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투기자본과 국정원: 1953년 이란, 1954년 과테말라, 1964년 브라질 쿠데타 모두 CIA 작품; 한국의 4.19, 5.16, 10.26에 모두 개입한 CIA; 한국 국정원(KCIA)은 미국 중앙정보부(CIA)의 짝퉁; 미국 CIA는 이승만-장면-박정희 정부 내내 이후락을 정보부 총책임자로 임명하라고 강요했다; 1966년의 사카린 밀수 사건은 이후락 계열과 김종필 계열간의 파벌 싸움; CIA의 청와대 도청사건, 박정희 방탄차 도청사건, 코리아게이트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CIA-백성학 영안모자-국정원 제2차장 커넥션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D%9B%84%EB%9D%BD

79 부대 창설[편집]

1958년 이후락은 국방부 내에 제79부대라는 특수부대를 조직하였다. 79호실, 그러니 결국 그 당시의 중앙정보부 등의 별칭으로 불리는 이 특수부대는 미국 CIA의 인사가 유재흥, 김정렬에게 미국 CIA 한국지부와의 업무 교류를 목적으로 창설하자고 제의하였고, 1958년 미국 CIA의 한국지부장으로 웨인 넬슨이 부임한 뒤 지부 설치를 독촉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재흥, 김정렬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국방부 중앙정보부로 국방부의 지휘를 받았다.

대사특별보좌관이란 직명을 가진 넬슨은 1958년 복구된 CIA 대한민국 지부장으로 대한민국에 왔던 것이었다. 그는 김정렬 국방부 장관을 설득, CIA지부와 상대할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했다. 그것이 국방부 장관 직속의 국방부 79호실이었다.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미국 CIA 한국지부장의 요청으로 3군의 정보요원을 차출해 가칭 중앙정보부라는 통합 부대를 창설하였다. 김정렬은 이 부대의 부대장으로 이후락을 앉혔고 이후락은 자신의 군번을 따서 '제79부대'라고 이름지었다.[3] 김정렬 장관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를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예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김정렬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이승만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 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결국 정보기관은 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결정된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그는 이 기관을 79호실로 하자고 했다고도 하고 제79부대라고 하자고 했다고도 한다. 79는 그의 군번 10079에서 따온 것이다.

라오스 밀파 활동[편집]

국방부 79호실장 시절 이후락은 이승만의 밀명을 받아 라오스에 잠입하기도 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라오스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익 노사반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 지원 방안을 검토하다가 이후락을 라오스 현지로 밀파했다.[3] 이후락은 당시 주 베트남 대사 최덕신(崔德新)의 도움을 받아 노사반을 만난 결과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김정렬 국방부 장관은 서울로 돌아온 이후락을 대동하고 경무대로 들어가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때 그는 이후락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이후락은 '노, 노, 노사반 장군이…' 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다. 이후락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병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 합동참모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 측의 반대로 라오스 파병은 결국 백지화되었다.

보고에 따라 한국군의 라오스 파병이 심도있게 검토되었으나 미국의 반대로 결국 무산되었다.[3]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이후락은 매주 두 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 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許政) 과도 내각 때도 계속되었고 1961년 3월까지 지속되었다.

중앙정보위원회 조직[편집]

1960년 5월 국방부 중앙정보부가 해체되자 국방부 정보담당관의 직위로 활동하였다.[4] 1960년 11월 중앙정보조직인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조직되자 연구실장이 되었다. 장면 총리는 미국 CIA 서울지부의 권유에 따라 국무총리실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었다.[1] 미국 CIA는 1961년 중앙정보연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발족한 이 기관의 책임자로 이후락을 밀었다.[1] 결국 HR는 미국인들의 지원에 힘입어 육군 소장 예편과 함께 정보연구실장(차관급)으로 취임했다.[1] 중앙정보연구위원회가 설치되자 그가 만들어놓은 제79부대는 중앙정보연구위원회에 편입되었다.

