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제와 화신의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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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3년, 영국의 매카트니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한다. 건륭제와 신하들은 이번원상서(理藩院尙書) 화신(和珅), 대학사 송균(松筠)부터 신임 양광총독(兩廣總督) 장린(長麟), 그리고 전체 여정을 함께 한 천진도대(天津道臺) 교인걸(喬人傑)과 통주협장(通州協將) 왕문유(王文維)까지 모두 매카트니 사절단에 대하여 아주 우호적이었다. 중국방문기간동안, 청나라관리들은 특별히 보살펴주었고, 많은 조치들은 현대의 외교관례에 부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사신이 속옷이 필요한 것을 알고는 곁에 있던 청나라관리는 이를 알고는 구입하여 그에게 주었고, 돈을 받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황상의 "관이(款夷)" 경비에서 썼다. 이른 지엽적인 문제에서 청나라정부는 "이대사소(以大事小, 큰나라가 작은 나라를 보살펴주는 것)" 의 거고임하(居高臨下)의 허교(虛驕)를 부렸다. 건륭제의 유지에 따르면 :속히 영길리(英吉利) 공사(貢使)를 보내라 엄절(嚴切)한 가운데 회유(懷柔)를 품어라."

 

영국인과 관계가 가장 나쁜 사람은 "매파"인물로 전임 양광총독인 복강안(福康安)이었다. 그가 광주에 있을 때, 외국상인에 대하여 엄격히 제한하는 조치를 취한다. 1793년 사절단이 북경과 열하(熱河)에 올 때, 복강안은 강경하게 영국사신에게 삼궤구고(三跪九叩)의 알현대례를 올리게 하도록 고집했다. 그러나, 영국인이 남하하여 광주로 갈 때 사신에 접근한 북경관리는 그들에게 말해준다. 현임 절강순무(浙江巡撫) 장린은 정직하고 인자하며 이미 전임명령을 받았다. 광주로 가서 복강안과 교체되어 양광총독의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비교적 우호적이니 반드시 잘 대접할 것이다.

 

과연, 사신들이 광주에 도착하자, 장린니 나와서 사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준다. 그들을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서 접대하고, 그들에게 극공연을 보여준다. <대청제국성시인상>에는 영국인의 동판화가 하나 있는데, <관부연청(官府宴請)>이다. 고증에 따르면 순무 장린의 가정연회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장린은 일정을 앞당겨 부임하여 영국인을 따라 항주를 출발하여 산과 물을 건너 광주로 가서 부임한다. 총독은 광동북부의 도시 소주(韶州)에 가서야 사신들과 헤어진다. 왜 더 이상 남하하여 광주까지 환담하며 가지 않았을까? 사신들의 추측에 따르면, 이것은 광동인들에게 그가 너무 영국인들과 친근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중국행의 후반단에 매카트니와 가장 관계가 밀접한 3명은 양광총독 장린, 교인걸과 왕문유의 세 관리이다. 중국전통정치의 사신접견원칙은 국가, 정부와 개인을 구분하지 않고, 담화를 할 때도 공사를 나누지 않는다. 관청이외의 사적인 접촉으로 관리들은 영국사신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개별적으로 대화를 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교, 왕 두 사람은 1793년 7월 31일 천진에서 매카트니를 영접한 때로부터 12월 31일 광주에서 영국인들과 함께 새해를 같이 맞으며 헤어진다. 5개월동안, 영국인들과 조석으로 함께 있었다. 장린은 11월 9일 항주에서 처음 보고, 광주에서 이별할 때까지 2개월간 같이 있었다. 그들과 사신들간의 관계는 아주 우호적이었다. 북경관료사회를 떠나서 중국방문의 하반기 일정에 중국인과 외국인은 의기투합한다. 부담없고 가벼운 분위기에 장린과 교인걸, 왕문유는 영국인들에게 많은 조정의 이야기들을 전해준다. 말해야하지 않아야할 것들까지 털어놓았다.

