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사 염동진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한국 근대사 1: 백의사 리더 염동진은 일제 때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육군 방첩대(CIC)의 밀정으로 이승만 반대세력인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암살에 개입; 물론 공식적으로 송진우 암살은 격몽의숙을 만든 한현우가 저지른 것이지만, 극우 테러 네트워크로 백의사와 엮여있었다 / 이 우익 네트워크의 핵심이자 혁신탐정단의 양근환은 한국민주당 창당 멤버 - 한민당은 이승만, 우익 세력, 친일파, 미국, CIC와 긴밀히 엮여있어 / CIC는 CIA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고, 박정희/김종필 5.16 쿠데타도 도와줬으며, 백의사-CIC 멤버들이 그대로 KCIA (중앙정보부)의 창설멤버들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맹인 염동진의 백의사가 본부로 사용했던 궁정동의 집이 훗날 중앙정보부의 안가가 되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곳도 바로 이 궁정동 안가 / 피와 권력의 카르마로 뭉친 백의사와 CIC, 중정, 박정희의 궁정동 유산

백의사 염동진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한국 근대사 1: 백의사 리더 염동진은 일제 때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고, 해방 후에는 미육군 방첩대(CIC)의 밀정으로 이승만 반대세력인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 암살에 개입; 물론 공식적으로 송진우 암살은 격몽의숙을 만든 한현우가 저지른 것이지만, 극우 테러 네트워크로 백의사와 엮여있었다 /  이 우익 네트워크의 핵심이자 혁신탐정단의 양근환은 한국민주당 창당 멤버 - 한민당은 이승만, 우익 세력, 친일파, 미국, CIC와 긴밀히 엮여있어 / CIC는 CIA와 긴밀한 관계가 있었고, 박정희/김종필 5.16 쿠데타도 도와줬으며, 백의사-CIC 멤버들이 그대로 KCIA (중앙정보부)의 창설멤버들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맹인 염동진의 백의사가 본부로 사용했던 궁정동의 집이 훗날 중앙정보부의 안가가 되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곳도 바로 이 궁정동 안가 / 피와 권력의 카르마로 뭉친 백의사와 CIC, 중정, 박정희의 궁정동 유산

 

 

그러고 보면 백의사-cic 멤버였던 안두희가 백의사-cic와 긴밀한 연관이 있던 김구를 암살하고, 또 미국 cic와 cia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박정희가 cia 지시를 받은 김재규에게 암살당한 것은 카르마적이네 

 

 

염동진
廉東振
염동진
1936년 6월 3일 고등과 수배자 명단에 오른 염동진의 1934년 낙양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모습.
본명
염응택(廉應澤)
본관
파주 염씨
출생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초현동 (現 중화군 중화읍)
사망
1950년 7월 이후
한반도 일대

1. 개요2. 생애3. 기타4. 밀정 논란5.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AKR2021060705930...
중산대학 학적표. 낙양군관학교 생도 시절 사진

해방 이후에 우익 조직인 백의사를 이끈 백색테러 지도자. 본관 파주 염씨 동정공파고 본명은 염응택(廉應澤)이다. 簾應澤·閻應澤 등은 가명이거나 틀리게 쓰인 거다.

백의사의 리더. 일각에서는 일제시기 동안에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채 일본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본래 《비밀결사 백의사》와 같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자료에 근거를 두는 정도인지라 신빙성이 낮은 편이었으나 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해 중국 측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실제로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2. 생애[편집]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초현동[1](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에서 염도열(廉道悅)의 차남[2]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선린상업학교 본과 1학년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하였으며, 이후 파주군 임진면(현 파주시 문산읍) 문산리에 잠시 거주하다가 1934년에 인척이었던 염온동의 주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한다. 곧 상하이시로 건너가 지청천 파벌[3]에 가담하여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제1기 입학한다.# 이범석이 당시 생도 대표였다고 한다.

입교 자격 심사는 김구, 지청천, 김원봉이 했는데 신익희의 추천으로 입학한다. 신익희[4]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중에 중국국민당 임시정부를 지원해 생도들에게 11원 씩 주었는데, 여기서 말썽이 생겨 폭동이 일어나자 염동진은 가담했다가 난징에 있던 신익희에게 피신한다. 신익희는 염동진에게 '요춘택'이라는 가명을 지어주고, 난징 국민혁명군 헌병사령부 우편검사처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얼마 후에 염동진은 남의사에 발탁되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남의사 단원들과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근무한다.

