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모든 분쟁의 원흉이자 진정한 악의 축 영국 2: 영국에 의해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분할 당시에는 동파키스탄)의 국경선인 ‘래드클리프 라인(Radcliffe Line)’이 만들어진 과정 = 인도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법률가에게 전권 위임 / 영국이 인도 대륙을 지배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는 것. 실제로 1857년 세포이 항쟁 때 두 종교가 연대하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의도적으로 두 집단을 이간질하기 시작. 이른 바 분할통치 전략.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국민회의'가 민족 운동을 이끌자, 영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교도들을 부추겨 '전인도무슬림연맹'을 만들도록 지원. /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영토분쟁 원흉도 영국의 듀랜드 라인 / 오늘날 중동 비극의 뿌리인 중동의 비극: 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 역시 영국이 원흉 / 아프리카 비극의 원흉도 영국 - 1884년 베를린 회의를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등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종족, 언어, 문화, 역사적 경계선을 완전히 무시 / 중국, 인도를 아편으로 병들게 한 것도 모잘라 한반도를 얄타회담 때 두개로 나눌 계획을 세운 것도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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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모든 분쟁의 원흉이자 진정한 악의 축 영국 2: 영국에 의해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분할 당시에는 동파키스탄)의 국경선인 ‘래드클리프 라인(Radcliffe Line)’이 만들어진 과정 = 인도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법률가에게 전권 위임 / 영국이 인도 대륙을 지배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는 것. 실제로 1857년 세포이 항쟁 때 두 종교가 연대하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의도적으로 두 집단을 이간질하기 시작. 이른 바 분할통치 전략.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국민회의'가 민족 운동을 이끌자, 영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교도들을 부추겨 '전인도무슬림연맹'을 만들도록 지원. / 오늘날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영토분쟁 원흉도 영국의 듀랜드 라인 / 오늘날 중동 비극의 뿌리인 중동의 비극: 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 역시 영국이 원흉 / 아프리카 비극의 원흉도 영국 - 1884년 베를린 회의를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등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종족, 언어, 문화, 역사적 경계선을 완전히 무시 / 중국, 인도를 아편으로 병들게 한 것도 모잘라 한반도를 얄타회담 때 두개로 나눌 계획을 세운 것도 영국

 

니카라과의 반군 조직 콘트라는 친미, 반공 성향?

네, 맞습니다! 니카라과의 반군 조직인 콘트라(Contras)는 확실한 친미이자 반공 성향의 조직이었습니다.

이들이 왜 그런 성향을 가졌는지 핵심만 간단히 정리해 드릴게요.

1. 탄생 배경: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려라"

1979년 니카라과에서는 좌익 성향의 산디니스타 혁명정부(FSLN)가 들어섰습니다. 이들은 쿠바, 소련 등 공산권 국가들과 밀착하며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는데요. 이에 반발한 구정권(소모사 독재 정권)의 군인들과 우익 세력, 그리고 산디니스타 정권에 실망한 반대파들이 모여 만든 반군 연합체가 바로 '콘트라'입니다. (스페인어로 '반대'를 뜻하는 'contra-'에서 유래했습니다.)

2.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 (친미의 이유)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 정부는 중남미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레이건 대통령은 콘트라 반군을 "자유의 전사들(Freedom Fighters)"이라고 부르며 대규모 자금과 무기, 군사 훈련을 지원했습니다.

3. 역사적 사건: 이랑-콘트라 스캔들

미국 의회가 콘트라 반군에 대한 지원을 법으로 금지(볼랜드 수정안)하자, 레이건 행정부는 비밀리에 적국이었던 이라크와 전쟁 중이던 이란에 무기를 밀수출하고, 그 대금으로 콘트라 반군을 우회 지원하는 막장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이란-콘트라 스캔들'입니다.


요약하자면:

콘트라는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니카라과의 좌익 공산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싸웠던 전형적인 냉전기 친미·반공 게릴라 조직이었습니다.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 국경선이 지어진 배경에 영국이 개입한 악독한 짓은?

인도,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분할 당시에는 동파키스탄)의 국경선인 ‘래드클리프 라인(Radcliffe Line)’이 만들어진 과정은 세계 역사상 손에 꼽히는 영국 제국주의의 치명적인 흑역사이자 무책임의 극치였습니다.

