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산업혁명의 씨앗이 된 유럽의 가격혁명과 상업혁명
개인주의 - 민주주의 - 자본주의는 세개의 쌍두마차
1. 정치 구조의 측면에서
벼농사/밀농사 문화 차이 - 그리스 도시국가/아고라 - 서유럽의 분열/교권 황권의 분열 - 한자동맹 - 마그나카르타 - 재산권/민주주의/의회주의 - 인클로저 운동 - 산업혁명
2. 경제 구조의 측면에서
십자군 화폐경제/원거리 경제 - 가격혁명과 상업혁명 - 대항해시대 / 구덴베르크 인쇄술 / 은행업, 대부업의 발달 - 아담 스미스 국부론과 중상주의 - 네덜란드/영국의 동인도회사 /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 산업혁명
* 가격혁명의 여파
1. 아메리카에서 유입되는 금, 은을 바탕으로 아시아 상대로 무역 증가
2. 신대륙의 작물과 광물까지 확보하고 생산 원료와 자금을 모두 손에 넣어 상업이 급격히 팽창
3. 금, 은을 확보하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 식민화에 더더욱 박차를 가함
4. 유럽이 순식간에 부국이 됨
5. 2세기에 걸쳐 물가가 폭등
6. 인구도 폭등
7. 토지와 농업을 통해 현금을 벌던 지주는 몰락하고, 물건 가지고 무역하는 상공업자는 돈을 많이 벌게 됨
8. 중상주의 매력을 깨달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제국주의 시대를 열음
9. 단, 물가가 오르니 전쟁에 치러야 할 돈도 오른 스페인은 만년 적자. 펠리페 2세는 4번이나 파산 및 채무불이행 선언.
https://www.youtube.com/watch?v=mmrYjlyPvjA
3. 인문학/과학기술의 측면에서
벼농사/밀농사 문화 차이 - 유클리드 기하학 - 르네상스 - 구덴베르크 인쇄술 - 재산권/특허권 - 과학혁명 - 계몽주의 - 산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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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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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13세기, 십자군 이후의 동·서유럽에서는 원격지 상업이 한때 혁명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후 15세기 초부터 대항해(大航海) 시대에 콜럼버스는 신대륙으로의 항로를, 바스쿠 다 가마는 아프리카 남단를 회항(回航)하는 동양으로 신항로를 개척하였다. 그 결과 지중해·북해·발트해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활약하던 상업권이 구조적으로 쇠퇴하고, 대신 세비야·카디스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에스파냐의 신대륙, 즉 서인도 무역과,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 즉 동인도 무역이 활발해졌다. 상권은 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약 1세기 동안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가 지배하였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변화를 상업혁명이라 한다. 그러나 신대륙으로부터 막대한 양의 은을 유입함으로써 에스파냐를 비롯하여 전유럽에는 물가가 앙등하고 가격혁명이 일어나 중세 말까지 번영하였던 남부 독일의 은 광산을 쇠퇴시켜 유럽의 상업자본 발전에 커다란 구조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 결과 네덜란드·영국의 상업자본이 주로 동인도 상업권에 침투하여 영국의 식민지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시대를 여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이를 근대자본주의 형성의 한 지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1492년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과 1498년의 바스코다가마의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 경유 동인도항로개척 등 지리상의 발견에 의해 그때까지 지중해 상업권에 국한되어 있던 상업은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3대륙을 포함하는 세계적 상업권을 대상으로 하였다. 이것에 의해 야기된 상업의 규모·체제에 있어서의 대변혁을 상업혁명이라 부른다. 신대륙은 영국을 비롯한 유럽공업국들의 산물·제품에 대해서 일대시장을 제공했다. 방대한 신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중세적인 농·공·상업 형태는 대변혁을 겪었다. 예컨대 아메리카 시장 등에 수직물을 공급하기 위해 영국농업에서는 엔클로저 운동을 행하여 원료 양모를 생산하고, 공업에서는 중세의 길드적 소규모생산을 지양하고 선대제·매뉴팩쳐 등의 대규모 생산형태를 취하고 무역면에서는 수십 개의 물권적 무역회사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무역의 급격한 확대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생산 형태의 발전은 당시 유럽제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항로 개척과 상업혁명
- salabi84 답변채택률 63.6% 2008.04.20 20:14
고맙습니다. 덕분에 사회 점수 많이 받을 거 같아요...ㅋㅎ
15세기 이후 오스만 터키 제국에 의해 동방 무역 거점이 함락되고,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면서, 십자군 원정 이후 동방 교역로는 오스만 터키제국에 의해 독점되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동양으로 갈 수 있는 새로운 항로를 모색하던 중, 1492년, 콜럼버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바스코 다가마의 원정으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로 갈 수 있는 직항로가 개설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종래에 동방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던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의 지중해 연안 도시국가들은 점차 쇠퇴해 들어갔고, 신대륙 발견과 신항로 개척의 선두주자였던 포르투칼과 스페인은 막대한 교역이익을 차지하게 된다. 특히 신대륙에서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은 16세기 유럽의 가격혁명을 몰고 온다.
