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천재, 마요라나 페르미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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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수준의 과학자들이 있다. 이류나 삼류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결코 커다란 성과를 이루지는 못한다. 다음으론 과학적 진보에 기반이 되는 핵심적인 발견을 이루는 일류들이 있다. 그리고 갈릴레이나 뉴턴과 같은 천재들이 존재한다. 마요라나가 바로 이런 천재 중 하나였다."
- 엔리코 페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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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짧으면서도 굵은 필체로 새겨놓은 이탈리아의 물리학자가 있다.
동료 물리학자들로부터 천재로 칭송받았던 남자.
이 남자를 둘러싼..
그야말로 기상천외하다고밖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는..
그런 '전설'이 존재한다.
헌데 안타깝게도, 이 전설은 자국인 이탈리아 외엔 영어권 국가에서조차 제대로 전파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우리 국내에서는 아예 그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하며, 언제나처럼 이상한 옴니버스가 그러한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이야기'를 '정확성'에 입각해 상세히 소개하고자 한다. (과거 수년 전 한 차례 해당 이야기를 파트너 업체 정기 연재를 통해 간략히 소개한 바가 있었음)
이야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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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태생의 미국인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그는 양자론, 입자물리학, 핵물리학, 통계역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역사적인 물리학자이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 경력에 원자폭탄의 설계자이기도 했던 그는, 선구안과 후학 양성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며 제자 중 노벨상 수상자를 6명이나 배출했을 정도.
이런 페르미가 진정한 천재이자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완성된 학자라고 칭송하며 의견을 따르기도 했던 라이벌이자 협력자였던 남자, 20대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방정식과 개념을 제시하며 오늘날 암흑물질 연구 및 양자 컴퓨팅 분야의 중요한 토대를 제공한 인물, 20대 중반 무렵 중성자의 존재에 대해 최초로 예측한 이론 물리학자.
이 물리학자의 이름은, 에토레 마요라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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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카타니아에서 태어난 에토레 마요라나.
명망 있는 가문의 7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난 마요라나는, 다른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우수한 두뇌를 가지고서 태어났다. 아니, 가족 중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마요라나는 5살 무렵부터 복잡한 계산식을 수행하며 수학 신동이었고, 이후 물리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쏟는 가운데 초등학교 졸업 후 4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까지를 이수한다.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로마 예수회 학교인 마시밀리아노 마시모 연구소에서 1-2학년 과정을,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학교 토르카토 타소 리세움에서 3학년 과정을 말이다.
그리고..
1927년 여름.
사피엔차 대학(교황의 주도로 1303년 로마에 설립된 최고의 지성 교육 및 연구 센터) 공학과인 마요라나와 급우이자 친우였던 에밀리오 세그레가, 물리학으로 함께 전과하자며 끈질기게 설득하는 일이 벌어진다. (세그레는 훗날 반양성자 발견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
평소 전과를 고민 중이던 세그레는 이제 막 이론 물리학 정교수로 임명된 26살의 페르미를 만나고서 결심을 굳힌다. 그리하여 평소 공학이 아닌 물리학자의 자질이라고 여겼던 마요라나에게 설득을 시작한 것.
그렇게 그해 가을-겨울, 페르미의 연구소에서 페르미와 마요라나의 만남이 발생한다.
당시 페르미는 훗날 토마스-페르미 모델이라 이름 붙여지는 원자의 통계적 모델을 연구 중이었고, 둘은 해당 항목을 주제로 논의를 나누며 최근 연구 결과를 공유하기까지 한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연구소를 찾은 마요라나가 방정식 변환 및 수치 적분표 계산 테이블을 보이며 페르미에게 대조를 요청했고 그 결과 두 사람의 표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후 물리학으로 전과한 마요라나는 방사성 핵의 양자 이론에 대한 우수한 논문을 발표하며 2년도 걸리지 않아 우등으로 졸업한다.
당시 페르미를 중심으로 한 당대 최고의 젊은 물리학 지성들이 그룹을 구성해 연구소에서 협업을 했는데, 마요라나는 대부분 홀로 연구하거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페르미와 직접적인 협업을 하지 않는 유일한 그룹원이었다.
마요라나는 극히 내향적이고 냉담하며 비판적인 데다 동시에 자기 비판적이고 겸손하기까지 한 괴짜였다. 그럼에도 페르미와 대등한 라이벌리를 구축할 정도로 우수했기에, 그룹원들은 별칭으로 페르미를 교황으로 마요라나는 대심문관이라 일컬을 정도였다.
