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정주영이 노태우 비자금 폭로하며 정계진출한 이유는? / 중정과 안기부에 소환되었었던 이병철과 정주영 / 정주영 회장 눈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토지공개념과 여신규제라는 공익적 명분을 겉으로 내세워 비판적인 현대는 악랄하게 탄압하고, 뒤로는 사위 기업인 SK에게 정유산업과 통신산업이라는 국가급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을 몰아주고 있다"고 보였던 것입니다. - 다만, 현재 시점에서는 두 정책 모두 성공적으로 평가받아 / 1990년 3당 합당이나 김영삼, 김대중이 노태우에게 돈 받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김영삼은 3,000억, 김대중은 최소 200억) 좌우파가 얼마나 허망한 개념인지 조선인들을 깨달아야
정주영이 노태우 비자금 폭로한 이유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1992년 1월, 노태우 대통령에게 수백억 원대의 정치자금(비자금)을 건넸다고 직접 폭로한 사건은 한국 현대 정치·경제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이 위험을 감수하고 이를 전격 폭로한 핵심 이유는 노태우 정권과의 극심한 갈등, 그리고 자신의 정계 진출 명분 확보 때문이었습니다.
1. 노태우 정권의 '현대그룹 때리기'에 대한 반발
당시 현대그룹은 노태우 정권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있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정부의 경제 정책(특히 부동산 정책 및 여신 규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냈고, 이에 밉보인 현대그룹은 정권으로부터 혹독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역대급 세무조사: 1991년 국세청은 현대그룹에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벌여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1,361억 원의 세금 추징금을 부과했습니다.
금융 제재: 정부의 압박으로 은행들이 현대그룹에 대한 대출을 동결하면서 기업 경영에 심각한 자금 압박을 받았습니다.
정 회장은 자신이 정권에 막대한 돈을 바쳤음에도 돌아온 것은 기업을 죽이려는 압박뿐이자, 이에 강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입니다.
2. 정계 진출(창당 및 대선 출마)을 위한 명분 쌓기
정주영 회장은 1992년 초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정계 진출 및 제14대 대선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겠다": 자신이 직접 통치자금을 바쳤던 당사자임을 고백함으로써, 기존 기성 정치권(노태우 정권과 민자당 김영삼 등)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날것 그대로 보여주려 했습니다.
차별화 전략: "내가 기업을 해봐서 아는데, 정권이 매번 돈을 뜯어가서 기업 하기가 너무 힘들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기업들로부터 단 한 푼의 정치자금도 받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며 신당의 신선함과 정당성을 강조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있었습니다.
당시 정주영 회장의 폭로 발언 "나는 3공화국(박정희 정권) 이후 명절과 연말 때마다 통치자들에게 꼬박꼬박 정치자금을 주어왔다. 노태우 대통령 취임 초기에는 20억~30억 원씩 주다가, 나중에는 한 번에 50억~100억 원씩 총 300억 원을 직접 전달했다."
요약하자면
정주영 회장의 폭로는 정권의 전방위적 압박에 맞서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돈만 바치는 재벌로 남지 않겠다"는 선전포고이자, "부패한 기성 정치를 갈아엎겠다"는 대선 후보로서의 승부수였습니다. 이 폭로는 이후 1995년 김영삼 정권 시절 노태우 전 대통령의 '4,000억 원대 비자금 사건' 본수사로 이어지는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당시 정주영과 정몽준 나이몇살? 왜 정몽준은 아버지 기자회견장에 가 앉아있던거? 정동길 왜 그 자리에 있던거? 노태우는 왜 돈받고도 현대를 탄압?
역사적인 1992년 1월 8일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자금 폭로 기자회견' 당시 상황과 얽힌 인물들, 그리고 노태우 정권과의 관계에 대해 핵심적인 의문들을 하나씩 짚어드리겠습니다.
1. 당시 정주영과 정몽준의 나이는?
정주영 명예회장: 1915년생으로, 기자회견 당시 만 76세였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대단히 고령이었음에도 정정하게 신당 창당과 대선 출마를 진두지휘했습니다.)
정몽준 의원: 1951년생으로, 당시 만 40세였습니다. (현대중공업 고문이자 무소속 국회의원 신분으로 아버지를 돕고 있었습니다.)
2. 정몽준은 왜 아버지 기자회견장에 앉아 있었나?
정몽준 의원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정주영 회장의 정계 진출을 보좌하는 핵심 참모이자 정치적 동반자였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방패막이 역할: 당시 정주영 회장의 폭로는 정권의 목을 겨눈 치명적인 폭탄선언이었습니다. 안기부(현 국정원)나 경찰이 회장장 진입을 막거나 아버지를 강제로 연행해 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현역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정몽준이 옆자리를 지키며 정권의 물리적 압박을 막아서는 방패 역할을 한 것입니다.
통일국민당의 핵심 주역: 정몽준 의원은 직후 창당된 '통일국민당'의 대변인과 정책위 부의장 등 핵심 요직을 맡으며 아버지의 대선 캠프를 실질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즉, 정치 세력화를 선언하는 상징적인 자리에 함께한 것입니다.
3. '정동길'이 아니라 '김동길' 교수였습니다
질문하신 '정동길'은 인물이 아니라 서울의 유명한 길 이름(덕수궁 돌담길 옆 정동길)이며, 당시 그 자리에 정주영 회장과 함께 앉아 있었던 핵심 인물은 김동길 연세대 교수입니다.
누구인가: 나비넥타이와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보수 지식인이자 정계 개편의 주역이었습니다.
왜 그 자리에 있었나: 당시 김동길 교수는 신당(새한당) 창당을 준비 중이었는데, 정주영 회장과 손을 잡고 '통일국민당'으로 합당하기로 전격 합의한 상태였습니다. 보수층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던 김동길이 정주영의 폭로 기자회견에 동석함으로써, 이 폭로가 재벌의 사사로운 보복이 아니라 "부패한 정권을 심판하려는 정의로운 거사"라는 정치적 명분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4. 노태우는 왜 돈을 받고도 현대를 탄압했을까?