그가 중앙정보연구위원회의 정보실장과 연구실장으로 발탁된 것은 CIA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장면은 측근인 이한림 육군 제1야전군 사령관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물었는데, 이에 이한림은 이후락을 평하기를 "맨날 힘센 쪽에 붙어다니는 형편 없는 군인"이라고 장면 국무총리에게 이후락의 사람 됨됨이를 평했다. 이에 장면 국무총리는 1961년 3월 28일 이기호(李岐鎬)를 행정이사관 임용과 동시에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하여 이후락을 견제하게 한다. 당시 국방부 정보비서관인 육군 대령 이기호는 특명으로 육군 준장 진급과 동시에 예편 후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 부실장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이후락은 주한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에게 박정희 공산주의자라는 정보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락은 박정희 주변에 끊임없이 밀정을 심어두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였다. 1961년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의 실버 참사관이 마셜 그린 대사 대리에게 한 보고 중에 "그에 관해서는 걱정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후락 준장의 얘기로는 이전에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그는 반란 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고 전향하여 형의 집행을 면한 적이 있습니다.[5]"라는 보고가 있다. 나중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후락을 내심 경계하였다.

정치 활동[편집]

5.16 군사 정변 전후[편집]

1960년 11월 이후락은 국무총리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으로 발탁되었다. 이때 육군 소장이었지만 그를 데려가려면 예편시키고 데려가라는 최경록 육군참모총장의 건의로 1961년 1월 예편과 동시에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이 되어 1961년 3월까지 재직했다. 동시에 그는 국무총리 안보 담당 비서관을 맡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60년 12월부터 해외 언론 번역기관인 대한공론사 이사장의 제의로 대한공론사의 필진으로도 참여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벌어지자 이후락은 박정희의 과거 남로당 이력을 미국에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위원인 김재춘 대령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대령에 의해 구제되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공보실장 겸 대한공론사 이사장 직을 겸임하며 《Korea Republic》지를 개편 발행하여 재한 외국인에 대한 군사 정부의 홍보를 담당하게 되었다.

  • 이후락이 부패 혐의자로 몰려 감옥에 갇혔을 때 옆방에 수감되었던 정치인 박준규는 훗날 '5·16 직후 우리 모두 감옥에 잡혀 들어갔을 때 이후락이가 내 옆방에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얼마나 약던지 삽살개처럼 굴더니 먼저 빠져나가데.'라고 회상하였다.

1961년 5월 18일 미국 CIA가 존 F. 케네디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박정희는 공산주의자였다는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한국 전쟁 때 복직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미국으로서는 좌익 전력을 지닌 박정희 의장을 감시할 인물이 필요했고 곧 이후락이 박정희 감시 역할을 맡게 된다.

5·16 군사 정변 초기에 이후락은 크게 주목받지는 않았으나, 1961년 7월 박정희에 의해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되고 군사 정부 대변인을 겸직하였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대한공론사 이사장직을 맡은 뒤 처음에는 정변 주체 세력의 장교들에게 깍듯이 '님'자를 붙이며 존대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 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았다고 한다. 1963년 1월 민정 이양과 동시에 다시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한편 그는 김종필 등과 함께 2인자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였으나 결국 패하고 만다.

 

 

 

 


이승만 대통령 정도가 되면 통크게 CIA와 협상했을 것입니다. 중앙정보부 만들 터이니 대마도 달라는 식으로 했을 것입니다. 허나, 이는 CIA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CIA는 까다롭기 그지 없는 항일운동가 이승만 대통령 제거 작전을 세웠을 것입니다.  

 

예서, CIA가 그간 요구하지 않다가 왜 1958년에 중앙정보부 창설을 요구했을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 베트남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국유본 기획이 3차 대전을 한국 전쟁으로, 십 년 뒤에는 베트남 전쟁였던 것입니다. 이후락이 뜬금없이 라오스 반군을 지원하러 라오스에 갔습니다. 중앙정보부 창설은 국내 문제 때문이 아니라 국제 문제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면, 이후락이 왜 라오스에 갔을까요?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때 적응이 가능한지 사전답사 성격이었을 것입니다.