자아비판 성향이었던 마요라나는 고작 9개의 논문만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중성자의 존재를 최초로 예측하고 올바른 실험 해석을 했음에도, 이를 발표하라고 강력히 조언한 페르미의 말을 무시했다가 이듬해 중성자 존재 증명으로 제임스 채드윅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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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34년-1937년 동안 마요라나는 갑자기 집에 틀어박힌 채 은거에 들어간다.
그러던 1937년 4월경 전자와 양전자의 대칭 이론에 대한 논문 발표를 결심한 마요라나는 케임브리지, 예일, 카네기 재단의 제안을 물리치고서 나폴리 대학의 이론 물리학 교수직을 수락한다.
이 무렵, 마요라나는 같은 물리학 연구소 출신이자 동료 교수이며 친우였던 물리학자 안토니오 카렐리에게 반복해서 다음과 같은 모호한 말을 내뱉는다.
"물리학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어. 우리 모두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거야."
1938년 3월 25일, 마요라나는 잠시 나폴리를 떠나 휴식 차 증기선에 탑승해 팔레르모로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은행 계좌에서 모든 돈을 빼내 팔레르모로 향했던 마요라나는, 나폴리로 향하는 배편 티켓을 구매하고는 모습을 감춘다.
그러니까, 허공에서 사라진 것처럼 실종이 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총리 무솔리니가 수사 지시를 내리고 제보금도 걸렸으나, 3개월 간의 집중 수사에도 불구하고 뚜렷한 목격담 하나 건지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제가 돼버렸다.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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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라나는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서 그의 실종이 사람들의 관심사가 됐음에도 발자취를 일절 찾을 수가 없었다.
그저..
증기선에서 바다 한가운데로 투신한 것이라든지, 사람들을 피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은거했다든지, 국외로 떠나 신분을 위장한 채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든지, 노숙자 신세를 자처하며 거리를 배회한다는 말들만 공허히 떠돌 뿐이었다.
이러한 전설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것이..
바로, '수도원 은거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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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은거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마요라나는 기질과 성향 자체가 흔히 표현되는 '고독하고 비사교적인 천재 캐릭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물리학 지식이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오용되고 있는지, 임박한 세계 대전의 우려 가운데 한층 불거지는 인간 혐오,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세간의 주목과 자신에게 부여되는 의무들과 책임들은 우울증을 심화시키는 요소들이었다.
그리하여, 마요라나는 인간 사회에서 자발적 은퇴를 결심한다.
어려서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마요라나가 은거지로 삼은 곳은, 수도원이었다.
실종 며칠 전 한 수도원에 입회 요청을 했다가 반려되기도 했으며, 실종 이후엔 몇몇 수도원을 둘러싸고서 '가장 복잡한 계산도 순식간에 해결하는 수도사가 있다, 위대한 과학자가 머물고 있다, 한 수도원장이 마요라나의 어머니에게 아드님이 행복할 것이므로 찾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라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다.
마요라나의 공식 전기 작가도 수도원 은거설을 추측한 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수도원 은거설과 관련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가 있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롤란도 펠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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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란도 펠리자는 193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작은 마을 키아리에서 태어났다.
신발 거래상으로 처음 사업을 시작한 그는, 이후 각 분야의 비즈니스에 뛰어들며 전문 실업가의 인생을 살아온다.
그러던 1976년, 여름.
그는 놀라운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다.
자신이 제작한 작은 크기의 기계를 통해 반물질을 이용한 파괴 무기로 사용하거나, 제로의 비용으로 청정의 무료 에너지를 대량 생산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괴짜 발명가로 보이겠지만..
놀랍게도 그의 주장과 기계의 시연을 통해 자국인 이탈리아 정부는 물론이고 미국, 벨기에에서도 기밀리에 접촉을 갖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것을 증빙할 실지 영상과 정부 문서가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
헌데..
펠리자는 기계가 전쟁에 사용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모든 재정적 제안을 뿌리쳤고, 이로 인해 정규 제조 허가 없이 무기를 제작했다는 혐의로 국제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서 1982년 해외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0년 넘도록 도피 생활을 한 끝에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던 펠리자. 그동안에도 기계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았던 그.
그런 그가 1992년 기계의 2시간 분량 시연 영상을 촬영해 공개했는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 영상에서 기계는 '어떤 원소든지 다른 원소로 변형 가능한', 그야말로 꿈의 연금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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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자는 이 불가사의한 기계를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은 맞으나, 어디까지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고안과 설계를 건네받아 완성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가 설계자를 처음 만난 건..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주에 위치한 도시 세라산브루노, 이 도시의 한 암자에 자리한 수도원에서였다고 한다.
1958년 5월 1일이었다.
