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일보 사장이었던 여운형,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모두 독립운동가였고 친일파였던 적이 없다; 단, 거대 언론사를 운영했기에 그들의 이름이 여러 차례 도용되었고, 송진우 퇴임 이후 동아일보 논조가 친일로 변했기에, 친일파였다는 후세의 오해가 있었다; 동아일보 사주였던 김성수의 경우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일제의 전시체제에 협력하는 방향이 되어 친일 논란이 있고, 조선일보는 원래 독립운동을 후원했으나 1933년 방응모가 인수하고 1937년 중일전쟁 시기부터 노골적으로 친일 행보

 [11] 1934년 '조선대아세아협회'라는 것에 대해 해명하자면 이 단체에는 12명의 친일파 거두와 방응모, 여운형, 송진우 등 15명의 조선인의 명의가 있다. 이는 '신문사 사장 직함'으로써 피할 수 없었다고 봐야 하는데 왜냐하면 당시는 신문사 경영 자체가 민족 운동인 시절이었기 때문이었고 신문사를 통해 합법적으로 독립운동 양성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신문사의 원활한 운용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도용 또는 이용되는 것을 묵인하는 방법이었다고 해석하면 된다. 1945년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언론보국회'에 송진우의 명의가 있는 것도 시기를 고려해 봐야 하는데 이 시기 송진우는 거의 모든 활동을 그만두고 칩거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재홍, 홍명희, 여운형 등처럼 명의를 도용당했다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송진우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무슨 협력의 대가로 받은 급부가 없으며 대개 일반적인 친일파들은 자신들의 지위 재산을 지키기 위해 협력한 반대 급부를 받는 게 당연했다. 반면 그의 평생 동지격인 김성수는 중일전쟁 때부터 라디오 시국 강연 등 나섰던 기록이라든가 조선총독부로부터 반대 급부를 받았다는 것도 있다. 즉 김성수를 친일파라 부를 수는 있어도 송진우를 친일파라 부르기 어렵다. 받은 게 없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안재홍 같은 사람도 오히려 친일세력쪽에서 친일 의혹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안재홍이 일제 시대에 항일 활동을 하다가 별 희한한 죄목들로 수도 없이 억울한 감옥 생활을 반복한 걸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물론 현재의 국가보안법에 해당하는 죄목(반국가단체 결성. 안재홍은 상해 임시정부의 조선 내 연락 조직을 만들었다가 잡혔고 감옥에 끌려가서 몇 년을 살았다.)으로도 감옥에 가기도 했다.

 

2.1. 언론인 방응모[편집]

1933년에 공금횡령사건과 자금난으로 어려워진 조선일보를 조만식[6]으로부터 인수했고, 항일 민족지 성향의 조선일보를 친일 신문으로 바꿔버렸다. 이때 김성수가 소유한 동아일보,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와 경쟁하면서 조선일보 사옥을 증축하고 신문지면을 확대하고 1935년에 《조광(朝光)》을 창간하는 등 조선일보를 번창하도록 하는 데에 주력하였다. 1936년에는 동방문화학원을 설립했다.

2.2. 친일 행적[편집]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8년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거나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하는 등의 다양한 친일 행위를 하였다. 1942년 6월에 '징병령 실시에 일층 더 감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글을 써서 조광에 발표하였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여러 친일 단체에 가담하였다. 이로 인해 노무현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선정되었다. 그나마 같은 언론인 친일파였던 김성수는 변절 전에는 독립유공자이기도 했고 친일파였을 때도 일본이 민족말살정책을 강행하기 전까지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 지원을 하였으나 방응모는 처음부터 포탄에 맞아죽는 순간까지 반민족행위자였다.
 