영국이 저지른 이른바 '악독한 짓'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인도 땅을 밟아본 적도 없는 법률가에게 전권 위임

영국 정부는 국경선 획정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시릴 래드클리프(Cyril Radcliffe)라는 영국인 변호사를 임명했습니다. 문제는 이 사람이 인도에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고, 인도의 문화, 종교적 갈등, 지리적 특성에 대해 무지한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영국은 그가 인도에 연고가 없으니 "중립적일 것"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그를 발탁했습니다.

2. 단 '5주' 만에 8,800만 명의 운명을 결정

당시 분할해야 할 영토는 약 45만 (한반도의 2배 이상), 엮여 있는 인구는 8,800만 명에 달했습니다. 수백 년간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도가 한마을에서 뒤섞여 살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총독 마운트배튼은 철수 일정을 대폭 앞당겼고, 래드클리프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주(36일)였습니다.

3. 지도와 펜만 가지고 그어버린 '탁상행정'

현장 조사는 당연히 불가능했습니다. 래드클리프는 에어컨도 잘 나오지 않는 방에 박혀 낡은 지도와 부정확한 인구 조사 자료(1931년 자료)만 보고 펜으로 쓱쓱 선을 그었습니다. 그 결과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까요?

  • 한마을이 반으로 쪼개졌습니다.

  • 어떤 집은 안방은 인도, 부엌은 파키스탄이 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 철도, 도로, 수로(인프라)가 뚝뚝 끊겨 농민들은 졸지에 물줄기를 잃거나 농토로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4. 폭동을 피하려 독립 이틀 뒤에 국경선 발표

가장 악독하고 비겁했던 점은 국경선 발표 시점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미 독립일(1947년 8월 15일) 전에 국경선을 다 그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선이 공개되면 피비린내 나는 종교 폭동이 일어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폭동이 나더라도 독립시킨 후에 터져야 영국 책임이 아니다"라는 계산하에, 독립 이틀 뒤인 8월 17일에야 국경선을 기습 발표했습니다.


그 결과가 가져온 대참사

자신이 어느 나라 국민이 되었는지도 모른 채 독립을 맞이한 사람들은 이틀 뒤 지옥을 마주했습니다. 힌두교도가 다수인 지역에 고립된 무슬림, 무슬림이 다수인 지역에 갇힌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살아남기 위해 짐을 싸고 국경을 넘어야 했습니다.

이 대혼란 속에서 종교 간 학살과 보복이 종잡을 수 없이 터졌고, 최소 50만~10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1,200만 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평화 시기에 일어난 가장 거대한 비극 중 하나였습니다.

정작 국경선을 그은 래드클리프는 이 참상을 보고 죄책감과 공포를 느껴 자신이 받을 급여(4만 루피)도 거부한 채 모든 서류를 불태우고 영국으로 도망치듯 떠났으며, 평생 인도를 다시 찾지 않았습니다. 이때 영국이 남긴 무책임한 칼질은 오늘날까지도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인도-방글라데시의 국경 분쟁의 씨앗이 되어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의 피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왜 분리된 걸까? 피로 그은 국경선, 래드클리프 라인 이야기! 영국이 저지른 졸속 국경선 획정 과정과 그로 인해 발생한 인도·파키스탄 분단의 비극적인 역사를 시각적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영상입니다.

독립 이후 영국이 이 두 나라로 분할한 이유는?

영국이 인도를 단일 국가가 아닌 인도(힌두교 중심)와 파키스탄(이슬람교 중심, 당시 방글라데시 포함) 두 나라로 쪼개서 독립시킨 데에는 영국의 철저한 정략적 계산과 무책임이 깔려 있었습니다.

크게 세 가지 결정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1. 영국의 전통적인 통치 수법: "분할통치 (Divide and Rule)"

영국이 인도 대륙을 지배하면서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힌두교도와 무슬림이 힘을 합쳐 영국에 대항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1857년 세포이 항쟁 때 두 종교가 연대하자 위협을 느낀 영국은 의도적으로 두 집단을 이간질하기 시작했습니다.

  • 힌두교도 중심의 '인도국민회의'가 민족 운동을 이끌자, 영국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이슬람교도들을 부추겨 '전인도무슬림연맹'을 만들도록 지원했습니다.

  • 수백 년간 이웃으로 잘 살던 두 종교 집단 사이에 "저들이 권력을 잡으면 너희는 탄압받을 것"이라는 공포와 증오의 씨앗을 뿌린 주범이 바로 영국이었습니다.

2.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먹튀' 계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전쟁으로 인해 나라 살림이 완전히 거덜 난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거대한 인도 대륙을 통치할 재정적·군사적 여력이 없었죠. 인도 내부에서 독립 요구가 폭발하자 영국은 "최대한 빨리, 우리 군인들이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철수하는 것"만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습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지도자 간의 합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영국은 중재를 포기하고 "그럼 그냥 땅을 반으로 쪼개서 각자 독립해라"라며 무책임하게 손을 떼버린 것입니다.

