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D. 록펠러가 금주법 (1919-1930)을 서포트한 것은 석유의 경쟁상대였던 (에디슨과 포드가 예찬했던) 에탄올 시장을 완전히 도태시키고 1930년대의 석유 only 독재시대를 열기 위해? / 록펠러는 곡물로 연료를 만드는 에탄올을 농부들의 먹거리를 빼앗는 행위이자 토양을 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알코올 금지 움직임에 가세했다. 그는 스스로를 독실한 침례교 교인으로 포장했다 / 알코올 자유 법안 통과 (1906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1906년에 알코올 자유 법안을 만들어 의회에서 224대 7로 통과시켰다. / 사회 위생 센터 설립 (1913년): 연준 설립과 소득세 통과를 이룬 록펠러 주니어는 와바그(Paul Warburg)와 함께 사회 위생 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의 역할은 소득세 도입을 위한 노동자들의 수익을 조사하는 것과 동시에, 석유화학이 전 산업 분화로 진출할 가능성을 모두 탐색하는 것이었다 / 소득세와 금주법의 연계: 1913년 소득세 통과 이후 정부 수입이 증가하자, 록펠러 지지 세력은 "소득세로 충분하니 주류세를 없애고 금주법을 만들자"고 설득할 수 있었다. 1918년 국세 수입의 75%가 소득세에서 나왔으며, 이는 주류세를 없애고 금주법을 도입하는 데 설득력을 제공했다 / 1925년 독일의 아이게 파벤(I.G. Farben)과 결탁하여 에탄올이 독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휘발유만 계속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 록펠러 2세는 1930년에 콜롬비아 대학 총장 니콜라이 머레이 버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공화당과 민주당이 협력하여 금주법을 폐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뉴욕 타임스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됨).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록펠러를 칭찬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XzPf5QZgxzs
록펠러와 금주법 1: 존 D. 록펠러가 금주법 (1919-1930)을 서포트한 것은 석유의 경쟁상대였던 (에디슨과 포드가 예찬했던) 에탄올 시장을 완전히 도태시키고 1930년대의 석유 only 독재시대를 열기 위해? / 록펠러는 곡물로 연료를 만드는 에탄올을 농부들의 먹거리를 빼앗는 행위이자 토양을 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알코올 금지 움직임에 가세했다. 그는 스스로를 독실한 침례교 교인으로 포장했다 / 알코올 자유 법안 통과 (1906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1906년에 알코올 자유 법안을 만들어 의회에서 224대 7로 통과시켰다. / 사회 위생 센터 설립 (1913년): 연준 설립과 소득세 통과를 이룬 록펠러 주니어는 와바그(Paul Warburg)와 함께 사회 위생 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의 역할은 소득세 도입을 위한 노동자들의 수익을 조사하는 것과 동시에, 석유화학이 전 산업 분화로 진출할 가능성을 모두 탐색하는 것이었다 / 소득세와 금주법의 연계: 1913년 소득세 통과 이후 정부 수입이 증가하자, 록펠러 지지 세력은 "소득세로 충분하니 주류세를 없애고 금주법을 만들자"고 설득할 수 있었다. 1918년 국세 수입의 75%가 소득세에서 나왔으며, 이는 주류세를 없애고 금주법을 도입하는 데 설득력을 제공했다 / 1925년 독일의 아이게 파벤(I.G. Farben)과 결탁하여 에탄올이 독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휘발유만 계속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 록펠러 2세는 1930년에 콜롬비아 대학 총장 니콜라이 머레이 버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공화당과 민주당이 협력하여 금주법을 폐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뉴욕 타임스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됨).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록펠러를 칭찬했다.
존 D. 록펠러가 금주법을 서포트한 것은 석유의 경쟁상대였던 에탄올 시장을 완전히 탄압하고 1930년대의 석유 only 독재시대를 열기 위해?
존 D. 록펠러와 금주법(Prohibition), 그리고 에탄올 간의 관계는 음모론과 실제 역사가 묘하게 섞여 있는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록펠러가 금주법을 강력하게 지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동기가 '에탄올 경쟁 제거'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합니다.
