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김영삼을 비롯해 한국인들 다수가 얼마나 미개했는지 보여주는 사건: 일제의 쇠말뚝 날조 사건

 

1. 개요2. 상세3. 오해와 진실
3.1. 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가?3.2. 왜 그런 설이 나왔는가?3.3. 일본에도 한국과 같은 풍수 개념이 존재했는가?3.4. 다량의 쇠말뚝을 만들 여유가 일본에 있었나?3.5. 그렇다면 발견된 쇠말뚝은 무엇인가?
4. 쇠말뚝 설화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있었다5. 여담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원래 뜻은 로 된 말뚝… 이지만, 이 문서에서 다루는 것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한반도의 정기를 끊고자 쇠말뚝을 산간벽지 이곳 저곳에 꽂아뒀다는 도시전설을 말한다.

2. 상세[편집]

일제 쇠말뚝설은 이른바 일본 육군 장군 야마시타 도모유키 전설에서 시작되었다. 즉 일본 패망 후 전범재판에서 일본 육군대장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영어 통역관이 '신세우'라는 한국인이었는데, 야마시타가 조선에서 근무할 당시 조선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 수백 개를 박았다는 비밀을 형 집행 직전 신세우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언론에서 당시 재판기록과 문서들을 조사해본 결과 조선인 통역관은 없었고 쇠말뚝 어쩌고 하는 얘기도 전범재판 과정 내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고 드러났다.출처 1(월간 말 지 2006월 1월호) 출처 2(조선일보) 출처 3(데일리굿뉴스)


1995년 2월에 김영삼 문민정부 시기 내무부에서 '역사바로세우기'의 일환으로 쇠말뚝 뽑기를 국가정책으로 실시하여 118개를 뽑아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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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철심이 있다고 하면 바로 '일제가 풍수침략용으로 박은 철심이다!'고 하는 판. 나이든 세대 중에는 아직도 이 도시전설을 진지하게 믿는 사람들이 많다.#

지리산쇠말뚝1

국내에서 유일한 풍수지리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해당 내용을 다룬 적이 있다. 링크

요약하면 풍수지리적으로는 쇠말뚝이 박힌 위치가 대한민국 기가 뭉친 혈처가 아닌 엉뚱한 바위이므로, 일제강점기의 토지조사사업에서 사용된 삼각점일 확률이 높다고 보고있다. 여기에 당시 상당한 반일감정과 풍수지리가 실존하던 시기에 이를 보고 분개한 농민들에 의해 '일제가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 한다'고 구전되었을 수 있다는 소견을 밝혔다.

3. 오해와 진실[편집]

3.1. 왜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가?[편집]

공식적으로 조선총독부 혹은 조선주둔 일본육군이 조선 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쇠말뚝을 박은 일이 없으니 당연히 기록이 없다.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할지라도 파편적인 자료들은 남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저지른 만행 중 하나인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만 해도 이러한 파편적인 사료들이 남아있다.

당시 강제동원에 투입된 군인들이 쓴 일기라든가, 전범재판 당시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을 인정한 증언들을 적은 당시 판결문이라든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저지른 만행들은 대부분 공식 기록이 소각되거나 하여 극히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파편적 사료들에 의거해 밝혀낸 것들이다.

그리고 일본 스스로 남긴 자료들도 이러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국가기록원에 이런 자료들이 어느 정도 보존되었다.조선총독부 기록물 개요(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관리)

그렇지만 한반도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곳곳에 박아넣는다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기록은 전무하다. 설마 쇠말뚝 박기가 여타의 만행들보다 더욱 극악하다고 믿었기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증거들을 없애버렸을까?