많은 양의 금과 은이 유입되고, 또한 아메리카 식민지의 플랜테이션과 아프리카 흑인노예의 노동력을 결합한 새로운 상품작물의 대량 생산과 유통과정을 통해 유럽의 상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이후 상비군과 관료제를 갖춘 중앙집권적인 절대 왕정이 들어서면서 전국 규모로 시장이 통합되고, 단위 국가별 교역량이 상승하면서, 아메리카의 은을 매개로 아시아와의 막대한 교역이 이루어지자, 유럽엔 새로운 상업혁명이 발생한다.
이러한 상업혁명은 17세기 네덜란드 헤게모니 시대에서부터 출발하여 18세기 영국 헤게모니 시대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으며, 이러한 상업자본의 축적은 이후 19세기 산업혁명의 근본적 토대가 되었다. 상업의 집중과 더불어 종래의 수공업은 더욱더 빠른 속도의 생산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곧 분업화, 더 나아가 공장제 기계공업의 탄생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에 따라 산업혁명이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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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 혁명(價格革命, 영어: Price Revolution, 스페인어: Revolución de los precios)은 15세기 하반기에서 17세기 상반기 사이에 일어났던 일련의 경제적 사태로, 서유럽의 물가가 폭등한 인플레이션을 특징으로 한다. 150년간 물가가 대략 6배 올랐으며, 매년 인플레이션 수치는 1-1.5%꼴이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높지 않은 수치이지만, 16세기 기준으로는 엄청난 물가상승이었다.[1]
일반적으로, 이 물가상승의 원인은 멕시코, 페루를 비롯한 스페인 제국의 신대륙 식민지에서 서인도 선단을 통해 유입된 막대한 양의 금, 은이라고 여겨진다.[2] 이렇게 정금이 유입되면서 스페인의 물가가 상승했고, 이것은 스페인의 경상수지 적자로 인해 서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많은 유럽 국가들의 통화 공급과 가격 수준을 확대시켰다. 금, 은의 유입과 함께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항해시대 이전의 물가는 회복되지 못했고, 가격 혁명이 영구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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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3ef6691ac16f4d0/40
동양 문명이 1000년 동안 서양 문명에 앞서 있었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유럽에서 아무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된 이후, 영국과 프랑스, 독일과 북유럽 등지에서 차례로 유력 정권이 등장했다. 각국 지도자들은 교황의 권위를 빌려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독교 개종을 선택했고, 그들이 형성한 기독교 문명 연합체는 거침없이 밀려 들어오는 이슬람교도의 군대를 프랑스에서 격퇴하며 독자적인 문화권을 유지했다.
유럽에는 로마 제국 이후 본토에 압도적인 강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각국의 왕들은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를 받아들였지만, 그들은 동양의 국가들과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은 종교와 엮여 있었고 왕의 정치적 권위 역시 교회가 뒷받침하고 있었으며,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유지하려면 지방 실력자들의 손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을 받아들이며 10세기 무렵 이슬람 세계가 문명의 도약을 이룬 반면, 유럽에서는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위업을 계승하는 기술과 사상의 발전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을 종교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많은 국가들이 권력을 사이에 둔 지리멸렬한 내분으로 좀처럼 발전의 찬스를 잡지 못했다. 이슬람 문명과 교류하며 그들의 문물을 보고 배워야 했던 유럽인들이 문명의 선두주자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배경이 시너지를 일으켜 문명의 대전환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약 1000년 전의 유럽은 동아시아와 다르게, 농업으로 많은 잉여생산물을 창출하는 데에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특히 북독일 이상의 위도를 가진 지역은 기후와 토질의 한계로 풍족한 농업 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에 따라 어업과 상업 부문에서 경제활동을 열심히 해 나갔다. 인근의 발트 해나 북해는 청어와 대구가 풍부한 어장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생선을 잡고 가공하는 산업이 발달했으며 항구를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었다.