1943년에 조선으로 돌아온 염동진은, 일본 나라여고를 졸업하고 평양 서문여고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최성률과 결혼한다. 비슷한 시기 대동단을 결성하는데. 1919년 설립된 조선민족 대동단과는 다른 단체다. 임시정부 요인 박찬익의 동생이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에 와서 스님이 된 박고봉이 여운형 조선건국동맹에 대항할 조직을 만들자고 해서 만들었다. 노변야화 김두한 편제42화 이박사와의 관계 1969년 12월 5일 방송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에게 고문을 당해서 실명됐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는 어떤 단체가 있었으냐 하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백의사’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장개석 총통 밑에 있는 건 ‘남의사’인데 이 단체는 군통국장(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 대립이라고 하는 육군 중장이 만들어 장개석 총통의 생명을 지킨 겁니다. 여기에서는 백의사라고 만들었는데 공산당 두목을 죽이려는 5도 단체의 청년들이 모였죠. 그 백의사가 사령부로 되어 있어요. 지하사령부인데 사령관이 누구냐면 염동진 씨라고 평양분인데, 장개석 총통 밑의 군통국에 있다가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들어왔지만 밀렸거든요. 항일 투쟁을 했으니 어떠랴 싶었는데 공산당 본부에 끌려가 척추뼈가 부러지고 장님이 됐어요. 중국이 항일 전쟁 할 때 모택동이가 염동진은 장개석 편이라고 두들겨 팼단 말이야. 그래서 옛날에 항일 투쟁하던 동지들이 그 분을 업고 38선을 넘어왔어요. 이름을 한국말로는 염동진 씨고 중국말로는 요 모씨라고 썼대요.그런데 백의사 사령부는 비밀 결성인데 남쪽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예요. 그건 왜 그러냐면 독립 운동을 한 민족주의자로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고 항전총연합회 주석으로 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제 아버님 아닙니까? 아버님께서 국제공산당한테 암살을 당해서 돌아가셨으니까 일급 거물이거든요. 우리 한국의 거물이 국제공산당한테 제일 처음으로 암살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그 연유로 해서 백의사의 참모가 됐어요.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까 무기, 돈, 정보,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나하고 합작을 원해요. 그런데 이박사와 뜻을 맞춘 염동진 씨가 나를 들어오라고 해요. 들어가니까 염동진 씨가 인사를 하고…

1945년, 현준혁 암살 혐의로 체포되지만, 부인 최성률이 소련군정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의 부인에게 남편의 억울함을 탄원하여 석방된다. 이후 월남한 그는 신익희의 측근인 조중서를 만나서 대동단을 모태로 백의사를 조직한다. 백의사는 대동단의 후신이라지만 그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 행동대장에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염동진),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이었다고 한다. 염동진은 박용직, 유진산, 이규갑과 함께 좌익이었던 김두한을 설득하여 아버지 김좌진의 죽음을 알리고 공산당의 만행과 자유시 사변의 일도 알려 김두한을 우익으로 전향하게 했다. 다만, 이는 김두한 문서에도 있고, 백의사 문서에도 있지만 신뢰도가 낮다. 김두한이 좌익이었다는 부분도 그렇고, 과정에도 논란이 많다.

백의사 조직 이후 각종 백색 테러와 대북 정보활동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방첩대(CIC)와 긴밀하게 협조한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 조지 실리는 이른바 '실리 보고서'에서 염동진을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백의사를 '남한, 북한, 만주와 중국 전역'에 걸쳐 '한국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는 지하조직으로 표현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 역시 염동진에게 "명령만 받으면 누구든 암살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술되었다.[5]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요원을 보냈다. 김일성이 있는 평양의 연설장에 폭탄을 던졌으나 소련군 장교의 방해로 인해 김일성은 부상만 입었고 암살은 실패한다. 다시 암살하기 위해 김두한에게 정보를 보내 대한민청 정예 간부들을 산정호수의 김일성 별장으로 보냈지만 김일성이 없어서 실패했다. 휴가 끝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탈출한 것인지 아에 안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거부하였으며, 그대로 서울에 남아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백의사의 수장이었던 만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3. 기타[편집]

