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1 부대, 이시이 시로, 미국 (GHQ), 교토대 의대, 녹십자사 커넥션

 

2. 설립[편집]

1936년에 육군군의학교 방역부 휘하 이시이 시로 등 군의(軍醫) 5명이 속한 방역연구실로서 시작되었다. 1936년 당시 관동군 참모장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가 관동군 방역부의 신설 및 증강을 주장했고 이것을 당시 천황이었던 히로히토가 재가하면서 방역연구실은 '관동군방역부'로 정식 발족되었으며 1940년하얼빈시 남부 핑팡(平房)에 새로운 부대 시설을 지은 뒤 통칭 '만주 제659 부대 관동군 방역 급수부(満洲第659部隊 関東軍防疫給水部本部)'로 개편되었다.[7] 이 부대는 일본 제국이 패망한 1945년까지 약 5년 간 활동했다.

 

 

미국도 전후 전범들과의 사법거래를 통해 생체실험을 통해 나온 자료를 고스란히 얻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시이 시로 같이 731 부대에서 제대로 된 죗값을 치른 자들보다 사회적으로 출세한 자들이 압도적으로 많은데[9] 이는 미군과의 사법거래에 의한 것이다. 미국이 자료에 눈이 멀어 전범에게 면죄부를 준 탓에 죽어나간 사람들만 억울하게 되었고 이는 미국이 난징 대학살, 만주사변, 위안부 문제와 달리 731 부대에 대해서는 최대한 말을 아끼는 가장 큰 이유다.
 

 

 

1998년 KBS 일요스페셜에서 "731부대는 살아있다" 다큐멘터리를 방영해 시청자들에게 다시 한 번 큰 충격을 줬다.1편, 2편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731 부대 부대장 이시이 시로6.25 전쟁 당시 미군의 요청으로 대한민국에 들어와 일본에서 싼값에 거둬들인 혈액을 6.25 전쟁에서 미군에게 비싸게 팔아서 많은 이득을 얻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심지어 일본 헌병특무대에서 체포한 한국(조선) 독립운동가 40여명을 체포하여 이들에게 콜레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한 생체실험이 이뤄졌다[15]는 내용 등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16]

 심지어 여기에서 파생되어 731 부대에서 얻은 세균무기를 토대로 6.25 전쟁에 사용했다는 더 충격적인 내용도 있다.# 그러나 니덤 보고서는 영국 과학자 조지프 니덤이 작성했지만 이를 주도적으로 배포한 국가가 중공이었으며 미국 CIA의 입장은 미군 전쟁포로가 중국에 억류되는 동안 중공군에서 이들에게 허위진술을 한 내용이 그대로 흘러들어간 것이라고 일축했기 때문에 6.25 전쟁에서의 사용 여부는 아직도 논란 중이다. 자세한 건 조지프 니덤 문서로.

 

 

3. 업적 및 영향[편집]

조지프 니덤의 과학사적 업적은 명저 중국의 과학과 문명으로 설명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중국의 과학과 기술 모든 분야를 망라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바탕으로 중국과학사를 연구하였으며, 이는 후대의 중국과학사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 일관되게 나오는 내용은 중국이 고대서부터 12, 13세기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분야에서 서양보다는 같은 수준이거나 오히려 앞선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서양학자는 물론 동양계 학자조차 고문서 짜집기하고 멋대로 허위 주장한다고 그를 저격하고 있다.

니덤은 중국의 전통과학이 서양의 근대과학과는 다르게 종합적·유기론적·비결정론적·비인과율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을 통해, 중국의 전통과학이 서양의 근대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이런 중국의 전통과학이 현대 물리학의 성격과 비슷함을 강조하면서, 서양의 근대과학을 거치지 않고 현대 과학으로 가는 또 하나의 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중국의 전통과학은 그러한 발전을 할 수 없었는가?라고 하는 질문, 니덤 문제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한 답변을 그의 저서를 통해서 풀어내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과학에 대한 여러 오해들, 수학의 미발전이나 실험의 부재, 논리적 추론의 전통의 부재, 또 중국어 때문에 논리적 추론에 방해받았다는 주장들을 여러가지 자료들을 통해서 반박하였다. 니덤 문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중국의 전통과학이 현대과학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에 기초하여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목차 역시 현대 과학의 분야들에 맞추어 중국의 전통과학을 이해하려고 하였다.

4. 비판[편집]

중국의 과학기술을 정도가 심할 정도로 과대평가하여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재밌는 점은 중국의 과학기술이 원시적이고 조잡하다고 본인 스스로 밝히면서도 출처가 불명확한 문서들을 조합해서 마치 중국이 대단한 과학기술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등 모순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친중파인 그의 사적 행보와도 맞물려서 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점은 비판받는 점이다. 현대 과학의 분야들에 맞추어 중국의 전통과학을 이해하려한 시도 역시 중국의 전통과학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방해요소가 된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2]

특히 한국의 과학사는 니덤의 피상적인 이해를 잘 드러낸다고 박성래 교수는 지적한다. 니덤이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동아시아 과학에서 한국의 위치를 높게 평가한 것은 사실이나, 정작 인명표기에 있어서 오기가 많은 편이고 앙부일구가 중국에서 만들어져 조선으로 수입된 것이라고 기술하는 등 한국과학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그에 대한 이해가 떨어진다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3]

또한 한문 문장 역시 전문 연구자치고는 능숙하지 못하다는 비판 역시 있으며, 중국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다는 점, 중국의 입장에서 다른 나라들의 과학발전을 바라본다는 점도 니덤이 비판받는 점이다.

다른 각도로는 그가 해당분야에서 선구자적 인물이다 보니, 그에 대한 건전한 비판이 부족하고 그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에 대한 학문의 원론적인 성격의 비판도 존재하나 사실 그의 주장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은 중국의 국수주의 학자들 외에는 없다. 대표적으로 조지프 니덤이 정크선에 대해 연구하면서 정크선의 수밀격벽 구조를 중국인들이 고대에 대나무 뗏목을 사용하면서 대나무 내부의 마디에 착안해 수밀격벽을 만들었을 것이며 수밀격벽 역시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이 제대로 비판받은 것은 상당히 최근의 일이다.[4] 또한 정크선에 대해 연구하면서 정크선의 혁신적인 부분을 강조하는데 집중한 나머지, 군함으로서의 발달이 미흡하여 서양식 배에 중국인들이 많은 관심을 가진 사실을 간과했다.[5]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대학 시절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31]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든 겁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정리해 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났다.

하나 더하자면 생체실험과 세균전이라는게 조금 쉬쉬했을지는 몰라도, 일본 육군과 전 일본 의학계에서 광범위한 협조를 얻어 이뤄진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시이 시로의 지휘와 군부 밎 의학계의 높으신 분들의 뒷바라지 아래 인력과 돈이 광범위하게 들어간 사업이라는 건데 이렇게 따지고 보면 731부대가 천황도 몰랐던 부대니 국화무늬가 없는 부대니 하는 말 자체가 그저 광범위한 전쟁범죄를 저거 하나로 물타기하려는 꼬리자르기용 어구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저 위에서 이시이 시로가 언급한 이시가와나 오카모토, 그리고 동상 연구반장 요시무라 등은 대체로 교토대 의학부 출신으로 1907, 1908년생이며 부대 설립 당시 30대 초반의 젊은 비군인 의학자들이었는데 그들을 이 부대로 보내고 이 연구결과를 기대하고 이용하려는 누군가가 의학계의 거물 중에 있었다고 볼수 있다. 그 점에서 이는 일본 군부의 흑역사일 뿐 아니라 일본 의학계 전체의 흑역사가 될 수도 있는 문제다.