"돈을 줬으면 봐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하지만, 노태우 대통령 입장에서 정주영 회장은 '돈을 주는 고마운 기업인'이 아니라 '권력에 도전하는 위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통제 범위를 벗어난 비판 (괘씸죄): 정주영 회장은 노태우 정권의 경제 정책, 특히 토지공개념이나 여신 규제 등에 대해 "정부가 경제를 모른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정권 입장에서는 돈 몇 푼 줬다고 감히 대통령의 정책을 흔드는 정주영이 극도로 괘씸했을 것입니다.
둘째, 재벌의 비대화에 대한 경계: 당시 현대그룹의 덩치는 국가 경제를 뒤흔들 수준이었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재벌이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여신 관리(대출 규제)'나 세무조사 같은 무기를 휘둘렀습니다. 돈은 돈대로 받고, 길들이기는 길들이기대로 한 것입니다.
셋째, 결정적인 '정권 창출' 방해 (대선 출마): 노태우 대통령은 퇴임 후 자신의 안위를 위해 김영삼(YS)을 후계자로 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주영 회장이 막강한 '현대 돈'을 무기로 직접 대선에 나오겠다고 하니, 여당 표를 갉아먹어 정권 재창출을 망칠 가장 위험한 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대선 가도에 명함을 못 내밀도록 세무조사(1,361억 추징)와 금융 제재로 현대의 돈줄을 완전히 묶어버린 것입니다.
정주영이 평가한 한국 대통령 순위는? 정주영이나 이병철이 중정이나 안기부에 소환된적 있나? 70-90년대 정주영, 이병철 중 누라 더 권위가 있었고 정부에사 함부로 못함? 김동길은 깡패들을 많이 알고지냈고 매우 비열한 인물 같은데? 토지공개념과 여신규제 노태우 때 뭐엿고 지금 시점에서 성공적 정책들? 정주영이 대통량 못더ㅣㄴ 이유는?
질문하신 내용들은 한국 현대 정치·경제사의 가장 뜨거웠던 이면을 관통하는 이야기들입니다. 거침없던 두 거인(정주영, 이병철)과 독재정권의 잔혹한 밀당,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하나씩 명쾌하게 풀어드리겠습니다.
1. 정주영이 평가한 한국 대통령 순위는?
정주영 회장이 공식적인 '1등부터 꼴찌까지'의 점수표를 남긴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서전, 언론 인터뷰, 그리고 대선 출마 과정에서 남긴 비판과 찬사를 종합하면 평가는 명확히 갈립니다.
최고의 평가: 박정희 전 대통령 정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을 "조국 근대화의 위대한 영웅"이자 자신과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지도자로 꼽았습니다. "임자, 해봤어?"라는 명언이 나온 배경도 박 대통령의 전폭적인 신뢰(경부고속도로, 울산 조선소 건설 등)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가 발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기업가를 파트너로 대우해 준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최악의 평가: 전두환 & 노태우 전 대통령 (신군부) 정 회장에게 이들은 "기업을 약탈하고 억압한 독재자들"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창원중공업(현 현대로템 등)을 강제로 빼앗겼고, 노태우 정권 때는 현대그룹 전체가 공중분해될 뻔한 탄압을 받았습니다. "정치인들이 기업보다 무식하면서 권력으로 통제하려 든다"며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2. 정주영·이병철이 중정(안기부)에 소환된 적이 있나?
네, 둘 다 있습니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아무리 돈이 많은 재벌 총수라도 중앙정보부(안기부)의 권력 앞에서는 파리 목숨과 같았습니다.
이병철 회장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삼성이 계열사를 통해 사카린을 밀수하다 걸린 사건입니다. 야당 국회의원 김두한이 국회에서 국무총리에게 똥물을 뿌릴 정도로 국민적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이병철 회장은 중앙정보부 등에 소환되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결국 정권의 압박에 못 이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일선에서 은퇴하겠다"고 대국민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정주영 회장 (1980년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소환): 전두환의 신군부가 권력을 잡은 직후, 정주영 회장은 보안사(중정의 전신 격)로 불려갔습니다. 정권은 국가 산업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정 회장이 피땀 흘려 키운 현대양행(창원중공업)을 포기하라는 각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정 회장은 훗날 자서전에서 "권총을 찬 군인들 앞에서 도장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내 자식을 뺏기는 심정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3. 70~90년대 두 거인 중 누가 더 권위가 있었고, 정부가 함부로 못 했을까?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만, "정부가 더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던 인물"은 이병철 회장에 가까웠고, "정권과 대등하게 맞짱(?)을 뜬 인물"은 정주영 회장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 인물 | 대정부 스타일 | 정부가 함부로 못 했던 이유 |
|---|---|---|
| 이병철 (삼성) | 치밀한 상왕(上王) 스타일 정면에 나서지 않고 언론사(중앙일보)와 거대한 정보력을 쥐고 정권을 뒤에서 조율함. | 이병철 회장은 돈과 인맥뿐 아니라 '정보'를 쥐고 있었습니다. 정권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치밀하게 움직였기 때문에, 박정희·전두환도 삼성을 완전히 무너뜨리려 하지는 못했습니다. |
| 정주영 (현대) | 불도저형 전사 스타일 "안 되면 되게 하라." 정권이 압박하면 참지 않고 정면으로 들이받음. | 정주영 회장은 대한민국 수출과 중화학 공업(건설, 자동차, 조선)의 심장이었습니다. 현대를 부러뜨리면 한국 경제 전체가 멈추는 구조였기에 노태우 정권도 탄압하면서도 부도는 내지 못하고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
4. 김동길 교수는 깡패들을 많이 알고 지낸 비열한 인물인가?