상황을 다각도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록펠러가 금주법을 지원한 실제 이유
록펠러는 단순히 비즈니스적 이득 때문에 술을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청교도적 신념: 그는 독실한 침례교인이었습니다. 술을 '사회적 악'으로 보았고, 가정을 파괴하고 노동 효율을 떨어뜨린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사회적 안정: 당시 금주 운동은 종교계와 여성계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사회 운동이었습니다. 록펠러는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기부하며 사회적 도덕성을 높이려 했습니다.
2. 에탄올 vs 석유 (휘발유)
질문하신 '에탄올 시장 탄압설'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당시의 시장 상황 때문입니다.
이미 휘발유가 압승 중: 1920년 금주법이 시행될 당시, 이미 석유 산업은 거대해졌고 휘발유는 에탄올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율적인 연료로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굳이 금주법이 아니더라도 에탄올은 가격 경쟁력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에탄올의 한계: 당시 기술로는 에탄올을 대량 생산하여 전국의 자동차에 공급할 인프라가 전혀 없었습니다. 록펠러가 두려워할 만한 '위협적인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3. 금주법과 알코올 연료의 관계
금주법은 '마시는 술(음용 알코올)'을 금지한 것이지, 산업용 알코올까지 완전히 막은 것은 아닙니다.
산업용 알코올은 변성 알코올(독성 물질을 섞어 마실 수 없게 만든 것) 형태로 유통이 가능했습니다.
만약 에탄올이 정말 경제성이 있었다면, 산업용 알코올 시장을 통해 발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석유 자원이 워낙 풍부했던 미국에서 에탄올은 찬밥 신세였습니다.
요약 및 결론
| 구분 | 내용 |
| 록펠러의 동기 | 경제적 독점보다는 개인적 신념과 종교적 이유가 컸음 |
| 에탄올의 위상 | 당시에도 석유에 비해 경제성과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음 |
| 음모론의 배경 | 훗날 바이오 연료 지지자들이 석유 자본을 비판하기 위해 만든 서사가 퍼진 것으로 보임 |
결국 록펠러의 금주법 지원은 **"석유 독재를 위한 치밀한 계산"**이라기보다는, **"성공한 기업가의 보수적인 도덕 관념"**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혹시 록펠러가 금주법 외에 다른 방식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했던 사례(Standard Oil의 독점 전략 등)에 대해서도 궁금하신가요?
넌 당시에도 석유에 비해 경제성과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했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레이엄 벨이나 토마스 에디슨, 헨리 포드가 에탄올을 예찬하는 등 완전히 석유중심은 아니었어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맞습니다. 단순히 "경제성이 없었다"라고만 치부하기엔, 당시 헨리 포드(Henry Ford) 같은 거물들이 에탄올을 미래의 연료로 강력하게 밀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질문하신 맥락처럼, 당시 석유와 에탄올 사이에는 분명한 **'에너지 주도권 다툼'**의 기류가 있었습니다. 이 관점에서 상황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헨리 포드의 '농장 연료' 꿈
포드는 자동차가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도 널리 쓰이길 원했습니다.
모델 T의 설계: 초기 모델 T는 휘발유와 에탄올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플렉스 퓨얼(Flex-Fuel) 기능이 고려되었습니다.
농민과의 상생: 포드는 농민들이 남는 농작물로 연료를 직접 만들어 쓰면, 석유 재벌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는 록펠러의 중앙집권적 석유 시스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2. 금주법이 에탄올에 끼친 '실질적' 타격
록펠러가 에탄올을 죽이려고 금주법을 만든 것은 아닐지라도, 금주법이 에탄올의 경쟁력을 완전히 꺾어버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사실입니다.
복잡한 규제와 세금: 금주법 시대에 알코올을 생산하려면 정부의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했고, 마실 수 없게 만드는 '변성 공정' 비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는 가뜩이나 휘발유보다 비쌌던 에탄올의 가격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연구의 중단: 술을 만드는 기술 자체가 죄악시되면서, 알코올 연료에 대한 대중적인 연구와 투자가 위축되었습니다.
3. 록펠러와 석유의 '운 좋은' 승리?
당시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이 휘발유를 표준 연료로 정착시키기 위해 전방위적인 로비와 마케팅을 펼친 것은 사실입니다.