3.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요구와 영국의 방조

인도 내부의 정치적 상황도 한몫했습니다. 무슬림 연맹의 지도자였던 무하마드 알리 진나는 힌두교도가 압도적인 다수인 인도에서 독립하면 무슬림들이 2등 시민으로 전락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는 이슬람교도만의 독립 국가인 '파키스탄'을 세워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두 민족론)했습니다.

간디와 네루 등 인도국민회의 지도자들은 끝까지 분단을 반대하며 단일 국가를 원했지만, 영국의 마지막 총독 마운트배튼은 갈등을 조율하기보다 진나의 분리 독립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빠른 철수 방법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영국은 통치 기간 내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을 조장했고, 막상 떠날 때가 되자 그 갈등을 해결할 책임감도 없이 "너희끼리 알아서 찢어져서 살아라"라며 지도에 선만 긋고 도망치듯 떠난 것입니다. 이로 인해 거대한 단일 대륙이었던 인도는 동·서로 쪼개진 파키스탄과 인도로 분단되는 기형적인 형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는 언제 분리되었고 영국은 어떤 책임이 있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분리된 사건은 1971년에 일어난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입니다.

원래 방글라데시는 1947년 인도 분단 당시 ‘동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파키스탄의 일부였습니다. 하지만 약 1,600km나 떨어진 인도 대륙을 사이에 두고 서파키스탄(현 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을 지독하게 차별하고 탄압하면서 결국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비극적인 분리 과정에도 영국의 무책임한 과거 통치와 졸속 분단 정책이 깊은 뿌리로 작용했습니다.


1. 두 나라의 분리 과정 (1971년)

1947년 독립 당시, 영국은 오직 '종교(이슬람교)'가 같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지리적으로 완전히 떨어져 있고 언어와 문화가 아예 다른 두 지역을 묶어 '파키스탄'이라는 하나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을 철저히 2등 국민으로 취급했습니다.

  • 문화적 탄압: 동파키스탄인들의 모국어인 벵골어를 무시하고, 우르두어만 공식 국어로 강요했습니다.

  • 경제적 착취: 동파키스탄이 수출(황마 등)로 벌어들인 돈을 서파키스탄의 발전에만 쓰고, 정작 동파키스탄에는 거의 투자하지 않았습니다.

  • 대량 학살: 참다못한 동파키스탄이 1971년 독립을 선언하자, 서파키스탄 군대는 동파키스탄 민간인을 수십만 명 이상 학살(벵골인 제노사이드)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인도가 동파키스탄을 지원하며 전쟁에 개입했고, 서파키스탄이 항복하면서 1971년 12월, 방글라데시가 최종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2. 영국의 책임은 무엇인가?

방글라데시가 겪은 이 비극에 대해 영국은 절대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① 지리적·문화적 현실을 무시한 '기형적 국경선'

영국이 철수할 때 만든 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인도라는 거대한 땅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1,600km나 떨어져 있는 기괴한 형태였습니다. 두 지역은 이슬람교라는 종교만 같을 뿐, 인종(펀자브인 vs 벵골인), 언어(우르두어 vs 벵골어), 문화, 기후가 완전히 다른 남남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러한 현실을 뻔히 알면서도 "이슬람교도 구역은 다 파키스탄"이라는 단순하고 무책임한 논리로 땅을 쪼개어, 훗날 내전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② 갈등을 방치하고 도망친 '기한 단축'

당시 영국의 마지막 총독 마운트배튼은 원래 1948년 6월까지 인도의 전후 수습과 이주 대책을 세우며 천천히 철수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도 내부의 종교 갈등이 심해지고 영국 자체의 재정 부담이 커지자, 독립 일정을 무려 10개월이나 앞당겨 1947년 8월에 번개불에 콩 볶아먹듯 철수해 버렸습니다. 이 과정에서 동·서파키스탄 간의 권력 분배나 소수민족 보호에 대한 세부적인 법적·정치적 안전장치는 전혀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③ 의도적인 민족 분열 정책의 부메랑

영국은 인도 대륙을 통치하는 내내 벵골 지역(현 방글라데시)의 민족주의 운동을 억누르기 위해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를 의도적으로 이간질했습니다(예: 1905년 벵골 분할령). 이 과정에서 지역 간, 종교 간 감정의 골이 깊어졌고, 결국 독립할 때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를 만들어 분단과 재분단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한 줄 요약하자면:

영국은 종교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 지리적·문화적으로 도저히 섞일 수 없는 두 지역을 억지로 한 나라(파키스탄)로 묶어놓고 도망쳤고, 그 무책임의 대가는 1971년 수많은 방글라데시인의 피로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영국이 래드클리프라는 문외한 변호사를 래드클리프 라인을 긋게 한 이유는?