 

4. 행적에 관한 의견과 사후 영향력[편집]

인촌 김성수 선생 동상 건립문: 민족자립의 대본이 첫째 교육에 있음을 깨닫고 일제의 억압과 싸워가며 이 사업을 완수한 이는 곧 인촌 김성수 선생이었다. 선생의 사업이 허다하지만 특히 교육은 그가 지상사명으로 삼아 물심을 기울여 일생을 여기에 바쳤던 것이다. 선생은 본시 고창출생으로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을 마치고 돌아오자 단기 4248년 1915년 중앙학교를 맡아 일익확장, 다시 그 경영을 반석위에 놓고자 4262년 1929년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창설하였다. 그후 2년에 걸친 구미유람에서 또 깊이 느낀 바 있어 4265년 1932년 보성전문학교를 이어받아 전기 재단 경영 밑에 두고 안암동 넓은 지역을 택하여 괄목할 시설을 이룩하니 영재육성과 아울러 민족문화배양의 일대요람을 만들고자 함이었다. 갈망의 해방을 맞이하자 익 4279년 1946년 드디어 보성전문학교를 개편하여 고려대학교로 승격시키고 한층 더 내용을 확충하니 그의 포부는 실로 원대하였다. 아! 선생은 4288년 1955년 아깝게도 65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애국애족의 발로에서 교육사업에 진췌한 그 숭고한 정신, 치밀한 경영, 거룩한 공헌은 길이 후세의 사표가 되고 남음이 있으리라. 고대교우가 중심이 되어 본교관계유지들과 함께 선생의 높은 덕행을 추모기념하고자 모교 교정에 이 동상을 모신 것이다.

- 단기 4292년 1959년 5월 5일 건립 고려대학교 교우회[13]
- 1942년 징병제도실시감사축하대회에 참석하고, 1943-1944년 『매일신보』, 『춘추』에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기풍 조장하라」, 「인고단련의 기백」,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 「충용무쌍의 황병 되라」 등의 글을 기고하여 징병을 선전, 선동함. 1943년 「학도출진좌담회」에 참여하고 『매일신보』, 『경성일보』에 「빛나는 전통을 살리라」, 「일각도 주저치 말자」, 「우리 완승을 목표로 더욱 연락과 격려를」, 「이 시대 최고의 광영!」 등의 글을 기고하여 학병의 취지를 고취시켜 학병 동원을 독려함.

- 1941년 '황국정신의 앙양' 등을 목표로 내건 흥아보국단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의회를 통합하여 조직된 전시체제기 최대의 민간전쟁협력단체 조선임전보국단에서 발기인과 감사로 활동함. 1937년 중일전쟁기에 라디오와 강연회를 통하여 시국인식의 철저와 '총후봉공'을 역설하고, 군용기 경기호 건조비로 3백원을 헌납하였으며, 1943년과 1944년 『매일신보』에 「절대로 협력」, 「징병이 닥쳐온다」 라는 글을 기고하여 출정 군인 유가족에 대한 원호사업의 철저와 협력을 주장함.

- 1938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이사, 참사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매일신보』에 「만전 준비 다할 뿐」, 「각 전문교 과거와 현재」, 「새 결의로 총궐기」라는 글을 기고하여 일제의 침략전쟁 승리를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것을 역설함.

