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험 고수익의 위험한 베팅을 했던 박정희처럼, 일본 최대 재벌이자 유니클로 회장인 야나이 타다시도 그러했다 - 그의 자서전 제목은 "1승 9패" / '변방 비주류가 日최고부자로' 유니클로 야나이 회장 / 이병철, 마쓰시타 고노스케, 피터 드리커에서 영감 받아
[의류혁명 유니클로] 유니클로 창업자 야나이 다다시
물려받은 시골 옷가게 사장에서 일본 최고 부자로
실패 두려워 않고 도전… 자서전 제목도 ‘1승 9패’
“야나이 회장님, 자신의 경영방식과 경영자로서의 능력에 점수를 준다면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주시겠습니까?”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지주회사)의 한 사외이사가 갑자기 꺼낸 질문이다.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유니클로 회장은 잠시 고민하다 “합격점을 약간 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점수로는 70점이었다. 지방의 작은 양복점에서 시작해 유니클로(UNIQLO)를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로 만든 최고경영자(CEO)가 스스로에게 매긴 점수치고는 낮았다. 야나이 회장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며 “일반적으로 경영자는 100점을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하지 않거나, 60점이나 70점을 받더라도 이를 100점이라고 착각하거나 둘 중 하나”라며 “나는 늘 100점 만점을 꿈꾼다”고 말했다.
이병철 회장 저서 읽고 글로벌 기업 꿈꿔
유니클로 신화가 시작된 곳은 일본 지방 도시인 야마구치(山口)현 우베(宇部)시다. 1949년 2월 야나이 회장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 경제학과를 졸업한 야나이 회장은 자스코(Jusco)라는 종합수퍼마켓 체인에 입사해 판매사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야나이 회장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냈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을 도와달라는 아버지의 연락을 받고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정장과 캐주얼 의류를 파는 오고리(小郡)상사에 들어갔다.
별다른 일 없이 사회초년병 시절이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야나이 회장은 이미 이때부터 세계적인 기업을 꿈꾸고 있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사업을 하게 된 계기로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을 꼽았다. 이병철 회장이 1963년에 쓴 ‘우리가 잘사는 길’을 대학생 때 읽고 감명받았다는 설명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도 세계적인 기업을 꿈꾸던 이병철 회장을 보고 야나이 회장도 아버지의 양복점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야나이 회장의 아버지는 아들이 오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야나이 회장은 지방의 양복점을 일신하기 위해 노력했고 상품 조달에서부터 진열, 판매, 재고관리, 고객 응대까지 모든 일을 도맡았다. 그렇게 10여년에 걸쳐 일을 배운 야나이 회장은 1984년 마침내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히로시마(廣島)에 유니클로 1호점을 열고 사장에 취임했다.
유니클로 1호점에는 야나이 회장의 새로운 시도가 녹아 있었다. 당시 일본 의류 유통업계는 걸이(hanger)식 진열이 대세였다. 하지만 야나이 회장은 선반(shelf)식 진열 방식을 전격적으로 도입했다. 미국 대학의 구내매점에서 물건을 품목별로 가지런히 진열해 놓은 것을 보고 선반식 진열 방식을 생각해낸 것이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실패를 경계하라”
1984년 유니클로 1호점이 문을 연 이후 모두가 아는 유니클로 성공 신화가 이어진다. 1900엔짜리 후리스가 일본 전역에서 열풍을 일으켰고, 중국과 한국·미국 등 세계 시장으로 무대를 넓혔다. 자라나 H&M·갭(GAP) 같은 글로벌 의류 브랜드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2009년에는 ‘포브스’가 일본 최고의 부자로 야나이 회장을 선정하기도 했다. 화려하게 빛나는 시절로 보이지만, 야나이 회장은 고개를 젓는다. 그는 성공이 아니라 실패를 말한다.
야나이 회장이 직원 교육용으로 2003년에 쓴 자서전의 제목은 ‘1승 9패’다. 2009년에 두 번째로 낸 자서전 제목도 ‘성공은 하루 만에 잊어라’다. 야나이 회장에게 ‘성공’이란 피해야 할 독약 같은 존재다. 그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기는 순간은 알아도 지는 순간을 잘 모른다”며 “아홉 번을 실패해도 계속 도전해서 손님의 요구에 맞는 업태, 상품, 매장을 만들어 한 번만 승리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야나이 회장은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야채 판매 사업에 실패했고, 영국과 중국 진출도 처음에는 고전을 거듭했다. 크고 작은 인수·합병(M&A)에서도 실패 사례가 수두룩하다. 중요한 건 실패를 대하는 자세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숨기려 하지 않고 냉철하게 분석한다.