휘발유의 덤핑: 석유 정제 과정에서 부산물로 나오던 휘발유는 당시 처치 곤란한 쓰레기에 가까웠습니다. 이를 연료로 쓰게 되자 석유 회사들은 매우 싼 값에 휘발유를 공급하며 에탄올이 발붙일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기술적 담합: 자동차 제조사들과 정유 업계는 휘발유 엔진의 압축비를 높이는 방향으로 기술을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납(Lead)을 섞은 '유연 휘발유'가 등장하며 에탄올의 옥탄가 장점을 무력화시켰습니다.
💡 관점의 전환: 음모보다는 '기회의 박탈'
정리하자면, 록펠러가 금주법을 **"에탄올을 죽일 목적으로 설계"**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지만, **"금주법이라는 파도가 록펠러의 배를 아주 멀리 노 저어 가게 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포드와 에디슨이 꿈꿨던 '지속 가능한 농장 연료'의 시대는 금주법과 저렴한 석유 공급이라는 두 가지 벽에 부딪혀 1930년대 이후 '석유 독재 시대'로 넘어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헨리 포드가 왜 그토록 에탄올에 집착했는지, 혹은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이 어떻게 시장을 장악해 나갔는지 구체적인 **'독점 전략'**에 대해 더 알아볼까요?
📌 록펠러가 미국 금주법을 추진한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록펠러는 자신의 석유 산업 독점을 강화하고 경쟁 연료인 에탄올 산업을 파괴하기 위해 금주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그는 금주법 지지 단체에 막대한 자금을 지원하며 정치적 로비를 펼쳤습니다.
💡 록펠러가 금주법 폐지에 찬성한 시점은 언제이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1932년, 록펠러는 금주법 폐지를 찬성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이는 이미 금주법으로 인해 에탄올 연료가 경쟁력을 완전히 잃고 석유 연료가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입니다.
이 콘텐츠는 미국 금주법의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며, 단순히 도덕적 운동이 아닌 록펠러와 석유 산업의 거대 전략이었음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19세기 말 에탄올 연료와 석유 연료 사이의 치열했던 '에탄올 전쟁'의 역사를 추적하며, 금주법이 어떻게 석유 독점을 공고히 하고 소득세 및 중앙은행 설립의 기반을 마련했는지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해부합니다. 석유 에너지 시대의 근간을 이룬 이 역사적 사기극의 전말을 이해하고 싶다면, 현대의 에너지 패권과 기후 변화 논쟁 이면에 숨겨진 진짜 게임의 규칙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금주법을 둘러싼 미국 주류 역사학계의 해석과 그에 대한 반박주류 역사학자들의 금주법 해석: 미국 주류 역사학자들은 미국 금주법이 다음과 같은 이유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미국인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기 때문이며, 청교도적 도덕이 발현된 법안이라는 해석이다.
세계대전 후 경제 부흥을 위해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면 안 되기 때문에 만든 법이라는 해석이다.
미국 내의 독일 유대인 주류 제조업체를 흔들려는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다.
주류업체를 지지하는 민주당을 약화시키려는 공화당의 전략이라는 해석이다.
원문에 대한 비판: 이러한 해석들은 실제 정황 증거가 없고 추측만 가득한 이야기들이며, 필자는 이러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만약 미국의 법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세워졌다면 좋아하겠지만, 대다수가 조지 부시 같은 인물들에 의해 세워진 역사이므로 크게 들을 만한 내용이 없다고 평가한다.
금주법 시행 전 정부 세수 구조: 20세기 초까지 미국 정부 수입의 30%에서 40%가 주류(술, 와인, 위스키)에서 발생하는 세금에서 나왔다.
특히 뉴욕과 같은 도시는 주정부 세수의 75%가 주류 세금이었다.
금주법 강행의 아이러니: 주류 세수가 사라져 정부에 심각한 손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금주법이 강행되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며, 이면에 숨겨진 역사가 있음을 시사한다.
잊혀진 역사: 현재 사람들이 잊고 있는 역사는 석유(Petroleum)의 전쟁에 대한 역사이며, 이는 1870년부터 193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금주법이 시행되기 시작한 시점부터 폐지되는 시기까지와 정확히 일치한다.
