠다는 나라”가 파키스탄이었던 겁니다.
특히 다음 요인들이 컸습니다.
- 소련 봉쇄: 파키스탄은 소련의 남쪽, 중앙아시아·아프가니스탄·이란·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미국은 파키스탄을 서방의 봉쇄망에 편입시키려 했습니다.
- 미군 정보기지: 파키스탄은 미국에 군사통신·정보시설 사용을 허용했습니다. 1962년 미 국무부 내부 문서는 이런 시설들이 미국의 국가이익에 **“vital”**하며 적절한 대체 장소가 없다고까지 평가했습니다.
- 인도의 비동맹주의와 소련 접근: 인도는 공식적으로 소련의 동맹국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소련과 군사·외교적으로 가까워졌습니다. 특히 1971년 인도-소련 우호협력조약은 워싱턴의 의심을 강화했습니다.
- 중국과의 비밀 통로: 1970~71년에는 파키스탄이 닉슨·키신저의 미중 화해를 위한 비밀 중개자가 됐습니다. 키신저의 1971년 비밀 베이징 방문도 파키스탄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 때문에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닉슨 행정부가 유명한 **“tilt toward Pakistan”**을 취하는 데도 영향을 줬습니다.
- 아프가니스탄: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에는 파키스탄의 가치가 다시 폭등합니다. 미국-CIA → 파키스탄-ISI → 아프간 무자헤딘이라는 지원망에서 파키스탄은 핵심 중개국이 됐습니다. 미 국무부도 파키스탄이 소련의 아프간 침공 이후 미국 외교정책을 지원한 핵심 국가였다고 정리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국과 파키스탄 사이의 근본적인 동상이몽이 있었습니다. 미국은 “파키스탄을 공산주의 봉쇄에 이용한다”고 생각했지만, 파키스탄이 미국과 손잡은 가장 큰 이유는 인도였습니다. 미국 무기와 안보보장을 받아 훨씬 큰 인도와의 군사력 격차를 줄이려 했던 것이죠.
놀랍게도 당시 미국 정부도 이것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내부 전략문서에는 **“Pakistan’s motive for obtaining U.S. arms was not security against a Communist attack but protection against India”**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계속 삐걱거렸습니다. 미국은 “소련을 막으라고 준 무기인데 왜 인도와 싸우는 데 쓰느냐”고 했고, 파키스탄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소련보다 인도인데 왜 인도와 싸울 때 미국이 안 도와주느냐”고 불만을 가졌습니다. 결국 1965년과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미국이 파키스탄이 기대했던 만큼 개입하지 않으면서 동맹에 대한 파키스탄의 신뢰도 크게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냉전기의 삼각관계를 아주 단순화하면,
미국 ↔ 파키스탄
소련 ↔ 인도
중국 ↔ 파키스탄
이라는 구도가 형성됐습니다. 물론 인도는 공식적으로 비동맹이었기 때문에 완전한 소련 동맹국으로 보는 것은 틀립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냉전이 끝난 뒤 이 구조가 서서히 뒤집힙니다. 중국이 미국의 최대 전략경쟁자로 부상하면서 미국 입장에서는 중국과 오랫동안 가까운 파키스탄보다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거대한 인도의 전략적 가치가 훨씬 커졌습니다. 오늘날 미·인도 관계가 냉전기와 완전히 다른 이유도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현재(2026년 8월) 기준으로는 파키스탄에 대규모 미군 전투부대나 공식적인 미군 기지가 상시 주둔하고 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과거에는 달랐습니다.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파키스탄은 미군에 여러 공군기지와 시설의 접근·사용권을 제공했고, 미군은 이를 물류·정보수집·아프간 작전 지원 등에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파키스탄 정부는 이후 미군 기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워싱턴에서는 끊임없이 이런 말을 듣는다. 만약 우리가 자존심을 억누르고 참는 일을 그만둔다면, 파키스탄의 과두 지배층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이 행동할 것이고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 진부하고 피상적인 주장은 끔찍한 역사적 사실 하나를 무시한다. 파키스탄 지도부가 상황을 악화시키거나 더 나쁘게 행동할 때마다 미국은 그들에게 후한 보상을 해주었다.
우리는 그 비참한 국가가 반혁명적 길을 걸어온 모든 단계에서 이를 가능하게 해준 조력자였다. 그 결과 파키스탄은 이제 심각한 지역적 위협이자, 우리의 최악의 적에게는 위장한 동맹이며, 동시에 우리의 가장 훌륭한 동맹국들 가운데 일부에게는 철천지원수인 국가가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동맹의 방향을 바꿔, 그 대신 인도와 손잡는다면 어떻게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겠는가? 인도는 규모 면에서 우리와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다민족·다종교 민주주의 국가이며, 파키스탄 전체 인구에 거의 맞먹는 수의 무슬림이 살고 있는 나라다.