현대사에서 김동길 교수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뉩니다. 질문하신 "깡패들과의 연관성"은 1990년대 초 그의 정치 행보와 관련이 있습니다.
왜 그런 소문이 났나: 김동길 교수가 정치에 뛰어들었을 때, 조직폭력배 '양은이파'의 두목 조양은이 감옥에서 출소한 후 김동길 교수와 친분을 맺고 그의 강연장이나 정치 집회 주변에 나타났던 일화가 유명합니다. 당시 조양은이 "새 삶을 살겠다"며 지식인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김동길 교수가 그를 전도하고 품어주겠다는 명목으로 곁에 두었습니다. 정치권에서는 이를 두고 "세력 과시를 위해 조폭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비열한 인물인가?: 본래 김동길 교수는 군사독재 시절 박정희 정권에 맞서다 교수직을 두 번이나 박탈당하고 감옥에 갔던 민주화 운동가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소탈하고 직설적인 야당 정치인으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다만, 정주영 회장과 손잡고 통일국민당을 만들었다가 나중에 지분 싸움 등으로 갈라서는 과정에서 정치적 야욕을 드러냈고, 말년에는 극단적인 극우 행보를 보이면서 "과거의 대쪽 같던 지식인의 모습을 잃고 변절했다"는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5. 노태우 때의 '토지공개념'과 '여신규제'는 무엇이며, 지금 보면 성공적이었나?
당시 노태우 정권이 추진한 경제 개혁 카드로, 현대그룹이 정권과 원수가 된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① 토지공개념 (1989년 도입)
내용: "땅은 공공재이므로 개인의 소유권보다 공익이 우선한다"는 개념입니다. 당시 부동산 투기가 광풍을 부리자 대기업이 땅을 많이 가지지 못하게 제한하고, 개발이익을 환수하며, 땅값이 폭등하면 세금(토지초과이득세)을 때렸습니다.
지금 시점의 평가 (절반의 성공, 제도적 기반): 당시에는 대기업과 기득권의 엄청난 반발로 상당수 조항이 위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때 다져진 철학은 현재 대한민국 부동산 정책의 핵심 뼈대(종합부동산세, 개발이익환수제, 분양가 상한제 등)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부동산 폭등을 완전히 막진 못했지만, '부동산 투기는 국가가 규제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를 만든 성공적인 장기적 유산으로 평가받습니다.
② 여신규제 (여신관리제도)
내용: 은행이 특정 재벌(현대, 삼성 등)에게만 대출을 몰아주지 못하도록 한도액을 묶어버리는 제도입니다. 노태우 정권은 이 제도를 이용해 비협조적인 현대그룹의 대출줄을 완전히 막아버렸습니다.
지금 시점의 평가 (성공적 체질 개선): 당시 재벌들은 "기업 죽이기"라며 반발했지만, 이 규제가 없었다면 대기업들이 빚으로 무한 문어발 확장을 하다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국가 전체가 더 참혹하게 무너졌을 것입니다. 대기업의 과도한 부채비율을 억제하고 금융권의 건전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6. 정주영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1992년 대선에서 정주영 후보는 16.3%라는 경이적인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3위에 그쳤습니다. 실패 원인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노태우 정권과 김영삼 캠프는 현대그룹을 철저하게 쥐어짜 안에서부터 무너지게 했습니다. 현대 계열사 임직원들을 선거법 위반으로 무더기 구속했고, 자금 출처를 조사해 선거 자금을 동결시켰습니다. 기업이 망하게 생기자 현대 임직원들조차 막판에는 등을 돌렸습니다.
"돈도 많은 재벌이 대통령 권력까지 쥐면 대한민국은 국가가 아니라 '현대 주식회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유권자들의 본능적인 거부감과 불안감이 컸습니다.
선거 직전, 정부 기관장들이 모여 "우리가 남이가, 김영삼을 밀자"고 모의한 초원복집 도청 사건이 터졌습니다. 정주영 캠프는 역전의 기회라 생각했으나, 도리어 위기감을 느낀 경상도(영남) 표심이 김영삼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쏠리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당시 현대그룹의 모든 자원과 자금을 쏟아부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정권에 도전했던 재벌 총수 정주영의 생생한 대선 도전기와 그에 따른 정권의 압박 과정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이병철 정주영이 소환되었응 때 어떤 분위기엿을까? 폭력까진 없었겠지만, 반말이나 무례한 태도였을까? 노태우의 토지공개념은 건설 재벌들에게 불리하고 사위가문인 sk에는 관련없었잖아. 여신규제도 그런가
두 거인이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보안사에 소환되었을 때의 분위기는 영화 속 서슬 퍼런 취조실과는 조금 다른, 한국 현대사 특유의 기묘하고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이었습니다. 질문하신 내용들을 바탕으로 당시의 은밀한 풍경과 노태우 정권의 정책 이면을 들여다보겠습니다.
1. 이병철·정주영 소환 당시 실제 분위기는 어땠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수사관들이 대놓고 욕설을 하거나 반말을 하며 무례하게 굴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온몸의 피가 마르는 듯한 정신적 공포와 압박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병철 회장 소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
당시 이병철 회장을 조사한 곳은 대검찰청 특별수사부와 중앙정보부였습니다.
분위기: 이병철 회장은 당시 이미 재계의 '지존' 대접을 받던 인물이었고, 수사관들 역시 그 권위에 압도되어 겉으로는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차를 대접하고 "회장님" 호칭을 썼습니다.