 

 



2014년 1월 21일 교토대학 의학부에서 731 부대에 가담한 관계자들에게 1960년까지 꾸준히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경성제국대학에서도 1945년에 박사 학위를 수여한 것으로 밝혀졌다. 뉴스, 뉴스2 2015년 중국의 한 청년이 731 부대와 비슷한 성격의 부대인 526 부대에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고 공개했다.(#) 2016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부산에서도 생체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전파했다. #[38] 

 

 

미국에 의한 전쟁범죄 은폐와 면책특권 부여[편집]

그러나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은 비밀부대의 지도자들에게 면책특권을 부여하고 전쟁포로와 남성, 여성, 어린이, 심지어 유아를 포함한 민간인에 대한 끔찍한 실험에 대한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기밀해제에 따라 공개된 문서에서 일본과 미국의 ‘검은 뒷거래’가 드러났습니다.

일본은 생체실험 결과를 대가로 미국에 전쟁범죄 면책 특권을 요구했고, 미국은 해당 데이터를 미군 포트 데트릭 연구소로 옮겨 냉전 기간 생물·생화학 무기 개발에 사용하며 일본의 전쟁범죄를 눈 감아 준 정황이 확인된 것입니다.

At the end of the war, US authorities secretly granted unit officials "immunity from prosecution" in return for access to their research. Several former Unit 731 officials went on to have successful careers in medicine, academia and business.
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당국은 비밀리에 부대원들에게 그들의 연구에 대한 접근권을 주는 대가로 "기소 면책"을 부여했습니다. 몇몇 전직 731부대 간부들은 의학, 학계 및 비즈니스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습니다.

전후 731 부대 구성원들이 전쟁범죄에 대해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마음껏 활개치고 다니게 된 것은 미국 때문인데 미국에서 일본과 뒷거래를 해서 일본이 미국에게 실험 결과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이 이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 묵인하고 이들에 대한 면책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때 최대 피해국인 중국[39]과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였고 냉전 시대라는 특성상 당시 자유진영이었던 일본이 자유진영 맹주 미국의 우방이라 미국이 덮어 주기 쉬운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고 따라서 731부대의 만행을 알리는 것에는 미국이 소극적이고 최대의 피해국인 러시아, 중국이 나서고 있다.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큰 중국과 러시아가 이를 공론화해 줘서 다행이라는 평이 나왔다. 중국이 일본을 GDP 순위에서 추월하면서 나름 국제사회에서 목소리가 커지고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등으로 날을 세우기 시작하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꺼내들기 시작했기 때문인데 기본 시설과 극비문서 일부, 그리고 731 부대의 시설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려고 시도하거나 1950년대 발굴된 731 부대의 기록물에 관해 발표하는 등 매우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과거사 청산에 소극적인 일본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있다. 이 발표 자료는 1936년부터 1945년 5월 사이에 작성된 것들로, 81권의 책자와 400여 건의 문서, 70여 건의 시청각 자료로 상당한 수준이다. 관련 기사보도
이러한 미국의 소극적 태도는 독일 전범재판에서 생체실험 등에 참여했던 의사 전범 20명이 기소돼 7명이 사형을 선고받는 등 무겁게 처벌된 것과 비교된다. 심지어 소련조차 전쟁 후 만주를 점령한 뒤 731부대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벌여 전모를 거의 파악했고 100명이 넘는 관계자들 가운데 12명을 기소했다. 소련은 조사 내용을 미군 측에도 넘겼으나 미국은 반인도 범죄를 처벌하는 대신 731부대의 연구 성과를 넘겨받고 일본을 냉전의 대리인으로 내세우기 위해 용인하는 쪽을 선택했다.

미국의 이러한 묵인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데 일단 소련도 데이터를 활용한 것까지는 미국과 똑같았지만 그나마 관계자들 가운데 일부는 기소까지는 했고 조사 내용도 미국에게 넘겼다. 그런데 미국은 731부대의 연구 성과를 넘겨받아 이를 용인하고 심지어 생체실험 자료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전범 재판의 기소를 면제해 주기까지 했다(출처: 중앙일보)

1945년 10월 731 부대장의 오른팔이었던 대령과 곤충학자인 소령, 전 육군참모 등 3명을 미 육군의 생물전연구 기관 캠프 데트릭의 샌더스 중령이 신문한 기록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전쟁범죄자의 적발과는 별개의 문제이니 안심하고 얘기해주기 바란다 . (중략) 대통령에 제출하는 비밀 보고 자료를 작성하기 때문에..."
샌더스 중령은 731부대의 신문 보고서를 1947년 12월 12일 미 국방부에 제출한다. 그가 제시한 최종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일본인 과학자들이 수백만 달러의 비용과 오랜 세월을 거쳐 얻은 자료다. 이런 정보를 우리 쪽 연구소에서는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체실험은 양심의 가책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를 총액 25만엔 정도로 얻었다. 연구에 투입된 비용을 따져보면 이는 미미한 금액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이런 정보를 제공한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국은 731 부대가 아니라 일본에서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하여 살해되었을 때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하였지만 731 부대를 비롯한 자국민 이외의 사람이 생체실험을 당한 경우에는 전혀 처벌하지 않고 오히려 금전까지 지급하며 보호하였다.[40] 뿐만 아니라 미국은 생체 실험 주범들에게 월급을 주고 실험 인원으로 고용하기도 했으며 미국의 화학전 요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까지 요청하였다.

미국이 이같은 행동을 한 이유는 종전 이후 소련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은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에 페이퍼클립 작전으로 대표되는 인재와 기술력이 절대 소련에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계산이 있었고 독일의 일반 과학자는 물론 베르너 폰 브라운 같은 나치 소속 과학자도 거짓으로 신분세탁을 해 가면서까지 빼 왔다. 때문에 특히 윤리적 문제로 구하기 힘들고 사법처리 도중 소련에 넘어가기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는 인체실험 자료라는 점이 미국 입장에는 충분히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거래에 응했고 실제로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경쟁의 주역이 되는 등 유용했기 때문에 미국의 위선적인 면모와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41]
 
 
 
 
제국은행 사건

사건 초기에 경찰은 구 일본군, 특히 세균전 부대 관련자들에게 혐의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사건의 수법 등이 화학물질의 취급에 익숙한 자가 아니면 힘든 방법이었고 방역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을 사칭했다는 점에서 731 부대 관련자가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런 가운데 수사팀은 구 일본군 육군 제9연구소 소속의 반 시게오라는 자로부터 유력한 정보를 입수해 형사반장은 구 일본군의 특수요원들 쪽으로 수사망을 좁혔다. 그런데 갑자기 연합군 최고사령부에서 구 일본군 특수요원들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수사는 난항에 봉착했다.