  • 백의사의 본부로 사용했던 집은 궁정동에 있었는데 6.25 전쟁 이후 국회의원 이인의 자택으로 사용하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구입해서 안전가옥으로 사용했다. 이 곳에서 훗날 10.26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역사적 현장인 것이다.
  • 미 군정이 작성한 문서에 따르면 일제의 패망 직후 만주[6]에 반공주의 군대를 조직하려 하다가 실패한 후 한국인들이 극단적인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모두 거부해야 한다며 국가사회주의 형태의 국가[7] 건설을 선동한 바 있다. 이 문서는 미군방첩대(CIC) 출신 조지 실리 소령이 작성한 것으로, 신동아에서 김구 암살 배후와 관련한 참고자료로 제공했다. 링크 이범석과 여러모로 비슷한데 둘은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 동기이고 이범석이 생도 대표였으니 그의 영향을 받았거나 역으로 그에게 영향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범석은 이승만과 매우 친했고 그의 내각에서 무려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염동진 쪽은 이승만에 다소 부정적인 스탠스였다.
  • 배우 정석용과 닮았다. 이후에 캐스팅을 고려해볼만 하다.

4. 밀정 논란[편집]

일각에서는 염동진이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관동군에 체포된 후 관동군의 밀정으로 변절했다고 주장한다.[8][9]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金九 일파 특무대원 검거에 관한 건(1936년 8월 17일)에도 나온다.
簾應澤, 27 平南 中和郡 中和面草峴里82 소화 11(1936)년 3月 山城鎭(산성진) 憲兵(헌병) 분대 검거, 현재 同 부대의 밀정을 하고 있다함

1940년대 초 평양의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서 활동하였기에 '밀정설'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활동공백만으로 장기간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을 배신자로 모는건 성급한 일이라는 의견이다. 아무튼 염동진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2021년 6월 7일 그가 밀정이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이번에는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다시금 대두되었다. 아래의 중국 공산당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자신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고, 사실은 일본 관동군의 고문을 못이겨서 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 1973년 개봉한 영화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서는 배우 강계식이 연기했다.
  •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배우 이대로가 연기했다. 백색 테러가 애국 행위로 포장되어 그 수장인 염동진도 정의의 사도 수준으로 미화되면서 문제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과 행적을 모티브로 한 가상 인물인 염석진(이정재 분)이 등장한다.
  • 웹소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김구와 같이 한국의 니콜라이 예조프 역할이며 조지원이 이완용을 숙청할 때 등장한다. 이후 보위부에서 활동하며 나중에 세계 대전 당시에는 진짜 예조프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이 잘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1] 구한 말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초현동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초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평양시 중화군 중화읍 → 2010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2] 또는 3남[3] 민족혁명당 계열이라고도 한다.[4] 1892년생인 신익희가 형이었다.[5] 그런데 염동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 담았던 이력으로 백범 김구를 존경하고 해방 후에도 따랐다. 백범 김구와 경교장에서 자주 대화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한다.[6] 당시 인민해방군과 소련이 점령한 상태였다.[7] National Socialistic State[8] <비밀결사 백의사>, 이영신.[9] 염동진의 친일설을 내세우는 측에서는 염동진의 시력 악화도 관동군의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 주장한다.   


여운형 암살사건의 진상은 1974년이 되어서야 암살하는데 가담한 4명이 신문지상을 통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밝힘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들은 한지근과 자신들이 어떻게 여운형을 암살했는지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여운형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1945년 12월 30일 발생한 송진우 암살사건의 주범 한현우(韓賢宇)의 집에서 ‘격몽의숙’ 관련자들과 교유하며 극우적인 사고를 키워나갔다. 여기서 이들은 당시 극우 테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던 한국민주당 창당 멤버이자 혁신탐정단의 양근환(梁謹煥), 백의사의 염동진(廉東鎭)과 접촉하며 테러 대상을 물색했는데 여운형이 ‘민족 분열에 책임이 있는 야심가’라는 결론을 내리고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양근환과 염동진은 암살사건 가담자들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1974년에 나온 여운형 암살사건 가담자들의 주장은 사후적이고 일방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신빙성 여부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조사한 검찰에 따르면 이들의 설명이 여운형 암살사건 당시 한지근을 조사했을 때의 기록과 상당히 가깝게 들어맞았다고 증언했다.