  • 인촌 김성수는 고창 출신의 민족교육자이자 민족자본가, 독립운동가로 오랜 기간 물밑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해 온 인물이다. 그가 중앙학교를 인수해 민족교육에 매진하던 시기, 숙직실에서 3‧1운동을 모의했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2·8독립선언서 초안을 들고 귀국해 와세다대학 선배이자 중앙학교 교사였던 현상윤을 찾았고, 이후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김성수,현상윤,송진우 등이 거사를 논의했다. 뒤이어 최남선,최린까지 합류하며 3‧1운동의 싹이 틔워졌다. 중앙학교의 김성수를 빼놓고 3‧1운동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김성수는 일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민족자본이 필요하다고 판단, 최초의 주식회사인 경성방직회사를 설립했다. 이어 민족 언론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했으며, 경영난에 빠졌던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훗날 고려대학교의 초석을 닦았다. 구전에는 독립군이 군자금을 요청하면 김성수가 금고를 열어둔 채 자리를 비웠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김좌진 장군에게 ‘소 백 마리를 사고도 남을’ 자금을 지원하고, 이승만과 상해 임시정부에도 자금을 댔다는 증언도 있다. 기록이 남기 어려운 비밀지원이었지만, 해방 이후 김구와 이승만이 김성수에게 큰 고마움을 표시한 점을 감안하면 사실에 무게가 실린다. 해방 뒤 김성수는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힘을 보탰고, 전쟁기에는 대한민국 부통령직을 수행했다. 해당 공로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는 전북은 물론 대한민국에서 지식인,기업인,교육자,언론인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 귀감으로 평가된다.그러나 현재 김성수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일제 말기의 혹독한 상황에서 기업과 학교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관직과 제한적 협조 행위가 문제로 지적된 결과다. 작은 일을 하는 자신의 안위만 지키면 되지만, 큰 조직을 책임지는 회사 직원, 학교 교직원과 학생, 언론사 기자와 독자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김성수를 ‘친일’로만 규정하는 시각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었어야 한다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사업가로서 최소한의 협조를 통해서라도 회사를 유지해야 독립자금을 지원하고, 민족 언론과 교육을 지속할 수 있다는 논리다. “떡장수를 하다 보면 손에 고물이 묻고 바닥에 떨어지기도 하는 법”이라는 속담이 이 맥락에서 인용된다. 일제는 김성수를 요시찰인물, 불령선인으로 분류해 지속적으로 감시했다. 김성수는 보통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항일,독립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펼쳤고, 전라북도는 물론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인물이었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새전북신문 기사
  •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보고서에 포함되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었다. 이유는 일제강점기 [14] 친일 기고문과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발기인과 활동했다는 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 <경성일보>, 잡지 <춘추> 등에 학병 권유문을 수 차례 기고했을 뿐만 아니라 담화문 및 연설 등을 수 백 차례 했다는 점, 국방 헌금을 여러 차례 납부했던 점 등이다.
  • 2009년 11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인촌의 행적 중 일부가 친일반민족행위라고 한 결정에 대해 인촌기념회 등은 이에 대해 불복해 2010년 1월 소송을 내 1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2010년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 20명'이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 취소 결정이 내려지고 2011년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을 때 김성수만이 보류 결정되었는데 인촌기념사업회가 행정안전부장관을 상대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 것을 취소해 달라고 법원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1심과 2심을 거치면서 김성수 친일 행적이 대부분 인정되었다. 2017년 4월 13일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김성수의 친일 행적을 인정했다.#[15]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 2018년 2월 13일 국무회의 의결로 건국훈장의 서훈이 취소되었다.# 이에 대해 유족들이 서훈 취소에 불복해 또 소송을 걸었으나 1,2심 모두 패소하였다. 2024년 4월 12일 대법원에서 김성수의 서훈 취소를 확정하였다.#