 

하면, 왜 라오스 파병이 중지된 것일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또 통밥을 굴린 것이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인드라는 추정합니다. 국유본은 사전 답사에 이어 라오스에서 한국군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베트남전 투입을 결정하려했을 것입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공짜는 없다'는 외교 철학으로 국유본에게 대마도 반환, 남북 통일과 같은 대담한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국유본이 거절합니다. 이후, 국유본은 CIA와 중앙정보부를 통해 419 시위를 배후에서 주동하여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시킵니다.  

 

쪽발민주당이 들어섭니다. 대통령은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자에게 빨갱이라고 비난했던 쪽발보선이었고, 국무총리는 쪽발돼중의 스승으로서 일제 때 부역질한 악질 쪽바리 쪽발면이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국방부 산하에서 국무총리 산하로 격상합니다. 이후락이 쪽발면 부하가 된 겁니다.

 

해서, 이후락은 516 혁명이 발발하자 체포됩니다. 허나, CIA 강력 요구로 4일만에 석방됩니다. 뿐만 아니라 1963년 12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을 맡아 중도좌파 민족주의자 박정희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CIA에게 보고합니다.


 

둘, 북 쪽발일성이 박헌영 뿐만 아니라 소련파를 숙청하였습니다. 국유본은 왜 박헌영이나 김두봉 같은 국내 민족공산주의자들을 놔두고 쪽발일성을 주석으로 임명했던 것일까요? 이유는 그리스와 동유럽에 있습니다.

 

국유본 기획에 따라 스탈린이 동유럽을 먹었습니다. 헌데, 그리스 및 동유럽에서 민족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 통치를 거부하면서 티토처럼 독자적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이는 국유본이 만든 냉전체제에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냉전체제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해서 실행한 것이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삼차대전인 한국전쟁으로 냉전체제가 안정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김두봉, 박헌영과 같은 민족공산주의자들을 불신하였습니다. 민족공산주의자들에게 전쟁이냐 혁명이냐 묻는다면 혁명일 것입니다. 허나, 쪽발일성만이 민족과 조국을 배반한 천한 피가 흐르는 쪽바리색희답게 쪽발에게 이익을 주고 한반도인에게 재앙뿐인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조만식, 김구 같은 민족주의자도 죽였지요. 이때, 쪽발일성이 독립운동가들을 죽인 명분이 뭔 줄 아십니까. 친일파 운운인 것입니다. 애비 색희가 마약 팔다 공산주의자에게 뒈진 쪽발이인 데다가 북 정권 만들 때 좌우합작 독립운동가 출신 내각으로 만든 이승만 내각과 달리 강양욱 등 친인척 쪽바리 색희를 자리에 앉힌 것이 쪽발일성이 아닙니까.

 

허나, 국유본은 쪽발이에 반감이 없는 쪽발 일성을 임명합니다. 이유는 쪽발이색희들이 태평양 전쟁으로 반미했잖아요. 이용하기 좋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민족공산주의자들은 항일운동을 했기에 비록 반쪽뿐인 해방이지만 미국을 적대하는 것이 명분이 없었습니다.

 

해서, 국유본은 쪽발일성을 절대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한국전쟁 준비하는데 불과 3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엄청난 지원인 셈입니다. 이뿐입니까. 당시 모택동이 도와달라고 국유본에게 사정사정했는데 국유본이 중국을 안 도와주어서 모택동이 대약진운동 실패 책임으로 2선으로 후퇴할 정도였음에도 북한 만큼은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북은 남보다 당시 잘 살았습니다. 자력갱생? 자주경제? 자주국방? 시러베 병쉰이나 아는 개그일 뿐입니다.

 

헌데, 국유본이 스탈린을 숙청하니 쪽발일성이 남로당파와 소련파를 숙청합니다. 이는 국유본에게 혼선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소련파가 국유본 연락책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허가이 같은 인물이 이후락, 김종필이었던 것입니다.

 

국유본이 해방 직후부터 1958년까지는 북한 평양에서 소련파가 북한을 중심으로 남한을 담당하게 하고, 쪽발 동경에서 쪽발을 중심으로 남한 지역을 담당하는 구도였습니다. 헌데, 소련파 숙청으로 변화가 불가피했던 것입니다.