상업으로 다수의 생활 여건을 유지하기 위해서 상품의 질에 대한 신뢰와 유통과 운송 과정에서의 안전성이 뒷받침되어야 했기에, 도시들은 서로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자동맹이라는 상인 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지방에 독립적인 부의 축적이 일어날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교회의 영향력이 컸던 사회적 배경과 함께, 도시 단위의 발전은 유럽에서 지방 세력이 개별적인 경제적·정치적 특성과 이해관계를 띠게 된 원인이 되었다.
지방 상업 도시와 교회 교구의 영향력은, 귀족 및 지방 세력이 중앙의 목적을 위해서 움직이도록 할 만한 강력한 중심을 가진 국가가 없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은 법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유럽의 왕들은 귀족들을 주도적으로 통제하기는커녕, 군사력과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그들의 힘을 빌려야 국정을 다스릴 수 있었다. 각자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귀족들은 그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뭉쳐서 왕을 압박하기에 이르렀고, 그 결과 전제 권력의 존재를 부인하는 헌장인 마그나 카르타를 만들어냈다.
정치적 정점인 황제(왕)를 중심으로 국가 시스템이 작동한 동시대의 동양 문명과 달리, 서양 문명에서는 정치적·경제적 실력자들이 중앙을 위한 봉사에 집중하게 할 만한 체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유교 사상을 굳건히 한 동아시아 문명은 모두가 중앙권력을 위하도록 충효의 가치를 숭상하는 제도적 배경이 형성되었지만, 서양에서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미비해 개인의 권익 보호가 제도의 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산권을 비롯한 개인의 권리 보호는 자본 축적의 핵심이다. 국가의 임의적 개입에 의한 권익 침해를 방지할 안전장치를 마련해 둠으로써, 개인이 경제적 이윤을 추구해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동기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헌장의 탄생은 수백 년 후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자본주의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제도적 배경을 갖춘 상황에서 신대륙의 발견은 서양 문명 발전의 거대한 기폭제가 되었다. 아시아와의 교역을 통해 유럽에서 공수할 수 없는 향신료를 얻어 큰 이익을 얻고 싶어 했던 유럽인들은, 진귀한 향신료를 선점하기 위해 활발히 대양을 누볐다. 그러한 모험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아메리카에는 엄청난 양의 은이 매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은을 대거 확보한 유럽인들은 아시아와의 무역에 더욱 적극적으로 임할 수 있게 되었고, 신대륙의 작물과 광물까지 확보하고 생산 원료와 자금을 모두 손에 넣어 상업이 급격히 팽창했다. 새로운 시장이자 원료 공급원인 아메리카가 등장하면서 해상 무역의 범위가 전 세계로 확장되어, 유럽의 국가들은 순식간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화폐량 급증으로 물가가 상승하여 화폐에 비해 생산요소(자본)의 가치가 크게 뛰었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소작료를 받는 것보다 훨씬 많은 가치를 창출하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이미 흑사병으로 많은 농민이 사라져 타격을 입은 지주는 소작료의 가치까지 하락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들 대신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상공업자와 자영농의 경제적인 지위가 향상하였다. 신대륙 발견이 경제의 주축과 시스템을 송두리째 뒤흔든 것이다.
자본을 가진 이들은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경제의 대전환기에서 이득을 본 상공업자들은 부를 창출하는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 내기에 이르렀다. '은행'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중세 금세공업자들은 고객이 맡긴 금 중 일부만을 남겨두고 다른 이들에게 예금을 다시 대출해, 채무자에게 이자도 받고 고객들에게 보관 수수료도 받는 이중 이윤 창출 루트를 개발했다. 마침, 사람들은 무겁다는 이유로 금을 굳이 휴대하지 않고도 금보관증을 만들어 금을 인출할 권리를 사고파는 창의적인 시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금세공업자들은 자신 이외의 누구도 금이 얼마나 보관되어 있는지 알지 못한다는 점을 이용해, 있지도 않은 금에 금보관증을 매겨 더 많은 대출 수익을 챙기는 더욱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 냈다.