다른 한편으로 유사 사건들에서 나온 명함, 특히 마쓰이의 명함을 가지고 수사를 진행하던 다른 팀이 마쓰이 명함의 행방으로 범인을 추적해 나갔다. 당초 수사팀에서 명함을 가지고 수사하던 팀은 보조적인 역할에 불과했지만 사건이 난관에 봉착하자 이쪽으로 수사 방향이 급선회되었다.

마쓰이는 자신이 명함을 준 날짜와 장소, 상대를 모두 기록해 두었기 때문에 추적은 나름대로는 쉬운 편이었다. 명함 100장 중 마쓰이 자신이 8장을 가지고 있었고 나머지 92장 중 62장을 수거했다. 수거하지 못하고 받은 이들이 분실한 명함이 22장이었는데 이는 사건들과는 무관하다고 판명되었다. 나머지 행방을 끝까지 추적하지 못한 8장이 있었는데 이것들 중 한 장을 범인이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4. 범인 체포[편집]

그리하여 1948년 8월 21일 홋카이도 오타루시에서 유화를 전문으로 그리던 히라사와 사다미치(平沢貞通)를 체포했다. 명함을 추적하던 수사팀이 히라사와를 체포한 이유는 마쓰이와 명함을 주고받은 사람들 중 히라사와는 그 명함을 지니지 않았고 사건이 발생한 시간에 제국은행 근처를 산책하고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알리바이가 증명되지 않았으며 과거에도 은행에서 사기 사건을 일으켰었고 결정적으로 제국은행에서 도난당한 금액과 거의 액수가 똑같은 금액을 예금했기 때문이었다. 히라사와는 그 예금의 출처를 끝내 해명하지 못했다. 춘화를 팔아서 번 돈이 아니냐는 설도 히라사와는 끝까지 부정했고 오늘날까지도 이 예금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경찰에서 히라사와와 생존자들을 대질했지만 어느 누구도 히라사와가 범인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히라사와는 범행을 일관되게 부인하다가 9월 23일부터 자백을 시작해 10월 12일 제국은행 사건과 앞서 일어난 유사 사건 2건의 범인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12월 20일에 열린 공판에서 히라사와는 갑자기 자백을 뒤엎고 범행을 부인했다.

5. 재판 과정[편집]

그러나 히라사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1950년 7월 24일 도쿄지방재판소는 히라사와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하필이면 과거 히라사와가 니혼도 사기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여론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니혼도 사기 사건과 제국은행 사건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며 범죄 수법도 사기와 대량살인으로 큰 차이가 있다. 히라사와는 다시 항소했지만 1951년 9월 29일 도쿄고등재판소는 항소를 기각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지만 1955년 4월 7일 최고재판소는 상고를 기각하고 5월 7일 최종적으로 사형을 확정했다.

사실 히라사와가 죄를 뒤집어썼다는 지적도 나왔다. 왜냐하면
  • 사건의 정황이 히라사와가 범인이라고 상정하고 보면 무리한 게 많다는 점
  • 히라사와가 광견병 예방접종의 후유증인 베르니케-코르사코프 증후군 때문에 생긴 정신질환을 앓아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점
  • 당대 일본의 유명한 형사 히라쓰카 하치베에가 히라사와를 심문한 방식이 고문에 가까웠다는 점
  • 결정적으로 히라사와의 사형 판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히라사와의 자백조서 3통이 실은 거짓이었다는 것. 사건 조사에 관여하지도 않은 이데이 요시오(出射義夫) 검사가 히라사와에게 백지를 건네서 지장을 찍게 했음을 오무라 도쿠조(大村徳三) 박사가 자백조서를 감정함으로써 밝혀냈다.

이런 의혹들 탓에 이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추리소설가 마쓰모토 세이초 등이 히라사와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탄원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의 법무대신들은 엔자이 의혹이 있는 사건을 대하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히라사와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만일 나중에 진범이 아니라고 밝혀지기라도 하면 그때는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나카 이사지(田中伊三次)가 법무대신으로 재임 중이던 1967년 10월 13일 그는 신문기자들을 집무실에 모아 앞에서 사형수 23명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한 뒤 이를 보도하라고 요구했는데 현장에서 히라사와의 사형 집행 명령서를 보고 그조차도 "히라사와는 엔자이잖아."라고 말하면서 명령서에 서명하지 않고 넘겼을 정도였다.[2]

1962년 히라사와는 도호쿠의 미야기 형무소로 이송되었다. 도호쿠의 기후가 좋지 않은 탓에 일각에서는 일본 법무성이 히라사와를 처형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계속 가둬 두면 뉴스가 되니까 기후가 안 좋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병으로 죽어서 잊혀지기를 바라는 게 아니냐는 음모론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미국의 저명한 잡지 타임이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런 점을 꼬집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히라사와는 95세를 일기로 1987년에 사망했다.
 
 
 
 

 

10. 현지 사건[편집]

1989년 신주쿠의 유명한 공원인 도야마공원(戸山公園)에 위치했던 후생성 연구청사의 건설현장 지하에서 100구가 넘는 훼손된 아시아인 유골이 발견된적이 있다. 수술 및 총상 자국으로 인해 훼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수 년 동안 일본 정부와 후생성은 이 유골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아서 미스테리로 남아 있었는데 이 연구청사가 있기 전에는 육군 군의학교가 있었다는 점, 지하에는 731 부대와 관련 깊은 연구실이 있었다는 증언 등과 신주쿠 구의원 까지 나서게 되면서 결국 731 부대의 생체실험 지하 연구소였다는 도시전설 비슷한 의혹이 나오기까지 했지만 정부와 후생성은 끝까지 부정하고 있었다.

이 미스테리는 당시 군의관 간호사 출신이였던 이시이라는 할머니가 종전 후 미국으로부터 생체실험 은폐를 위해 마루타들을 모두 처형시키고 지하에 매장시켜 그 위에 건물을 세워 들키지 않도록 했다는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밝혀졌다. 이후 후생성은 결국 일부를 시인했다. 후생성은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기관이라 입지에 타격을 입을 것을 걱정하고 계속 부정해 왔다는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부정하고 있다.
toyama door
도야마 공원 근처 당시 군의학교 731부대 지하연구실 입구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곳.

현재는 저렇게 형상만 남았는데 저게 뭔지 아는사람은 정색한다고 한다. 이 지역은 원래 군의학 시설이 많았던 곳이라 현재도 근처에 도야마 병원 등 의료센터가 많다. 구글맵 위치

이 사건을 기억하는 일본 시민은 그렇게 많지 않지만 알고 있는 사람은 도야마 공원이 있는 곳은 너무 무서워서 절대 살고 싶지 않은 마을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 이유에서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십 수년 전만 해도 이 부근은 굉장히 어두운 동네였다. 다만 현재는 근처에 신오쿠보라는 한인타운이 있고 좀 더 가면 가부키초, 신주쿠라는 일본에서 1, 2위를 다투는 도심이 있어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고 부동산 가격도 높은 편이다. 반면 이 도야마 공원 지역 주민은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소문을 내기도 하는데 농담 반 진담 반이다.
 
 
 
  • 2009년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운찬이 대정부 질의에서 731 부대를 아냐는 질문에 항일 독립군이냐는 발언을 했었다.
 