미국 비밀문서는 여운형 암살이 백의사의 범행이라고 말하고 있다.
백의사의 핵심인물 염응택도 그동안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으나 '실리 문건' 은 그에 대해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맹인장군' 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백의사를 통해 여운형의 암살에도 관여한 것으로 언급돼 있다.

중앙일보 정창현 기자
   

특히 2001년에 공개된 이른바 **‘실리 보고서(Cilley Report)’**가 중요합니다.

실리의 보고서에는 안두희가

  • 백의사의 특공대원이고
  • CIC의 정보원이었다가 요원이 되었으며
  • 염동진의 명령이 있을 경우 암살을 수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

는 취지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최소한 다음 세 가지는 상당히 강하게 뒷받침됩니다.

① 안두희 ↔ 백의사 연결
② 안두희 ↔ CIC 연결
③ 염동진 ↔ 백의사 지휘자 연결

이 세 가지가 한 사람, 즉 안두희를 중심으로 겹칩니다.

그래서 **“염동진 계통에서 김구 암살이 실행됐을 가능성”**은 단순한 음모론이라고 치부하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정병준 교수의 연구도 실리 보고서에 의해 밝혀진 핵심 사항으로 안두희의 CIC 정보원·요원 신분과 백의사 구성원 신분을 들면서, CIC와 백의사가 암살에 어느 정도 관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평가합니다. 

   


특히 백의사의 실제 암살 대상 목록을 보면 우파/좌파라는 단순한 구분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남북협상을 추진했기 때문에 백의사의 적이 될 수 있었지만, 장덕수는 우파 정치인이었습니다. 따라서 백의사의 기준은 단순히 “좌익 제거”가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하는 반공·민족주의·정치노선에 장애가 되는 사람을 제거하는 에 가까웠습니다. 

    
  1. ChatGPT의 말:

    질문하신 것들을 하나씩 바로잡아 보면, 서로 연결되는 부분과 전혀 다른 조직인 부분을 분리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CIC는 CIA 내부의 CIC가 아니라 **미 육군 Counterintelligence Corps(방첩대)**입니다.

    1. CIC가 CIA의 '선배 조직'이냐?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입니다.

    미 육군 **CIC(Counterintelligence Corps)**는 육군 조직이고, CIA의 전신은 OSS → SSU → CIG → CIA라는 계보입니다. CIA 공식 역사도 OSS와 CIG를 CIA의 전신으로 설명합니다. 

    다만 기능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고 서로 협력했습니다.

    • OSS: 전략정보·첩보·공작·방첩
    • CIG: 1946~47년의 중앙정보 조직
    • CIA: 1947년 창설된 민간 해외정보기관
    • Army CIC: 미 육군의 방첩·보안·정보수집 조직

    따라서

    CIC → CIA

    라는 조직적 직계 계보는 아니지만,

    OSS/CIG/CIA와 CIC가 전후 미국 정보공동체를 구성한 서로 다른 

    이라고 이해하는 게 정확합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날짜가 있습니다. CIA 내부의 **Counterintelligence Center(CIC)**는 1988년에 만들어진 전혀 다른 조직입니다. 따라서 1940~60년대 한국 이야기에서 CIC라고 하면 미 육군 방첩대를 뜻합니다. 


    2. 그런데 5·16과 CIC는 실제로 연결됩니다

    이건 질문하신 문제의식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5·16 직후에도 미 육군 CIC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의회도서관의 『South Korea: A Country Study』는 김종필이 5·16 이후 기존 Army Counterintelligence Corps 조직을 활용하여 중앙정보부를 만들었고, 초기 3,000명 규모의 인력 중 상당수를 그쪽에서 충원했다고 설명합니다. 

    즉 대략적인 계보를 그리면:

    미 육군 CIC
    ↓ 한국인 방첩 인력·조직 경험
    한국군 방첩대(KCIC)

    중앙정보부(KCIA, 1961)

    라는 인적·조직적 연속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CIA의 1960년대 한국 관련 자료를 볼 때도 미군 CIC와 CIA는 같은 조직이 아니면서 각각 한국에서 정보활동을 했습니다. 