야나이 회장이 펴낸 두 권의 자서전은 그가 겪은 실패 사례 분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1994년 유니클로가 히로시마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이후 회사 내부에서 안정기에 접어들었다는 반응이 나오자 야나이 회장은 “과거의 성공은 빨리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고 외쳤다. 야나이 회장은 모든 것을 바꾸자는 의미의 ‘ABC 개혁’을 선언했고, 유니클로는 비용 절감과 고객중심주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야나이 회장은 “별로 대단한 성공이 아닌데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착각하는 건 ‘성공이라는 이름의 실패’라고 불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현역에서 뛰고 있는 야나이 회장은 건강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술과 담배는 전혀 하지 않고, 주말마다 골프를 한다.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는 퇴근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저녁 모임이나 회식도 즐기지 않는다. 집에 일찍 들어가 책을 읽고 자료를 검토하며 저녁 시간을 보낸다.
[plus point]
‘마쓰시타’와 ‘드러커’에게서 배우라
야나이 회장은 2009년 ‘아는 즐거움’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의 업무방식을 소개했다. 이때 야나이 회장이 선택한 주제가 ‘나의 드러커식 경영론’이었다.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고(故)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야나이 회장이 존경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야나이 회장은 이 프로그램에서 ‘기업의 목적은 고객 창조 단 하나’라는 드러커의 명언을 소개했다. 이익 추구는 기업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이익만 추구하고 고객을 바라보지 않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유니클로 같은 대형 의류 유통업체 입장에서는 매일 방문하는 고객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방문하는 고객만을 상대한다면 사업을 더 넓게 확장하는 건 불가능하다.
야나이 회장은 드러커의 명언 ‘기업의 목적은 기업 밖에서 찾아야 한다’도 인용했다. 아직 매장을 방문하지 않은 고객을 찾아 유니클로의 상품이 좋다는 것을 알리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야나이 회장은 “잠재적인 고객의 수요를 파악해서 기존 상품을 개량,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상품이 유니클로의 히트 상품인 후리스와 히트텍이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는 고 마쓰시타 고노스케도 야나이 회장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마쓰시타는 마쓰시타전기(파나소닉)의 창업자로 일본형 경영의 모체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야나이 회장은 2007년 유니클로 전 직원에게 보낸 ‘신년 포부’에서 마쓰시타의 일화를 소개했다.
일본 맥도널드 설립자인 후지타 덴이 경영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하자 마쓰시타가 “경영이란 돈을 버는 것이지요”라고 답한 이야기다. 야나이 회장은 이 일화를 언급하면서 “얼마나 적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얼마나 큰 효율을 얻느냐를 고민하는 것이 경영”이라며 “돈을 벌지 못하는 회사는 존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https://www.yna.co.kr/amp/view/AKR20160303097101009
'혁신의 아이콘'…양복점에서 출발해 유니클로 키워
(서울=연합뉴스) 이춘규 기자 = 최근 미국 경제지 포브스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부호 순위에서 일본인 1위는 캐주얼 의류 '유니클로'로 유명한 패스트리테일링(Fast Reailing)그룹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회장 겸 사장이다.
146억달러(17조7천억원)의 자산으로 세계 57위다. 2년 연속 일본 최고부자에 오른 야나이 회장은 1949년 2월 7일생으로 만 67세다. 재일동포 사업가인 손정의 사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의 사외이사로도 활동한다.
그는 변방의 비주류에서 일본 최고의 혁신가로 변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물갔다는 의류업으로 거부의 반열에 오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작은 양복점에서 출발해 스웨덴의 H&M, 스페인의 자라와 겨루는 세계적인 제조·유통일괄형(SPA) 브랜드를 키워냈다.
패스트리테일링이 일본사회에서 혁신을 단행할 수 있는 몇몇 되지 않는 이단아로 꼽히는 이유다.
회사 이름 만큼이나 발빠른 행보로 성장해왔다.
패스트리테일링이 "업무에 빨리 익숙해지기 위해" 다른 회사(4월1일)보다 한 달 빠르게 입사식을 치르는 것도 그 사례 중 하나다.
지난 2일에도 그랬다. 야나이 회장은 이날 도쿄도내 신입사원 입사식에서 "세계 여기저기 점포에서 많은 사원들이 활약하고 있다. 회사를 잘 이끌어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 2년 연속 일본 최고부자…손정의 회장과 각축

야나이 회장이 일본 제1의 부자에 오른 길은 곧 유니클로의 성장과정이다.
자산에서 패스트리테일링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그의 지분율은 21.67%(작년 8월말 현재)다.
그는 포브스의 부호 순위에서 2007년만 해도 세계 95위, 일본 6위였다.
그가 일본인 1위에 오른 것은 추정자산이 61억달러가 된 2009년이지만 늘 수위를 유지한 것은 아니다. 그의 '맞수'는 손정의 사장이다.
야나이 회장은 2011년 76억달러로 일본 부호 2위로 밀려났는데 당시 1위는 손 사장이었다. 2012년 1위를 탈환했지만 2014년에는 다시 손 사장에게 1위 자리를 내줬다. 2015년부터 야나이 회장이 다시 1위에 올랐다.