 

해서, 국유본은 쪽발일성에 대한 지원을 끊고, 남한에 대한 지원을 본격화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허나, 이승만, 쪽발민주당 때에는 여건이 맞지 않았고, 박정희 때에 이르러서야 조건이 충족이 되어 지원을 했던 것입니다.

 

쪽발일성은 1964년 이전까지 지원을 받지 못해 주체노선이니 하면서 쌩구라를 까며 초조해하였지만, 1964년에 들어서서 다소 안정화됩니다. 데이비드 록펠러가 1964년 소련을 방문한 직후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던 후루시초프가 실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1964년 이후 국유본은 데이비드 록펠러를 통해 북 정권과 연결됩니다. 허나, 병주고 약준다고 할까요? 쪽발일성은 제 2의 한국전쟁을 준비하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 군사력 강화로 나서는데요. 이로 인해 북한 경제가 망쪼로 변합니다. 일각에서는 쪽발정일 때문에 북한경제가 망했다고 하는데요. 쪽발정일 책임도 크지만, 원죄는 쪽발일성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이후락 같은 자도 필요했지만 소련파 같은, 박헌영 같은 세력을 국내에서 찾기 시작하는데, 그들이 바로 516 혁명을 주도한 남로당파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셋, 이승만 제거 공작 때문입니다. 당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한민국 국민들은 누가 쪽발이 짓을 했는지 다 알 때입니다. 쪽발민주당에서는 그나마 신익희 정도가 쪽발이가 아닌 애국자였는데요. CIA나 중앙정보부 때문인지 죽습니다. 해서, 쪽발민주당은 예나 지금이나 늘 쪽발이가 당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해서, 정권 교체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권 교체를 하려면 419 같은 사건을 CIA가 만들어야했습니다. CIA는 대한민국과 이란, 이집트, 이스라엘 등지에서 선거 조작, 419 시위 조작 같은 사건을 잘 만듭니다.

 

문제는 이후락은 물론 쪽발민주당 정권이 시원찮았던 것입니다.

 

국유본은 1950년대 후반부터 독일 재단을 한국에 도입시키는 등 베트남 전쟁에 대한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갑니다.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은 국내 문제 때문이 아닌 국제 문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응이었습니다.

 

허나, 이후락과 쪽발민주당 정권 하는 짓이 병쉰이다 보니 국유본 내부에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회사에서 사장이 모든 일을 하나요? 아닐 것입니다. 사장은 주요 안건만 처리하고 대부분 일들을 임원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헌데, 임원이 죽을 쑤면 어찌 되나요? 사장이 두고 보았다가 영 안 되겠으면 직접 개입하죠?

 

국유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문제에 대해 빅터 로스차일드는 516 혁명 전까지 국유본 귀족들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허나, 국유본 귀족 하는 짓이 병쉰이다 보니 빅터 로스차일드가 직접 개입한 것이 516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해서, 장기집권한 이스라엘 중도좌파 마파이당, 오늘날 노동당 집권당이 세계 최초로 박정희 중도좌파 민족주의 정부를 승인했던 것입니다.

 

허나, 국유본 귀족들은 박정희 정부에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해서, 스칼라피노, 훗날 삼극위원회 회원이자 한국전쟁은 내전이다 등을 주장한 자가 박정희 정부를 만나고서는 박정희 정부가 사회주의 정부다라고 보고한 것입니다. 하고, 사사건건 국유본 귀족이 주축인 미국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는 공산주의 정부인가, 왜 화폐 개혁하나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화폐 개혁을 할 때도 화폐를 미국이 아닌 영국에서 주조했습니다.

