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용지 부족사태를 둘러싼 독일 vs 한국의 대응방법 by 최진석

 성역은 국가를 무너뜨린다.

민주주의를 측정할 때 우리는 흔히 유권자의 의식 수준이나 정치적 참여도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현실에서 잘 흐르게 만드는 것은 결국 국가의 행정 시스템이다. 아무리 진실하고도 뜨거운 열망을 가진 유권자가 줄을 서 있어도, 그들에게 투표용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바로 그 순간 바로 거기서 폐허다. 우리는 이 당연한 진실을 행정 선진국이라 믿었던 독일의 심장 베를린에서 보았고, 부끄럽게도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보았다. “우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가” 2021년 9월 베를린에서 벌어진 선거 참사는 국제사회에 작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연방 총선과 지방선거, 주민투표가 동시에 치러진 그 날, 수많은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바닥나거나 엉뚱한 선거구의 용지가 배달되는 사고가 속출했다. 급기야 현장에서는 투표용지를 복사기로 복사해 유권자에게 나눠주는 파행이 자행되었고, 공식 마감 시간을 2시간이나 넘겨 출구조사 결과가 방송된 이후에도 투표가 계속되는 촌극이 벌어졌다. 당시 독일 지성인 사회에서는 뼈아픈 자성이 나왔다. 유력 매체들은 일제히 “독일은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나라인가?”라는 자조 섞인 특집 기사를 쏟아냈다. 그것은 과거의 성공과 관행에 안주하다가 국가 운용 역량 자체가 서서히 침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독립성이라는 방패, 내부에서부터 썩어들어간 한국형 성역 독일 베를린과 한국의 선거 부실 사태는 외견상 닮아 보이지만, 그 내부의 구조적 원인은 전혀 다르다. 독일의 선거 관리 기구는 독립된 헌법기관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정부(내무부) 소속의 실무 집행 기관이다. 연방 통계청장이 선거관리위원장을 겸임하고, 주 정부 내무부 소속 관료들이 실무를 맡는다. 그들에게는 치외법권적 독립성이라는 방패가 없다. 베를린의 참사는 관료주의적 타성과 안일함이 낳은 행정 실패였을 뿐이다. 반면, 대한민국의 선거관리위원회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조직의 성역이다. 우리 선관위가 이토록 무소불위의 독립성을 보장받게 된 데에는 역사적 트라우마가 있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내무부를 통해 자행한 3·15 부정선거의 비극을 겪은 후, 행정부의 개입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1963년 헌법을 통해 사법·입법·행정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초연한 독립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권력의 개입을 막으라는 이 숭고한 취지는 그러나, 60년이 흐르는 동안 외부의 감시와 비판을 원천 차단하는 폐쇄적 요새로 변질하였다. 최근 드러난 대한민국 선관위의 실태는 충격적이다. 선거 관리가 존재 이유인 조직에서, 전국 단위 선거라는 가장 엄중한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휴직을 감행하는 행태가 지난 10년간 관행처럼 반복되어 왔기 때문이다. 가장 업무가 집중되고 책임이 무거워지는 비상시에, 법적으로 보장된 휴직 제도를 방패 삼아 집단으로 이탈해 온 것이다. 2022년 최악의 부실 관리로 꼽힌 소쿠리 투표 사태 때도, 그리고 최근 91개 투표소에서 투표용지가 고갈되는 초유의 참사가 발생한 선거 직전에도 휴직자 수는 어김없이 급증했다. 중앙선관위가 내부적으로 불필요한 휴직을 자제하라고 공지했음에도 이 현상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이미 이 조직이 내부 통제력과 기강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증명한다. 외부의 엄격한 감사와 국정감사를 독립성 훼손이라며 완강히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성역에 안주해 온 결과, 조직 내부가 얼마나 고인 물이 되었고 공적 책임감이 얼마나 처참하게 마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실증적 증거다. 