 

2.1. 초기의 활동[편집]

일본의 치바 현에서 태어나 교토제국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규슈대학 의학부에서 미국군 포로에 대한 생체실험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는데[6] 아이카와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사건은 큐슈대 의학부 인체해부 사건에선 자그마치 실험을 명령한 해군 장교들이 산 채로 해부된 미국군 병사들의 간을 먹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참고로 이 학교와 관련해 윤동주 시인의 사망이 일어났단 설이 있다. 피 대용으로 바닷물을 주입하는 대체실험을 당했다는 것. 다만 윤동주 시인의 최후는 여러가지 설이 있으니 단정지을 수는 없다. 윤동주 시인은 옥중 병사한 것이 현재까지 정설. 윤동주 생체실험설이 제기된 유일한 매체는 윤동주의 시체를 인수하러 간 친척의 증언이다.[7] 죄수들이 '이름모를 주사'를 맞았다고. 특이한 건 사망한 윤동주의 시신을 일반적인 생체실험 희생자처럼 화장하지 않고 유족이 잘 가져가게 방부 처리해서 넘겨주었다는 것이다.[8]

 

2.3.1. 그간의 통설[편집]

귀국 후 전범 추적을 피해 자기 장례식까지 치르고 가명을 써가며 은신했고 기회가 닿자 미 점령군 당국에 부하를 보내 전범 면제의 대가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세균전 자료 일체를 미국군에게 넘긴다. 이시이 시로는 미국에게 자신을 용서해주지 않으면 이 자료들을 소련에 준다고 협박했다. 실제로 마루타의 창시자이자 100부대 부대장인 다카하시 다카아쓰는 소련군한테 끌려가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혹사당하다 최후를 맞이했고, 이 외에도 상당수 전범들이 사형 내지는 종신형을 선고받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살 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부하들도 정상은 아니였는지 이를 기회로 이시이를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점령군과의 거래를 독점하고서는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발돋움하여 일본 녹십자(ミドリ十字)사를 만들어 명예와 돈을 거머쥐고 80년대까지도 고위층으로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러나 녹십자사도 시작부터 임상을 진행하는 와중의 잡음으로 비난을 받았으며, 결국 1980년대에 혈우병 치료제에 AIDS 환자의 혈액을 사용하여 일본 내 혈우병 환자들 5,000여명 중 무려 40%에 달하는 2,000여명이 줄줄이 AIDS에 감염되고 에이즈 감염자 대부분이 목숨을 잃는 최악의 참사가 터지고 말았고, 1986년에 이 사실이 폭로되며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었다.

1998년 일본 녹십자는 인수합병의 형태로 요시도미 제약이라는 회사에 합병되고 모든 기술은 요시도미 제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기업이 웰화이드라는 기업이며 또 이 웰화이드는 후에 미쓰비시 화학의 자회사인 미쓰비시 도쿄제약으로 합병되는데 이리하여 탄생된 기업이 미쓰비시 웰파마다. 이후에는 다나베 제약과 합병해 미쓰비시 다나베 제약(주)가 되었다. 참고로 이 기업은 한국 지사도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731 부대는 명맥을 이어가고 또 돈을 벌어 지금은 엄청난 대기업으로 발전했다. 한국 녹십자와는 혈액관련제재의 기술협력은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본 녹십자가 망하자 협력했던 지분은 한국 녹십자가 다 챙겼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이시이는 전쟁 전에 착복한 재산과 전후 고향에서 벌인 사업으로 번 돈으로 엽관과 매수에 공을 들여 어떻게든 옛날의 영화를 누리려 했다. 그가 했던 사업이란 매음굴을 겸하는 숙박업소와 실험용 흰쥐 농장이었다. 그런데 일본 쪽 위키백과에서는 단순 매음굴이 아닌 '뭔가 다른 것을 했다'고 나와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명확한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다.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선언과 함께 전쟁이 끝난 후 이시이는 존재 자체가 일본 의학계의 흑역사였기에 옛 부하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렇게 한 번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고 나서는 회개를 했는지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윤락업소 경영과 병행해서 동네 주민들에게 무상 의료 행위를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도 위법으로 이시이의 의사 면허는 1945년에 박탈됐으므로 걸리면 감옥에 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윤락업소 경영은 모순적 행동이다.

어찌되었든 그는 결국 실의에 빠진 채 미국군을 상대하는 윤락업소를 겸하는 여관 주인 노릇을 하며 살다가 67세에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어쨌든 이 자가 한 짓은 전범재판에서 무조건 사형이 선고될 중죄였기에 이렇게 천수를 누렸다는 사실 자체가 미국군과의 모종의 거래, 그리고 그 대가로 이어지는 신변 보호를 증명한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2.3.2. 진실[편집]

그런데 2014년 1월 교토대 의학부 도서관에서 발견된 1960년 2월 콜레라균 연구를 주제로 한 박사 학위 논문에 지도교수로 이시이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어, 종전 이후 사망하기 직전까지 자국에서 의학계의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731 부대의 반인륜적인 행위로 얻어진 결과물을 지속적으로 학계에 적용시켰던 것으로 밝혀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즉 위의 매음굴 운영과 불행한 말년을 보냈다는 정보는 이시이가 여전히 의학계에서 떵떵거리고 있는 사실을 외부에 은폐시키기 위한 역정보였던 것이다.

731 부대에는 일본의 최고학부를 졸업한 엘리트 의사나 과학자가 다수 있었고, 이들은 전쟁 후에 전범 기소를 받지 않은 채 각 대학으로 돌아가 일본 의학계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1986년에 폭로된 약해 에이즈 사건(薬害エイズ事件)[16]으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녹십자 제약회사의 설립자·대표 이사·전무 이사는 시로의 최측근이었던 나이토 료이치(内藤良一, 1906~1982)였으며, 그는 제2대 731 부대장을 역임한 바 있는 기타노 마사지(北野政次, 1894~1986)[17]를 고문으로 두고 있어서, 731 부대와 그 연속성을 찾아볼 수 있다.

참고로 731 부대 관련자 중에 전범 처리된 사람도 거의 없고 그 극소수도 처벌은 극히 가벼웠다. 1945년 소련군만주 작전 때 이곳은 점령하고 731 부대 관련자를 체포하였지만 이미 수뇌부는 일본으로 튀었고 일부 스태프만 소련군에 체포되어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 넘겨졌으나 이들은 강제노역형을 살다가 소련-일본 수교 협상 때 모두 풀려나서 일본으로 돌아온다.

일본으로 도망친 731 부대 고위 관계자들은 승승장구했다. 모두가 그러지는 못했고 이시이의 함구하는 명령을 따라서 군인연금을 신청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소년병 같은 경우는 학력도 인정 못 받았다. 그런데 특히 교토대학 의대 학장을 지낸 인물도 731 부대 출신이라는 것은 충격과 공포. 그의 이름은 요시무라 히사토(吉村寿人). 이시이의 대학 후배이자 동상 연구를 했으며[18] 이후 교토대학 의학부 학장을 지냈다.https://ja-m-wikipedia-org.translate.goog/wiki/%E5%90%89%E6%9D%91%E5%AF%BF%E4%BA%BA?_x_tr_sl=ja&_x_tr_tl=en&_x_tr_hl=en&_x_tr_pto=sc

더구나 731 부대는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안전하게 귀국한 사람이 많은 만주 주둔 일본군 중에서도 인원 손실율이 특히 낮은 부대라는 점에서 더욱 사람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다. 외국에서만이 아니라 관동군 출신자들 사이에서도 비난이 쏟아질 정도. 심지어 그들의 전범 혐의 노출을 막기 위해 안전 철수를 명령하고 직접 편의를 봐주었던 관동군 참모장교조차 전후에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릴 만큼 자기네 안전만 챙긴 놈들"이라며 비난해댔다.

