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왕조 교체기 시기 공무원들의 운명: 하급 관리와 이서(胥吏)층: "왕조는 바뀌어도 행정은 멈추지 않는다" /고위 관료층: "능력만 있다면 철새도 환영" (사례: 5대 10국의 풍도)

 

질문하신 "중국 왕조 교체기 시기 공무원들의 운명"에 대해서도 아주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상층부는 피바람과 물갈이, 하급·실무 인력은 대부분 유지"였습니다.

과거 중국에서 왕조가 바뀔 때 공무원 조직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3가지 핵심 시스템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1. 하급 관리와 이서(胥吏)층: "왕조는 바뀌어도 행정은 멈추지 않는다"

중국 역사에서 왕조가 아무리 자주 바뀌어도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리(향리, 이서)들은 거의 물갈이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 이유 1 (전문성): 세금을 걷고, 호적을 관리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일은 고도의 현장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새로 권력을 잡은 황제나 군벌이 낙하산으로 자기 사람들을 다 앉히고 싶어도, 그 지역의 토지 대장과 세금 제도를 아는 기존 실무자들이 없으면 당장 국가 운영이 마비됩니다.

  • 이유 2 (지역 유착): 중국은 땅이 너무 넓어서 중앙에서 보낸 지방관(수령) 혼자서는 통치가 불가능했습니다. 대대로 그 지역에서 서류 작업을 도맡아 하던 '이서(아전)' 계급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조가 당나라에서 5대 10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로 바뀌어도 직업을 잃지 않고 그대로 대물림하며 일했습니다.

즉, 백성들 입장에선 "위에 사장님(황제)은 바뀌었는데, 동사무소 직원(이서)은 그대로인 상황"이 반복된 것입니다.


2. 고위 관료층: "능력만 있다면 철새도 환영" (사례: 5대 10국의 풍도)

고위 공무원(재상, 장관 급)들은 왕조가 바뀔 때 목숨을 잃거나 숙청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능력이 출중하고 행정 장악력이 뛰어난 고위 관료들은 새 왕조에서도 모셔갔습니다.

가장 극단적이고 유명한 인물이 중국의 혼란기였던 5대 10국 시대의 풍도(馮道)라는 인물입니다.

  • 그는 왕조가 수없이 바뀌는 70여 년 동안 무려 4개의 왕조, 10명의 황제를 섬기며 거의 평생 재상(총리)을 지냈습니다.

  • 유교적 관점에서는 '지조 없는 변절자'라고 욕을 먹기도 했지만, 왕조가 바뀔 때마다 새 황제들이 그를 쓴 이유는 "그만큼 행정을 완벽하게 처리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대체 불가능한 탑클래스 관료"였기 때문입니다. 새 왕조 입장에서도 국가를 빨리 안정시키려면 검증된 베테랑 고위 공무원이 필요했습니다.


3. 이민족 왕조(원, 청)의 선택: "지배는 우리가, 실무는 한족이"

중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왕조 교체는 한족 왕조가 무너지고 만주족(청나라)이나 몽골족(원나라) 같은 이민족이 들어설 때였습니다. 이때도 공무원 조직은 유지되었습니다.

  • 청나라의 '신사(紳士)층' 포섭: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 후, 명나라의 기존 고위 공무원들과 지식인들에게 "머리만 만주족 스타일(변발)로 깎고 복종하면, 신분과 관직을 그대로 유지해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 소수의 만주족(약 100만 명)이 수억 명의 한족을 통치하려면 기존의 유능한 한족 공무원 시스템을 그대로 흡수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 요약하자면

과거 중국에서 왕조가 바뀔 때, 권력의 핵심인 초고위 정치인들은 숙청되거나 교체되었지만, 국가의 뼈대를 지탱하는 중하급 행정 공무원들은 90% 이상 그대로 고용 승계되었습니다.

결국 정치는 칼과 피로 이루어졌지만, 나라를 굴리는 행정의 세계는 철저히 실리와 전문성으로 움직였던 셈입니다.

 

 

 

영문의왕
馮道 | 풍도
1564328929
영문의왕(瀛文懿王)
출생
882년
사망
954년 4월
재임
오대의 재상
927년 ~ 954년



















1. 소개2. 생애3. 평가
3.1. 풍도에 대한 언사
4. 기타5. 둘러보기

1. 소개[편집]

중국 오대십국시대의 정치가.