또한 쇠말뚝을 박아서 지맥을 끊는다는 발상은 한자 문화권의 전근대적 사상인 풍수지리에 기반한 것이다. 풍수지리 관념은 한자 문화권에 존재했던 생각으로, 일본이 미국의 강제 개항으로 인해 '근대화'된 이후로는 이런 사상 자체를 구시대적이라며 배척하는 풍조가 짙어졌다. 사실 조선에 들어와있던 서양 선교사 등도 공통적으로 한국의 풍수지리 관념을 전근대적 관념이라며 비판하였다. #

게다가 19세기 후반 메이지 유신 이후로 근대화 시기에 일본은 국가신토마저도 종교가 아니라고 간주했고, 자국의 오래된 종교전통도 전폭적으로 뜯어고쳤다. 일본에서는 오랜 세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 하여 불교를 중심으로 신토가 반쯤 합쳐진 상황이었는데 둘을 억지로 뜯어내었다. 또한 일본의 미신이라고 간주한 전통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이 시기에 많은 사찰과 음사(淫祀)로 간주된 신사들이 타격을 받았다.

근대기 일본의 군대나 관료집단은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는 종교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자국의 수많은 종교시설과 전통신앙을 개화의 걸림돌로 여기고 정리해버렸다. 특히 조선총독부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통치에는 언제나 관심이 넘쳐도,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인, 또는 주술적인 요소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예를 들어 조선신궁만 하더라도, 기껏 돈을 들여 완공해놓고 예대제 같은 큰 행사 때에는 총독부 관리들이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신궁의 궁사(신사의 책임자)가 조선총독에게 항의하고 나서야 겨우 참석했을 정도였다. 조선신궁 항목을 보면 일제가 본인들 전통도 아닌 풍수지리 사상에 따라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쇠말뚝을 박긴 개뿔, 일본 식민당국 자신들도 오히려 손발 더럽게 안 맞아서 결국 졸속한 방법으로 타협하고 진행하였다. 정리하자면 막상 일제 총독부 당국은 조선은 물론이고 자기네 나라인 일본 본토에서도 각종 신토적 민간풍습 따위를 미신적이고 미개하다고 극혐한, 뒤틀린 근대주의자들이 오히려 주류적인 성향이었다.

일본은 풍수에 관심이 없었고 측량과정이었을 뿐이라는 내용은 이이화가 역사풍속기행에 쓴 것으로, 각 언론보도로 내용이 알려지자 적잖은 반발이 일어났다. 한국우리민족사연구회의 유왕기 연구위원은 이이화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위치 표시용 쇠말뚝은 바위에 20~30 cm 정도면 충분하며 (풍수침략용 쇠말뚝처럼) 1 m 이상 박지는 않는다. 일본은 한국침략을 위해 역사 지리 풍수 등을 열심히 연구했다. 침략 후에는 모든 관사를 명당자리에 지었다."[1] 라고 반박했다.

3.2. 왜 그런 설이 나왔는가?[편집]

풍수지리 사상을 기반으로 한 한국의 전통 신앙을 못마땅한 일제가 민족말살 정책 차원에서 마을 사람들의 민속 신앙을 방해한 것이 일제가 풍수지리를 믿고 풍수 침략을 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을 수는 있다.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 안치마을에 얽힌 사연 중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링크
안치마을 이장 김판태(76) 씨는 "마을에서는 산의 가장 낮은 지점을, 설화처럼 뱀이 바위에 끼어 머리를 쳐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부근을 중심으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있고 앞으로는 바다가 있어 풍수지리에 따라 명당으로 여겼다"고 했다. 현재의 안치마을 앞 도로는 과거 바다를 간척해 국도 15호선이 깔려 있다.