여담으로 731 부대와 한국은 인체실험 희생자 외에도 의외의 분야에서 악연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유행성 출혈열[19]의 매개와 감염 경로의 규명 과정으로 이는 731 부대 관련자가 미국군의 위탁을 받아 연구를 실시한 결과이다. 그러나 역시 치료법은 고사하고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그저 기본적인 예방수칙 하나만 정리하는 데 성공한 정도이며 이 정도는 이미 미국군 중 상당수는 이런 예방수칙이 나오기 전에 어느 정도 기본적인 대책을 수립하고 있었다.

당대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타바이러스에 의한 유행성 출혈열은 미국 본토, 특히 서부의 풍토병이기도 하며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이 병의 예방을 위해 쥐를 피하거나 보는 족족 죽이는 관습이 있었다. 한국전에서도 관련된 조치가 일선부대 병사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오히려 731 부대 관련자가 미국군에 협조했던 탓에 "중국과 북한 상대로 미국이 세균전을 벌였다!"는 공산권의 선전에 철저하게 말려들어 국제적으로 욕만 먹었고 지금도 계속 구설수에 오르고 있으니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다만 부분적으로는 실험했다는 징후도 있으나 구두증언밖에 없었고 증언 당사자가 중국군의 포로심문 과정에서 진술한 것이 전부로 거의 전원이 송환 후 이를 부정했다고 전해진다. 앞서 정리되었듯이 병원체를 규명하지도 못했는데 그 바이러스를 사용해서 세균전을 했다는 말이 이상하다. 쥐의 사체를 폭탄에 실어 투하했다는 기록은 없다.

3. 회고[편집]

이시이 시로는 1955년 12월 교토 대학 때의 지도교수였던 기요노 겐지의 장례식장에서 이시이 기관의 설립되기까지의 경위와 규모, 목적 등에 대해 술회하였다.[20]
“그래서 육군이 여러 차례 회의한 결과 결정하여 기온의 변화, 환경이 다르므로··· 하나는 만주의 북단으로 가면 좋겠다는 것이어서 결국 연구소를 그곳에 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발전하여 우선 전쟁터가 4천 킬로미터나 넓어져··· 1년 내내 동시에 계속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우선 장병의 신체를 보호하고 사망률을 낮추려는 국가 백년의 계획을 세울 것을 정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육군군의학교에 연구실을 만들었고 다음으로 만주는 하얼빈에··· 또 남지는 중산대학을 중심으로 그 외 수차 연구실을 만들어 실시하였고 결국 324개의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전염병 및 전염병 사망률이 낮아져 대장성이 매우 기뻐하여 그렇다면 계속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하얼빈에 큰, 그러니까 마루 빌딩의 14배 정도의 연구소를 만들어 주었고 그 안에 전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었습니다. 모든 종합대학에 연구소가 만들어지고 거기서 열심히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께서 가장 주력하신 것인 인적요소입니다. 각 대학에서 가장 우수한 교수 후보를 모아 주셔서 여기 계신 이시가와 교수[21], 그리고 도호쿠대학의 오카모토 교수[22] 그 외 십여 명의 교수진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대동아의 전면에 걸쳐 이 민족선 방어의 제1차 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련이 왔기 때문에, 패전 때문에 부대는 폭발하고 모두 태우지 않을 수 없었고 비운으로 끝났습니다.”

이를 통해 정리해보면 대학 이상의 규모와 기동력을 가진 연구기관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32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일본을 대표하는 의학자, 과학자들이 참가한 세계 최대의 생체실험센터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패전으로 야망이 좌절되고 생체실험 등에 대한 것이 알려져 비판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성의 언급은 보이지 않고 오히려 패전으로 연구나 실험이 중단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만 드러나 있다.

또한, 저 정도 수준의 시설과 그걸 굴릴 인재들을 1930년대 후반 당시 일개 대좌였던 이시이 시로 한 사람의 지휘와 총 책임하에 만들고 모았다는 것도 넌센스다. 저 연설에서도 짐작가능하겠지만, 생화학전 준비와 그에 따른 생체실험 프로젝트 자체가 전 일본 군부와 일본 의학계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이루어졌지 일부 수뇌부와 이시이 시로 등의 핵심인물 몇이 사바사바해서 만든 극비부대는 절대로 아니었다. 일본 의학계와 군 전체가 저 비인간적인 활동의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4. 여담[편집]

전후 미국군은 '동물실험으로 얻을 수 없는 자료'에 눈독을 들여 731 부대 출신 인사와의 사법거래를 진행하고 이들의 신변을 보호했다. 또한 이는 미국의 이중잣대임으로 큰 비판을 받았고, 미국이 이들을 뒤늦게 처벌했다간 그동안 저지른 일에 대한 긍정이 되어버릴 상황에 놓인다.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의혹을 전면 부정하면서 더더욱 이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미국군이 보호한 관련자들이 살아서 일본 의료계 중진으로 자리잡은 것이 가장 큰 문제다.[23]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4012616595601909


945년 3월, 도쿄 육군군의학교에 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 1892-1959)는 이례적으로 육군 참모본부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갈을 받았다. 참모회의에서는 독성이 강해 치사율이 높은 페스트 균을 주무기로 한 세균전이 논의했다. 그 바로 뒤 이시이는 중장 승진과 더불어 다시 731부대장으로 복귀했다. 1942년 8월1일 1군 군의부장으로 떠났다가 도쿄 군의학교를 거쳐 다시 731부대로 돌아갔으니, 거의 2년 반 만의 복귀였다.

'악마의 의사' 이시이 시로를 (군의관으로서는 최고 계급인) 중장으로 승진시키면서 다시 731부대를 맡긴 이유는 뻔했다. 국제사회에서 전쟁범죄로 비난받기 마련인 세균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시이가 도쿄 참모회의에 불려간 시점은 10만의 희생자를 낳았던 미군의 도쿄대공습(1945년 3월10일) 직후였다. 적국을 향한 적개심이 넘쳐나는 가운데 일본 육군 강경파들은 세균무기 살포라는 벼랑끝 전술로 전세를 뒤집어보려는 헛된 기대감을 품었다. 

이시이 시로가 숱한 '마루타'를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키며 개발해온 세균무기를 실전에 쓰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패전 뒤 소련군에 붙잡혀 있다가 하바롭스크 전범재판(1949년) 피고석에 섰던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山田乙三, 1881-1965)가 남긴 진술에서도 드러난다(야마다는 8월15일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방송을 들었지만 공식 항복명령서가 올 때까지 버텼다. 8월17일 일본 왕족 한 명이 항복명령서를 들고 관동군사령부로 가서 항복명령서를 건네자, 8월19일 공식 항복했다). 