 

처음부터 이후락이나 김종필이 국유본 귀족파, 빅터 로스차일드파인 건 아니었습니다. 그건 1960년대 후반 국유본 권력투쟁이 본격화된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후락이나 김종필 모두 국유본 지시를 받아 중도좌파 민족주의 박정희 정부를 감시 견제하는 알파, 오메가였습니다. 이때, 1950년대는 이후락이 알파, 김종필이 오메가였습니다. 허나, 1960년대는 김종필이 알파, 이후락이 오메가가 됩니다. 하고, 1970년대는 이후락이 다시 알파가 되고 김종필이 오메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건의 전말을 보면 사건의 미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미 관계는 마치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美양원합동회의에 가서 미국 지도자를 훈계하듯 강경 연설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이대통령에 대한 신임이 급격히 떨어진 때와 비슷한 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통령은 휴전 후 미국을 방문하면서 내셔널 프레스클럽, 샌프란시스코 연방클럽, 필라델피아 재향군인회, 로스앤젤레스의 세계문제협의회 등의 연설을 위해 올리버 박사에게 원고를 쓰도록 부탁했다.
올리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올리버 박사가 원고를 써 올릴 때마다 별로 고치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양원합동회의 연설문은 스스로 썼다. 올리버 박사는 여러 번 사정하다시피 그 원고를 한 번만 보여 달라고 했다. 백악관 만찬 후 블레어하우스에서는 단 한 자도 고치지 않을 테니 그저 한 번만 읽어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그 원고가 든 가방을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않은 채 완강한 거부 태도를 보였다.
올리버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꺾을 수 없는 고집의 표시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7월 28일 드디어 의사당에 나가 "미국이 한국에서 對공산주의 전쟁을 벌벌 떨면서 그만두게 됐다"고 비난하고 "어리석게도 휴전에 동의했다"느니 "한국이 다시 공격받기 전에 워싱턴은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일장 훈시를 했다.
그날 이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으나 미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승만과는 애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됐다.

박대통령이 78년 12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엉터리 선거'에 의해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이즈음 미국은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에 초조할 정도의 관심을 높이고 있었고 약간의 위협용으로 주한미군 철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고 있었다.
1979년 6월 29일 카터 美대통령이 한국에 왔다.
나는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인의 한 사람으로 이 카터-박대통령의 만남이 양국에 얽힌 많은 문제를 풀어 줄 것을 빌었다. 그러나 박-카터 회담에서 박대통령이 회담 시간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서 철군의 부당성을 들어 일방적으로 미국 행정부를 공격하는 발언으로 일관해 분위기가 밝게 끝나지 못했었다. 韓 · 美의 관계가 어긋나면서 카터 대통령도 차기 선거를 위해 미국 유권자들에게 줄 선물(인권 문제 등)을 별달리 얻지 못한 채 쓸쓸히 돌아갔었다.
그 뒤 가발 공장 여종업원들을 신민당사에서 끌어낸 소위 YH사건, 김영삼 총재의 국회의원제명사건 등 계속 불행한 사태가 한국에서 발생했고, 이때마다 美국무부는 '개탄한다' 등의 非외교적 용어까지 써가며 박정희 정부를 비난했었다.
물론 나는 이 고차원적인 정치 문제를 애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한국에서 내 직업 군인 생활을 송두리째 마친 입장에서 볼 때 양국 관계는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고 있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 김재규를 움직일 수 있었다거나 움직일 엄두를 낼 수 있었다고는 절대로 믿지 않는다.


제임스 하우스만,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 17~20p
 
 
 
 
 
 
 
 
 