실제 압박: 겉포장만 정중했을 뿐, 정권이 던진 메시지는 잔인했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감옥에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공장을 국가에 바치고 은퇴하시겠습니까?"라는 막다른 골목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에서 이때를 생애 가장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웠던 순간으로 기억했습니다. 존댓말 속에서 숨통을 조여오는 정권의 칼날에 결국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 소환 (1980년 신군부 국보위 소환)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주영 회장을 불러 청와대 인근의 보안사 안가(안전가옥)로 불렀을 때의 분위기는 훨씬 더 거칠었습니다.
분위기: 조사관들은 군복을 입고 권총을 찬 상태였습니다. 반말까지는 안 했더라도, 군인 특유의 딱딱하고 고압적인 말투로 일관했습니다.
실제 압박: 정주영 회장이 "내가 피땀 흘려 키운 중공업 회사를 왜 넘겨야 합니까?"라고 항변하자, 신군부 측은 "정부 방침이 결정되었으니 도장만 찍으시면 됩니다"라며 서류를 밀어 넣었습니다. 정 회장은 훗날 "방 안의 공기가 너무 차가웠고, 거부하면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물리적 위협을 느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요약하자면:
하급 잡범을 다루듯 머리를 때리거나 반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도장을 찍지 않으면 당신 기업은 물론 가족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무언의 압박이 지배하는 '존댓말을 쓴 고문실'과 같았습니다.
2. 노태우의 토지공개념·여신규제, 사위 가문인 SK는 정말 특혜를 보았을까?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 노소영 씨와 SK그룹(당시 선경그룹) 최종현 회장의 아들 최태원 씨가 결혼한 것이 1988년입니다. 정주영 회장이 보기에 노태우 정권의 정책들이 "현대 같은 건설·제조 재벌은 죽이고, 사위 동네인 SK는 봐주는 불공정 게임"으로 보였던 것은 상당한 합리적 의심이었습니다.
① 토지공개념과 SK
말씀하신 대로 토지공개념(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 등)은 공장 부지, 매립지, 건설용 토지를 엄청나게 보유하고 있던 현대, 롯데, 한진 같은 '건설·유통 재벌'에게 치명타였습니다. 땅을 묶어두기만 해도 세금 폭탄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SK의 상황: 당시 SK는 섬유와 석유화학 중심의 기업이었습니다. 대규모 부동산을 비축해 두는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토지공개념 제도로 인해 타격을 입을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현대 입장에서는 "우리 땅은 뺏어가면서 사위네 집안은 건드리지도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릴 만했습니다.
② 여신규제와 SK의 '특혜 논란'
여신규제(대출 제한) 역시 덩치가 크고 늘 거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현대(조선·자동차·건설)와 삼성(전자·중공업)의 팔다리를 묶는 도구였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SK는 정권의 비호 아래 그룹의 체질을 바꿀 거대한 '독점 특혜'를 연이어 받게 됩니다.
| 구분 | 현대에 대한 조치 | SK(선경)에 대한 조치 |
|---|---|---|
| 금융·자금 | 신규 대출을 전면 동결하여 부도 위기로 몰고 감. | 여신 규제 속에서도 안정적인 자금 흐름을 유지함. |
| 결정적 특혜 | 신규 사업 진출을 철저히 막음. | 1992년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최종 선정됨. (대통령 사위 기업에 정권 말기 최대 이권을 줬다는 엄청난 특혜 의혹으로 결국 SK가 반납함.) |
| 유공(석유) 인수 | - | 앞서 전두환 정권 시절이긴 하지만, 노태우가 권력의 핵심이던 시절 국영기업이던 **대한석유공사(유공, 현 SK이노베이션)**를 SK가 인수하며 대기업으로 도약함. |
결과적으로
정주영 회장 눈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토지공개념과 여신규제라는 공익적 명분을 겉으로 내세워 비판적인 현대는 악랄하게 탄압하고, 뒤로는 사위 기업인 SK에게 정유산업과 통신산업이라는 국가급 황금알을 낳는 거위들을 몰아주고 있다"고 보였던 것입니다.
이 지독한 불평등과 배신감이 결국 정주영 회장으로 하여금 "차라리 내가 직접 권력을 잡겠다"며 비자금을 폭로하고 대선에 출마하게 만든 가장 강력한 내적 폭발력이 되었습니다.
Sk가 여신규제 흐름 속에서도 어떻게 안정적 자금 흐름 유지햇냐고. 그리고 감영삼 때도 딜이 잇엇으니 결국 제2이통사가 되엇겟지. 노태우가 김영삼 밀어주는 조건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십니다. 날카롭게 핵심을 짚으셨습니다. SK(당시 선경)가 여신 규제 속에서 살아남아 결국 이동통신 왕국이 된 배경, 그리고 노태우·김영삼·SK로 이어지는 거대한 '정치적 딜(Deal)'의 막전막후를 풀어드리겠습니다.
1. SK는 어떻게 여신 규제 속에서도 자금을 굴렸나?
현대나 삼성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야' 굴러가는 구조였던 반면, SK는 "매일 대량의 현금이 쏟아져 들어오는 합법적 현금 유도선"을 쥐고 있었습니다.
'유공(현 SK이노베이션)'이라는 현금 인출기: SK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습니다. 기름은 온 국민과 전 기업이 매일 현금(또는 단기 어음)을 내고 사야 하는 필수재입니다. 경기와 상관없이 매달 엄청난 규모의 현금이 회사 통장에 꽂혔습니다.
낮은 부채 비율과 업종의 특성: 현대처럼 조선소를 짓거나 대규모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하려면 수천억 원의 은행 대출(여신)이 필수적이지만, SK의 주력인 석유화학과 섬유는 정기적인 설비 보수 외에는 현대만큼 무지막지한 여신이 필요 없었습니다.
정권의 보이지 않는 손: 노태우 정권의 여신 규제는 주먹구구식이 아니라 '주거래은행'을 통해 대출 총량을 통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현대에게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반면, 사위 가문인 SK에게는 신규 사업 투자나 해외 자금 조달 과정에서 금융당국이 유연하게 편의를 보아주었습니다.