  • 주로 일제 말 전시 국가총동원 체제에서 총독부 기관지에 실린 김성수 명의의 기고문, 담화문과 그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친일단체 임원명단이 그를 친일인사로 판단하는 근거인데, 이것이 과연 김성수의 진의에 의한 것이었는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고 해방 직후 친일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일생에 걸쳐 애국적 삶을 살아온 그를 단순히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있다.[16]
  • 공식적 결정과는 별개로[17] 이 논쟁이 좌우 갈등 문제에서 정치적으로 심심하면 거론되고 있는 중이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좌우가 서로 정치적으로 따지다보니 문제가 꼬일 때가 많다. 특히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극우 세력에서는 '같은 친일 기고문 떡밥이 있는 여운형은 안 오르고 김성수는 오르냐.'는 이유로 민족문제연구소를 공격하기도 한다. 다만 여운형이 친일인명사전 문제에서 빠진 이유는 일제 말에 국내에서 유일한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옌안의 조선의용군, 중국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광복에 대비하는 등 구체적인 독립운동이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밝혀졌고 학계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 말기 국내에서 독립운동 단체는 조선건국동맹 이외에 거의 전무했었으며 아이러니한건 살아 생전 김성수와 여운형이 사상적으로는 정반대 관계였지만 인간적으로는 친분이 두터웠다는 점이다. 김성수는 여운형 계열 인사인 조봉암을 많이 밀어주기도 했다.
  • 어느 시사 카툰은 여운형을 번번이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 심사에서 탈락시키면서 일제 말기 징병을 옹호한 전적이 있는 김성수에게 진작에 건국훈장을 추서한 국가보훈처의 행동에 대해 비판했던 적이 있다. # 후에 김성수는 대통령장(2등급) 서훈이 취소되고 여운형은 대통령장에다 대한민국장(1등급)까지 받게 되었다. 친일인명사전 문제 이후로 사상에 따른 훈장 수여 문제가 불거져 나와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한 극우 측에서는 여운형에게 수여한 1급 훈장을 치탈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진보 측과 역사학계에서는 김성수를 포함하여 친일 경력이 있는 자의 훈장을 치탈하라 주장하며 서로 치고 받고 싸우고 있다.
  • 반론 측에서는 전시 체제 기간(1943~1945) 동안 집중적으로 쓴 여러 편의 글이 있긴 하지만 강압이나 조작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있고 김성수는 적어도 그 전까지 실력양성운동 등 항일 활동을 실천으로 보여준 지식인 가운데 1명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조선일보> 사주인 방응모 같이 대놓고 친일파라고 분류하는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주요 근거로 내세우는 가장 대표적인 반론이 <매일신보> 기자인 김병규라는 자가 인촌 김성수의 명의를 함부로 도용해서 자기 멋대로 실었다는 주장[18]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위 여부를 놓고 실제 재판까지 가기도 했다. 2005년 재판 당시 재판부에서는 '실제로는 김병규라는 매일신보 기자가 친일 논설들을 게재하기에 앞서 김성수에게 글의 내용을 보이고 김성수가 그 내용을 충분히 검토한 이후에 이를 <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는 것인바 그런 경위로 게재된 글은 김성수 자신의 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여겨지므로 위 보도는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이라고 믿을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라고 결정을 내렸다.# 조선총독부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다는 점[19]에서 신문, 회사, 학교를 살리기 위한 '소극적인 친일'을 한 것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20] 물론 법원에서는 대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적용을 해야 하는 법원의 입장에서는 행위의 동기, 당시의 정황과 상관없이 외부적으로 표시된 사실만 갖고 판단할 수밖에 없으므로 정상참작 등의 정책적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 각종 독립운동 가담 제의를 표면상으로는 대차게 거절하면서 뒤로 몰래 도와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러 증언 내용을 보면 독립운동가를 방에 남겨둔 상황에서 금고를 열어놓고 밖에 나가는 일을 자주 했다고 한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사라진 돈이 <동아일보>를 통해서 한국독립군 쪽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강훈은 김성수가 송진우를 통하여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4차례나 보내줬다고도 증언했다.