한국현대사 연구자인 미국의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30년을 한국에서 보낸 가장 주요한 미국 요원이었으며, 미국과 한국군부 간에 그리고 이들 정보기구 간의 연결자로서 활동했다고 썼다. 커밍스는 하우스만이 ‘촌뜨기 같은 언행 뒤에 자신의 기술을 감추고 있는 교활한 공작원’이었으며, 한국판 에드워드 란즈데일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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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군 수뇌부의 인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이는 하우스만이라는 미군 고문관이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준다.
하우스만은 “그 때 모든 사령관의 파면, 임명이 내 손을 거쳐 갔으며 내가 사령관과 미 대통령 사이를 연결해주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두 사람의 유일한 통로였다. 내가 어떤 사람도 거치지 않고 직접 대화 가능했으며, 내가 원한다면 국방부장관과도 바로 대화가 가능했다. 그래서 내가 모르면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
한번은 정일권과 고문관 하우스만이 토벌중인 백선엽 부대를 조사하러 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빨치산이 매복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는데도, 정일권은 체면 때문에 예정된 길을 가자고 주장했다. 이때 하우스만은 “정, 당신은 부참모총장이고 나는 참모총장의 고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이 길로 가기를 명령한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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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무쵸 주한 미대사가 재판도 없이 제주도에서 민간인 20명을 총살한 사실을 보고 받고 놀란 적이 있었다. 그 때 하우스만은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이것은 좋은 신호이다. 과거에는 이같은 민간인 200명 또는 더 이상이 집단으로 처형되었는데, 이제 숫자가 20명으로 줄었다. 이것은 진보이다.”라고. 무쵸조차 더 이상 할 말을 잃었던 이 의연한 대답은 그의 황폐한 정신 상태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무쵸 대사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었고, 나중에 워싱턴에서 하우스만을 다시 만났을 때, “자네가 당시 그렇게 말했다네”라고 상기시켜 줄 정도였다.
이런 그의 심성 때문에 그는 미군들 사이에서조차 '무서운 사람'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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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하우스만은 학살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우스만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수 천명의 공산당을 처형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이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 다시 질문이 이어졌지만 하우스만의 대답은 “잔학 행위는 없었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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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만은 이승만 정권시기에 한 사람의 미군 대위에 불과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 초기에 하우스만은 장관들만이 참석하는 국무회의에 미국인의 신분으로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경무대에 들어앉아 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시간에 구애됨이 없이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나 응하기 위해서였다.
하우스만은 10여 년이 넘게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주기도 했지만,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는 최후 통첩을 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불붙자 미국 정부는 이승만을 더 이상 남한의 통치자로 머물러 있게 하지 않았다. 이에 하우스만은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을 통해 미국의 지지 철회를 통고하였다. 하우스만은 송요찬에게 “당신이 가서 미국 정부는 경무대의 탱크를 철수시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알려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승만 정권의 종말을 알리는 발언이었다. 당시 하우스만은 송요찬의 고문이었다.
김득중, 2001,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여순사건 제53주기 학술세미나 발표문 : 여순사건의 진상과 국가테러리즘 수록, 여수지역사회연구소#1 #2
 
 
 

 

 

http://www.cc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89

 

 다른 조직원들에도 고유 코드명 부여…미국 CIA 코드명은 '뉴욕'




'국가 정보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은 ‘아담스’나 ‘빅맨’이라는 코드명을 가지고 '정보 수집 활동’을 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백 회장은 다른 조직원들에게도 고유 코드명을 부여했으며 미국 CIA에 대해서는 ‘뉴욕’이라는 코드명이 붙어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국가 정보 유출 의혹’을 제기한 경인방송 신현덕 대표는 지난달 31일 열린 국회 국정감사에서 “백 회장이 ‘아담스’나 ‘빅맨’이라는 코드명을 사용하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실제로 신 대표가 국정 감사장에서 폭로한 ‘S-1'이라는 문건에 백 회장의 코드명이 ‘아담스’, ‘빅맨’이라고 표기돼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S-1' 문건의 첫 장에도 ’BS'와 ‘홍 이사’라는 코드명이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 신 대표는 "회사 안에서 정보 수집 활동에 대해 아는 사람은 백 회장 자신과 ‘BS', '홍 이사’뿐“이라는 백 회장의 설명을 듣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해 놓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유비’라는 코드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백 회장의 ‘국가 정보 유출 의혹’에 깊이 관련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S-1' 문건의 두 번째 장을 보면‘뉴욕’이라는 코드명이 나오는데 미국 CIA를 지칭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백 회장 자신이 수집하거나 작성을 지시한 문건들에도 D나 S와 같은 코드 뒤에 일련번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은 국감장에서 이미 확인이 됐다.

백 회장은 국감장에서 "기업 활동을 위한 정보 수집만 해왔다”고 해명했지만, 일반적인 기업 활동으로 보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은 대목이다.