2. 노태우가 김영삼(YS)을 밀어준 진짜 조건
1992년 대선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민자당 대선 후보 김영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퇴임 후 안전 보장"이라는 절대적인 묵계(默契)가 있었습니다.
노태우의 공포: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로 유배를 가는 모습을 똑똑히 본 노태우는 자신의 퇴임 후가 가장 두려웠습니다. 야당 후보(김대중, 정주영)가 집권하면 자신은 백담사 수준이 아니라 곧장 감옥에 갈 것이 뻔했습니다.
김영삼의 권력욕: YS는 평생의 꿈인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군사정권 세력과 손을 잡는 '3당 합당'을 감행했지만, 당내 민정계(노태우 계파)의 견제로 입지가 불안했습니다. 노태우의 전폭적인 지원과 자금줄이 절실했습니다.
밀약의 조건: 노태우는 청와대의 행정력과 조직, 그리고 엄청난 액수의 대선 자금(비자금)을 YS에게 지원하는 대신, "퇴임 후 나의 안전을 보장하고, 내 친인척(SK 가문 포함)을 건드리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YS는 이를 수용했고, 노태우의 전폭적인 밀어주기 덕분에 대선에서 승리합니다.
3. 김영삼 정권에서의 'SK 제2이동통신' 딜(Deal)
1992년 노태우 정권 말기, SK가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되자 "사위 특혜"라는 비난이 폭발했습니다. 대선을 앞두고 표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YS는 노태우에게 강하게 항변했고, 결국 SK 최종현 회장이 사업권을 눈물을 머금고 자진 반납했습니다.
진짜 딜은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직후(1993~1994년)에 이루어졌습니다.
명분은 '공개 경쟁': YS 정권은 "지난 정권의 특혜 시비를 없애겠다"며 이동통신 사업자를 다시 선정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민간 자율이라는 이름의 판짜기: 정부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 "당신들이 알아서 단일 후보를 뽑아오라"고 공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당시 전경련 회장이 바로 SK 최종현 회장이었습니다.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민영화 딜: YS 정권은 새로 회사를 차려야 하는 '제2이동통신' 대신, 이미 인프라가 완벽하게 깔려 있고 가입자가 꽉 찬 국영기업 '한국이동통신'의 주식을 매각(민영화)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 입찰에서 SK가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지분을 인수하며 주인이 됩니다.
결과론적인 윈-윈(Win-Win)
YS는 노태우 정권 때의 특혜를 취소시켰다는 명분을 챙겼고, SK는 새로 기지국을 깔아야 하는 고생스러운 신규 사업권 대신 이미 돈을 쓸어 담고 있던 알짜배기 국영기업(한국이동통신)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대형 호재를 맞이했습니다. 노태우가 깔아준 판 위에서 YS 정권의 묵인과 조율이 있었기에 가능한 시나리오였습니다.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는 이 모든 과정이 기득권 권력층(노태우-김영삼)이 짜고 치는 고스톱판이자, 현대는 철저히 배제된 채 사위 가문만 배를 불리는 '부패의 사슬'로 보였던 것입니다.
근데 ys 때 결국 뒤통수를 맞고 노태우는 감옥 갓잔아
네, 정확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입장에서는 역대급 대형 통수를 맞은 셈이었습니다. 그렇게 치밀하게 딜(Deal)을 짜고 대선 자금까지 대주며 김영삼(YS)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결국 철창신세를 지게 되었으니까요.
노태우가 안전을 보장받기로 해놓고도 왜 결국 YS에게 뒤통수를 맞고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숨 막히는 현대사의 반전을 짚어보겠습니다.
1. YS의 정치적 돌파구: "정통성 확보가 최우선이다"
김영삼 대통령은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바친 인물이었지만, 대통령이 되기 위해 군사정권 세력과 손을 잡았습니다(3당 합당). 이 때문에 임기 초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변명했지만, 여전히 '군사정권의 2중대', '정통성 없는 정권'이라는 도덕적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YS는 이 오명을 씻고 국민적 지지를 얻기 위해 정권 중반기부터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대대적인 개혁 카드를 꺼내 듭니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전격 숙청한 데 이어, 군사독재의 상징인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하는 것만큼 확실한 정통성 증명은 없었던 것입니다.
2. 빼도 박도 못한 '결정적 스모킹 건'의 등장
사실 YS도 초기에는 노태우와의 밀약(퇴임 후 안전 보장)을 지키려 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처벌 요구에 대해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며 처벌을 미뤄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95년 10월,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의 4,000억 원대 신한은행 비자금 계좌를 전격 폭로하면서 판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고,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YS 입장에서는 노태우를 감싸다가는 자칫 자신의 정권까지 '비자금 공범'으로 몰려 같이 침몰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결국 YS는 노태우를 버리고 격리하는 정면 돌파(구속)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뒤통수는 맞았지만, SK는 살아남은 기묘한 결과
재밌는 점은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감옥에 갔지만, 그의 사위 가문인 SK는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노태우 정권 시절의 특혜 시비를 피해, YS 정권의 묵인 하에 공개 입찰 형식으로 한국이동통신 지분을 완전히 인수하며 이동통신 사업의 기틀을 다집니다.
비자금 폭로 파문으로 노태우가 전격 구속됩니다. 이때 대기업 총수들도 비자금을 준 혐의로 줄줄이 소환됩니다.