 

놀라운 일은 총독과 두 대인이 영국인에게 당금황실의 궁중비화까지 털어놓은 것이다: 건륭과 화신은 동성애의 연인사이이다. 그들에 따르면, 건륭은 일생동안 3번에 걸쳐 사랑에 빠진다. 제1차는 부친인 옹정제의 비인 마가(馬佳)이다. 이것은 난륜이다. 황후가 몰래 비를 만나서, 백릉(白綾, 흰비단)을 내려 자진하게 했다. 제2차는 "회족향비(回族香妃)"이다. 건륭은 자신이 포로로 잡은 서역여자가 불굴, 견정, 그리고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그래서 그녀를 궁중으로 데려온다. 그러나 태후가 이를 막았고 향비도 사사된다. 마지막으로 건륭이 60살때 화신을 사랑하게 된다. 건륭이 보기에, 그는 바로 마가가 환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건륭의 애인이 된다. 그는 천조의 법도에 위반되게 인민을 위하여 아무런 공적을 세운 바도 없는 애인을 최고위직에 올린다. 2년후에 사망하는 모후는 이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는 여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들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영국인은 이런 비화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유럽궁중에도 이런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도 사람이다." 이것은 오히려 정상이다. 다만, 그들은 대신들에게 황제의 비화를 얘기한다는 자체는 아주 의외로 여겼다. "매카트니는 충실하게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의 말을 기록했다. 왜냐하면 그는 두 사람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제의 실제연령은 다시 그로 하여금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이 황제의 풍류염사에서의 능력에 대하여 과장하고 있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중국의 군신관계는 지나치게 의식에 구애되어, 그들을 따라다니는 두 중국관리가 자신의 군왕에 대하여 이런 평가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기괴하게 여긴다. 그저 화신의 "용모가 비범하고...황제가 유일하게 총애하는 사람"이라고 우회적으로 얘기했지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는 않았다. 각종 원인으로, <매카트니일기>는 공개출판되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이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야 프랑스 역사학자인 Alain Peyrefitte(1925-1999)가 발굴해냈다.

 