많은 왕조가 흥망하는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서도 변함없이 재상의 자리를 보존한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하며 자는 가도(可道)였다. 무려 5개 왕조(후당, 후진, 요나라, 후한, 후주) 11명[1]황제[2] 밑에서 재상을 지냈다. 한마디로 나라와 황제는 계속 바뀌는데 재상은 그것과 아무 상관 없이 계속 풍도였던 것이다.[3]

2. 생애[편집]

풍도는 당나라 말기 희종의 치세였던 882년, 영주(瀛州) 경성(景城)[4]의 한 평범한 가문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과 작문에 능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훗날 연나라를 세운 유주절도사 유수광의 휘하에서 처음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 유수광이 다른 고을을 침공하는 것을 막으려고 간언하다가 옥에 갇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풍도가 이후 정계에서 몸을 사리며 시류에 영합하는 움직임으로 일관한 것도 당시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914년, 유수광이 사타족 출신의 진왕 이존욱에게 멸망당하자 당시 이존욱이 통치하던 진양[5]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이존욱 휘하의 환관인 감군사 장승업과 만나게 되었는데, 장승업은 풍도의 재능을 높이 샀는지, 그를 후원하여 관료로 등용했다. 923년,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하여 황제에 등극하자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여 몇 년 후인 927년, 사타족 장수 이사원이 쿠데타로 장종 이존욱을 몰아내고 명종으로 즉위한 후에는 그 지위가 재상에 이르렀다.

명군이었던 명종 이사원의 뒤를 이어 이종후가 즉위했으나, 고작 재위한 지 1년이 지난 934년, 이종가에게 찬탈당했다. 풍도는 그 과정에서 이종가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이후 936년, 사타족 출신 하동절도사 석경당의 쿠데타로 거란군에 의해 후당이 멸망하고 후진이 건국되자 풍도는 또다시 석경당에게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풍도는 고조 석경당의 명을 받들어 요 태종 야율덕광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2개월 동안 머물렀다. 요 태종은 풍도의 명망을 잘 알고 있어서 그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했지만, 풍도는 매우 겸손한 태도로 일관하며 이를 완곡한 태도로 거절하고는 후진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석경당은 풍도를 무척 신뢰하게 되어 반드시 그와 국정을 논의했다.

942년, 석경당은 중병으로 죽음을 목전에 앞두게 되자 풍도를 호출하여 자신의 어린 아들인 석중예의 후사를 부탁했다.[6] 그러나 석경당이 붕어한 후, 풍도는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어린 석중예 대신 석경당의 장성한 조카인 석중귀를 황제로 옹립했다.

946년, 출제 석중귀는 요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나 참패했고, 이로 인해 요 태종이 군사를 거느리고 반격해와 후진의 수도인 개봉이 함락당하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요 태종은 풍도와 재회하여 그를 태부에 임명했다. 풍도는 요나라 군사들이 중원의 한족 백성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는 이를 멈춰줄 것을 간했고, 요 태종은 그의 말을 따라주었다.[7]

그러나 이듬해인 947년, 사타족 장수인 하동절도사 유지원후한을 건국하여 거란족의 지배에 대해 항전하자, 고립될 위기에 처한 요 태종은 북쪽으로 철군했다. 풍도 또한 이 행렬을 따라가 북쪽으로 이동하던 와중에 요 태종이 병으로 붕어하자 장례식을 틈타서 한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풍도는 여러 대신들과 함께 이에 합세하여 격려했고, 요 태종의 행렬은 북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풍도를 비롯한 후진의 대신들은 유지원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후 고조 유지원이 짧은 재위 끝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유승우가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런데 950년, 은제 유승우가 강력한 권력을 지닌 개국공신들을 숙청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개국공신들 중에서도 가장 명망높았던 추밀사 곽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유승우를 제거하고 후주를 건국했다. 풍도는 곽위에게도 등용되어 후주의 재상으로 발탁되었으며 그를 위해 일했다.