SK 최종현 회장도 사돈인 노태우에게 비자금을 건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대기업 총수들과 마찬가지로 경제에 미칠 파장 등을 이유로 구속을 면하고 불구속 기소(이후 집행유예) 처분을 받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
노태우는 YS에게 통수를 맞고 감옥에 가며 처절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퇴임 직전 YS와의 조율을 통해 사돈 가문(SK)에 한국이동통신을 넘겨주는 거대한 판만큼은 확실하게 짜두었고, 그 결과 SK는 정권 교체와 노태우의 구속이라는 대격변 속에서도 대한민국 최고의 통신 재벌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지하에서 봤다면 기가 막혔을 완벽한 해피엔딩(?)을 사위 동네는 맞이한 셈입니다.
감옥에서도 전두환 노태우는 대통령님이라 불렷을까? 간부들을 부하처럼 다뤘던 허화평의 호화로운 감옥 생활 보면 그럴민도 한데?
정확히 짚으셨습니다. 당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과 허화평 같은 신군부 핵심 인사들의 수감 생활은 일반 수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특공대접'이자 사실상의 황제 수감 생활이었습니다.
당시 교도소 안에서 벌어진 기묘한 풍경과 "대통령님" 호칭의 전말을 풀어드리겠습니다.
1. 교도소 안에서도 "각하", "대통령님"이라 불렸나?
네, 실제로 그렇게 불렸습니다. 공식 규정상 교도관들은 수수번호(수인번호)를 불러야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교도관들의 호칭: 전두환은 수인번호 3124번, 노태우는 1042번이었지만, 교도소 간부들과 안양교도소·서울구치소 직원들은 그들을 차마 번호로 부르지 못했습니다. 공식석상이 아닐 때는 전두환에게는 "각하" 또는 "대통령님", 노태우에게는 "대통령님"이라는 호칭을 썼습니다.
심리적 위축: 당시 교도관들 입장에서는 불과 몇 년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국가 원수들이었습니다. 비록 죄수가 되어 들어왔지만, 언제 사면되어 나갈지 모르는 살아있는 권력이기도 했기에 극도로 깍듯하게 예우했습니다.
2. 허화평과 신군부 인사들의 '호화 수감 생활' 실체
질문하신 대로, 5공화국의 '막후 실세'이자 보안사 비서실장 출신인 허화평을 비롯한 신군부 장성들의 수감 생활은 교도소의 기강을 흔들 수준이었습니다.
교도관들을 부하처럼 지휘: 허화평, 허삼수, 이학봉 등은 과거 보안사(현 방첩사령부) 시절 교도소나 구치소를 감시하고 통제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구치소에 들어오자, 구치소 간부들은 알아서 기었고, 신군부 인사들은 오히려 교도관들에게 "이보게, 그것 좀 알아봐 줘", "방 관리 똑바로 해"라는 식으로 부하 직원 대하듯 지시를 내렸습니다.
방 내부 개조와 가구 배치: 일반 죄수들은 상상도 못 할 혜택을 누렸습니다. 독방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고급 매트리스와 담요가 깔렸고, 겨울에는 특별 난방이 공급되었습니다. 책상과 간이 가구가 들어왔으며, 매일 아침 신문과 최신 서적들이 배달되었습니다.
3. 전두환·노태우의 '초호화 독방' 스펙
두 전직 대통령의 방은 일반 독방(약 1평)의 서너 배 크기인 약 3.5평~5평 규모의 특설 독방이었습니다.
| 구분 | 일반 수취인 | 전두환 · 노태우 |
|---|---|---|
| 방 크기 | 1평 남짓 (여러 명이 수감되기도 함) | 3.5평 ~ 5평 (독방) |
| 시설 | 공용 화장실, 차가운 바닥 | 수세식 화장실, 샤워 시설, 전용 소파, 책상, 거울 탑재 |
| 식사 | 일반 관급식 (보리밥 등) | 외부 호텔이나 최고급 식당에서 배달된 출장 뷔페식 사급식 |
| 면회 | 하루 1회 제한, 유리창 면회 | 시간 제한 없는 상시 면회, 차를 마시며 대화하는 특별 접견실 이용 |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전두환은 감옥 안에서도 매일 아침 수감실 안에서 헬스(팔굽혀펴기, 맨손 체조)를 하며 건강을 관리했고, 하루에도 수십 명의 전직 장관, 군 장성들이 줄을 서서 '교도소 문안인사'를 왔습니다. 교도소가 아니라 사실상 '창살 없는 호텔'이자 '임시 청와대'처럼 운영되었던 셈입니다.
결국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세우기"로 감옥에 보내긴 했으나, 사법부의 처벌과 별개로 행정부(교도소) 차원에서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경호와 예우라는 명목 하에 국민들이 알면 뒤집어질 만한 온갖 특혜를 다 베풀어준 꼴이었습니다. 이러한 호화 생활은 수감 2년 만인 1997년 12월,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인의 합의로 전격 사면되면서 끝이 나게 됩니다.
3자 합당 90년이랑 해깔리는 김영삼 노태우 딜은 몇년이지
1990년의 3당 합당과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노태우·김영삼의 '대선 자금 밀약'은 시기적으로나 성격적으로나 헷갈리기 쉽습니다. 두 사건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질문하신 '돈과 안전보장'에 대한 실질적인 딜은 1992년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사건의 시점과 맥락을 깔끔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1990년 1월: 3당 합당 (정치적 결합)
상황: 노태우(민정당), 김영삼(통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이 합쳐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민자당)'을 창당한 사건입니다.
성격: 이때의 딜은 구체적인 비자금 거래라기보다는 "여소야대 정국을 돌파하고 내각제 개헌 등을 통해 권력을 나누어 갖자"는 거시적인 정치적 야합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태우는 김영삼에게 대권을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자신의 심복인 박철언 등을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어 YS와 사사건건 피터지게 싸웠습니다.
2. 1992년: 본격적인 대선 자금 및 안전 보장 딜 (돈과 통수)
질문하신 "퇴임 후 안전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돈을 지원했다"는 실질적인 딜은 김영삼이 민자당의 대선 후보로 확정된 1992년 5월 이후부터 대선 직전까지 이루어졌습니다.