이 비화들을 건륭시대 북경에서는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교인걸, 왕문유가 항주에서 그들에게 얘기해준 외에, 매카트니가 막 북경에 도착했을 때, 건륭제와 가깝게 지내는 프랑서 신부 Nicolas-Joseph Raux, 1754-1801, 중국명 羅廣祥)도 영국인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바 있다. 왜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은 항주에서 영국인들에게 황제의 비화를 확인해준 것일까? 한가지 해석은 장린과 그들은 모두 화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린은 몽골기인(旗人)인 귀족이다. 섬감총독(陝甘總督)으로 있을 때 정치적 업적과 전공이 있었다. 화신이 비천한 출신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아 조정에서 전횡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1792년, 억울한 사건에서 변호를 해주다가 화신의 배척을 받아 계속 순무의 지위에서 머물러 있었다. 이번에 양광총독이 되는 것은 다시 재기하는 기회이다. 조정에 대한 불만, 화신에 대한 원한은 교인걸, 왕문유 두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들 3명은 항주에서 탐관 화신에 대한 의분을 발설한 것이다. 돌아가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외국인에게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확실히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영국사신의 회고록을 보면, 장린은 비교적 정직한 관리이다. 그는 영국정부와 협력하여 광주의 무역질서를 확립하기를 바랬다. 그는 영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도록 허락하겠다고 말했다. 영국이 건륭이 퇴위한 후 신황제의 등극대전에 참석해주기를 요청했다. 광주에서 중국-영국무역에 편리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장린은 광주에서 화신이 규정한 것과는 "약간 다른" 신정책을 펼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린이 광주에서 총독으로 있은 기간은 1년밖에 안된다. 아마도 그렇지 않았다면, 중국-영국간의 이러한 밀접한 개인관계는 서로 다른 미래를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편전쟁도 아마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하나의 역사편찬학상의 계시가 있다. 외국인의 여행기는 중국정사의 부족함을 메워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사고>에는 당연히 건륭과 화신의 동성애를 언급하지 않았다. 진강기 <낭잠기문>, 설복성 <용암필기>에는 화신의 각종 악행을 적었지만, 이 관계는 분명히 적지 않았다. 민국후의 청궁야사에서 가끔 노출되기도 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그외에, 진삼의 <품화보감>에서 우리는 건륭시기에 북경성내에 동성애가 유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위 "남풍(男風)"이다. 이것이 윗사람을 아랫사람이 본받은 것인지 아니면 아랫사람들의 행동을 윗사람이 따라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황제도 동성애를 한다. 현재 당시 조정의 대신이 외국인에게 말한 것이니, 우리는 엄숙하게 이 사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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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 중국 역사상 거부 2위의 ‘대탐관’ 2010년 중국의 <인민일보>는 흥미로운 기사 한 꼭지를 실었다. 현재부터 지난 1000년 동안 중국 최고의 부자들을 거명한 것이다. 참고로 현재 중국 최고의 부자는 알리바바그룹의 창업주 마윈이다. 그의 재산은 약 1500억 위안, 우리 돈으로 약 25조원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이다. 하지만 <인민일보>는 중국 최고의 부자 1위로 명나라 정덕제 치세의 환관 유근을 뽑았다. 그는 금 300톤(단위가 돈이 아니고 톤이다), 은 8200톤, 은괴 2000톤과 부동산, 금은보화를 소유, 그의 재산은 가히 화폐로 환산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2위는 청나라 건륭제의 총신으로 재무장관이었던 화신이다. 건륭제 사후 가경제가 화신을 죽이고 재산을 몰수했는데, 그 규모가 약 9억 냥으로 당시 청나라의 10년 세수입 규모였다고 한다. 3위는 20세기 초 국민당정부의 재정 담당이었던 송경령의 남동생 송자문으로 막대한 재산을 보유했다고 한다. 황제의 시대, 사실 국가의 재산은 곧 황제의 소유였다. 그럼에도 환관 유근과 재무장관 화신이 중국 역사상 거부 순위 1, 2위 오른 것은 부정 치부의 결과였다. 국고에 귀속될 세금을 빼돌리고 지위와 권력으로 뇌물을 받아 축적한 돈인 것이다. 3위인 송자문 역시 마찬가지다. 마오쩌둥과 치열한 국공내전 중이었던 당시 국민당 정부의 재정을 총괄했던 송자문은 미국의 막대한 군수구호자금을 사적으로 유용해 거부가 된 것이다. 흔히 부자가 천당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그만큼 재산의 축적은 정의, 정상적, 배려심 등과는 정반대 쪽의 수단이 필요하다. 보통의 방법과 양식으로는 어렵다는 뜻이다. 물론 부자를 폄훼할 의도는 없다. 하지만 일개 환관과 대신이 중국 역사상 가장 돈 많은 부자에 오른 것은 정상적인 정치가 통용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는 반증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화신은 억울해할지 모른다. “내가 왜 넘버2야, 넘버1이지”하며. 순위를 떠나 그는 ‘남다른 재주와 영리함 - 최고 권력자의 총애 - 권한과 직권남용 - 뇌물과 국고 유용 치부 - 비참한 최후’라는 부패 관리의 전형적인 일생을 보여주었다. 역사는 그를 ‘대탐관 大貪官’이라 불렀다.

그는 청나라 건륭제의 총신이었다. 건륭제는 강희, 옹정, 건륭으로 이어지는 청나라 전성시대의 황제다. 오직 백성만을 생각하며 국가를 통치했고 그 누구보다 청렴했던 건륭제 60년 치세 시스템에 역사에 기록될 부정한 관리가 중용됐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후에 역사가들은 건륭제와 화신의 사이를 단순히 황제와 총신의 관계를 넘어선 ‘그 무엇’이 있다고 분석했다.