# 또한 인촌은 1924년 동아일보의 논조 문제로 악질 친일파이자 야쿠자인 박춘금에게 고하 송진우와 함께 납치되어 폭행, 고문과 살해위협을 받다가 간신히 풀려난 전력도 있으며, 도산 안창호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자 안창호의 치료비를 그가 죽을 때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 다른 관점에서 보면 김성수로서는 자신의 행보에 학교, 언론, 기업과 거기 속한 사람들의 생사가 걸린 만큼 친일을 거부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에 정상 참작을 해줘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한 세대를 넘는 35년의 시간 동안 조선 인민 절대 다수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했고 적어도 일제의 행정 기관과 군사 기관 앞에서 겉으로는 이를 부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항일 무장 투쟁이 말이야 쉽지, 현실적으로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체제 자체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학교, 언론, 기업이 존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21] 그나마 김성수는 태평양 전쟁 전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 시도했던 사람 중의 1명이었으나 일본의 통치가 비이성적으로 폭주하게 된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르러서부터 생존을 위해서라도 일제에 협력하는 척을 했던 것으로 봐줄 여지가 있다.[22]
  • 민문연이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23]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물산장려운동,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하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등 친일보다 항일의 공이 더 큰 인물이라는 견해가 있고, 반면에 선항일 후친일의 변절자라는 견해도 있다. 나아가 김성수의 친일혐의는 누명이라며 더 적극적으로 김성수를 변론하는 입장도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중요한 근거는 김성수의 행적에 대한 생생한 증거와 생존한 증인들이 산적해 있을 광복 전후 당대에 김성수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여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진영을 불문하고 그를 민족지도자로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민문연과 정부에서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시키는 발표를 할 때마다 각계각층에서 큰 진통이 벌어졌다.
  • 실제 김성수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지만, 이것은 딱히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없다. 해방 후에도 활발하게 교육 사업을 펼쳐 사회적 명망이 있었으며, 심지어 명목상이기는 하나 1947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환국 이후 만든 국민의회 국무위원에 취임하기도 했다.[24] 나아가 각계의 신망을 얻어 제2대 대한민국 부통령에 취임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 장기집권에 실망하여 부통령직을 내던지고 성재 이시영, 심산 김창숙 등 독립운동가 원로들과 합심해 성명서를 발표하고 장기집권 반대투쟁에 나서는 등의 업적도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다. 김성수가 타계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그의 말년에 그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장례를 국민장(葬)으로 치러주었다.
  • 진보 성향 역사학자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도 “제헌헌법 86조에 농지개혁이 명시되어 있다. 농지개혁은 지주의 토지를 빼앗아 농민에게 나눠주자는 것이다. 조선 8도에서 땅을 제일 많이 가진 김성수가 제헌헌법을 만들 때 그 조항에 반대하지 않았다. 자기 땅을 다 뺏어서 나눠준다는데도 동의했다.”고 지적하면서, 김성수를 높게 평가하였다.#
  • 이승만 정권 당시 이승만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한 인물치고는 현재 민주당계 정당에서는 친일 구태 기회주의자 정도로 격하되어 박하게 평가받고 있다. 과거에는 이승만 정권 초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훌륭한 교육자로 긍정적인 방향에서 평가받았으나, 2010년대 이후 친일 행적이 부각되고 재평가되면서 평가가 떨어진 것이다.[25] 전통적으로 1955년 민주당을 이끌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이 민주당계 정당의 아버지로 여겨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백범 김구를 애국·독립·민주·평화·통일의 가치를 추구했다며 민주당의 근간으로 삼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 1991년 경기 과천 서울대공원 한마당광장에 그의 동상이 제막됐으나,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그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적극 철거운동을 벌임으로써 2019년 안내판을 세웠다. 고려대 김성수 동상과 전북 고창의 생가 및 동상, 서울 계동의 인촌 숙소 터 등의 현충시설 등록이 취소되기도 했다. 또 서울 성북구 인촌로가 '고려대로'로 변경되기도 했으며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로도 도로명 개칭을 놓고 논란을 빚은 바 있다.
  • 2001년 최인훈이 인촌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 인촌의 "황민됨의 책무는 크다"글을 자녀에게 보여주며 수상을 거절한다고 밝혔다.#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볼 수 있지만, 두 신문을 똑같은 경로로 설명하면 안 됩니다. 특히 “여운형·송진우가 물러난 뒤 방응모·김성수가 사주가 되면서 신문사가 친일화됐다”는 식으로 시간순서를 잡으면 약간 틀립니다.