본질적으로 현대 은행의 원리도, 금세공업자의 수익 창출 메커니즘 위에 그 수익을 예금주에게 이자로 분배한다는 점만 추가된 것일 뿐이다. 고객(예금주)은 자금을 안전하게 보관하면서 예금 이자를 받을 수 있어서 좋고, 채무자는 새로운 대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어서 이러한 구조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예탁자(금세공업자)는 그들 사이에서 보관 수수료와 대출 이자를 이중으로 챙길 수 있었다. 경제적 창의력의 결정체인 이 위대한 호혜적 메커니즘에는 '은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편, 시대적인 변화를 캐치해 사업에 뛰어든 이들이나 트렌드에 의해 이전보다 경제적인 지위가 위태로워진 이들은 대부업자의 손을 잡았다. 은행의 등장과 자금 융통 수요의 급등으로 인해, 유럽에서는 화폐의 유통이 유연해지고 금융업이 급격하게 발달할 수 있었다.
유럽에서 상업혁명이 대파란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명 왕조의 인구는 유럽 전체 인구보다 두 배나 많았다. 아시아의 문명국들은 서양 문명국들에 비해 훨씬 큰 실물 경제 규모를 자랑했으며, 발달한 학문과 고도의 기술력 및 다양한 향신료를 틀어쥐고 있는 쪽은 여전히 아시아였다. 그러나 신대륙의 발견으로 말미암은 상업혁명은 발달한 신용 경제라는 신세계를 서양 문명이 먼저 개척하게 해줌으로써, 막대했던 문명 레이스의 격차를 대번에 없애버리는 역사적 대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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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25
16세기초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엄청난 금과 은이 스페인으로 흘러들었다. 금과 은을 통화의 기본단위로 했던 스페인에 막대한 양의 통화가 흘러넘쳤다. 150년 사이에 물가는 여섯배로 올랐다.
경제사학자들은 이를 가격혁명(Price revolution)이라고 명명했다. 물가 상승이란 개념이 없던 중세 유럽에 처음으로 가격이 오르는 현상이 빚어진 것이다. 그래서 혁명(revolution)이란 용어가 붙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율은 연평균 1~1.5%에 불과했다. 현대의 개념으로 보면 매우 억제된 통화팽창이지만, 상당한 시간이 경과한 후에 사람들은 물가가 오른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가격혁명은 스페인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스페인의 금화와 은화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로 흘러들어갔고, 그 이웃나라로 파급되면서 유럽 전반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16세기 유럽은 금과 은을 화폐로 사용하는 복본위제(bimetallism)를 채택하고 있었다. 유럽의 봉건왕조는 화폐로 사용할 수 있는 금과 은을 많이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부(富)를 증대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금·은을 찾아 정복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1520~1530년대, 스페인의 군대는 아메리카대륙의 아즈텍과 잉카제국을 멸망시키고, 그곳의 금은 보화를 보물섬에 가득 싣고 세비야(Seville)항에 도착했다. 이 보화는 스페인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Karl V)의 영토팽창 욕구를 충동질했다.
카를 5세는 이 금을 담보로 독일 금융가문인 푸거가(Fuggers)와 벨저가(Welsers), 이탈리아 제네바 상인들에게서 빌렸다. 재위 36년 동안 카를 5세는 아메리카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을 녹여 자신의 영토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거에 펑펑 썼다. 새로 발행되는 주화는 저지대 상업도시인 안트워프(Antwerp)로 흘러 갔다. 그곳에 푸거가와 벨저가의 은행들은 스페인 주화를 빨아 당겼다.
16세기초 스페인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아메리카로 몰려 갔다. 1503년부터 1510년까지 금 4.9톤이 세비야항으로 들어왔다. 1510년대의 금 유입량은 9.1톤, 1520년대 4.9톤이 들어왔고, 1550년대엔 42.6톤이 유입되어 절정을 이뤘다. 하지만 아메리카는 언제까지나 노다지가 아니었다. 그후 금 유입량은 줄어들어 17세기 초에 연간 1~2톤으로 줄어들었다.