김 이장에 따르면 당시 주민들은 뱀이 끼어있던 그 장소를 묏자리로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김 이장은 "뱀이 바위에 끼어있는 자체가 흔치 않은 일이라 특이하게 여겼다고 하더라"며 "뱀이 이렇게 낀 데는 이 산에 특별한 기운이 있다고 생각해 꺼리는 동물인데도 제사도 지냈다고 한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날짜를 특정하고 제사를 지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사람이 모여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어서 주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고자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에게 이 모습은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

김 이장은 "당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는 것도 아니고 눈에도 보이지 않는 불분명한 장소를 마음속으로만 신성시 여기는 것뿐이었다"며 "하지만 일본인들은 마을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데는 쇠말뚝 박고 잘라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다만 위의 증언도 기록에는 없는 일이며 마을 주민들의 주관적 경험에 따른 진술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에 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전통 신앙 등의 민족 문화를 혐오하는 성향이 매우 강했다. 조선 민중들이 행하는 전통적인 집단행동을 직접 훼방 놓으려던 이들도 있었고, 일부에서는 순사 등 공권력이 직접 그러기도 했다. 이런 태도가 적대감을 불러 '쇠말뚝 전설'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히려 여러 언론의 추적에 의하면, 쇠말뚝설은 해당 지역 주민들이 들어본 적도 없고, 심지어 방송국에서 취재를 하면서 "일제가 쇠말뚝을 박았다고 들었다."라고 말하라고 시킨 정황도 포착된다. 일종의 집단적 기억조작 + 언론사의 황색 저널리즘의 결합체라 할 수 있다.
기자는 KBS 아침뉴스에 출연해 일제의 소행임을 증언했던 그 유일한(?) 증언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남한산성 북문 인근에서 마트를 운영하고 있는 김병갑씨가 그 주인공이었다.

“제 나이가 쉰 한 살인데, 30년도 훨씬 더된 이야기에요.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일제강점기에 맥을 끊기 위해 일본사람들이 쇠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단지 그렇게 들은 내용을 (KBS 측에서) 말해 달라고 해서 이야기해줬을 뿐이에요.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 이야기는 아니고,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몇 분들만 알고 있는 이야기지요. 구체적으로 누가 언제 어디서 그랬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동네 어르신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얼핏 들었을 뿐입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발견된 쇠말뚝이 일제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동네 어르신들에게서 얼핏 들었다”고 밝힌 김씨의 증언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셈이다. 또한 소윤하 회장에게 “쇠말뚝을 뽑을 수 있는 장비와 인력을 지원했다”고 밝힌 하남시청 관계자는 “고리 모양의 쇠말뚝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제의 소행이 아닌 것 같다는 의견이 중론”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공영방송의 뉴스 진행자가 “일제가 민족정기를 끊겠다며 남한산성에 심어 놓은 것”이라고 설명하며 들고 나온 쇠말뚝의 실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월간 말 지 2006년 1월호에서 발췌)

3.3. 일본에도 한국과 같은 풍수 개념이 존재했는가?[편집]

일본의 수도 도쿄와 천황이 거주하는 황거의 입지만 봐도 이들은 풍수지리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배산임수로 대표되는 명당자리와는 아주 동떨어진, 산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끝없는 평야가 이어지고 형편없는 작은 물줄기나 저 멀리 지나가는 이런 동네에 수도를 세우고 군주의 궁궐을 지었다는 것은 전통적인 풍수지리학의 관점으로 보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풍수지리에 따르면 기운은 산줄기를 타고 흐르기 때문에, 기가 모이는 혈처까지 산맥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지를 중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 따라 보면, 도쿄는 근처에 산이 없기 때문에 기운을 받을 수 없다. 명당의 조건에 대놓고 벗어나는 것이다. 오죽 트여있으면 건물에 막히지만 않으면 도쿄에서 저 멀리 후지산이 보인다. 풍수지리를 따지는 중국 같은 경우, 베이징도 주변에 산이 거의 없는 지형이라서 자금성 북문 앞에 풍수지리적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인공 언덕(조산造山)인 경산공원을 일부러 만들었다. 일본이 풍수지리를 신경쓰는 문화권이었다면 여기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미개한 조선을 문명화하는 선진 일본'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이 왜 조선의 풍수지리설에 따라 쇠말뚝을 박겠느냐는 반론에 맞서, 어떤 사람은 '미신을 역으로 이용하여 조선 민중에게 정신적 공격을 하려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신을 역으로 이용하려 했다면[2][3] 오히려 대대적으로 알리면서 박았어야 한다. 비밀리에 박는다면 무슨 정신적 공격이 되겠는가? 비밀리에 박는다는 것은 일본이 실제로 풍수지리를 진지하게 믿을 때에나 가능한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일본에선 오히려 미신으로 취급했으므로 비밀리에 박을 리가 없다.