    따라서 “5·16과 미국 정보기관의 관계”를 연구할 때 CIA만 보는 것은 불충분하고, 미군 CIC까지 봐야 한다는 말씀은 상당히 타당합니다.

    문명자 부분

    문명자의 회고록에는 5·16과 미국 측 인사들의 접촉 및 미국의 사후 대응에 관한 여러 주장이 나옵니다. 다만 제가 지금 확인한 문명자 자료에서는 “CIC가 5·16을 직접 지원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1차 문서까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문명자의 회고록은 중요한 증언 자료이지만, 회고록의 주장과 미국 공식 문서로 확인되는 사실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확실하게 확인되는 것은 5·16 직후 CIC가 현지 상황과 여론을 조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쿠데타를 사전에 지원했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3. 염동진이 맹인이 된 시기는?

    여기가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이고, 최근 연구 때문에 기존 서술을 다시 봐야 합니다.

    오랫동안 알려진 이야기는:

    염동진이 중국에서 공산당에게 붙잡혀 고문당했고 → 그 과정에서 실명했다.

    였습니다.

    실리 보고서도 그런 취지의 정보를 기록합니다. 경향신문이 소개한 실리 보고서에는 염동진이 중국 공산당의 고문 때문에 맹인이 됐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병준 교수의 2021년 연구는 이 설명 자체를 의심합니다.

    정병준 교수는 새로 확인된 자료를 토대로 염동진이

    1936년 3월 관동군 통화현 산성진 헌병대에 체포된 뒤 일본 관동군의 밀정이 되었고, 1944년 3월까지 약 8년간 직업적인 밀정으로 활동했다

    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정 교수는 “중국 공산당의 고문으로 실명했다”는 염동진의 이야기가 자신의 친일 밀정 경력을 은폐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위 서사일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따라서 현재 연구 수준에서는:

    염동진이 정확히 언제, 누구의 고문으로 실명했는지는 확정되지 않았다.

    라고 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만 **“일제 말기에는 이미 시력을 잃었다”**는 기존 자료가 있고, 경향신문이 소개한 자료도 그렇게 정리합니다. 


    4. 그러면 맹인이 어떻게 암살·테러를 지휘했나?

    여기서는 사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염동진이 직접 권총 들고 뛰어다닌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사령·기획자였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백의사는 점조직 성격이 강했고, 염동진은 사람을 직접 만나 지시하고 정보를 취합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운영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궁정동 본부에서도 방문자를 별도로 만나 장시간 이야기하는 등 극도로 비밀스러운 점조직 방식을 사용했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즉:

    염동진 = 기획·정보·지휘

    부하 조직원 = 정찰·운반·폭탄·암살 실행

    입니다.

    시각장애가 있다고 해서 조직 지휘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백의사가 점조직이었다면 염동진은 현장에서 싸우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정보를 교환하고 명령하는 '두뇌'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의사가 실제로 여운형 암살 등 여러 폭력 사건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됩니다. 


    5. 그리고 궁정동 집 — 이건 정말 흥미로운 연결입니다

    네. 같은 장소입니다.

    염동진의 백의사가 본부로 사용했던 궁정동의 집이 훗날 중앙정보부의 안가가 되었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피살된 바로 그 궁정동 안가라는 자료가 있습니다. 

    다만 표현을 정확히 해야 합니다.

    **“염동진의 개인 집이 곧바로 10·26 현장이 되었다”**라기보다는,

    염동진이 백의사 본부로 사용하던 궁정동 가옥

    한국전쟁 이후 다른 사람이 사용

    5·16 이후 중앙정보부가 매입

    중앙정보부 안가로 사용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

    이라는 공간의 역사입니다. 

    따라서 질문하신 **“집이야, 본부야, 둘 다야?”**에 대한 답은:

    둘 다입니다. 원래 가옥이었고, 염동진이 그곳을 백의사의 본부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상당히 흥미로운 것은 같은 공간이 서로 전혀 다른 두 시대의 비밀공작 중심지로 사용됐다는 것입니다.