에탄올의 시초 연료: 에탄올(알코올 연료)은 자동차의 최초 연료였으며, 브라질은 현재까지도 이를 사용하고 있다.
브라질은 1970년대 후반부터 주유소에 사탕수수 에탄올을 공급했으며, 2003년에 FFV(Flex-Fuel Vehicle, 에탄올/가솔린 혼합 연료 작동 차량) 개발이 시작되어 2008년에는 신규 구매 차량의 90%가 이를 채택했다.
2006년부터 순수 에탄올 연료 자동차가 급증했으며, 2010년 초에는 에탄올 25% 이상을 사용하는 FFV 경차가 브라질 전체 차량의 1/3을 차지했다.
브라질만이 에탄올 역사를 기억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은 이 역사를 잊어버렸다.
현대의 에탄올 재부상과 석유 달러 견제: 미국 역시 2000년부터 옥수수 에탄올을 연료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전체 연료의 10% 수준에 도달했는데, 이는 탄소 문제 적응 현상일 수도 있지만, 석유 가치 하락과 석유 달러의 죽음에 대비하는 전략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19세기 서구 사회의 에너지원: 19세기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서구 사회는 주로 나무와 석탄을 사용했으며, 내연성 연료로는 알코올(에탄올)이 거의 유일했다.
당시 에탄올은 고래 기름을 대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에서는 에탄올 혼합 재료를 사용하는 기계, 램프, 스토브, 히터가 작동했으며, 양조 업체들이 알코올을 만들어 전체 미국 연료 시장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었다.
초기 자동차 기술: 독일에서는 1864년 니콜라우스 오그스트 오토가 에탄올 구동 자동차를 구성했으며, 이후 1876년 석유가 발견된 후에도 에탄올 구동 엔진이 만들어지고 자동차 시범 운영이 이루어졌다.
에탄올의 장점: 콜라와 마찬가지로 옥수수 같은 곡물이나 설탕 식물로 변형하여 생산 가능하며 포장 도로에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에탄올은 산업용인 동시에 주류이기도 하다는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진다.
남북전쟁 기간의 세금 차별: 미국은 남북전쟁 기간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알코올에 갤런당 2.08달러의 세금을 부과했으나, 막 시작하는 에너지원이었던 석유에는 단 10센트의 세금만 붙였다.
이로 인해 에탄올 가격이 급격히 올랐고, 이때부터 석유가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여 1906년 알코올 세가 폐지될 때까지 우위를 유지했다.
록펠러의 석유 사업 진출: 1863년에 록펠러가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 1870년 스탠다드 오일을 설립했다.
1865년 이전까지 연간 9,900만 갤런의 에탄올이 사용되었으나, 1870년 이후 석유 생산량이 2억 갤런 이상으로 늘어나 에탄올보다 두 배 많이 생산되었고 가격도 더 쌌다.
초기 에탄올 우위 주장: 이미 이때부터 에탄올이 석유보다 더 청정 에너지라는 주장이 있었다.
1896년 헨리 포드가 출시한 첫 자동차의 사용 연료는 원래 순수 에탄올이었다.
포드는 휘발유보다 싼 에탄올을 사용할 수 있도록 가솔린과 에탄올 복합 사용 자동차를 구상했다.
독일의 에탄올 지원: 독일에서는 1899년 빌헬름 2세가 석유 트러스트에 대항하여 에탄올을 생산하도록 정부를 이끌었다.
석유 매장량에 의존해야 하는 석유보다 언제나 생산 가능한 에탄올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르텔 형성: 빌헬름 2세는 석유 카르텔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로스차일드, 록펠러, 브라노벨 등 세계 석유 생산 1위인 록펠러를 포함한 주요 세력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
에탄올 전쟁: 헨리 포드 역시 에탄올을 지지했으며, 이는 석유와 에탄올 사이의 전쟁이었다는 것이 이 역사의 핵심이다.
알코올 자유 법안 통과 (1906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1906년에 알코올 자유 법안을 만들어 의회에서 224대 7로 통과시켰다.