조선일보: 방응모의 경우

방응모는 1933년에 조선일보를 인수했습니다. 그 이전 조선일보에는 이상재·안재홍·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이 사장으로 있었고, 방응모가 인수한 뒤 신문사의 성격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인 1937년부터 방응모 체제의 친일 협력이 뚜렷해집니다.

  • 1937년 전쟁 발발 후 일본군을 지칭하는 용어를 ‘아군·황군’ 등으로 바꾸도록 요구
  • 경성군사후원연맹 활동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인
  •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조선임전보국단 참여
  • 징병·학병·헌금·전쟁협력 선전

등이 확인됩니다. 

따라서 **“태평양전쟁으로 일제가 총동원체제로 폭주하면서 조선일보도 친일화됐다”**는 설명은 상당히 맞습니다. 다만 방응모 개인의 친일 활동은 단순히 신문 지면의 강요된 협력 수준을 넘어섰다는 자료가 있습니다.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도 방응모와 김성수를 1937~45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최종 명단에 포함했습니다. 

동아일보: 김성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김성수는 방응모처럼 1933년에 신문을 새로 인수한 사람이라는 구조가 아닙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 창간 때부터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고 경영에 깊이 관여한 인물이었습니다. 우리역사넷도 동아일보의 재정을 지원한 김성수를 식민지 토착자본가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송진우는 1936년 일장기 말소사건 이후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김성수의 영향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동아일보 역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협력하는 방향으로 급격히 변했고, 1940년 결국 조선일보와 함께 폐간됩니다.

김성수 개인도 단순히 “신문사가 일본의 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친일 보도를 했다”는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등 전시동원 관련 활동에 참여했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김성수를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확정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신 표현을 조금 다듬으면

“여운형·송진우 같은 민족주의적 언론 지도자들이 물러난 뒤, 방응모·김성수 같은 식민지 자본가/경영자 중심의 신문 경영체제가 강화되었고,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면서 두 신문 모두 급격하게 전쟁협력·친일 논조로 전환했다.”

이 정도가 가장 정확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신문사 전체’와 ‘사주·경영진·편집진 개인’을 구별하는 입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는 일제 말기에도 친일에 적극 가담한 사람뿐 아니라 그 체제에 저항하거나 소극적으로 협력한 사람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결국 1940년 두 신문 모두 일제에 의해 폐간됐다는 사실도 함께 봐야 합니다. 

 “처음부터 친일신문이었다”도 틀리고, “끝까지 민족지였다가 일제가 강제로 친일신문으로 만들었다”도 틀립니다.
특히 1937~1940년이라는 전환기를 보면, 질문하신 **“경영자의 처세 + 일제의 총력전·태평양전쟁 체제로 인한 압박과 폭주”**가 결합해서 두 신문의 성격이 크게 변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1. ChatGPT의 말:

    아, 오늘날의 중앙일보를 말씀하신 거군요. 그렇다면 완전히 별개의 신문입니다.

    현재 중앙일보는 1965년 9월 22일 창간됐고,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이 설립했습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도 설립자를 이병철로 명시합니다. 

    오늘날 중앙일보의 출발

    계보를 간단히 하면:

    1965년
    → 이병철(삼성)이 중앙일보 창간
     홍진기가 경영에 참여
    → 삼성그룹을 배경으로 성장
    → 1980년대까지 삼성과 긴밀한 관계
     1999년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
    → 현재의 중앙일보·중앙그룹으로 발전

    입니다. 

    따라서 1930년대의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와 오늘날의 중앙일보는 이름만 같을 뿐 별개의 신문입니다. 오늘날 중앙일보가 스스로 내세우는 창간일도 1965년 9월 22일입니다. 

    그런데 이 신문의 창업·경영진도 역사적으로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특히 홍진기가 중요합니다.