    1945~50년대: 백의사 비밀본부

     1960~70년대: 중앙정보부 안가

     1979년: 10·26

    물론 이것만으로 두 사건 사이에 직접적인 조직적 연속성이 있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공간의 연속성과 조직의 연속성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6. 조선의열단은 언제 해체됐나?

    여기도 날짜를 정확히 잡아야 합니다.

    1935년 7월 5일, 조선의열단을 비롯해 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독립당 등의 세력이 합쳐져 민족혁명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1935년 7월 5일 민족혁명당 결성 → 조선의열단은 공식적으로 해체·흡수

    라고 합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도 민족혁명당 발족과 함께 의열단이 사실상 해체되었다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1935년에 모든 의열단원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 계열 인사들은 민족혁명당으로 들어갔고, 이후

    민족혁명당 → 조선의용대 → 대한민국임시정부·한국광복군 일부와 연계

    라는 식으로 조직적·인적 계보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걸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던 흐름에 놓으면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대략적인 시간축이 이렇게 됩니다.

    1930년대

    조선의열단
     1935 민족혁명당

    1936~44

    염동진
    → 관동군 헌병대 밀정으로 활동했다는 최근 연구 

    1945

    해방
    → 염동진 월남
     백의사 조직

    1945~50

    백의사
     미군 CIC와 정보·방첩 관계
    → 각종 대북공작 및 국내 우익 폭력 사건

    1949

    안두희
    → 백의사 + CIC 정보원이라는 중첩된 위치
    → 김구 암살

    1950

    한국전쟁
    → 염동진 서울 잔류
    → 북한군에 붙잡힌 뒤 행방불명

    1961

    5·16
    → 한국군 방첩조직 인맥의 상당수가 중앙정보부 형성에 흡수 

    1979

    옛 백의사 본부였던 궁정동 가옥
     중앙정보부 안가
     10·26

    이렇게 놓으면 질문하신 여러 가지가 하나의 **“한국 현대사의 정보·방첩·비밀조직 계보”**라는 관점에서 연결됩니다.

    다만 연결된 장소·인맥·기관이 있다고 해서 하나의 동일한 비밀조직이 1930년대부터 1979년까지 존속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 부분은 증거를 하나씩 대조해야 합니다.

    특히 다음 단계로 파고들면 정말 중요한 것은 “염동진 백의사 ↔ 미군 CIC ↔ 한국군 CIC/KCIC ↔ 김종필의 중앙정보부”의 인적 명단이 실제로 얼마나 겹치는가입니다. 이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인사기록과 조직명단을 대조하면 어느 정도 검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네, 말씀하신 인물이 위컴(William K. Westmoreland?가 아니라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이었던 인물)인지 확인하려는 것이라면, 제가 찾은 문명자 회고록 관련 자료에서는 ‘위컴’으로 나옵니다. 정확히는 문명자가 1995년 당시 위컴 측근에게 들었다는 취재 내용을 회고록에 적었습니다.

문명자의 서술에 따르면 5·16 당일 반도호텔에 있던 장면을 지프에 태워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이동시킨 사람이 위컴이었다고 합니다. 문명자는 그가 당시 주한미군 부사령관이었지만 “정보라인”에 있었다고 평가하면서, 이 행동을 단순한 장면 보호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합니다. 

다만 “성당”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입니다. 장면은 5월 17일 새벽 그곳으로 피신해 있었습니다. 다른 자료에서도 장면이 카르멜 수녀원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정정 하나: 제가 앞에서 “위컴”을 특정하지 않고 얼버무린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이번에 확인해보니 문명자 책의 해당 대목은 분명히 “위컴이 장면을 반도호텔에서 카르멜 수녀원으로 이동시켰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이건 문명자가 1995년에 위컴의 측근으로부터 확인했다는 회고·취재 내용이지, 현재 제가 확인한 범위에서 미국 정부의 1차 문서로 확정된 사실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말씀하신 사람은 **존 A. 위컴(John A. Wickham Jr.)**이고, 바로 그 사람이 1980년 전두환 신군부를 둘러싼 인터뷰에서 한국인을 레밍(lemming), 즉 나그네쥐에 비유한 사람입니다. 제가 앞 답변에서 김학철을 끌어온 것은 명백한 착오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위컴과 5·16 당시의 위컴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위컴이 5·16 당시 장면을 성당/수녀원으로 데려갔다는 이야기를 문명자 회고록에서 보셨다고 하신 것이고,
  • ‘레밍’ 발언은 1980년, 위컴이 한미연합군사령관으로 있던 시기의 발언입니다. 
  • 따라서 같은 존 위컴이 맞습니다.