이 법안으로 주류세(갤런당 22센트)가 폐지되면서 옥수수 에탄올(14센트), 당밀 에탄올(9.5센트)의 경쟁력이 회복되었고, 농부들과 자동차 회사들이 환영했으나 록펠러는 이를 싫어했다.
헨리 포드의 에탄올 옹호: 록펠러가 미국 석유 공급의 90%를 장악하고 있던 시기에, 헨리 포드는 1908년에 가솔린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만들면서도 에탄올을 우선적으로 사용했으며 에탄올을 미래의 연료로 여겼다.
포드는 농촌을 부강하게 하고 도시의 스모그를 없애며 휘발유 폭발 사고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에탄올은 가성비가 좋고 휘발유보다 힘이 더 셌으며, 자동차 회사와 연구 기관들은 에탄올 성능이 휘발유보다 뛰어나거나 최소한 동일하다는 연구 결과를 무수히 발표했다.
에디슨 역시 에탄올을 지지했으며, 에탄올은 고갈 걱정 없이 원하는 만큼 생산할 수 있는 연료라고 보았다.
에탄올 연구의 우위: 에탄올 연구 초기부터 가솔린과 비교했을 때 에탄올이 판정승을 거두었으며, 가솔린 연구와 개선 프로그램이 많아진 오늘날의 우위는 연구를 죽여버린 결과라고 지적된다.
빌 코바(Bill Koba)는 1900년부터 1921년 사이 21년간 152개 유관 연구를 조사한 결과, 모든 연구에서 에탄올이 휘발유보다 부정적인 면이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이 모든 연구들이 불태워졌다고 언급된다.
스탠다드 오일 트러스트의 최초 독점 행위 (1872년): 록펠러는 1872년 스탠다드 오일과 철도 회사와 결탁하여, 자사 운송료를 50% 할인해 주고 경쟁 중소 석유 정제소들의 석유 운송을 막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한 뒤 인수하는 사기를 벌였다.
단 6주 만에 클리블랜드에 있던 26개 정유소 중 22개(85%)를 확보하며 미국 최초의 독점 행위를 달성했다.
1880년경, 록펠러는 세계 석유의 50%를 실어 날랐고 미국 소비 석유의 90%를 제공했다.
석유 에너지의 생명줄: 자동차 연료로서 휘발유는 록펠러의 생명줄이었으며, 록펠러는 곡물로 연료를 만드는 에탄올을 농부들의 먹거리를 빼앗는 행위이자 토양을 시키는 것이라고 비난하며 알코올 금지 움직임에 가세했다.
그는 스스로를 독실한 침례교 교인으로 포장했다.
금주법 로비 단체 지원: 클리블랜드 본점이 금주법의 핵심이었으며, 록펠러의 아내가 참여했던 기독 여성 절제 동맹(1874년 창설)과 반술 연맹에 금주법이 완전히 시행되는 1918년까지 자금을 지원했다.
이 두 단체는 모두 클리블랜드에서 만들어졌으며 록펠러의 돈을 받았다.
직접적인 자금 지원: 록펠러는 1900년부터 반술 연맹에 35만 달러를 지원했으며, 금주법 통과를 위해 1,500만 달러에서 3,000만 달러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금주법 유지(1919년~1929년)를 위해 추가로 48만 7,000달러를 지원했다.
역사가들의 실드: 록펠러의 금주법 연관성은 홀로코스트 언급처럼 언급이 금지된 영역이며, 역사가들은 "록펠러가 알콜 연료에 반대했다면 금주법으로 산업용 알코올 생산을 지원한다는 내용이 왜 있겠느냐"며 록펠러를 옹호했다.
산업 알코올 허용은 면피용이었으며, 1910년대에는 알코올 가격이 높아 휘발유 엔진이 이미 우세한 상황이었다.
록펠러의 덫: 록펠러는 1911년 텍사코 카르텔을 이용해 텍사스 유전을 풀가동시켜 휘발유 가격을 급격히 떨어뜨렸고, 이로 인해 주류업자들이 산업용 알코올을 생산하더라도 휘발유 가격에 밀려 경쟁력을 잃게 만드는 덫을 놓았다.