954년, 태조 곽위가 붕어하자 그의 양자였던 곽영(시영)이 뒤를 이어 후주의 제2대 황제가 되었다. 시영이 즉위하자마자 북한유숭거란과 결탁하여 40,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고 침공해왔는데, 이에 세종 시영은 자신이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퇴하고자 했다. 이때 풍도는 아직 나라가 안정되지도 않았는데 군주가 직접 출전할 수는 없다고 말하며 장수를 파견할 것을 간했으나 세종은 뜻을 꺾지 않았다. 신하들은 모두 세종의 뜻에 따랐으나, 풍도는 끝까지 세종의 출전에 반대하며 언쟁을 벌이기까지 했다.[8] 결국 세종은 직접 출전하여 유숭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9]

그럼에도 세종은 풍도의 능력과 인품을 높이 사서 중용했다. 그러나 이미 고령의 나이였던 풍도는 세종이 유숭을 격파한 지 몇달 후에 73세의 나이로 숨울 거두었다. 세종은 풍도의 죽음에 크게 낙심하여 3일간 조례를 금하며 풍도의 죽음을 애도했다. 풍도는 사후에 영왕(瀛王)으로 추증되었으며, 문의왕(文懿王)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3. 평가[편집]

풍도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리는 편이다.[10] 지조나 염치도 없이 오로지 일신의 안녕만을 위해 주인을 수없이 갈아치운 간신배로 여겨지기도 하고, 혹은 처세의 달인이자 군주보다는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한 뛰어난 재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보더라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 풍도의 평가를 다채롭게 하고 있다. 물론 충효론이나 화이론이 대세였던 전근대에는 비평적인 논조가 주를 이루지만, 현대에서는 정치가적인 면이 더 부각되었다. 이 때문에 본 문서도 긍정적인 논조가 주를 이룬다.

풍도가 이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함부로 정적을 만들지 않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면밀하게 관찰하다가 왕조가 바뀌면 잽싸게 갈아타주며, 강자 앞에서는 넙죽 엎드려서 간도 쓸개도 빼다 바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사신으로 요나라에 갔을 때 요 태종에게 "소인은 재주도 덕도 없는 어리석은 늙은이일 뿐입니다."라고 말했던 일화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다.

그러나 풍도가 5대의 황제들에게 중용되었던 것을 단순히 비굴한 모습을 보여주기만 했기 때문이라고 보기에도 어폐가 있다. 당시의 황제들이라고 풍도가 주인을 수차례 바꾸었음을 모를 리가 만무했겠으나, 그들은 한결같이 풍도를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으로 중용해 자신 다음의 실권자로 선택했다. 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풍도가 지닌 정치가이자 관료로서의 능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다. 또한 풍도는 정말로 필요한 상황에서는 후환을 무릅쓰고 간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요 태종 야율덕광의 밑에 있었을 때 그의 거란족 부하들이 백성들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일을 그만 두도록 간언하여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고, 후주의 명군인 세종 시영을 보좌할 때는 젊은 황제의 심기를 팍팍 거스르는 말을 날리면서까지 북방으로의 친정을 반대했다.

이처럼 풍도는 난세를 맞아 몸보신을 하는 재능과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으며, 국가의 일을 잘 처리하여 민생을 보살피는 데도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위가 충성과 지조를 중시하던 당대의 가치관이나 윤리관에 들어맞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5개의 왕조를 거치면서 왕조마다 충성을 다짐했을 터이니 이런 부분에서 겸연쩍어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덕망이나 명성이 높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언해야 할 수준의 군주가 과연 옳은 길을 가르쳐 준들 반성하고 자기의 행동을 고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세상사 이치를 통달한 사람이니 그런 사람도 잘 다뤄서 '목숨 걸고 개과천선을 시켜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라고 비판한다면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닐지...

기본적으로 풍도는 국가나 군주의 가치를 당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생활했던 선비들에 비해서는 크게 여기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군주가 바뀌든 왕조가 바뀌든 풍도는 그저 적당하게 이용해 먹을 만한 군주나 왕조면 이용해 먹었고, 그게 안 될 때 버릴 수 있으면 버리는 사람이었다. 다만 풍도가 그렇게 지조 없는 행동을 하면서 '자기 목숨의 보신'만큼이나, 그리고 어찌 보면 그 이상으로 '백성의 안녕'을 추구한 관료라는 게 당시 관료로서는 굉장히 특색 있는 점이었다. 그리고 당장 목숨을 걸어야 할 만한 일에는 대범하게 목숨을 걸기도 했다. 출제 석중귀의 배반으로 빡친 요나라 태종의 학살을 막으면서 '지금 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건 부처님도 아니고 오직 폐하 한 분 뿐이십니다'라며 태종의 마음을 움직인 일이 과연 만만하게 웃으면서 할 만한 일이었을까? 저 행동이야말로 진짜 목숨을 걸고 제대로 간언을 한 것이었다. 분명히 조위가후처럼 스스로의 보신만을 위해서 재주를 부린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는 증거다.