위컴의 1980년 발언은 보도에 따라 표현이 조금씩 다르지만, 핵심은 한국인들이 레밍처럼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국내에서는 이를 한국인을 비하한 ‘들쥐 발언’으로 크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이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5·16 미국 정보기관 개입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제가 앞에서 위컴을 제대로 특정하지 못한 탓에 문명자 회고록의 맥락을 엉뚱하게 처리했습니다. 앞으로는 문명자의 주장을 먼저 정확히 확인하고, 그 다음에 미국 정부 문서와 대조해서 사실관계를 따져야 합니다.

 

 

 
  1. ChatGPT의 말:

    무궁화동산 4.2공원

    네. 말씀하신 관점은 “서로 다른 사건을 억지로 하나의 음모로 묶는다”기보다는, 해방 이후 한국의 우익 비밀조직·미국 정보기관·군 정보기관·중앙정보부 사이의 인적·조직적 연속성을 추적해 보는 관점으로 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다만 **“미국 정보기관의 힘을 빌려 여운형·김구를 처형했다 → 그 업보로 10·26이 일어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해석·비유의 영역입니다. 여운형·김구 암살과 미국 정보기관의 구체적인 지휘관계, 그리고 김재규의 10·26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입증된 것은 아닙니다.

    반면 기관과 공간의 연속성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추적할 수 있습니다. 특히 궁정동은 정말 상징적입니다.

    궁정동 안가는 지금 어디인가?

    현재는 서울 종로구 궁정동 55-3 일대의 입니다.

    방향웹사이트전화

    1979년 당시에는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던 궁정동 안가 5채가 있었습니다. 그중 **‘나동’**이 10·26 당시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피격된 만찬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건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 1979년: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
    • 10·26: 나동에서 박정희 피살
    • 이후 안가 철거
    • 1993년 문민정부가 안가들을 철거하고 무궁화동산 조성
    • 현재: 시민에게 개방된 공원

    서울신문 자료에 따르면 당시 안가 전체를 철거하고 약 1만560㎡ 규모의 무궁화동산을 만들었으며, 나동 대연회장이 있던 자리에는 현재 돌담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10·26의 정확한 현장을 찾아가려면 무궁화동산으로 가면 됩니다. 다만 옛 ‘나동’ 건물 자체는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도 재미있는 

    궁정동 안가는 청와대와 아주 가까웠습니다. 당시 안가는 청와대 담장 밖에 있었고, 중앙정보부가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지도로 보면 대략:

    청와대 → 길 건너 궁정동 → 무궁화동산

    구조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옛 안가 5채 중 김재규의 중앙정보부장 집무실 등이 있던 자리까지 현재 청와대 경호처 관련 시설과 연결되는 공간적 흔적이 남아 있다는 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카르마”라는 표현은 역사적 인과관계라기보다는 상당히 강력한 역사적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해방 이후의 폭력적 정치가

    암살·테러 → 방첩·정보조직 → 군사쿠데타 → 중앙정보부 → 고문·공작정치 → 궁정동 안가 → 10·26

    이라는 식으로 이어지는 권력의 공간과 인맥의 변천을 추적해 보면, 역설적으로 10·26은 그 체제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발생했습니다.

    특히 “안가”라는 공간 자체가 상징적입니다. 한때 국가의 적을 제거하기 위한 비밀공작과 정보정치의 세계에 속했던 공간이, 결국 그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던 대통령을 제거하는 장소가 됐으니까요.

    다만 이걸 역사학적으로 말할 때는 **“카르마 때문에 일어났다”**보다는,

    폭력과 비밀공작을 통해 구축된 권력체제가 결국 자신이 만든 비밀공간에서 내부자의 폭력에 의해 붕괴했다

    정도로 표현하면 상당히 강하면서도 역사적으로 방어 가능한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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