첫째는 종교적인 공감대이다. 두 사람은 독실한 티베트 불교의 신자로 특히 화신은 티베트어에 능통해 건륭제에게 종교적 심층 접근이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또 하나는 확인되지 않는 설이지만 동성애 주장이다. 현명하고 영리한 군주였던 건륭제가 화신의 문제에서만은 ‘무조건적’이었던 사실을 이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는데서 이 주장도 나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천년을 살 것 같던 건륭제가 죽자 그 뒤를 이은 가경제는 아버지 건륭제의 죽음 딱 보름 뒤에 화신을 숙청했다. 20개의 죄목으로 화신을 탄핵하고 그에게 능지처참형을 내렸다. 하지만 선대 황제의 총신이었고, 황실과 사돈이라는 점을 감안해 자결할 수 있는 은혜(?)를 베풀었다. 화신은 하얀 비단에 목을 매고 죽었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가경제는 그의 재산을 몰수했는데 금액이 무려 9억 냥이었다. 가경제는 이를 국고가 아닌 황제의 개인금고에 귀속했다. 이 또한 올바른 처사는 아니었다. 백성들은 “화신이 죽어 가경의 배만 불렀다”고 비판했지만 ‘황제가 국가’인 시대에서 이 같은 목소리는 황궁 안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화신에게 주목하는 것은 두 가지 관점이다. 하나는 ‘성군이었던 건륭제 치세 때 그의 치부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두 번째는 ‘절대후원자였던 건륭제가 죽고 보름 만에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방심했었나’이다. 명예, 권력, 재산 이 모든 것을 한 손에 거머쥐려는 탐욕은 항상 해피엔딩이 아닌 비참함과 비극임을 화신이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건륭제의 어전시위에서 장관이 되다

화신은 1750년에 태어났다. 이름은 선보로 그는 청나라 주류인 만주족 출신이다. 집안은 대대로 관리직을 역임했고 아버지는 2품 벼슬까지 지냈다. 더구나 그는 청나라 정예집단인 팔기군 중 정홍기 출신이다. 물론 팔기군에도 서열이 있었다. 황제의 직속부대인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 등 3개 부대가 서열이 제일 높았고 나머지 5개 부대는 제후의 직속부대로 앞의 세 부대에 비하면 관직의 승급 등 여러 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관학에서 공부를 했지만 계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어려워져 만주족 명문가인 직례총독 풍염령의 도움을 받으며 학업과 생활을 했다. 화신은 눈치가 빠르고 똑똑했다. 외모 역시 매우 수려했다고 한다. 특히 언어에 탁월한 재주를 보여 만주어는 물론 한족어, 몽골어, 티베트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다. 화신을 눈여겨보던 풍염령은 자신의 손녀인 풍제문의 짝으로 화신을 선택했다. 화신으로서는 만주족 최고 명문가문이 처가가 되면서 향후 출세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화신의 첫 직장은 건륭제의 친위대였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최고 권력자의 눈에 들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친위대는 언제든지 황제를 대면할 수 있는 보직이었다. 어느 날, 화신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건륭제가 오후에 산책을 나서는데 양산이 없어졌다. 시종관들은 허겁지겁 양산을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았다. 기다리던 건륭제의 안색이 변했다. 모두 다 겁에 질려 있을 때 화신이 나섰다.

“폐하, 작은 실수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의 의장과 기구를 책임진 시종관에게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건륭제는 화신을 쳐다보았다. 수려하게 생긴 병사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건륭제는 화신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고 화신은 똑 소리 나게 대답을 했다. 건륭제는 외모도 준수하고 말도 또렷한 화신이 마음에 들었다. 건륭제는 화신을 그 자리에서 어전시위로 발탁했다. 어전시위는 건륭제를 24시간 옆에서 모시는 직책으로 경호원이면서, 수행 비서였다. 이때 화신의 나이 26세 때이다.