유니클로 '의류 왕국'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양복점이 밑천이 됐지만 온전히 그의 노력으로 일궈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패스트리테일링의 전신인 작은 양복점은 1949년 야마구치(山口)현의 소도시인 우베(宇部)시에 문을 연 '멘스숍 오고리(小郡)상사'다.
그의 아버지는 1984년까지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1999년 2월에 80세로 타계했는데, 유산은 당시 세무서 공시에 의하면 27억1천500만엔이었다.
◇ 천민거주지 '부락' 해방운동가 집안 출신
그의 백부 야나이 마사오는 부락(部落)해방운동가 출신이다.
일본에서 부락은 우마상이나 가죽제조업자, 숯굽는 사람, 돼지 키우는 재일한국인 등이 집단으로 거주한 지역을 의미했고, 지금도 일부 차별이 남아 있다.
마사오는 이들 소수자의 인권운동을 펼친 것이다. 인권운동단체인 전일본동화회 초대회장, 전일본동화회 야마구치현 연합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멘스숍 오고리상사의 전신인 '오고리상사'를 창업한 실업가이고도 했다.
정치에도 뛰어들어 일본 사회당 공천을 받아 1946년 야마구치시의회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마사오의 아버지(야나이 회장의 조부)는 젊은시절 소와 말을 취급하는 우마상을 했는데, 마사오 역시 초등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부친의 우마상을 돕는 것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었다.
이후 마사오는 교토 식당 종업원으로 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잠시 야쿠자(조직폭력배 집단)세계에 발을 들였다가 형무소까지 다녀온 뒤 손을 떼고 실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백부 마사오의 오고리상사가 후에 야나이 회장까지 이어지게 된다. 야나이 회장 집안에는 부락민들이 펼친 수평사 창립에 관여하고, 야마구치현 수평사연맹본부 임원을 맡은 이도 있는 등 부락해방운동과 밀접하다.
◇ 비주류에서 일본사회 혁신가로…신사복에서 캐주얼 의류로 사업전환
야나이 회장 집안은 이렇듯 변방의 비주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베시에서 태어난 그는 현립 우베고등학교를 나와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권유로 자스코(현재의 이온 리테일)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의 월급쟁이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싫증이 나 9개월 만에 퇴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년 정도 친구 집에 더부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 오고리상사에 입사한다.
오고리상사는 신사복 등 남성대상 의류가 중심이었다.
그는 12년간 경영하는 사이에 도심 밖에 전문점포를 두고 저렴한 가격을 내세운 이른바 '교외(郊外)형 신사복점'이 커나가는 것에 주목했다.
이때 야나이 회장의 선택은 캐주얼의류 판매점이었다. 후발주자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캐주얼은 신사복처럼 접객을 필요로 하지 않고 물건이 좋으면 팔린다는 점도 선택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신사복을 버리고 캐주얼 의류를 택한 것은 혁신에 가까웠다.
198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고리상사 사장에 취임한 그는 같은해 6월 일본 서부 히로시마(廣島)시에 유니크한(unique) 의류(clothes)라는 뜻의 '유니크 클로징 웨어하우스(Unique Clothing Warehouse, 약칭 유니클로)' 1호점을 열었다.
그 후 좋은 품질과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주고쿠(中國)지방을 중심으로 점포를 확대해 지금은 세계적인 기업이 됐다.
옷은 패션이라기보다 생필품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야나이 회장은 "옷이 지위의 상징이던 시대를 벗어나 일상을 사는 편안한 생활도구인 시대가 됐다"고 말한 바 있다.
◇ 칠순 앞둔 지금도 후계구도는 안개 속
두 아들을 둔 야나이 회장은 6년 전까지는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공공연하게 말해왔다.
그는 경영승계를 꺼리는 이유로 "가족승계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아들이 쉽게 회사 대표가 된다면 열심히 일해온 직원들은 박탈감이 클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2002년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겼다가 실패한 경험 때문인지 최근 들어 입장이 바뀌는 기류다.
일본 1위 부호인 만큼 경영권이나 재산 상속 모두 일본 사회의 민감한 관심사다. 그가 올해 67세라는 점도 아들들에게 시선이 쏠리게 한다. 장남 야나이 가즈우미는 2011년 링크띠어리홀딩스의 회장 겸 사장으로 취임했고, 다음해에는 패스트리테일링 그룹 집행위원이 됐다. 차남 고지는 2011년 9월 패스트리테일링에 입사했다.
골드만삭스에서 경제 감각을 익힌 장남 가즈우미가 경영일선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다는 얘기가 퍼지기 시작하고 있다. 야나이 회장도 2014년부터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아들들에 대해 "각각 회장, 부회장 같은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tae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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