또한 전직 정보기관 수장 암룰라 살레(Amrullah Saleh) 같은 용감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어떻게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겠는가? 그들은 수년 동안 우리에게 **“당신들은 엉뚱한 나라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해왔다.
우리가 이 피할 수 없는 사실을 계속 부정하거나 외면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범적인 젊은 자원병들을 모욕하는 동시에 그들을 더욱 위험에 빠뜨리는 셈이다.
왜 **아보타바드 급습(Abbottabad raid)**이 그토록 당연하게 ‘대담한 작전’이라고 불렸는가?
그 이유는 이 작전이 파키스탄 공군의 레이더를 피해 수행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 공군은 전투기를 긴급 출격시켰으며, 가능했다면 미군의 블랙호크 헬리콥터들을 격추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만으로도 양심상 충분히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카야니 장군(General Kayani)**의 훈계와 질책을 고분고분 듣고 있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정도를 넘어선 일이다.
— Vanity Fair, 2011년 7월
이건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From Abbottabad to Worse」**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히친스가 빈 라덴 사살 직후 **“미국은 파키스탄과의 동맹을 사실상 끝내고 인도 쪽으로 전략적 중심을 옮겨야 한다”**고 상당히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대목입니다. 특히 *“we are fighting the war in the wrong country”*는 여기서 아프가니스탄만 공격할 게 아니라 탈레반·알카에다의 후방 지원망이 존재하는 파키스탄이 진짜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맞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1947년 분할이 ‘모든 무슬림은 파키스탄으로, 모든 힌두교도는 인도로’ 이동시키는 완전한 인구교환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왜 인도에 무슬림이 그렇게 많이 남았나?
영국령 인도를 분할할 때 기본 원리는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을 묶어 파키스탄을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쪽의 펀자브·신드·발루치스탄 등과 동쪽의 벵골 동부가 파키스탄이 됐습니다. 하지만 무슬림은 그 지역에만 살았던 게 아니라 인도 전역에 수천만 명이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1947년 분할 과정에서 약 1,500만 명이 국경을 넘는 엄청난 인구이동을 겪었지만, 모든 사람이 이동한 것은 아닙니다. 약 3,500만 명의 무슬림이 그대로 인도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네루가 이끄는 인도 국민회의의 입장은 애초부터
“파키스탄은 무슬림 국가를 원한다지만, 인도는 힌두교 국가가 아니라 종교와 관계없이 시민권을 갖는 세속국가가 된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 남기를 원하는 무슬림이 반드시 파키스탄으로 떠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도 자체의 인구가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무슬림이 소수파이면서 절대 숫자로는 세계 최대급인 현상이 생깁니다.
그리고 이것이 히친스가 사진의 문장에서 노린 포인트입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라는 정체성을 내세우지만, 세속 민주주의 인도에도 파키스탄에 맞먹는 규모의 무슬림이 산다”**고 강조한 것이죠.
아보타바드 급습은?
이건 훨씬 유명한 사건입니다.
2011년 5월 2일, 미국이 파키스탄 정부에 사전 통보하지 않고 파키스탄 영토 깊숙이 헬리콥터를 침투시켜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한 작전입니다. 공식 작전명은 **Operation Neptune Spear(넵튠 스피어 작전)**였습니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 산속에 숨어 있었던 게 아니라 놀랍게도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약 55km 떨어진 아보타바드의 큰 저택에 숨어 있었습니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곳이 파키스탄의 대표적인 군사도시이고, 파키스탄 육군사관학교에서 불과 약 1~2km 떨어진 곳이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은 파키스탄에 미리 알리면 정보가 새어 빈 라덴이 도망갈 가능성을 우려했습니다. 그래서 오바마가 비밀리에 작전을 승인했고, 미군 특수부대 **DEVGRU(SEAL Team Six)**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헬기를 타고 국경을 넘어 침투했습니다. 약 40분 만에 빈 라덴을 사살하고 시신을 가지고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빠져나왔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미국-파키스탄 관계에 엄청난 파장이 생겼습니다.
미국에서는:
“우리가 10년 동안 찾던 빈 라덴이 동맹국 파키스탄의 군사도시 한복판에서 살고 있었다. 파키스탄 정보기관이 정말 몰랐다는 게 가능한가?”
라는 의혹이 폭발했습니다.
반대로 파키스탄에서는:
“동맹국 미국이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군용 헬기를 보내 영공과 주권을 침해했다.”
라는 분노가 컸습니다.
그래서 방금 읽으신 히친스의 2011년 글이 굉장히 독한 겁니다. 그의 논리는 대략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서 발견됐는데도 왜 미국은 아직도 파키스탄을 동맹처럼 대하는가? 차라리 인도와 손잡아라”**였습니다.
그리고 제목 《From Abbottabad to Worse》 자체도 말장난입니다. *“from bad to worse(나쁜 데서 더 나쁜 데로)”*에 Abbottabad를 끼워 넣은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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