이후에도 화신에 대한 건륭제의 총애는 파격적이었다. 화신은 이듬해 1776년 나라의 재정을 책임지는 부서인 호부의 시랑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1년 뒤 좌시랑, 이부우시랑을 겸직하며 팔기보군영 총관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그야말로 ‘소년 등과’에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건륭제는 화신의 빠른 두뇌 회전과 수치 개념을 높이 평가했다. 그를 국가 재정을 담당하는 인재로 키울 생각이었다. 1778년 화신은 북경의 세수를 총책임지는 세무감독이 되었다. 그리고 1781년 화신은 32세의 나이에 호부상서가 되었다. 즉 재무장관 위치로 건륭제 치세의 최연소 대신이 된 것이다. 한마디로 현기증이 날 정도의 고속승진을 거듭한 것이다.

▶화신, 국가 재정과 개인 재산을 혼합하다

화신은 건륭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했는데, 특히 돈에 집착했다. 화신은 뇌물을 받기 시작했다. 시작은 작았지만 점차 대범해지며 규모가 커지고 그 범위도 확대되었다. 감찰부에서 화신의 부정을 눈치챘지만 누구도 나서서 그를 탄핵하거나 건륭제에게 보고조차 못했다. 건륭제의 신임이 워낙 두터웠던 면도 있었지만, 화신 자체가 사람을 모으는 재주와 파당을 형성하는 솜씨가 있어 조정이 점차 화신의 사람들로 채워진 것이었다.

승승장구하던 화신에게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감숙성의 회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건륭제는 흠차 대신 아계와 화신에게 진압을 맡겼다. 아계는 군사를 준비하고 출전을 기다렸다. 하지만 화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계는 화신을 재촉했지만 꿈쩍하지 않다가 갑자기 출진 명령을 내렸다. 알고 보니 진압군에 배속된 장군들이 화신에게 뇌물을 바칠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그만큼 화신은 조정의 작은 일부터, 모반 진압까지도 돈과 연관시켰다. 하지만 화신은 군사지휘 능력이 없었다. 그는 회족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결국 아계가 회족을 진압했고 이를 안 건륭제는 화신을 매우 꾸짖었다. 그리고 화신을 멀리했다. 화신은 재기를 위해 희생양을 찾았다. 그때 화신의 레이더에 감숙성 순무 왕단망이 걸려들었다.

화신은 왕단망과 감숙성 관리들의 회계장부를 감사했다. 그 결과 황실에서 내려준 구호자금을 백성들에게 쓰지 않고 왕단망이 착복했다는 것을 밝혀냈다. 무려 7년간 왕단망은 약 200만 냥을, 감숙성의 관리들은 모두 1500만 냥을 빼돌린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대노한 건륭제는 연류된 관리들을 사형에 처하고 재물은 국고로 환수했다. 그리고 화신을 호부상서로 임명, 다시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화신이 자신의 잘못보다 더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적발해 황제의 시선을 돌리는 방법으로 신임을 회복한 것이다. 비열하지만 화신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사건이었다.

화신은 건륭제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는 죄를 진 관리는 돈을 받고 면책해주었고 모든 국가 사업이나 이권에 개입했다. 이 같은 화신의 부정이 지속되었던 것은 건륭제의 신임도 한몫했지만 화신의 재정 운영 능력이 탁월했기에 가능했다. 화신은 국고가 비면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채워 넣었다. 장부상으로나, 실제로도 국고는 비어있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국가 재정에 관한 모든 업무와 부서를 화신과 화신이 임명한 관리들이 장악했다. 이른바 ‘화신 마피아’가 국가재정 기구를 접수한 것이다.