일본 오사카 시립대학교 문학부의 노자키 미츠히코 교수(野崎充彦, 조선문학 전공)는 일본인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 및 한국의 풍수지리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의 풍수사들'이라는 저서(1994년)까지 낼 정도로 한국통인 그는 쇠말뚝에 대해 그렇게 단정적이지 않았다. 노자키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박았다는 쇠말뚝에 대한 연구는 현재 '중단된 상태'이다."라고 밝혔다.

간혹 일본의 만화를 예로 들면서 일본에서도 풍수가 친근하고 익숙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본에서 1990년대 중반에 풍수 붐이 일어나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간과한 주장이다.십덕들이 또...

물론 현대 이전에 일본에 아예 풍수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본 풍수지리서 지상가상대전(地相家相大全)이 1940년에 출판되기도 했다.

일본풍수지리서1
일본풍수지리서2
저자 코바야시 하쿠류시(小林白龍子)[4]

그러나 지상가상대전의 내용은 한국의 '풍수'와는 촛점이 다르다. 형국론에 따라 기가 모인 혈처를 찾아 무덤을 쓰거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집에서 북두칠성의 방위를 보고 우물이나 창고를 어디에 두며 신단을 어떻게 꾸밀지 설명하였다. 똑같이 '풍수리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긴 해도, 물형[5]을 보고 기가 모인 혈처를 찾는 한국 풍수지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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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쇠말뚝 설의 근거로 1943년 일본 종교단체가 백두산 천지에 일본 개국신 제사를 지내면서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진이 자주 거론되는데 결론적으로 저건 쇠말뚝이 아니다. 2004년 당시 주간조선이 보도하고 다른 언론이 인용하면서 당시 이슈가 되었다.

사진 자체를 분석하면 아래 부분에 무엇인가 괴어 놓은 듯해 보이는데다가 제관의 몸에 가려진 부분이 있고 상판이 지나치게 넓고 얇은 데다가 홈들이 길게 나 있어 쇠말뚝이라고 보기에는 여러 물리적 특성들이 부적당하다.

2004년 3월 8일 방영 SBS 백만불 미스터리 40회에서 이 사건를 조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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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백만불 미스터리에서 당시 제사를 지낸 일본 종교 단체를 취재하면서 밝힌 바에 따르면 신토에서 사용하는 제례용 나무 탁자에 불과했다. 이런 탁자를 흔히 안(案)이라고 부르는데, 탁자 다리가 4개짜리, 8개짜리, 16개짜리 등이 있으나 8개짜리가 제일 흔하다. 그래서 다리가 8개인 안을 핫소쿠안(八足案, 8족안), 줄여서 핫소쿠(8족)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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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8개인 핫소쿠안 (사진 출처: 위키페디아 공용)

사진을 핫소쿠안의 오른쪽 뒤에서 대각선으로 찍자, 우측 다리들이 하나로 모인 듯이 보여 말뚝으로 착각할 수 있는 착시를 일으켰다.

사진 속 사람들은 1921년에 창교된 신도텐코쿄(神道天行居)라는 종교단체 소속이다. 이들은 일본이 유대인들에게 영적으로 공격을 받는다고 믿고, 일본을 영적으로 방어하고자 신지(神璽)라는 물건을 땅에 묻거나 호수에 던지는 주술을 행하였다.[6] 백두산에서도 신지를 천지 바닥에 가라앉혔다. 백두산에 말뚝을 박아 산을 쇠하게 하려고 하기는커녕, 백두산을 일본의 중요한 영적 거점으로 보고 주술로 백두산을 방어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 페이지를 참조하면 좋다. 가장 확실한 반박으로 이 종교단체는 후지산을 비롯한 일본의 명산에서도 똑같은 의식을 거행했다.

