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와 에셔

 

에셔는 보르헤스에게서 영감을 받았나?

직접적인 영향관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M. C. EscherJorge Luis Borges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세계를 만들었지만, 에셔가 보르헤스의 책을 읽고 자신의 대표적인 작품을 만들었다는 확실한 전기적 증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에셔의 영향원은 상당히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의 이슬람 기하학 문양입니다. 에셔는 1922년에 처음 알함브라를 방문했고, 특히 1936년 재방문 때 모자이크 패턴을 직접 베끼고 연구했습니다. 이것이 이후 tessellation(평면분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습니다.

또한 그의 이복형 Berend Escher가 지질학·결정학 교수였고, 1937년 에셔에게 결정학 관련 논문들을 제공했습니다. 이것 역시 그의 대칭·평면분할 연구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나중에는 수학자 Roger와 Lionel Penrose의 불가능한 도형 연구와도 직접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Ascending and Descending(1960)은 Penrose의 연구에서 직접적인 자극을 받은 작품입니다.

그런데 둘이 왜 그렇게 비슷해 보이나?

이게 훨씬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서로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거의 같은 철학적 문제를 서로 다른 매체에서 독립적으로 탐구했습니다.

보르헤스에셔
무한한 도서관무한히 반복되는 패턴
미로끝없이 이어지는 계단
현실 속의 또 다른 현실그림 속의 그림
순환하는 시간순환하는 공간
무한무한
자기참조자기참조
꿈과 현실의 경계2차원과 3차원의 경계
역설불가능한 공간

예를 들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이 문학적으로 무한을 구현한다면 에셔의 《Circle Limit》 연작은 시각적으로 무한을 구현합니다.

보르헤스의 **〈갈림길의 정원〉**이 시간의 미로라면 에셔의 **《Relativity》**는 공간의 미로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연대상 문제도 있습니다. 보르헤스의 대표적인 형이상학적 단편들이 주로 1930~40년대에 완성되는 동안 에셔 역시 193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자신의 평면분할과 '정신적 이미지' 방향을 발전시키고 있었습니다. 보르헤스는 1944년 《Ficciones》를 출간했고, 에셔는 1936년 알함브라 재방문 이후 1937년 Metamorphosis I, 1938년 Day and Night 등을 제작했습니다.

그래서 둘의 관계는 **“보르헤스 → 에셔”라기보다 “보르헤스 ∥ 에셔”**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합니다.

보르헤스는 언어로 미로와 무한을 만들었고, 에셔는 그림으로 미로와 무한을 만들었다고 보면 됩니다. 둘 다 1898/1899년생으로 거의 정확히 동시대인이었다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는 우연입니다.

 

 

2. 에셔도 보르헤스처럼 범신론자였나?

에셔를 범신론자(pantheist)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에서는 Jorge Luis BorgesM. C. Escher를 구분해야 합니다.

에셔는 엄격한 종교철학을 체계적으로 주장한 사상가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세계관에는 자연의 질서, 무한, 대칭, 수학적 구조와 우주에 대한 경외감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그것을 곧바로 “신=자연”이라는 스피노자식 범신론이라고 부를 근거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에셔 자신이 반복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질서(order)와 혼돈(chaos)**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규칙성과 질서를 발견하고 그것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강하게 매혹되었습니다.

그래서 작품들을 보면:

《Circle Limit》 → 무한
《Metamorphosis》 → 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환되는 연속성
《Day and Night》 → 대립하는 것들의 상호전환
《Drawing Hands》 → 자기참조
《Relativity》 →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공간
《Ascending and Descending》 →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무한순환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보르헤스와 에셔가 굉장히 가까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 세계는 끝없는 텍스트·미로·거울·꿈처럼 보인다.
에셔: 세계는 끝없는 패턴·변환·대칭·자기참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의 철학적 출발점은 다릅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보르헤스 역시 단순하게 “범신론자였다”고 확정하기에는 복잡한 인물입니다. 그는 스피노자에 깊은 관심과 존경을 보였고 범신론적·관념론적 아이디어를 작품에서 끊임없이 탐구했지만, 하나의 종교적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불가지론, 관념론, 범신론, 신비주의, 기독교 신학 등을 문학적·철학적 가능성으로 가지고 노는 사람에 훨씬 가깝습니다.

그래서 둘을 가장 짧게 대비하면:

보르헤스 = 철학적으로 무한을 사유한 문학가
에셔 = 수학적·시각적으로 무한과 질서를 탐구한 예술가

둘 다 작품에서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질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지만, 둘 다 단순한 의미에서 범신론 교리를 선언한 사상가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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