화신은 끝이 없어 보일 정도로 승진을 거듭했다. 이부상서, 병부상서, 형부상서 등 6부의 장관을 모두 역임했다. 그리고 황실의 사무와 재정을 총괄하는 내무부총관도 지냈다. 그리고 30대 후반의 나이에 재상격인 군기대신에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거침 없는 폭풍 같은 질주였다. 게다가 건륭제는 화신의 아들에게 친히 ‘풍신은덕’이란 이름을 하사하고 자신의 막내딸인 고륜화효공주와 결혼시켰다. 건륭제와 화신이 사돈이 된 것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화신의 부정과 치부가 극에 달했지만 국가 재정이 흔들리거나 황실의 내탕금이 바닥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화신의 정치력과 관리 능력이 상당한 수준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렇기에 화신에 대해 정적이나 감찰 기구에서 탄핵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화신은 국고이든, 자신의 개인적 재산이든 건륭제가 돈을 써야 하겠다고 결정한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고, 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한 것이다. 즉 국고라는 공적인 재산과 화신이라는 개인의 사적 재산의 회계가 이미 하나로 통합되어 움직이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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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신이 아닌 충견을 선택한 화신의 처세 화신이 부정축재를 일삼았지만 건륭제에 대한 충성심만은 타의추종을 불허했다. 어전시위 때부터 화신은 건륭제의 마음을 읽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 충성심을 발휘하는데 주저가 없었다. 이를테면 건륭제가 낮잠을 즐기는데 매미 소리가 너무 요란해 건륭제가 낮잠을 설치자 직접 매미를 잡았다고 한다. 또한 라마교 사찰을 찾는 건륭제가 가파른 산길을 오를 때면 지위가 높아도 솔선수범해 건륭제의 가마를 어깨에 둘러맸다. 건륭제는 재정관계 이외에 화신에게 정치적인 업무를 맡겼지만 화신은 그 부분에서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신은 자신의 능력과 처신을 건륭제에게 고했다. 그는 솔직하게 건륭제에게 고백했다.

“폐하의 은혜로 중책을 맡았지만 제가 능력이 모자라고 폐하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충신도 좋지만 폐하의 충견이 되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충신과 충견. 실로 엄청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건륭제는 성군이며 현명한 군주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청나라를 충분히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40여 년을 통치해왔다. 그에게는 충신과 능력 있는 대신은 차고 넘치게 많았다. 그는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며 충성을 다하는 충견도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화신을 거둔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이 늘 좋은 관계로 유지되었던 것은 아니다. 화신이 군기대신일 때 건륭제의 의사와 반하는 발언을 했다 쫓겨난 적도 있다. 관직에서 물러난 화신은 모아놓은 돈으로 전당포와 은행을 운영하며 재산을 늘리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 건륭제는 화신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의 빈자리가 너무 크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건륭제는 화신의 보필에 길들여져 있었다. 물론 건륭제도 화신의 치부와 단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륭제는 그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화신이 옆에 있어 군주의 청렴과 열성이 더 돋보이고 또한 화신을 정점으로 권력과 돈으로 신하들을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이 편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화신은 건륭제의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는 일이 없게 만들었다. 그 점을 건륭제는 높이 산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화신은 40대 나이에 팔기군 정홍기 출신으로 팔기군 정예인 정황기의 영시위내대신을, 그리고 사실상 내각의 수상격인 수석군기대신에 임명되었다. 최고의 관직에 오른 것이다. 이윽고 화신은 더욱더 대담하게 행동했다. 건륭제에게 올라가는 상소를 중간에서 검열했고 뇌물 수뢰와 부정 착복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화신은 조정을 자신의 개인적인 사당으로 만들 정도로 인사에도 깊이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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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의한 승진, 권력에 의한 숙청 재위 60년이 넘자 건륭제는 태자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했다. 가경제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여전히 태상황제인 건륭제에게 있었다. 가경제는 아버지를 이어 현명한 군주가 되고 싶었다. 또한 그는 태자 시절부터 화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부에 부정을 일삼는 간신배로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가경제는 황제의 권한으로 화신을 파직했지만 화신은 다시 복직했다. 바로 건륭제의 지시였다. 가경제가 결정하면 화신은 건륭제에게 가경제의 결정사항을 낱낱이 보고했다. 가경제는 이름뿐인 황제였다. 그는 화신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었다. 이렇게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799년 2월9일, 89세의 건륭제가 노환으로 죽었다. 가경제는 건륭제의 장례를 책임질 장의도감에 화신을 임명했다. 화신은 영원히 옆에 있을 것 같은 건륭제의 죽음의 충격과 그 장례를 진행할 생각에 다른 정치적인 계산을 하지 못했다.