이런 풍수 공격을 지금도 믿는 사람이 있어서, 유명한 위인이나 특정 조상의 묘에 쇠로 된 칼붙이를 집어넣어서 그 자손의 정기를 끊어 놓는 저주 계열의 주술로 사용되기도 한다. 1999년에 어떤 정신 나간 무당 이순신 장군의 묘에 그런 짓을 한 적이 있어서 화제가 되었다.#

풍수에서 지관마다 땅의 기가 모인 혈처라고 보는 위치가 다르다. 그 위치를 모르기 때문에 명당을 잘 잡는다는 소문이 난 지관의 몸값이 그만큼 높다. 지관을 불러 쇠말뚝이 나온 자리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다들 그 자리가 혈처라고 답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 자리가 혈처일까? 쇠말뚝이 나온 자리인 줄 모르고 봤을 때에도 과연 지관이 혈처라고 답했을까?
약간 다르지만 참고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박정희 살아생전에 지관들이 박정희 부모의 묘에 찾아올 때마다 만고에 다시 없을 명당자리라고들 했지만, 박정희 암살된 뒤에 찾아온 지관들은 그 전에는 언급도 안 되던 요소들을 지적하며 "이런 것 때문에 박정희가 횡액을 당했다." 운운하더란다. 먼저 결론을 내리고 근거를 찾는다는 뜻이다.

조선일보에서도 이 쇠말뚝 괴담에 대해 인터넷판 1면으로 괴담의 허상에 대해 분석한 기사를 보도하는 등 쇠말뚝 괴담에 대한 반성이 나왔다. 한국일보 보도에 비해서도 좀 더 단호하게 말뚝 괴담을 부인한 것이 포인트.#

월간조선 기자기도 했던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이 미디어펜에 기고한 칼럼에는, 현장에서 일제의 쇠말뚝인지 확신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기자들이 굳이 일제의 쇠말뚝이라고 단정적으로 보도한다거나, 일제 쇠말뚝이 아니라고 판명된 경우에도 쇠말뚝 뽑기 행사를 진행하려는 공무원들이 제발 일제의 쇠말뚝으로 해달라고 애원하더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

백두산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사진에 찍힌 신토텐코쿄를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면 참고가 된다. 신도텐코쿄는 매우 일본 우익적인 종교단체로, 신지를 일본과 대만, 조선 등에 묻고 물에 가라앉히는 의식을 함으로써 일본이 영적으로 굳건해지고 외부의 공격을 견딜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막상 일본 정부는 신도텐코쿄가 무력전을 경시하는 유해한 사상을 퍼트린다는 이유로 경계하였다.

애초에 일본은 자국에서도 1940년대 국가신토라는 것을 만들어서 신토의 종교적 측면을 없애버리고 오로지 통치도구, 즉,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로 삼았을 정도인 나라였다.

3.4. 다량의 쇠말뚝을 만들 여유가 일본에 있었나?[편집]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마구잡이로 전선을 확대하는 바람에 만성적인 물자 부족 특히 금속류의 부족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일본 본토는 물론이고 조선 곳곳에 있는 사찰의 범종이며 일반인들이 쓰는 놋쇠 그릇과 수저까지 온갖 금속류를 공출하던 상황이었다. 일제의 금속류 공출(국사편찬위원회) 이런 상황에서 그 귀중한 금속류로 말뚝 따위나 만들고 있었겠는가를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3.5. 그렇다면 발견된 쇠말뚝은 무엇인가?[편집]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살다보면, 땅에다 쇠로 된 기둥이나 말뚝을 박을 일은 무수하게 등장하며, 특히 근현대로 들어오면 더욱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후대에 땅을 조사하다보면 이곳저곳에 박힌 쇠말뚝은 당연히 발견될 수 밖에 없다.