    홍진기는 일제강점기에 판사·사법관으로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내무부 장관 등을 거쳐 중앙일보 창간 과정에서 이병철과 함께 핵심 경영자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이병철이 사장, 홍진기가 부사장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조·중·동을 역사적으로 비교할 때 상당히 재미있는 차이가 생깁니다.

    • 조선일보 → 방응모
    • 동아일보 → 김성수
    • 중앙일보 → 이병철·홍진기

    즉 중앙일보는 일제강점기의 민간지에서 이어진 신문이 아니라, 해방 후 삼성 재벌이 새롭게 만든 신문입니다.

    그리고 1965년 창간 당시부터 중앙일보는 삼성의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적인 상업신문 전략을 펼쳤습니다. 당시 중앙일보는 초고속 윤전기를 대규모로 보유하고 무가지·경품 등을 활용해 신문시장의 판도를 크게 바꿨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우리가 이야기한 “신문사–재벌–정보기관–권력”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중앙일보는 오히려 조선일보·동아일보와 다른 계보를 가진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일제강점기 친일 언론 → 해방 후 우익 언론 → 재벌 언론 → 중앙정보부/군사정권과의 관계라는 흐름을 살펴보려면, 중앙일보의 경우에는 홍진기와 삼성의 관계부터 보는 게 핵심입니다.

  2. 나의 말:

  3. ChatGPT의 말:

    네, “오늘날 중앙일보가 이름을 『조선중앙일보』에서 가져온 것 아니냐?”라는 의심은 충분히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공식적인 계승·후신 관계는 아니고, ‘이름을 의식적으로 차용했는지’는 별도로 입증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두 번째 부분은 맞습니다. 1930년대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조선중앙일보가 ‘3대 민간지’**로 불렸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도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을 설명하면서 이 세 신문을 민간 3대지라고 명시합니다. 

    특히 조선중앙일보는:

    중외일보 → 중앙일보 → 조선중앙일보

    로 제호가 바뀌었고, 여운형이 1933년 사장이 되면서 조선중앙일보로 개편됐습니다. 1936년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결국 1937년 폐간됐습니다. 

    그래서 1965년에 이병철이 새로 만든 ‘중앙일보’가 1930년대의 중앙일보/조선중앙일보와 법적·조직적으로 이어진 신문은 아닙니다.

    다만 이름의 측면에서는 꽤 흥미롭습니다.

    이름만 놓고 보면

    1930년대:

    조선일보 / 동아일보 / 조선중앙일보

    그리고 1965년 이후:

    조선일보 / 동아일보 / 중앙일보

    가 됩니다.

    즉 현재의 ‘조·중·동’이라는 3대 보수 일간지 구도가 형성되는 데 있어서 ‘중앙일보’라는 명칭이 과거 3대 민간지의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와 동일하다는 점은 분명 흥미로운 역사적 연속성입니다.

    하지만 **“1965년 중앙일보가 조선중앙일보를 모방해서 이름을 지었다”**고 단정하려면 당시 창간 관계자의 증언이나 사료가 필요합니다. 제가 지금 확인한 자료에서는 그런 직접적인 창간 동기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가 굳이 ‘조선’을 붙인 이유 자체가 중국에서 이미 『중앙일보』라는 신문이 발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설명합니다. 동시에 ‘조선’을 붙여 민족적 성격을 강조하려는 뜻도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름의 역사를 정확하게 보면:

    중앙일보(1931)

    조선중앙일보(1933~1937)
     (신문 자체는 폐간)
    중앙일보(1965~현재)

    이고, 1965년 중앙일보는 전혀 다른 회사지만 ‘중앙일보’라는 이름은 이미 식민지 시기에 상당한 인지도를 갖고 있던 명칭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당시에도 조선중앙·조선·동아가 3대 일간지였으니, 1965년 중앙일보가 그 이름을 가져온 게 아니냐”**는 것은 상당히 그럴듯한 역사적 추론이지만, 현재 확인된 자료만으로는 의도적인 모방이라고 확정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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