"1945년 봄 세균무기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법 연구가 완료된 뒤, 육군성으로부터 세균무기를 증산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나는 그 통지를 실행하는 데 필요한 일체의 조치를 취했다" (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167쪽). 

야마다 사령관이 말하는 '세균무기의 가장 효과적인 사용법'이란 벼룩이 든 도자기 폭탄을 비롯한 '이시이식' 세균폭탄의 사용, 비행기를 이용한 페스트균 살포, 지상에서 비밀리에 세균을 뿌리는 모략 작전 등을 가리킨다(야마다는 자신의 지휘권 아래 있는 731부대가 세균전을 준비한 책임을 물어 25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은 뒤, 1956년 일·소 국교회복이 이뤄지면서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시이, "세균병기 포함한 최후의 수단 써야" 

전세를 뒤집기 위한 방책의 하나로 세균전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일본 육군의 결정은 '악마의 의사' 이시이의 존재감을 키웠다. 한편으로 이시이는 주군인 히로히토에 대한 충성심과 사명감도 새삼 다졌을 것이다. 그는 731부대장 재부임 한 달 뒤인 1945년 4월 731부대 본부에서 각 지부장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전세를 호전시키려면 세균병기를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사실은 그의 부하 니시 토시히데(西俊英)의 증언에서 확인된다. 니시는 731부대 훈련교육부장 겸 슨우(孫吳) 지역의 673지대장(군의중령)을 지냈고, 세균무기를 제조하거나 마루타를 놓고 세균 생체실험을 했던 전쟁범죄자였다.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 법정에서 이렇게 이시이의 발언을 옮겼다.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천하를 가르는 대격전에 예상된다. 그 때는 일본 본토로 미국의 상륙작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731부대)는 가장 면밀(綿密)하게 미국과 소련의 동맹에 맞서 싸우는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 전황은 악화되고 있다. 우리는 올해 봄이 끝날 때쯤이나 여름에 전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세균병기를 포함한 최후의 수단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靑木富貴子, 141-142쪽).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의 또 다른 피고 구츠다(崛田)도 위의 이시이의 발언이 사실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여 구츠다는 그 무렵 쥐를 비롯한 설치류 번식이 급격히 늘어났고, 벼룩의 대량 증식을 꾀하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구츠다가 옮긴 이시이의 범죄적 발언. 

"소련의 전쟁에 대비해 731부대는 온 힘을 다해 세균과 벼룩, 그리고 쥐의 생산을 확대해야 한다. 태평양전쟁의 불리한 국면을 바로 세우기 위해 대량의 세균무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8월 말까지는 대량의 쥐를 잡는 임무를 마치는 동시에 1~2톤의 벼룩을 준비해야 한다"(진청민, <일본군 세균전>, 청문각, 2010, 265쪽).

만주에서는 대대적인 쥐잡기 소동이 벌어졌다. 목표는 1945년 9월말까지 300만 마리였다. 관동군은 중국 농민들은 물론 학생들까지 강제로 쥐를 잡으라고 몰아세웠다. 병사들도 군복을 벗고 평복 차림으로 군용 트럭에 쥐틀을 싣고 다니며 쥐잡이에 나섰다(대동아공영권의 맹주였다는 자부심을 지닌 오늘의 일본 극우들조차 '그때의 모습을 돌아보면 부끄럽다'고 말할 듯하다. '한때 만주를 호령하던 100만 관동군의 위용은 간 데 없는 말기적 모습이 아닌가'라며 혀를 찰 것 같다). 

▲ 1945년 8월9일 소련군이 일본 관동군 진지 쪽으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관동군은 60만의 포로를 남기며 궤멸됐다. ⓒ주한러시아대사관

'세균무기야말로 기사회생의 비밀병기' 

지난 주 글에서 살펴봤듯이, 잇단 생체실험 끝에 이시이는 페스트 균이 다른 균(콜레라, 장티푸스)보다 독성이 강해 치사율이 가장 높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페스트에 감염된 쥐벼룩을 이용한 도자기 폭탄을 만들려 했다(연재 55 참조). 731부대 본부와 여러 지부는 식당이나 빈 건물에다 사육장을 만들어 놓고 쥐를 대량 번식시키는 방법도 썼다.

아울러 페스트균 폭탄에 쓰일 벼룩도 번식시켰다. 벼룩을 키우는 배양기가 모자라면 석유통에다 벼룩을 담아 키웠다. 이 모든 소동이 페스트 세균폭탄을 만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시이는 관동군이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만주에서 철수할 경우, 적군(중국군, 소련군, 조선독립군)의 근거지에 벼룩을 대량 살포한다는 계획도 세우고 '사쿠라 특공대'란 이름의 별동대를 만들었다. 

전황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가운데 일본군 대본영, 특히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강경파들은 '세균무기야말로 기사회생의 비밀병기'라며 기대감을 높였다. 위에서 봤듯이, 이시이를 중장으로 진급시켜 731부대로 돌려보냈던 것도 그런 기대감에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731부대는 그런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소련군에 맞서 이렇다 할 세균전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서둘러 철수해야 했다. 이시이로서도 매우 당혹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소련군의 군사 개입이 벌어지더라도 9월쯤에나 이뤄지리라는 일본군의 예상이 깨졌고, 소련군의 진공 속도가 너무 빨랐다. 뒤집어 보면, 관동군이 너무 무기력하게 소련군에 무너졌기 때문에, 이시이의 731부대가 세균작전을 펼 틈이 없었다. 

관동군 포로 60만, 붉은 군대의 압도적 승리 

일본과 소련은 1941년 4월13일 일·소 중립조약을 맺었었다. 미국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여긴 일본이 북방쪽 안보 걱정을 덜려는 심산에서였다. 소련의 스탈린은 일본 관동군의 위협을 신경쓰지 않고 독일과의 전쟁에 전념할 수 있어 좋았다. 일반적으로 어느 조약이든 서로에게 이득이 될 때는 지켜지지만 상황이 바뀌면 언제라도 깨지기 마련이다. 소련이 1945년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중립조약은 깨졌다. 

8월9일 새벽 소련군은 병력 150만, 탱크 5500대, 비행기 5000대를 동원해 그야말로 물밀 듯이 관동군을 밀어붙였다. 지휘관은 극동군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대장이었다.관동군의 주력은 중국 본토로 또는 태평양전선과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해 많이 빠져나갔기에, 러시아군의 상대가 되질 못했다. 소련군 침공 열흘 뒤(8월19일) 관동군사령관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소련군에게 공식 항복했다. 관동군 71만 병력 가운데 전사자는 8만에 이르렀고, 시베리아로 끌려간 포로 60만 가운데 6만4000명이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죽었다(호사카 마샤야스, <쇼와 육군>, 글항아리, 2016, 1055쪽 참조). 

물론 소련군도 손실이 없진 않았다(소련군 1만2301명, 소련군과 함께 관동군을 공격했던 몽골인민공화국 군인 72명). 이런 손실은 전체 작전 참가병력의 0.7%로, 독일군과 맞서 싸웠던 유럽전선에서 소련군이 입었던 손실(전사 및 실종 760만, 포로 520만, 수감 중 사망포로 260만)에 견주어보면 '거의 손실이 없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붉은 군대의 압도적 승리였다(폴 콜리어, <제2차 세계대전>, 플래닛미디어, 2008, 689쪽 참조). 