일제는 조선 강점 초기부터 토지측량 및 조선인 토지 몰수를 비롯하여 수많은 토지 관련 사업을 시행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쇠로 된 기둥 종류는 매우 많이 사용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연히 쇠말뚝은 이곳저곳에서 나올수 밖에 없다.

1931년 철원-금강산을 오가는 철도가 개통되었는데, 이 지역은 험준한 산지이므로 정확한 측량을 위해서는 쇠말뚝이 필요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출처 금강산 개발과 관광철도에 대한 이야기는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북한편 제2권 "금강산 - 다시 금강을 예찬하다"에도 상세히 실려 있다. 서울 인근 북한산의 경우에도 기본적인 등산로는 일제강점기에 정비된 것이다. 백운대에 철제 난간 등을 처음 설치한 것도 이때이다.출처이렇다보니 명산을 조사하다보면 당연히 일제강점기에 박힌 철제 구조물이 여기저기에서 발견될 수밖에 없다.

쇠말뚝

이뿐만이 아니다. 위에 서술한 것과 동일한 이유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 정부에 의해 박힌 쇠 구조물 또한 매우 많다. 그러한 쇠말뚝이 발견되는 것 뿐이다. 실제로 발견된 쇠말뚝의 형태를 보면 대한민국 정부에서 측량용으로 꽂은 것과 과거 국군의 임시 막사 설치 시 꽂아 놓고 잊어 버린 것으로 추측되는 물건들이 많다. 일제강점기에 박은 쇠말뚝이라고 소개된 위 사진을 보면 위가 고리형으로 된 게 군인들이 임시 천막 설치할 때 쓰는 지주핀과 똑같이 생겼다. 심지어는 말뚝에 한국 정부 각인이 찍힌 경우도 있다고. 현대에도 추가로 포병 INS 위치 캘리브레이션을 위해 측량지점에 콘크리트 대신 간이형으로 박아놓는 경우도 종종 있다.

즉 한국 곳곳에서 발견되는 쇠말뚝은 누군가가 어떠한 합리적인 목적으로 박은 것일 뿐이고, 일제의 풍수침략용 쇠말뚝이라고 생각할 근거는 전혀 없다.

최근에는 일제가 측량을 위해 박았던 것은 위에 적혀있다시피 사실이고 그걸 알고 있는 사람들도 토지측량당해서 일제에 세금 내기도 싫어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일부러 소문을 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당시 일본 사료에 한국인들이 측량용 쇠말뚝을 무속 때문에 뽑아서 골치라는 구절을 근거로 일종의 저항 정신이라는 평한 것이다.

4. 쇠말뚝 설화는 훨씬 더 오래전부터 있었다[편집]

한국 각지에는 꼭 외세가 아니더라도 그 지방의 기를 풍수적으로 꺾어서 큰 인물이 나지 못하게 막았다거나 기세를 억눌렀다거나 하는 전설이 폭넓게 존재한다. 즉 일제 쇠말뚝 이야기는 말뚝을 박는 주체가 일제로 바뀌었을 뿐, 기본적인 골자는 훨씬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내려온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여송이 한민족의 정기를 끊으려고 방방곡곡에 혈침을 박거나 맥을 끊었다는 비슷한 민간설화가 여러 곳에서 전한다. [7] 예를 들어 충북 단양군 매포읍 단봉산에는 '작살고개'라는 지명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이여송(또는 왜군 장수)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보니 단봉산이 기러기 날개 치는 듯한 형상이라 장차 조선에서 큰 인물이 날 곳이었다. 그래서 이여송/왜장이 날개에 해당하는 혈자리에 작살을 박아 맥을 끊었고, 이후로 단양에서 인물이 나지 않는단 것이다. 그래서 단봉산을 넘어가는 고갯길에 '작살고개'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이 전해지는 곳 중에서는 아예 이여송이 간 적이 없는 곳도 있어 역사적 신뢰성이 크게 떨어진다. 신기하게도 이여송 쇠말뚝 전설은 한 지역뿐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에서 전해진다. 풍수지리설을 대중적으로 믿는 조선 민중은 조선 땅에 들어온 외세를 풍수지리와 연결하여 이러한 음모론을 상상하기 십상이었던 모양이다. 고전소설 임진록에도 이 설화를 반영해 이여송이 쇠말뚝을 박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 짓을 한 이유가 김응서, 강홍립 등 조선 장수들의 용맹을 보고 경계해 조선에 다시는 영웅호걸이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나오는데... 정작 실제 역사에서는 김응서가 이여송이 경계할 만한 능력을 보여준 인물인지 심히 의심스러울 정도이며 강홍립은 아예 평양성 전투 당시에는 관직에 있지도 않았다.