소득세법과 FRB 구상: 1909년에 소득세법 헌법 수정안 제16조 입안이 시작되었고, 1910년 지킬 아일랜드 섬에서 연방 중앙은행(FRB) 구상이 이루어졌다.
록펠러는 중앙은행을 독점하여 화폐를 찍고 미국 정부에 대출하여 이자(6%)를 받기 위해 소득세 도입이 필요했다.
수정헌법 통과: 지킬 섬에서 만난 금융가들(6명) 중 록펠러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연방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소득세도 통과되었다.
록펠러는 로비를 통해 미국 국민들을 속여 수정헌법 제16조(소득세법)를 통과시켰는데, 이는 1790년 헌법 이후 의회가 로비를 통해 헌법을 바꾼 16번째 '쿠데타'에 해당한다.
1918년 의회는 소득이 1만 달러 이상인 사람에게 77%의 세비를 정해 부자들이 많이 낸다고 국민들을 안심시켰으나, 실제로는 중산층 이하 미국인들의 등골만 뽑는 세금이었다.
사회 위생 센터 설립 (1913년): 연준 설립과 소득세 통과를 이룬 록펠러 주니어는 와바그(Paul Warburg)와 함께 사회 위생 센터를 설립했다.
이 센터의 역할은 소득세 도입을 위한 노동자들의 수익을 조사하는 것과 동시에, 석유화학이 전 산업 분화로 진출할 가능성을 모두 탐색하는 것이었다.
센터는 매춘, 노동자, 강도, 마약 등 연구된 모든 범죄 네트워크를 조사했다.
공격적인 장학 프로그램: 록펠러 주니어가 록펠러 재단 이사장이 되면서, 석유화학에 기반한 마약과 의학의 모든 공격적인 장학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공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사용 금지(금주), 마약 금지, 중앙은행 설립, 부자들에게 소득세 부과 등의 논리를 동원했다.
소득세와 금주법의 연계: 1913년 소득세 통과 이후 정부 수입이 증가하자, 록펠러 지지 세력은 "소득세로 충분하니 주류세를 없애고 금주법을 만들자"고 설득할 수 있었다.
1918년 국세 수입의 75%가 소득세에서 나왔으며, 이는 주류세를 없애고 금주법을 도입하는 데 설득력을 제공했다.
정부의 속임: 금주법 시작 후 1년이 지나자 소득세 수입이 급감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미국 사람들이 모두 탈세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당초 77%의 증세를 예상했던 부자들의 세금 수입은 25%로 떨어져 버렸고, 미국 정부는 록펠러에게 사기당한 셈이 되었다.
1929년 공황까지 겹치며 금주법은 소득세 도입을 위한 핑계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
석유 산업 강화: 록펠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석유를 국가 사업으로 만들었으며, 1919년 미국 석유 연구소를 세워 카르텔을 강화했다.
노킹 방지 성능 개선을 위해 에탄올 20% 첨가 습관을 없애고, 듀폰사와 제휴하여 납 성분이 들어간 에틸(Ethyl) 알코올을 화학적으로 새로 만들어냈다.
록펠러는 석탄, 화석 에너지 기구와 녹색 운동 양쪽을 모두 조종했다.
이 납 성분 에틸 알코올 제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질식사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유럽 시장 통제: 1925년 독일의 아이게 파벤(I.G. Farben)과 결탁하여 에탄올이 독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고 휘발유만 계속 들어가도록 조치했다.
또한 휘발유를 알코올로 대체하려면 미국 농토의 절반이 필요하다는 거짓 주장을 계속했다.
금주법의 산업 파괴 역할: 록펠러는 제1차 세계대전 승전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며 40개 주 정부에 휘발유 과세를 막고 연방 정부에 로비했다.
국세청을 동원하여 금주법 기간 동안 헨리 포드가 만들려던 에탄올 자동차가 불법이라고 협박했다.
1920년대 중반, 금주법은 알코올 산업을 완전히 무너뜨렸고, 1926년 미국 자동차는 완전히 가솔린이 지배하게 되었으며 에탄올은 노킹 방지제로 잠시 사용되었을 뿐이다.
1930년, 석유는 자동차뿐 아니라 각종 에너지 원료로서 미국 내 자리를 완전히 잡았다.