▲ 731부대원들은 서둘러 도망치면서 ‘마루타’들을 죽이고 건물을 무너트려 전쟁범죄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폭약으로 파괴된 채 남은 보일러실의 굴뚝 2개. ⓒ위키미디어

"731 드러나면 히로히토에게 누 된다" 

소련군의 기습공격으로 관동군이 급속하게 무너지면서 731부대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없애고 도망치기에 바쁘게 됐다. 소련군의 침공 당일(8월9일)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관동군사령부에게 731부대를 다른 부대들보다 앞당겨 철수시키라는 전보를 보냈다. 관동군사령부는 이시이에게 '직접 사령부에 와서 명령을 접수하라'고 알렸다.

그때 이시이는 본부(하얼빈 외곽의 핑팡 지역)에 없었다. 세균무기로 갖고 사쿠라 특공대와 함께 지린성 통화(通化)지역에 가 있었다. 이시이의 부관이 급히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新京)으로 달려가 받아본 명령 문안은 '731부대는 정황에 따라 임기응변하라'는 것이었다. 사실상 '잡히지 말고 서둘러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도쿄의 일본 육군 지도부가 731부대의 전쟁범죄가 문제될 것을 얼마나 걱정했을까를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아사에다 시게하루(朝枝繁春) 육군 참모와 관련된 이야기다. 아사에다 참모가 훗날 남긴 회고담에 따르면, 8월9일 관동군으로부터 소련군 침공 소식을 듣자말자, 731부대를 떠올렸다. '731부대의 세균전 실태가 드러나면 히로히토 국왕에게 누가 될 것'이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참모들과 상의 끝에 육군 참모총장의 명의로 이시이 시로에게 신징 군용비행장에서 대기하라는 전보를 쳤다. 

참모총장 훈령, "증거 다 없애고 빠져나오라" 

8월10일(일설에는 8월11일)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비행장 격납고에서 이시이-아사에다의 만남이 이뤄졌다. 이시이를 보자말자 아사에다의 첫마디는 '마루타는 몇 명 남았는가요'였다. 1시간 가량의 만남에서 아사에다는 731부대 철수와 관련한 육군 참모총장의 훈령을 이시이에게 전했다. 

[1. 귀부대는 전면적으로 해소(解消)하고, 부대원은 한시라도 빨리 일본 본토로 귀국시키고, 일체의 증거물건은 영구히 지구상에서 없앨 것. 2. 이를 위해 공병 1개 중대와 폭약 5톤을 귀부대에 배속하도록 이미 수배를 마친 상태이므로, 귀부대의 제반 설비를 폭파할 것. 3. 건물 안의 마루타는 전동기로 죽인 뒤 귀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하고, 그 재를 송화강에다 흘려보낼 것. 4. 세균학 박사학위를 지닌 귀부대 군의관 53명은 귀부대의 군용기로 일본으로 곧바로 송환할 것. 그 밖의 직원과 부녀자, 아이들은 만주철도로 다렌(大連)까지 먼저 수송한 다음 내지(內地, 일본)로 송환할 것](靑木富貴子, <731 石井四郞と細菌戰部隊の闇を暴く>, 新潮社, 2008, 173-174쪽). 

위 훈령문을 한 문장으로 줄인다면, '731부대의 전쟁범죄 증거들을 모두 없애고 빨리 그곳에서 빠져 나오라'는 것이다. 이시이로선 그동안 애써 모은 세균전 자료를 폐기하라는 명령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얘기를 마치고 돌아서던 아사에다를 불러 세우고 이렇게 물었다. "(세균전) 연구 자료만이라도 갖고 돌아가면 안 될까요?" 아사에다의 회고담에 따르면, 이 질문에 대해 "아니, 안 돼!"라는 반말 투의 단호한 대꾸를 했다고 한다. 

(이시이는 당시 53세, 아사에다는 33살로 나이 차이가 스무 살이 났고 계급 차이도 컸다. '일체의 증거를 없애라'는 참모총장의 훈령은 엄격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느라 말이 저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졌을 것이다. 한편으로, 아사에다의 언행에서 당시 엘리트 의식으로 우쭐해 거만을 떨었던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기세등등했던 분위기가 묻어난다. 하지만 이시이는 훈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조선 독립투사를 비롯한 많은 '마루타'를 희생시키며 만들어낸 피 묻은 세균전 자료를 더러운 거래수단으로 썼다). 

▲ 731부대가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도자기 세균폭탄 파편들. ⓒ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칼 빼든 이시이, "731 비밀, 무덤까지 가져가라" 

하얼빈 외곽의 731부대 본부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일본군 병사는 선임들로부터 '무엇이나 함부로 엿보거나, 말하거나, 엿들으면 안 된다'는 세 가지 부대훈(訓)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 핑팡으로 돌아온 이시이는 곧 모든 부대원들을 불러 모아놓고 철수 방침을 알리며 이렇게 큰소리로 말했다. 

"731의 비밀을 어디까지나 지켜주기 바란다. 만약 군사기밀을 누설한 자가 있다면, 이 이시이가 그 비밀을 지껄인 자를 어디까지든 추적할 것이다. 첫째,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731부대에서 근무했다는 사실을 숨길 것이고, 둘째, 어떠한 공직도 맡지 말며, 셋째, 대원들끼리의 연락도 엄금한다. 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靑木富貴子, 176-177쪽).

일본 군도를 빼들어 흔들며 이시이는 (전쟁범죄로 얼룩진) 731부대의 기밀을 지켜야 한다고 소리 높이 외쳤다. 그런 살벌한 이시이의 모습을 바라보는 부대원들은 귀기(鬼氣)를 느꼈다고 한다.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면 731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져가라'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실제로 일부 대원은 이시이 부대장의 말대로 자신의 과거를 숨기려고 군인 연금조차 신청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았다).

세 곳의 소각로에서 타오르는 연기 

흔히 731부대를 '731 세균부대'라 일컫는다. 731부대의 죄악상에서 페스트를 비롯한 세균의 비중이 워낙 크기에 그렇게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가 세균무기 개발에 미친 듯이 관심을 쏟았고,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균 하나에 매달린 것은 아니다. 세균실험 말고도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여러 생체실험을 했다. 따라서 '731부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731부대는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처럼 독가스 무기를 쓸 요량으로 독가스 실험도 했다. 이를 위해 지은 건물은 바로 옆의 가스저장실과 함께 (둘 다 부분적으로 파괴된 채로) 지금도 남아있다. 독가스 실험장으로 내몰린 '마루타'들은 이미 세균실험을 비롯한 여러 가학적인 생체실험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기진맥진해 있던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독가스 실험장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길목이었다. 그렇게 죽은 이들은 소각로로 보내졌다. 