강원도 강릉에는 16세기 중종 때에 한급(韓汲)이란 사람이 강릉부사로 부임했는데 지역 유림들에게 무시를 당해서, 또는 강릉 사람들의 기가 너무 드세서 꺾어버리고자 모산봉의 산 정상을 석자 세치 깎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런 풍수적 조치 때문에 더 이상 강릉에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것.

전남 해남에도 18세기 해남현감 김서구(金叙九)가 지역의 기를 꺾어버리고자 말뫼봉이라는 산의 정상을 석자 세치 깎아버렸고, 그래서 더 이상 큰 인물이 안 나온다는 전설이 전한다.

제주도에 전해지는 '고종달 설화'도 있다. 중국 본토에서 넘어온 고종달이란 승려가 중국 황제의 명령을 받고 제주도의 지기를 끊기 위해 제주도의 혈자리 여러 곳에 철심을 박았는데, 거기서 피가 흘러나와(!) 지금의 오름이나 삼성혈 같은 지형이 되었다는 것. 이런 조치 때문에 제주에서는 마실 만한 물이 나지 않고 큰 인물 또한 안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라산의 산신이 중국으로 돌아가던 고종달에게 벌을 내려 제주도 앞바다에 빠져죽었다는 전설도 전하는데, 그곳이 지금의 차귀도라고 한다.

고종달은 12세기 송나라 사람이던 호종단(胡宗旦)이 와전된 이름이며, 실제로는 승려가 아니라 지관이었다. 그는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온 후 귀화하였는데, 송나라에서 태학을 다닐 정도의 엘리트였기 때문에 예종(1105-22년 재위)에게 국가 풍수사로서 중용받았다. 예종은 호종단을 당시 고려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된 지역이던 제주도로 파견하여, 제주도의 토호들을 제압하고 완전한 고려의 판도로 장악하려고 했는데, 그 와중에 물맥을 끊는다며 실제로 쇠말뚝을 박기도 했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호종단에게 품은 반감이 신라 말기부터 퍼진 풍수지리설 관념과 얽혀서 '고종달 설화'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쇠말뚝과는 약간 거리가 있지만 이와 비슷한 설을 반박한 다산 정약용의 글이 있다. 철로 만든 말을 보고 노인들이 '이건 왜인들이 정기를 누르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자 이를 반박한 것. (다산 시문집 12권 중 '철마(鐵馬)에 대한 변증')[8]

풍수적으로 수작을 부렸다는 전설에서는 대체로 해당 지역민의 입장에서 보기에 '힘 있는 타자'가 술수를 부린다. 여기에서 힘 있는 타자는 이여송이나 왜군 장수, 또는 중국 황제가 보낸 사신 같은 외국의 높은 양반일 수도, 임금이 지역에 파견한 목민관일 수도 있다.[9] 그리고 일제강점기가 되면 일제는 그런 힘 있는 타자란 조건에 너무나 잘 부합한다.

즉, 쇠말뚝설은 일제강점기에 생긴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래되었고, 단지 풍수적 수작을 부린 주체를 일제로 바꾸었을 뿐이다.