영국이 인도 대륙의 운명을 가를 국경선 획정 위원장 자리에 인도에 가본 적도 없고 지리도 모르는 변호사 시릴 래드클리프를 앉힌 것은, 철저히 영국의 이기적인 정치적 계산과 면피(책임 회피)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영국이 왜 이런 황당한 인사를 감행했는지 세 가지 결정적인 이유를 정리해 드립니다.


1. "아무도 모르니 오히려 공정하다"는 황당한 논리

당시 인도의 두 주류 세력이었던 힌두교(인도국민회의)와 이슬람교(무슬림연맹)는 국경선 문제를 두고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인도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인물을 위원장으로 세웠다간, 어느 한쪽 편을 들었다는 거센 반발에 부딪힐 게 뻔했죠.

이에 영국의 마지막 총독 마운트배튼은 기막힌 꼼수를 냅니다. "인도에 연고도 없고, 인도 사정을 아예 모르는 사람을 데려오면 편파성 시비는 없지 않겠느냐"는 논리였습니다. 결국 인도에 아무런 이권도, 인맥도, 지식도 없는 래드클리프가 '백지상태에서 공정하게 선을 그을 적임자'로 낙점된 것입니다.

2. 총대를 매고 책임져 줄 '영국인 희생양' 필요

독립 이후 국경선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종교 폭동이 일어날 것은 영국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 엄청난 비극의 화살을 피해 갈 '독립된 제3자'가 필요했습니다.

정치인이 아닌 법률가 출신의 래드클리프를 내세워 "우리는 법률 전문가에게 전권을 맡겨 공정하게 처리했다"는 명분을 만들고, 훗날 문제가 생기면 모든 비난을 그 개인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실제로 래드클리프는 영국 정부의 방패막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평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3. 말 잘 듣고 군말 없이 '5주 마감'을 맞출 인물

당시 영국 정부의 최우선 과제는 "무조건 빨리 짐 싸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인도 지리에 밝거나 역사적 맥락을 잘 아는 전문가가 위원장이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이 상태로는 몇 년이 걸려도 제대로 된 국경을 못 긋는다", "현장 조사를 해야 한다"며 영국의 철수 일정에 제동을 걸었을 것입니다.

반면 래드클리프는 철저한 관료형 법률가였습니다.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모른 채, 영국 정부가 지시한 "5주 안에 무조건 선을 그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군말 없이 수행할 통제 가능한 인물이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영국이 문외한인 래드클리프를 고른 것은 그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영국의 철수 일정을 맞추기 위해 '말 잘 듣고, 인도 사정을 몰라 편견이 없다고 우길 수 있으며, 향후 터질 비난을 대신 받아줄 서류 작업 전문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인도의 복잡한 현실은 완전히 무시된 채 단 5주 만에 피로 얼룩진 '탁상행정' 국경선이 탄생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영국이 엉망으로 다른 나라의 국경선을 그은 사례들은?

영국이 현지 사정을 무시하고 지도 위에 자와 펜으로 쓱쓱 선을 그어 훗날 거대한 비극을 초래한 사례는 인도 대륙뿐만이 아닙니다. 세계사에서는 이를 영국의 대표적인 ‘자 대고 긋기(Border drawing with a ruler)’ 악행이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인 3가지 사례를 소개해 드립니다.


1. 중동의 비극: 사이크스-피코 협정 (Sykes-Picot Agreement)

오늘날 시리아, 이라크 등 중동 지역이 끊임없는 내전과 IS 같은 테러 단체로 고통받는 근본적인 원인은 1916년 영국과 프랑스가 맺은 비밀 협정 때문입니다.

  • 영국의 악독한 짓: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랍인들에게 "전쟁을 도와주면 독립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맥마흔 선언). 하지만 뒤로는 프랑스와 만나 중동 땅을 갈라 먹는 비밀 협정(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었습니다.

  • 어떻게 그었나: 영국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의 조르주 피코는 중동의 수많은 종족(아랍인, 쿠르드인), 종파(이슬람 수니파, 시아파)의 거주지를 완전히 무시하고 지도 위에 자를 대고 직선으로 국경선을 그었습니다.