20대 초반이었던 펠리자가출장차 해당 도시에 잠시 적을 두는 동안 우연찮게 무언가에 이끌리듯 수도원을 방문했고, 그곳에서 모두가 '교수'라 호칭하는 수도자와 조우하게 된다.
두 남자는 첫 만남에서부터 서로 파장이 딱 들어맞는 듯 급속도로 호감을 가지며 친분을 쌓게 됐고, 펠리자는 이 수도자로부터 매일같이 전에 없는 새로운 물리학의 기준을 사사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수도자가 펠리자에게 마침내 고백을 하는 순간이 온다.
"사실은.. 내가 에토레 마요라나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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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자는 수도자의 말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마요라나는 자신보다 32살 연상일 터였다. 그것도 살아있는다면 말이다. 헌데, 이 수도자는 전혀 중년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허나, 수도자의 고백이 진실됨을 깨달은 펠리자는 곧 그의 친우이자 정식 제자가 돼 본격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마요라나는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하는 기계'의 제작법을 전수한다. 해당 기술은 오로지 민간용으로만 사람들의 공공이익을 위해서만 쓰여야 한다는 조건과 함께.
이 제작법이 처음부터 완벽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펠리자가 십수년간 수십차례 수도원을 왕래하고 마요라나와 서신을 주고받는 가운데 점차 틀이 잡혀 나갔다.
그리하여..
1973년, 마침내 소형 기계를 통해 무시무시한 강도의 광선을 방출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파괴적인 힘을 생산적인 목적으로 전환시키고자 개선한 끝에, 1976년경 해당 힘을 열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찾아낸다.
이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하는 기계'는 그야말로 놀라웠다.
한 손에 잡힐만한 크기에 고작 70와트의 전력만 사용함에도 당시 세상에서 가장 큰 열핵 발전소 하나만큼의 효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기계 하나가 엄청난 에너지를 생산해 내고, 재료나 배출물 그리고 관리 비용이 모두 제로인 데다 무공해였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며 문명의 레벨을 수십 단계 앞당길 수 있는 무공해 청정 기기인 셈.
그렇게 1976년 여름에 펠리자는 연이 닿는 지인인 비밀경호국 대령을 시연회에 초대했고, 대령과 함께 동승한 내빈들을 모신 자리에서 자신만만하게 기계의 위용을 드러낸다.
허나..
대령과 내빈들은 이 동화 속 존재와도 같은 열에너지를 군사적 사용 용도로만 바라봤고, 이건 이후 펠리자에게 접근해 온 무리들 모두 그러했다.
펠리자는 이탈리아 정부가 해당 기계를 군사적 목적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협상을 파기했으며, 이후 벨기에 정부 관리들과 평화적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조건으로 115억 유로에 계약을 진행하나..
벨기에 정부 역시 실은 군사적 무기 활용에 노림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도중에 협상을 무효화 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에 대한 보복이었을까?
국제 체포 영장이 발부된 펠리자는 이후 10년 넘도록 조국을 떠나 해외를 도피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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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미국, 벨기에 정부와도 직간접적으로 연루되며 강압적인 협상 요구에 시달렸던 펠리자.
그러함에도 끝끝내 기계의 전체 설계도를 지켜낸 펠리자.
그런 그가 1992년, 이 '절대 진공 상태에서 양전자를 생성하는 기계'의 3단계 레벨 버전 시연 영상을 촬영하고 공개하기에 이른다. (상술했던 기존의 무시무시한 광선을 방출하는 게 1단계, 이 광선을 열에너지로 변환한 게 2단계)
2단계가 모든 발병가들의 최종 워너비인 '자유 에너지'였다면, 3단계는 모든 철학자들의 최종 워너비라 할 수 있는 '연금술'이었다.
3단계는 쉽게 말해, 어떤 요소의 물질을 순식간에 다른 요소의 물질로 변형시키는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불과 몇 그램에 불과한 폴리스타이렌 폼 큐브가 순금으로 변환하는 모습이 그대로 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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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단계가 끝이 아니다.
하나가 더 남아 있다.
바로, 4단계.
4단계는, 인류의 최종 워너비라 할 수 있는 '불로'였다.
펠리자는 1976년, 1986년, 1996년마다 마요라나의 70세, 80세, 90세 근황 사진들을 공개해 왔다. 이 밖에도 마요라나의 일상적인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사진 속 마요라나는 실종 무렵이던 30대 초반의 모습에서 아주 아주 서서히 늙어가는 모습이었다.
심지어, 90세 무렵에 촬영된 사진에선 환갑인 펠리자보다 족히 10살은 어려 보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출처] 사라진 천재 물리학자가 남긴 연금술 기계|작성자 메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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