5. 여담[편집]

일제강점기 때의 쇠말뚝 설은 허구였지만, 2012년에 실제로 일본인에 의해 소녀상에 쇠말뚝이 박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말뚝테러 사건 참조.

1995년 인화(仁和)출판사에서 만화가 강촌[10]이 <혈맥(血脈)>이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전 3권. 내용은 임진왜란 때 한반도의 호랑이 지형에서 네 발목과 명치 부분에 일본군 장수들이 쇠말뚝을 박았는데, 현대에 들어와 한국인들이 이 말뚝을 찾아서 뽑으려 하고 (일본군 장수들의 후예인) 일본인들은 막으려 한다는 내용. 2010년에 저자가 두레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원판이든 개정판이든 큰 인기는 끌지 못하고 절판되었다.

만화 풍장의 시대에도 쇠말뚝 이야기가 나온다. 들이 가슴을 쥐어뜯고 으아악. 그 외에도 몇몇 국내 학습만화에서 이 쇠말뚝설을 진실인 양 그려놓는 경우가 있다. 다만 이 작품의 배경에 한해서 덧붙이면 일본인들이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그보다 더 위에 있던 남산 꼭대기 봉수대 옆의 국사당을 부숴버린 것 자체는 사실이다. 한국의 전통적인 무속신앙에서 특히 북한산은 나라의 기운을 관장하고 남산은 민간의 신령들을 관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반감이 매우 심했다. 다만 국가신토 관계자들이 산신각을 철거한 것은 조선의 풍수를 누른다는 이유보다는 그네들이 생각하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신을 현세강림시키는 데에 '격'이 맞지 않아서였다. 즉 한국 전통 민간신앙을 모시는 건물이 일본의 국체신인 아마테라스보다 위에 있다고 부숴버린 것이다. 현재는 조선신궁은 백범기념관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남산에는 팔각정과 남산타워(N서울타워)가 들어서 있다.

이두호의 만화 '덜거덕 덜거덕'에는 한 마을에서 천재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나왔는데, 이 예언을 들은 마을의 원님이 그러한 위인이 나오면 오히려 피해가 생길것이라 생각하여 그 아이의 기를 끊으려고 산줄기에 쇠말뚝을 박는다. 마침 그 쇠말뚝을 박을 때에 태어나던 아이가 있었는데,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걷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구절을 말하고는 쇠말뚝이 다 박히자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가 보통 아기처럼 울었다. 부부는 이 아기에게 '장독대[11]'라는 이름을 붙이고 고이고이 길렀으며 독대는 자라면서 천재의 기질을 발휘해 중력이며 '단지 속에 파리가 날아다닐 때와 바닥에 앉아 있을 때 무게가 달라지는가' 등의 현대적인 과학 문제를 풀어낸다. 결말부에서는 한 사악한 도사가[12] 독대를 찾아와 자신이 얻은 비급을 해독하라고 협박한다. 그 비급은 백짓장으로 이루어진 책이었는데 독대는 그 책을 한 장 한 장 다 뜯어낸다.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난 도사가 독대를 죽이려는 순간 독대는 마지막 장을 들고 바로 이거라며 개천으로 가 종잇장을 물에 띄운다. 그러자 로 쓴 '마을 산줄기의 쇠말뚝을 뽑아라'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도사는 자신의 내공을 써서 쇠말뚝을 뽑았으나, 쇠말뚝을 뽑느라 기를 다 소진하고 그냥 힘없는 늙은이가 돼 버린다. 독대가 도사를 업고 자신이 모시겠다며 마을로 내려간다. 그리고 산적에게 납치되었다가 독대에게 구출되고 나서 그를 사모하게 된 주인집 아가씨가 독대의 방 문을 열지만 방에는 아무도 없는 것으로 만화는 끝난다. 결국 쇠말뚝이 억누른 독대의 능력은 묘사되지 않은 채로 완결.

혐한만화 태권더 박에서도 조롱거리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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