  • 결과: 수백 년간 원수처럼 지내던 수니파와 시아파가 한 나라(이라크)로 묶였고, 세계 최대의 유목 민족인 쿠르드족은 터키, 이라크, 시리아 등으로 뿔뿔이 쪼개져 오늘날까지 나라 없는 민족으로 박해받고 있습니다.


2. 아프리카의 분할: 베를린 회의와 후속 국경선들

아프리카 대륙의 지도를 보면 유독 국경선이 서부 개척 시대처럼 칼로 자른 듯 반듯한 직선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들이 저지른 만행의 결과입니다.

  • 영국의 악독한 짓: 1884년 베를린 회의를 시작으로 영국, 프랑스 등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하면서 종족, 언어, 문화, 역사적 경계선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오직 자신들이 확보한 자원과 영토의 편의성에만 맞춰 자를 대고 국경을 그었습니다.

  • 결과: 수천 년간 다르게 살아온 수십 개의 적대적 부족이 한 나라로 묶이거나, 반대로 하나의 부족이 여러 나라로 찢어졌습니다. 1960년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한 이후, 영국이 그어놓은 기형적인 국경선 때문에 나이지리아 내전, 르완다 대량학살, 수단-남수단 분쟁 등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부족 간 내전들이 연쇄적으로 폭발했습니다.


3. 중동 분쟁의 끝판왕: 팔레스타인 영토 분할 (다중계약)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이 저지른 사기극의 정점이며, 오늘날까지도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입니다.

  • 영국의 악독한 짓: 영국은 전쟁 자금이 필요하자 유대인들에게 "전쟁을 도와주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벨푸어 선언). 앞서 언급한 아랍인들과의 약속(맥마흔 선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이중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 결과: 전쟁이 끝난 뒤 영국은 이 지역을 위임 통치하다가,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하자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1947년 UN에 책임을 떠넘긴 채 무책임하게 철수해 버렸습니다. 영국이 심어놓은 증오의 씨앗은 결국 5차례의 중동 전쟁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가자지구의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약하자면

영국 제국주의 국경선 획정의 공통된 특징은 "식민지 현지인들의 언어, 종교, 문화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영국의 통치 편의와 철수 시 책임 회피"만을 위해 자를 대고 선을 그었다는 점입니다. 영국이 남기고 간 이 '기형적인 직선'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 세계 곳곳에서 피바람을 몰고 오고 있습니다.

1890년대에 그어진 유명한 라인 있짢아 머엿지

아, 1890년대에 그어진 유명한 국경선이라면 바로 ‘듀랜드 라인(Durand Line)’을 말씀하시는 것 같네요!

영국이 남긴 또 하나의 악명 높은 국경선으로, 1893년에 그어졌습니다. 이번에도 영국이 저지른 무책임한 칼질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듀랜드 라인이란?

1893년, 영국령 인도의 외무장관이었던 모티머 듀랜드(Mortimer Durand)와 아프가니스탄의 국왕이 협정을 맺고 그은 아프가니스탄과 영국령 인도(현재의 파키스탄) 사이의 국경선입니다.

영국이 여기서 저지른 '악독한 짓'은?

  • 하나의 민족을 반토막 내다: 이 지역에는 대대로 ‘파슈툰족(Pashtuns)’이라는 강력한 유목 민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을 통제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대포 분쟁 지역(그레이트 게임)의 방어선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파슈툰족의 거주지 한가운데를 자로 재듯 뚝 잘라 버렸습니다.

  • 민족의 이산: 이 선 하나 때문에 수백 년간 같은 부족으로 살던 파슈툰족의 절반은 아프가니스탄인, 절반은 영국령 인도인(현 파키스탄인)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선이 남긴 오늘날의 비극

  • 탈레반과 테러의 온상: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 지대는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거대한 무법지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파슈툰족은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오갔고, 훗날 이 지역은 탈레반의 근거지이자 알카에다 등 테러리스트들의 은신처가 되었습니다.

  • 끝나지 않는 국경 분쟁: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영국이 강제로 그은 선이니 무효다"라며 지금도 이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파키스탄과 수시로 총격전을 벌이는 시한폭탄 같은 곳이 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1890년대(1893년)에 영국이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그은 듀랜드 라인은, 파슈툰족이라는 하나의 민족을 강제로 반토막 내어 오늘날까지 아프간-파키스탄 분쟁과 중동 테러리즘의 불씨를 남긴 비극의 국경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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