아메리카에서 금을 대신한 것은 은이었다. 멕시코와 남미 포토시(Potosi)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견되었다. 1560년부터 1640년까지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은 연평균 185~320톤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있다. 은을 캐는데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다. 스페인은 인디오들을 강제노동에 내몰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갱도 노동과 30년이 지나야 풀려나는 강압 아래 많은 인디오들이 목숨을 잃었다.
은은 유럽에서도 발굴되었다. 1520년대에 보헤미아(체코)의 요하힘스탈(Joachimsthal)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굴되었다. 신대륙에서 들어오고 유럽에서 채굴되고 은이 넘쳐났다.
프랑스에서도 물가가 상승했다. 1568년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뎅(Jean Bodin)은 프랑스의 물가 상승이 스페인의 금은 유입에 따른 것이란 결론을 내렸다. 주화의 양적 팽창이 물가 상승을 이끈다는 것을 당시 사상가들은 꿰뚫은 것이다.
현대에 스페인의 가격혁명을 연구한 사람은 미국의 경제사학자 얼 해밀튼(Earl Hamilton)이다. 해밀튼은 1934년에 "신대륙에서 금은의 유입 증가가 스페인에서의 가격혁명의 주된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1501년과 1600년 사이에 스페인에서 물가상승률은 네 배였다. 해밀턴은 스페인의 물가가 1501년과 1550년 사이에는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1550년에서 1600년까지 정점에 이르렀다고 분석했다. 이는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은의 양과 거의 일치했음을 보여주었다.
인구팽창도 물가 상승을 부채질했다. 1460~1620년 사이에 유럽의 인구는 증가했지만 식량공급이 늘어난 인구를 따라잡지 못했다. 인구 증가는 곡물가격 상승을 동반했다.
물가 상승은 스페인의 인건비를 올려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로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다. 스페인에선 “엘도라도 광산(전설상의 금광)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다”는 말도 생겼다.
스페인에게 신대륙의 금과 은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였다. 물가가 오르면서 전쟁비용도 상승했다. 욕심많은 카를 5세는 벨저 가문에 돈을 빌리고 베네수엘라를 떼 주었다. 베네수엘라에서 금과 은을 캐서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벨저가의 베네수엘라 경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는 스페인의 부채가 심각하게 불어나고 있음을 반증했다. 카를 5세 재위기간에 금리는 17%에서 48%로 뛰어 올랐다.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재원을 낭비하자 스페인 의회(코르테스)가 등을 돌리고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는 말년에 합스부르크 제국을 분할해 스페인과 이탈리아, 플랑드르를 펠리페 2세에게 물려주고,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영지는 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양도했다.
하지만 이 때, 스페인은 이미 기울어 있었다. 카를 5세를 이은 필리페 2세가 오스만 투르크와 벌인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1572년 군사비 지출이 신대륙에서 긁어온 금과 세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2배나 되었다. 1576년에 펠리페 2세는 병사들에게 줄 급료가 국가 세입의 2.3배에 달하자 채권자들에게 디폴트를 선언했다. 또한 국왕은 부채의 만기를 장기로 전환할 것도 강요했다.
이때 스페인은 공채를 발행한다. 펠리페 2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막강한 무적함대를 바다에 처넣었다. 그 금액이 연간 세입의 다섯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펠리페 2세 이후에도 스페인은 1596년, 1607년, 1627년, 1647년에도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국가 신용은 떨어지고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정이 악화하면서 국왕들의 입지도 좁아져 새로운 사업을 펼칠수도 없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역대 국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카톨릭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 신대륙에서 얻은 부를 전쟁비용으로 소모했다. 그 득은 이탈리아의 제노바 상인들이 얻었다.
제노바 공화국은 스페인 왕가와 밀착해 자금을 대줬다. 물론 공짜 돈은 아니었다. 이자를 꼬박꼬박 붙였다. 스페인의 식량 공급도 제노바 상인들이 떠맡았다. 아메라카 뉴스페인에서 들어오는 부는 세비야를 거쳐 제노바로 몰렸다.
스페인의 인플레이션은 1640년 무렵에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금과 은이 줄어들면서 그 막을 내렸다.
<참고자료>
Wikipedia, Price revolution
Wikipedia, Spanish treasure fleet
네이버 지식백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과 물가 폭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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