가경제는 이미 건륭제가 죽는 순간부터 화신을 제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며칠 후, 장례 준비에 몰두해 있던 화신은 장의도감에서 파직되면서 곧바로 체포되었다. 가경제는 무려 20가지의 죄목으로 화신을 추궁했다. 죄목은 ‘가경제가 후계자라고 누설한 죄’, ‘가마나 말을 타고 궁을 드나든 죄’, ‘건륭제의 명령을 앞세워 마음대로 국정을 농단한 죄’, ‘막대한 국가재정을 사적으로 유용한 부정부패 죄’ 등이었다. 가경제는 화신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능지처참형을 명했지만, 가경제의 이복동생이자 화신의 며느리인 공주의 간곡한 부탁으로 가경제는 화신에게 자결할 수 있는 마지막 은전을 베풀었다. 1799년 2월22일, 건륭제가 죽은 지 채 보름도 되지 않아 화신은 50세에 비단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

그때 몰수한 화신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집이 무려 2700여 채, 직접 운영한 전당포 100여 곳의 전표, 황금으로 된 타구와 대야가 무려 400여 개, 각종 보물과 국보급 문화재 등 무려 총 9억 냥이었다. 가경제는 화신의 자결로 사건을 마무리 지으며 나머지 연루자들에게는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몰수한 화신의 재산을 국고가 아닌 황실의 내탕금에 귀속시켰다. 가경제의 이런 행동은 화신에 대한 정치적 복수와 그의 재산을 몰수해 황제의 개인 재산을 늘린 행위로 훗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화신의 일생은 참으로 허무했다. 무려 24년간 건륭제의 총신으로 권력과 부를 독점했지만 건륭제가 죽고 나서 단 한 달도 살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수십 년 동안 조정을 자기 사람으로 채우고, 돈으로 모든 감찰 기구도 매수했지만 그는 가경제의 숙청 1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재의 권력에만 집착하고 미래의 권력을 대비하지 못한 어리석은 행동이 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역사는 말한다. 탑이 높으면 그 그림자도 길다고.

▶# 처세학

20대에 차관, 30대에 장관 그리고 40대에 내각 수상인 수석군기대신, 작위는 공작, 게다가 황제의 사돈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탄핵받지 않았던 화신. 그 정도로 권력의 핵심부에서 누구보다 권력의 무서움을 알고 있는 화신이라면 분명 자신이 어떤 처신을 하면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었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화신은 이상하게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가경제가 즉위하고 건륭제가 태상황제로 뒤에 물러나 있을 때 화신의 처세는 실패작이었다. 그는 현재의 살아있는 권력에 올인했다. 장차 황제가 될 미래 권력과 대척점에 선 것이다. 어쩌면 화신은 그것을 충성심과 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왕제도에서 대를 이어 충성을 다하는 것은 배신이라 생각했다면 화신의 정무적 감각은 거의 0점에 가깝다. 차라리 화신이 건륭제의 일개 환관이었다면 그의 처신은 비난받을 일이 아닌 것이다.