‘S-1’ 문건에 등장하는 코드명의 실체만 밝혀도‘국가 정보 유출 의혹’의 진실이 상당 부분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충청뉴스(http://www.ccnnews.co.kr)

 

 

 

 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252

 국감장에서 제기된 영안모자 회장의 대미 정보 제공설의 진상은 무엇일까. 또 그와 미국 네오콘 실세와의 관계는?

 
‘모자왕’,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1940년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모자 회사를 창업해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언론 매체의 성공 사례 소개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이야기다. 그는 대우버스 등을 인수한 데 이어, 지난 4월28일에는 그가 1대 주주가 되어 구성한 컨소시엄이 경인 지역 민방인 경인TV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이처럼 잘나가던 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로 위기를 맞았다. ‘국내 정보를 미국에 넘겼다’는 의혹을 받으며 ‘애국자’와 ‘매국노’의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백성학 의혹’이 세간에 공개된 것은 지난 10월31일이다. 백회장과 함께 경인TV 대표를 맡고 있던 신현덕씨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백성학 회장이 국내 여러 사람들로부터 정보와 문서를 제공받고 있으며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해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그가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고 있다”라고 폭로하며 관련 문건 두 개를 공개했기 때문이다.(<시사저널> 제889호 참조)

이에 대해 백회장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싶어서 만든 것뿐이다. 영안모자는 브라질, 코스타리카 등에 30여 개 해외 법인을 두고 있다. 사업과 관련이 없는 문건을 해외에 보낸 적이 없다. 굉장한 누명을 쓰고 있다”라며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호사와 상의해 법적 조처를 취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신씨를 고소하지 않고 있다.

아직 이 사건의 실체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나를 고소하라”라고 큰소리치는 신 전 대표도 자신의 주장 이외에 다른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는 “여러 문건과 방어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고 있다”라고 자신하지만, 수사가 시작되면 공개하겠다며 뜸을 들이고 있다. 백회장측도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백회장을 대변하는 경인TV 김종오 부회장은 “내부적으로 백회장이 나서지 않고 실무자들이 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증거를 취합하는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소송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 전 대표의 주장은 음해다”라고 주장하는 백회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증언한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면 의문이 있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그의 주장 또한 과연 진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백회장은 “여야 의원들, 잘 아시죠”라는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의 질의에 대해 “전혀 아니다. 국회의원 가운데 아는 사람은 민주당 김종인 의원뿐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백회장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열린우리당 임시 당의장을 지낸 유재건 의원과 40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등 정·관계 인사들을 다수 알고 있다.
유의원은 “1965년부터 백회장과 알고 지냈다. 한마디로 그는 의리의 사나이다. 내게는 부탁 한번 한 적 없다. 그가 국내 정보를 미국에 전달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유의원은 “백회장은 정·관계 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성북동에 있는 교회에 같이 다닌다.

이부영 전 의원도 백회장을 안다. 미국에 있는 영안모자 해외 법인의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선배가 백회장과 이 전 의원을 인사시켰다. 이 전 의원은 “백회장을 알게 된 지 몇 년 되었다.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보도된 자기와 관련한 기사를 줬던 기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인사는 “백회장이 1998년 서울 영등포에 있던 사무실을 연청에 2년쯤 공짜로 쓰도록 내주었다”라고 증언했다. 5층 건물에서 80여 평 규모 2층을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 김홍일 전 의원이 이끌던 청년 조직)이 무료로 쓰도록 배려해주었다는 것이다. 1998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해이다. 이 인사는 “백회장은 당시 여권 실세와도 자주 만난 것으로 안다. 대권을 잡으려면 백회장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 정가에 나돌기도 했다. 그가 미국 공화당 쪽 인맥이 막강하다고 소문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경인TV 전 관계자는 “백회장은 누구누구를 키웠다는 말을 가끔 했다. 그가 거론한 사람 중에 정치인들도 몇 명 있었다”라고 말했다.

백회장이 국감에서 “나는 영어도 잘 못한다” “(코드명 D라는 사람이 47번째로 작성한 문건에 대해) D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46번째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부영 전 의원은 “백회장은 영어를 잘한다”라고 말했다. 우상호 의원은 “47번이나 문건을 보내온 D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46번째까지는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백회장을 힐난했다.