후대의 선비들은 이 일을 들어서 염치도 지조도 자존심도 없이 오랑캐 황제에게 굽힌 행위라고 풍도를 비난했지만, 저 행위가 비난받을 행위도 아니었고 분명 목숨을 걸어 학살을 막고 많은 인명을 구한 행위였다는 것, 명분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잘못되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것은 현시대 사람들의 가치관뿐 아니라, 동시대 사람들의 가치관으로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풍도의 능력만큼이나 그의 인품이나 덕망을 당대 사람들이 칭찬하지는 않았을 테니....[11]

풍도가 군주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엎드려 기다가, 혹은 지조 없이 모시는 군주를 바꾸다가 하면서 했던 일이라는 게 백성들의 삶에는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 많았다. 당장 요 태종의 학살을 막기 위해서 했던 저 아부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저런 처세의 목적 자체가 자기의 보존이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을 위한 일이었던 사례도 분명히 있었다. 비판자들도 인정하듯 당장 금전적으로도 청렴했고, 자신의 것을 털어서 구호하는 데도 아낌이 없는 사람이 풍도였다. 그러니 풍도를 '사직과 군주를 구분하여 충성하며 백성을 생각한 사람'이라고 호평한 명대 이탁오의 평가가 크게 틀린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5대 당대에 인정이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보면 저 평가가 유독 이탁오라는 튀는 지식인의 평가만도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2] 실제로 오대십국시대는 그 기간도 70여 년이어서 짧았거니와 다른 난세들과 비교해 보면 대규모 학살이나 유랑이 적은 시대였다. 거기에 풍도라는 사람의 캐릭터가 기여한 바가 제법 컸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보신에 능했던 많은 이들과는 달리, 풍도는 개인적으로 검소함과 청렴함을 실천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평소에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재상을 지낼 적에는 황제가 하사하는 재물조차도 받기 꺼려 했다.[13] 벼슬을 지내면서도 검소하여 몸소 농사를 짓고 땔감을 마련했으며, 기근이 들면 재산을 풀어 어려운 사람들을 구휼했고,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북송시대《신오대사》를 편찬했던 구양수는 <풍도 열전>을 서술하면서 풍도의 행적에 대해 염치도 없다며 비난을 퍼부었으나[14], 그러면서도 그의 청렴결백한 면모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록했다.

어떻게 보면 격동기였던 진말한초 시기의 유학자 숙손통과도 닮았다. 풍도와는 달리 숙손통은 유학자였음에도 돌아가며 섬긴 군주가 10여 명이었으며, 필요할 때는 아첨도 하고, 예(禮)도 황제의 취향에 맞게 간소화하는 등 현실을 더 중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풍도의 행보가 백성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숙손통도 유학자로서는 조금 결격 있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원칙만큼은 칼같이 고수해서 한태조가 황태자 교체를 꾀하려고 했을 때, 그럴 거면 자신을 죽이고 행하시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하게 나선 적도 있었다.

3.1. 풍도에 대한 언사[편집]

풍도의 이행(履行: 풍도가 행한 바들을 말하는 듯 하다.)은 그윽하여 옛 사람의 풍격이 서려있고 풍도의 도량은 깊어서 큰 신하의 예를 얻었다. 하지만 풍도는 4개의 왕조를 섬겨 여섯 황제의 재상이 되었으니, 충(忠)을 행했겠는가! 무릇 한 여자가 두 지아비를 섬기는 것은 인간의 불행인데, 하물며 3번 바꾼 자도 그러하겠는가! 죽은 자의 최후를 장식하는 의식에서 문정(文貞)이나 문충(文忠)의 시호를 받지 못하는 까닭은 대개 풍도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오대사》의 저자 설거정[15]
뻔뻔한 인간이다!

신오대사》의 저자 구양수
그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남을 편안히 한 것은 부처나 보살의 행동과 같다.

북송의 개혁 정치가 왕안석
그가 여러 왕조를 받들며 핵심지위를 장악하고 이를 자랑한 것[16]은 절조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간신의 표상이다.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
백성들이 고통을 벗어난 것은 그가 부양에 힘쓴 탓이다.

명나라 시대의 사상가 이탁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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