석유 시대의 도래: 1872년 록펠러의 석유 정제소 독점 이후, 알코올 연료 척결, 소득세 입법, 연준 설립, 세계대전을 통한 석유 일반화, 그리고 금주법을 통한 알코올 산업 파괴 과정을 거쳐 1930년대부터 석유 시대가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마셜 플랜을 통해 휘발유가 유럽의 에탄올 연료를 완전히 대체하는 석유 만능 시대가 열렸다.
금주법 폐지 요구: 대공황 여파로 1933년 정부 세수가 최저점을 기록하자, 정부는 소득세 수입이 적으니 차라리 주류세를 다시 만들겠다며 금주법을 폐지하려 했다.
록펠러의 편지: 록펠러는 이 시기 콜롬비아 대학 총장 니콜라이 머레이 버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공화당과 민주당이 협력하여 금주법을 폐지해 줄 것을 요청했다(뉴욕 타임스 등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됨).
프랭크 루즈벨트는 록펠러를 칭찬했다.
목적 달성: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었으나, 이미 1930년에 알코올 도매 가격이 갤런당 25센트였던 것에 비해 알코올 연료 가격은 갤런당 10센트로 경쟁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록펠러는 목적 달성(에탄올 산업 파괴)이 끝났으므로 금주법을 없앤 것이다.
정부 시스템 변화: 금주법은 석유 연료의 승리를 보장했고, 록펠러가 무기 산업으로 깊숙이 들어가게 만들었으며, 경찰 업무 권한을 주정부가 아닌 FBI(연방 정부)에 전권을 주게 만들었다.
전국적인 금주 운동을 위해 연방 정부가 움직여야 했기 때문이다.
국세청(IRS)이 이때부터 강력해졌는데, 이는 소득세 징수를 위한 것이었다.
철도 문화의 변화: 당시 형(어블)이 승객용 화물보다 승객 수송 이익이 낮아 승용 열차를 잘 만들지 않았고, 록펠러는 미국 동부 철도를 활용했다.
미국 철도 시스템은 민영화되어 있고 인구 밀도가 작아 수익 문제가 발생했고, 승용 열차 대신 자동차로 철도를 대체하는 것이 옳다는 인식이 생겼다.
이로 인해 1950년 이후 미국의 전차(전기차)는 버스 한 대에 밀려 90% 사라졌으며, 1916년 25만 마일이던 철도 사용 거리가 19년 후 9,000마일로 축소되었다.
고속 버스를 타고 오가는 미국 시민 생활이 고착화되었다.
석유의 완전한 지배: 제2차 세계대전 중 석유 부족으로 에탄올 생산 시도가 있었으나 이미 늦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미국의 모든 엔진 작동 기기, 자동차, 무기 등은 석유 연료에 맞춰져 있었고, 에탄올 산업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청정 에너지로 출발했던 알코올이 록펠러에 의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까지 석유를 연료로 쓰는 줄 착각하고 있다.
록펠러의 행보 요약 및 기후 변화 문제 제기: 록펠러는 석유 가격 경쟁 우위를 노력했고, 에탄올 연구를 왜곡했으며, 금주법으로 알코올 산업을 파괴했고, 헨리 포드 같은 사람들을 법적으로 압박했으며, 납 성분 에틸 첨가제를 가솔린에 섞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석유를 지원하여 전후 유럽 에탄올 산업을 파괴했다.
현재 제기되는 기후 문제는 전적으로 록펠러의 석유 산업 탓이며, 에탄올로 대체하면 해결되지만 록펠러 측은 엑손모빌 등을 통해 기후 변화 논쟁을 벌이며 탄소세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다.
록펠러는 석유 없이는 산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사기를 치고 있으며, 중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에탄올을 연료로 사용하면 될 일이라고 지적한다.
향후 전망: 다음 영상에서는 록펠러가 스스로 욕을 먹게 만들면서 전 세계 화석 에너지를 가진 회사들을 비난하고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과거 클리블랜드에서 했던 것처럼 시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다룰 것으로 예상된다.
탄소세, 즉 화석 연료를 없애자는 주장은 석유 없이 산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이라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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