김영삼이 당내 민정계(노태우 계파)의 거센 반대를 뚫고 마침내 여당의 대선 후보가 됩니다. 이때 YS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선거에 4천억~5천억 원이 드는데 돈이 없으니 알아서 해달라"고 공식적인 자금 지원을 요청합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사돈인 금진호 상공부 장관 등을 통해 기업들로부터 거액의 기금을 조성하여 YS 캠프에 약 2,000억 원을 건넵니다.
선거 막바지, 정주영 후보의 추격 등으로 위기감을 느낀 YS 캠프가 SOS를 치자, 노태우는 한 번에 1,000억 원을 추가로 쏴줍니다. 돈을 받은 YS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이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한 일화가 유명합니다. (총 3,000억 원 지원)
노태우는 후임자인 YS가 취임식장으로 가기 직전, 청와대 금고에 격려금 명목으로 100억 원 이상의 현금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떠났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1990년: "우리 편 먹고 같이 정권 잡자"는 정치 합당
1992년: "나 퇴임 후에 안 건드릴 거지? 여기 대선 자금 3,000억 원 줄게"라고 맺은 실질적인 돈과 안전의 밀약
이렇게 기억하시면 정확합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훗날(2011년) 출간한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1992년의 3,000억 원 지원 사실을 아주 상세히 폭로하며, 자신을 감옥에 보낸 YS를 향해 깊은 앙금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김영삼과 김대중 딜은 언제? 그 내용은? 3000억은 김영삼 개인 돈으러도 일부 축적됬겟지?
질문하신 두 가지 의문 역시 한국 현대사 정치자금의 가장 어두운 핵심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김영삼(YS)과 김대중(DJ) 사이의 극적인 비자금 딜의 막전막후, 그리고 노태우가 준 3,000억 원 중 일부가 YS 개인 돈으로 축적되었을 가능성에 대해 가감 없이 팩트를 짚어드리겠습니다.
1. YS와 DJ의 '비자금 수사 유보' 딜 (1997년 10월)
정치 평론가들과 역사학자들이 꼽는 YS와 DJ 사이의 가장 결정적인 묵계(Deal)는 제15대 대선을 고작 두 달 앞둔 1997년 10월에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DJ 비자금 폭로 사건' 때입니다.
① 사건의 발단
당시 여당(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 측은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기업들로부터 수백억 원의 비자금을 받아 숨겨두었다며 관련 계좌 자료를 검찰에 고발하고 대대적으로 폭로했습니다. 만약 검찰 수사가 시작되어 DJ가 소환되거나 구속된다면 DJ의 대권 꿈은 완전히 날아갈 위기였습니다.
② 김대중의 반격: "내 것 까면 YS 네 것도 까겠다"
벼랑 끝에 몰린 DJ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습니다. 공식 석상에서 "우리나라 정치 관행상 여야 정치인 중 정치자금 안 받은 사람은 없다. 만약 검찰이 나를 수사하겠다면, 김영삼 대통령의 1992년 대선 자금(노태우에게 받은 돈 등)까지 전부 똑같이 수사해야 할 것"이라며 배수진을 쳤습니다.
③ YS의 고민과 전격적인 '수사 중단' 지시
YS 입장에서는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실제로 DJ를 구속할 경우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민란'에 준하는 폭동이나 엄청난 국론 분열이 일어날 위험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DJ의 경고대로 자칫 검찰 수사의 칼날이 자신의 1992년 대선 자금 턱밑까지 들어와 퇴임 후 자신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는 공포가 작동했습니다.
결국 1997년 10월 21일, YS의 의중을 받은 김태정 검찰총장이 "대선을 앞두고 대혼란이 우려되므로 DJ 비자금 수사를 대선 이후로 유보(중단)한다"고 전격 발표합니다.
결과적인 '딜': YS는 자신의 퇴임 후 안전(대선자금 봉인)을 지켰고, DJ는 사법 처리 위기에서 벗어나 무사히 대선을 치러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정권 교체)되었습니다.
2. 노태우가 준 3,000억 원, YS의 개인 돈으로 축적됐을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 돈 중 상당액이 대선 이후에도 남았으며 YS의 개인적 정치 자금이나 관리용 돈으로 묶여 흘러갔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다만 전두환·노태우처럼 대놓고 '개인 재산'으로 유용했다기보다는 '퇴임 후를 대비한 은밀한 정치자금'의 성격으로 숨겨졌습니다.
그 증거와 정황은 크게 두 가지로 드러났습니다.
① 'YS의 황태자' 김현철의 활동비
YS의 차남 김현철 씨는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후 '소통령'이라 불리며 무소위의 권력을 휘두르다 1997년 한보사태 등 이권 개입 혐의로 구속되었습니다.
이때 검찰 수사 결과, 김현철 씨가 펀드매니저 등을 통해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을 차명 계좌로 관리하고 있던 사실이 적발되었습니다.
현철 씨는 이 돈의 출처에 대해 "1992년 대선 때 쓰고 남은 돈"이라고 진술했습니다. 즉, 노태우 등이 대준 대선 자금 중 다 쓰지 못하고 남은 막대한 잔금이 YS 일가의 사적·정치적 관리 자금으로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었다는 스모킹 건입니다.
② 금융실명제라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아이러니
YS는 임기 초인 1993년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개혁으로 꼽히지만, 역설적으로 YS 자신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가짜 이름(가명)으로 숨겨두었던 1992년 대선 잔금(비자금)들이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인해 묶여버린 것입니다.