731부대는 모두 세 곳의 소각로를 운용했다. 나치 독일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독가스 실을 운용하면서 '최종 해법'(Endlösung)이란 용어를 썼다. 그 단어를 여기에 빌리자면, 731부대가 세 곳의 소각로를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최종 처리'해야 할 '마루타'와 세균무기 개발과정에서 태워 없애야 할 각종 생체실험 장비들이 그만큼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련군의 침공을 맞아 731부대가 서둘러 철수하는 마지막 날, 소각로 굴뚝의 시커먼 연기가 더욱 세차게 솟아올랐다. 평소라면 소각로는 생체실험 과정에서 생기는 피 묻은 옷가지 또는 세균에 오염된 장갑이나 실험 장비들, 그리고 죽은 마루타들을 태우는 용도로 썼다. 그렇지만 소련군을 피해 도망치는 무렵엔 다른 것들이 태워졌다. 생체실험과 관련된 각종 표본과 세균 배양 도구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각종 문서들이 소각로의 불길 속으로 들어갔다.

'최후의 마루타', 독가스로 죽여 불태워 

731부대의 7동과 8동 감옥에 갇혀 있던 '최후의 마루타' 숫자는 40명으로 알려진다. 그렇다면 그 '마루타'들은 어떻게 '최종 처리'됐을까. 일본 육군 참모총장이 731부대 철수와 관련해 전보로 보낸 훈령에는 '마루타는 전동기로 죽인 뒤 귀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하고, 그 재를 송화강에다 흘려보낼 것'으로 쓰여 있었다. '전동기'라면 전기충격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실제로는 독가스(청산액화 가스)로 죽였다.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森村誠一)는 <悪魔の飽食>(角川文庫, 1983)에서 그때의 참상을 지켜봤던 731부대원의 증언을 이렇게 옮겼다. 

[마루타 가운데 몇몇은 독가스로는 아직 죽지 못해 강철로 된 문을 두들기며 끔찍한 소리를 내고 목을 쥐어뜯으면서 몸부림쳤다. 죽은 마루타들의 다리를 잡아끌어 7동 옆에 파두었던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가솔린과 중유를 퍼붓고는 불을 붙였다. 8월11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루타의 시체는 좀처럼 타지 않았고 철수는 시각을 다투었다. 도망치기에 정신이 없었기에 시체 소각작업 중 그대로 흙으로 덮어버렸다](森村誠一, <악마의 731부대와 마루타>, 고려문학사, 1989, 128쪽). 

'마루타'들을 모두 죽이고 불태우긴 했지만, 서둘러 도망치느라 그 재를 송화강에 뿌리라는 훈령을 따르진 않았다. 곧이어 부대 건물들이 폭파돼 무너졌다. 의심이 많고 꼼꼼한 성격을 지닌 이시이는 약제 담당 소좌가 모는 경비행기에 올라타 731부대의 파괴된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사진에 담았다. 그런 뒤 다렌의 731부대 출장소에 들러 필름 현상을 맡겼다. 

오늘날 전해지는 731부대의 흑백 기록 사진들은 음침한 분위기를 풍긴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노라면, 80여 년 전 그곳에서 가학적인 생체실험을 받다 숨져간 '마루타' 원혼들의 눈물이 사진에서 배어나오는 듯하다. 워낙 철근 콘크리트 두께가 두꺼워 폭파되지 않은 동력반 보일러실의 거대한 굴뚝 2개도 눈길을 끈다. 8월17일 소련군이 핑팡의 731부대를 접수했을 때 남은 것은 파괴된 건물 잔해였다. 무너진 건물 사이로 페스트 벼룩을 지닌 쥐들이 떼 지어 다닐 뿐이었다(일본군이 풀어놓고 간 페스트 쥐는 큰 피해를 남겼다. 다음 주 글에서 살펴본다). 

▲ 생체실험용으로 쓸 '마루타'들을 가두어 두었던 731부대 감옥. 731부대가 막판에 폭약으로 파괴했다. ⓒ한민족문화교류협의회

피묻은 세균자료, 부산항에서 옮겨 은닉 

바로 그 시각에 이시이는 괴뢰만주국 수도 신징의 기차역 귀빈실에서 특별열차를 기다리며 앉아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세균전 자료들을 열차에 싣고 평양-경성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상부의 훈령을 어기면서 챙긴 '피묻은 세균자료'는 1945년 8월22일 부산항 부두에서 쿠코토부키마루(德壽丸)란 이름의 화물선에 실려 그 다음날 현해탄을 건넜고, 그 뒤 비밀장소에 감춰졌다. 

731부대는 귀환 과정에서 매우 이례적인 특혜를 받았다. 731부대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핑팡역에서 다렌 직통의 특별 열차를 출발시켰다. 당시 만주에 있던 60만 명가량의 일본 민간인들이 귀국 교통편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고, 엄청난 고생길이었다. 가는 길목마다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사망자들도 생겨났다. 부산역으로 가는 4개의 열차에 나눠 탄 731부대원과 그 가족들도 차창 밖의 따가운 시선에 마음을 졸여야 했다. 언제 돌멩이가 차창을 깨고 날아들지 몰랐다. 열차를 움직이던 중국인 기관사가 사라지는 바람에 열차가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하기도 했다.

도쿄에서 우메즈 육참총장 만나다 

이시이가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달아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8월22일부터 26일 사이에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가까운 아쓰기(厚木) 또는 타치카와(立川)에 내린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8월26일 도쿄 육군성 의무국(醫務局)에 들렀다가 신주쿠 지역에 있는 육군성과 육군참모본부를 방문했다는 사실이다(그 무렵 육군성과 육군참모본부는 오늘날 방위성으로 쓰이는 건물 안에 함께 있었다). 

이시이가 그곳을 갔을 때는 미군 점령군이 오기 전에 기밀서류들을 태우느라 바빴다. 건물 전체가 연기에 쌓여 숨쉬기가 불편할 정도였다(1500명 규모의 미군 선발대는 8월28일 도착했고, 맥아더 장군은 8월30일 아쓰기 공항을 통해 들어왔다). 그곳에서 이시이는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대장을 만나 귀국 보고를 했다.

우메즈는 관동군사령관 출신으로 만주에서부터 이시이와 가까운 사이였다. '미군이 오면 세균전으로 공격하겠다'는 이시이의 말에 우메즈가 말렸다는 얘기도 나돌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우메즈는 1945년 9월2일 도쿄만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군부를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1948년 12월 도쿄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은 바로 뒤인 1949년1월 대장암으로 옥사했다). 

이시이는 우메즈에게 '세균전 자료를 폐기하라'는 참모총장의 훈령을 어기고 어딘가에 감춰두었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그 자료는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결국 그의 생명줄이 됐다. 하지만 소련 국경에 가까운 곳에 배치됐던 일부 731부대원들은 미처 도망치지 못했고, 관동군 고급장교들과 함께 전범재판에 붙여졌다. 이들에겐 10년에서 25년 사이의 징역형, 강제노동형이 주어졌다(전범재판에 대해선 다음 주에 좀 더 살펴봄). 

731부대의 수괴 이시이 시로가 소련군에 붙잡혔다면 어땠을까. 미국의 유대인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을 거듭 빌리자면, 사람들은 그의 죄값이 워낙 커 사형언도로도 값이 싸다고 여겼을 것이다. 다음 주엔 소련과 중국에서 벌어졌던 세균전 전범재판을 살펴보고, 아울러 731부대가 떠나면서 풀어놓은 쥐벼룩이 일으킨 페스트 전염병 문제, 독가스를 비롯해 일본군이 버리고 간 화학무기 엄폐물 문제와 아울러 '마루타'로 죽은 이들이 3000명뿐인가를 따져보려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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