삼구빌딩 1501호 사무실의 정체

백회장의 인맥·활동과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은 국가정보원에서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이상업 2차장이다. 국감장에서 백회장은 “경기경찰청장을 할 때부터 이상업씨를 알고 지냈다”라고 증언했다.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의 인척인 이씨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경기경찰청장을 지냈다. 신현덕 경인TV 전 대표도 “백회장은 국정원과 경찰 고위직에 상당한 인맥을 구축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로부터 수시로 정보 보고를 받고 있다고 여러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과시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이차장이 백회장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고 같은 교회를 다니며 알고 지낼 뿐이라고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 전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국가 공무원들이 백회장에게 국가 정보를 유출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다른 나라에 넘어가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 쪽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백회장은 현 정부가 들어선 뒤 김장환 목사의 소개로 차기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도 알게 되었다.

김종오 경인TV 부회장은 “백회장이 사업을 한 지 40년이 넘는다.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을 알게 되는 것 아니냐. 지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전달했다는 신 전 대표의 주장은 허위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백성학 의혹’과 관련해 주목되는 곳은 신 전 대표가 정보원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서울 중구 소공동 삼구빌딩 1501호이다. 백회장이 자신에게 15층에 가서 미국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교육을 받으라고 해서 갔다는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 현황과 조직 체계, 한반도 주변 정세 흐름 등이 주된 교육 주제였다고 한다. 신씨는 “삼구빌딩 15층에서 영안모자 해외담당 고문으로부터 여러 차례 일대일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 등 우수한 대학을 나온 직원들이 정보도 수집하고 종합·분석·번역하는 작업까지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경인TV 대표에게 왜 이런 교육이 필요했고, 영안모자 회장은 왜 이곳으로 그를 보낸 것일까.

지난 11월8일 1501호를 가보니 신 전 대표가 그려준 그림과 내부 구조가 똑같았다. 30평쯤 될 것 같은 사무실 입구에 여직원이 있었고, 방 세 개에 한 명씩 근무자가 있었다. 왼편에는 의자가 놓인 회의실이 있었다. 신씨는 이 회의실에서 정보원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장 배 아무개씨는 기자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기자가 찾아가 여직원에게 명함을 건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기자를 지나쳐 사무실을 빠져나간 사람이었다. 그는 왜 기자를 피했을까.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은 “US Asia는 컨설팅 회사이다”라고 말했다.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회사 설립 목적이 ‘사업 개발 자문 서비스 제공’이라고 나와 있었다. 1501호에는 이 회사 말고도 서류상으로 몇 개 회사가 더 있었다. 이 사무실에 근무하는 인원은 네 명 정도였다(OO쪽 참조).


 
이에 대해 경인TV 김종오 부회장은 “삼구빌딩 15층에 있는 US Asia는 영안모자의 해외 사업을 상담해주는 회사다. 백회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회사 대 회사로 거래하는 관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무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대표이사가 리처드피 롤리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반도 군사 문제에 대한 미국측 상대인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이다. 신 전 대표는 국감에서 “백회장은 리처드 롤리스 부차관보를 잘 안다고 했고, 롤리스와 오랜 인연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인사가 영안모자 해외담당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사람 역시 문건을 작성하는 데 깊이 관여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신씨가 지목한 ‘영안모자 해외담당 고문’은 US Asia 배 아무개 사장으로 추측된다.

백회장은 국감에서 “롤리스는 옛날에 사업 관계로 알게 되었다. 최근에 만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삼구빌딩 한 관계자는 “롤리스는 국방부 차관보로 가기 직전까지 1501호에서 일했다. 그가 배사장과 식사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라고 말했다. 1501호를 매개로 한 백회장과 롤리스의 관계가 새삼 주목되는 이유다.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지 모르는 사안이다”라는 열린우리당 우상호 의원의 말처럼 ‘백성학 의혹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충격파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별 죄의식 없이 미국이나 일본 등에 정보를 넘기는 것에 대한 경각심이 부각될 것이다. ‘적국’에 정보를 넘긴 경우에만 간첩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현재 형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을 것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런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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