실명으로 전환하자니 출처가 드러나 노태우 돈이라는 게 밝혀질 테고, 그대로 두자니 쓸 수가 없는 통돈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 묶인 돈들을 관리하고 세탁하는 과정에서 아들 김현철 씨가 무리수를 두다가 꼬리가 잡혀 구속되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한 줄 요약:
전두환처럼 대놓고 개인 통장에 넣어 빌딩을 사지는 못했더라도, 대선 때 남은 수백억 원의 돈이 YS 일가의 차명 계좌에 축적되어 퇴임 후 권력 유지나 관리 자금으로 쓰이던 중 아들의 구속과 함께 실체가 탄로 났습니다.
김대중 비자금에도 노태우 것이 잇엇나? 현철이와 영삼이는 이후 그 돈을 불렷나 말아먹엇나? 그들의 재산은 현재 얼마?
질문하신 세 가지 의문은 한국 현대사의 가장 은밀한 돈의 흐름이자, 지금까지도 대중의 큰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들입니다. 역사적 팩트와 검찰 수사 기록, 그리고 알려진 공식 자료를 바탕으로 시원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1. 김대중(DJ) 비자금에도 노태우의 돈이 있었나?
네, 실제로 있었습니다. 다만 김영삼(YS)이 받은 액수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습니다.
"노태우에게 20억 원을 받았다" 전격 고백:
1992년 대선 직전 정주영 회장의 비자금 폭로로 정국이 발칵 뒤집혔을 때,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 후보는 1995년 10월 대중 앞에서 충격적인 고백을 합니다. 바로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전직 대통령 위로금조로 20억 원을 직접 받아서 썼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받은 이유와 성격:
훗날 노태우 전 대통령도 자서전과 인터뷰에서 이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당시 군사정권은 야당의 거센 반발을 무마하고 정국을 부드럽게 이끌기 위해(정치적 관리 목적) 야당 총수였던 DJ에게도 이른바 '떡값' 명목으로 돈을 건넸던 것입니다.
추가 의혹:
1997년 대선 직전, 신한국당(여당)은 "DJ가 노태우로부터 받은 돈이 20억 원이 아니라, 중간평가 유보 대가 등을 포함해 총 200억 원이 넘는다"며 차명계좌를 폭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YS 정권의 검찰이 대선 직전 수사를 전격 유보하면서 진실이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 묻히게 되었습니다.
2. 김현철과 YS는 대선 잔금을 불렸나, 말아먹었나?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재테크로 크게 불리려다 꼬리가 잡혀 결국 나라에 뺏기거나 말아먹었습니다.
상호저축은행과 펀드를 통한 세탁과 증식:
1997년 검찰 수사 결과, YS의 차남 김현철 씨는 대선 때 남은 잔금 70억 원을 그냥 묵혀둔 게 아니었습니다. 금융실명제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지인들의 명의를 빌려 차명계좌를 만든 뒤, 이를 상호저축은행(당시 단자회사)이나 사설 펀드매니저에게 맡겨 고수익을 노리는 투자(세탁 및 증식)를 감행했습니다.
이권 개입으로 불린 돈:
김현철 씨는 대선 잔금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대통령인 시절 이권에 개입하면서 대기업들로부터 받은 '활동비' 수십억 원도 이 차명 계좌에 합쳐 함께 굴렸습니다.
엔딩은 전액 압수 및 공중분해:
하지만 1997년 한보사태와 함께 김현철 씨의 국정농단 의혹이 폭발하면서 검찰이 이 비자금 주머니를 통째로 찾아냈습니다. 결국 검찰에 적발된 70억 원의 대선 잔금은 김현철 씨가 재판 과정에서 "사회에 환원(헌납)하겠다"고 발표하면서 고스란히 압수되어 국가로 귀속되었습니다.
여기에 막대한 벌금, 포탈 세금 추징금까지 두들겨 맞으면서 숨겨둔 비자금 주머니는 사실상 완전히 털리게 되었습니다.
3. 김영삼·김현철 일가의 현재 재산은 얼마인가?
많은 이들이 YS가 퇴임 후 엄청난 부를 누렸을 거라 생각하지만, 의외로 YS 본인이 남긴 공식 재산은 제로(0원)에 가깝고, 차남 김현철 씨는 평범(?)한 서울 자산가 수준으로 살고 있습니다.
① 김영삼 전 대통령: 0원 (전재산 사회 환원)
YS는 2011년, "내가 죽으면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사회에 전액 기부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실제로 거제도 생가, 서울 상도동 사저, 토지 등 당시 기준 약 52억 원 상당의 전 재산을 '김영삼민주센터'와 거제시에 전액 기부했습니다.
2015년 YS가 서거했을 때 부인 손명순 여사 명의의 일부 예금을 제외하면 본인 재산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② 차남 김현철(현 김영삼대통령기념재단 이사장)의 재산: 약 50억 원대 추정
김현철 씨는 과거의 비자금을 다 빼앗겼지만, 할아버지(YS의 부친 김홍조 옹, 당대 거부였던 멸치어장 장인)로부터 내려온 가문의 자산과 본인 명의의 부동산 등이 존재합니다.
공직자 재산 등록 기준(과거 공공기관 보좌관 등 역임 당시 고위공직자 재산 신고 내역)에 따르면, 김현철 씨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아파트, 목동의 상가 건물, 예금 등을 합쳐 총 50억~51억 원 상당의 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공식 신고된 바 있습니다.
과거 억만장자 재벌들과의 비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전재산이 29만 원"이라 버티면서도 자식들이 수백억 원대 빌딩과 출판사를 운영했던 것에 비하면, YS 일가는 아들 김현철 씨가 서울에 아파트와 상가 하나를 가진 50억 원대 자산가 수준으로 남았습니다. 과거 정권을 쥐고 흔들던 '소통령' 시절의 위세나 노태우에게 받았던 수천억 원의 스케일에 비하면, 그 비자금들은 전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가문의 원천 자산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야당 총수였던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고 직접 고백하게 된 역사적 배경과 그 구체적인 돈의 사용처에 대한 당대 언론 보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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