더 큰 문제는 소쿠리 투표나 투표용지 고갈 같은 참혹한 문제가 구체적으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차원의 준엄한 조사나 실효성 있는 조치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독일은 선거 참사 직후 행정 책임자가 사퇴했고, 주 헌법재판소와 연방 헌법재판소가 1년 반이 넘는 지난 한 심사 과정을 거쳐 전면 무효 및 재선거라는 칼날 같은 처방을 내리며 훼손된 시스템을 스스로 가꾸고 복원해 냈다. 반면 우리 사회는 어떠했는가. 그저 부정선거냐 아니냐는 프레임에 갇혀 결과 없는 악다구니를 쓰느라, 정작 저 단단하게 성역화된 요새 내부를 들여다볼 실질적인 샛길을 내는 노력조차 하지 못했다. 시스템의 고장을 눈앞에 두고도 사법적·정치적 복원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자체가 바로 국가가 작동을 멈추었다는 결정적 증거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거대한 체계는 왜 이토록 무력하게 작동을 멈추어 버린 것일까? 그 해답은 성역의 본질에 있다. 성역이 문제인 이유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 수 없고, 또 무슨 일을 꾸미는지를 전혀 알 길이 없다는 데에 있다. 성역 내의 존재들은 애써 비틀고 감추려 드는 것이 있다. 인류 문명사는 인간의 사유를 가로막고 행동을 제약하던 성역을 허물어뜨리고, 그 자리에 인간의 주체성과 사유의 영토를 넓혀온 과정이다. 현대 사회에서 성역을 두는 것은 과거의 원시적 형태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이는 성역을 두어야 이익을 보는 집단이 있다는 뜻이다. 이 집단은 길을 여는 일보다, 길을 막거나 왜곡하는 데에 열을 올린다. 성역화는 독재의 길, 자유민주주의 작동의 큰 장애 국가라는 거대한 유기체가 제대로 숨을 쉬며 작동하려면 모든 기관이 서로 신호를 주고받으며 유기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어느 한 조직이 “우리는 신성불가침한 존재”라며 스스로를 성역화하는 순간, 그 조직은 전체 시스템의 흐름을 막아서고 민주주의의 근간을 갉아먹는 거대한 암세포가 되고 만다. 헌법상 독립기구라는 숭고한 개념은 조직의 나태함과 특권을 지키는 방패막이가 아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절제와 사명감, 그리고 엄격한 공적 책임을 다할 때만 그 정당성이 유지된다. 본업을 회피하는 직원들이 선거 때마다 짐을 싸서 휴가를 떠나고, 그 대가로 국민이 기본권을 침해받는 시스템은 이미 붕괴한 시스템이다. 이제 외부의 객관적인 메스를 들어 성역을 깨뜨려야 한다. 통제받지 않는 성역은 결코 유기적 국가 시스템의 일원이 될 수 없으며, 시스템이 계속해서 작동하게 하려면 국가 운용 체계 내에 그 어떤 성역도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 성역은 선관위 한 곳뿐인가?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국가 기관을 임의로 해체하려 드는 것도 자신을 스스로 성역화하는 일이다. 민주국가에서 법 위에 군림하려 드는 일은 다 자신을 성역화하는 일이다. 역사를 법으로 울타리 쳐두고, 울타리 안에 대하여 자유롭게 왈가왈부하는 것을 골라서 허용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유공자 명단을 아무도 모르게 감춰두는 것도 성역화의 행태다. 베를린의 선거 참사를 두고 독일 사법부가 “독재 국가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라 일갈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문명사회에서 특정 집단이 스스로를 성역화하거나 법 위에 군림하려 드는 시도는, 예외 없이 독재와 전체주의로 가는 길을 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껍데기 제도만 수입한다고 시스템이 복원되지 않는다. 제도는 조문이 아니라 그것을 운영하는 사회의 치열한 사유와 합의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가?”라는 독일 지성들의 한탄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가?”라는 서글픈 질문이 될 것이다.(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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