국가의 녹을 먹는 재상으로서 충성의 대상은 백성, 나라 그리고 황제라는 것을 망각하고 그는 오로지 황제만을 충성의 대상으로 판단한 것이다. 화신은 가경제에게 자신을 어필했어야 했다. 왜 건륭제가 자신을 아꼈는지,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지를 가경제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었지만 화신은 이를 무시했다. 또 한 번 화신이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건륭제가 죽고 가경제의 권력이 실제화 되는 순간 그는 전 재산을 가경제에게 헌납하고 은퇴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목숨만은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신은 이를 선택치 않았다. 권력도, 재물도 없는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화신이 이처럼 건륭제에게 집착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1793년 영국 사신 매타트니가 청나라를 찾았다. 그는 양광총독 장린 등과 친교를 맺고 편한 사이가 되었을 때 청나라 관리들에게서 궁중비사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건륭제의 극비 러브스토리이다. 건륭제는 평생 3번 진실한 사랑을 했다고 한다. 첫 번째가 자신의 아버지인 옹정제의 후궁이었다. 이 사실이 발각돼 그 후궁이 목을 매 자결했다. 이때 건륭제가 후궁의 시신을 안고 “미래에 다시 만난다면 진실로 사랑하겠다”고 맹세했는데 그 환생이 화신이란 설이 당시 청나라 사교계에 돌았다. 60세의 건륭제가 젊은 화신을 보고 수십 년 전 사랑했던 여인의 환생으로 여겼다는 이야기다. 정설은 아니지만 건륭제의 무조건적인 화신에 대한 신임과 총애를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다. 즉 건륭제는 화신을 단순한 부하가 아닌 사랑의 대상으로 여길 정도로 아낀 것이다.

▶사람보다 조직을 사랑하라

시끄러운 정치판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직장인이 직장생활에서 겪는 딜레마를 소개하기 위한 예이다. 사실 예능프로그램인 <무한도전> 속 ‘무한상사’에서도 이런 상황들이 종종 비춰졌다. 그것은 조직과 사람에 대한 구분이다. 2013년 국정감사장에서 오고간 대화이다. 대화의 주인공은 현직 검사장급 인물이었다. “조직을 사랑합니까?”

“네, 저는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습니다. 조직을 사랑합니다.”

쉽지만 어려운 이야기다. 직장인들에게 상사는 조직과 동일시된다. 조직의 공적인 질서와 이익을 배반하고 사적인 충성과 부정을 요구하는 상사는 실제 많지 않겠지만 직장인에게 한번쯤 부딪치는 선택지이기도 하다. 한창 기세 좋게 승진하며 실세로 군림하는 상사에게 등을 돌리거나 거리감을 두는 것은 쉽지 않다. 물론 그 상사가 회사에 대한 충성심과 애사심이 남다르고 열성적이라 존경할 만한 상사라면 고민할 거리도 아니다. 하지만 상사의 작은 부정과 일탈을 눈치 채고도 이를 그 위에 직보하기도, 아니면 혼자서 끙끙 앓다가 엎어버리기도 쉬운 결정은 아니다. 경험치에 의해 직장인들은 ‘내부자 의식’이 심어져있고 그 안에서 이탈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답은 나와 있다. 조직과 사람에 대한 선택지 앞에서는 무조건 조직을 선택해야 한다. 사람은, 즉 상사는 당신을 보호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지만 조직은 특성상 조직의 위한 행동에 보답을 한다. 그것은 제2, 제3의 조직우선주의자, 조직보호자를 만들어내기 위한 방편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조직보다 상사의 보복이 더 직접적이고 빠를 수 있다. 하지만 조직이 버스라면 조직원은 승객일 뿐이다. 정류장에서 내려서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정류장마다 내리고 타야 하는 것이다. 버스의 앞자리나 좋은 자리에 앉아 있다고 그 자리가 영원히 앉은 자의 것이 아니다. 누가, 언제, 앉고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버스는 계속 노선을 돈다는 것이다. 그 버스에서 오래 탈 수 있는 방법은 버스를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래도 약간 서글픈 것은 버스가 종점에 도착하면 누구하나 예외 없이 다 내려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직장인의 숙명이다.

[글 박기종(커리어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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