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말, 죽을 위험을 여러 번 극복하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유럽으로 2년 6개월만에 도착하고, 스페인 제국과 로마에서 국빈 대접을 받았으며, 펠리페 2세와 교황 2명과 뜨거운 포옹을 했고, 1년 8개월 동안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 각국을 여행하였으며, 다시 4여년만에 일본으로 돌아온 덴쇼 소년사절단의 이야기는 지극히 감동적이다
덴쇼 소년사절단이 일본인 노예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백미.
미겔은 천연두 비슷한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10월 19일까지 체재하게 된다. 당시 천연두는 치사율이 굉장히 높은 악명 높은 병이었다. 톨레도에서 2,000 여명이 사망자를 내고 번지고 있었다. 그래서 펠리페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왕실주치의를 보내 정성껏 치료하도록 했다. 뒤이어 마르티노는 포창에 걸렸고, 역시 치료를 받았다. 이후 사절단은 1584년 10월 20일 수도 마드리드에 가마 마차를 타고 환영객을 대거 거느리고 도착한다. 당시 이들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으며 귀공자 대접을 받았다. 이후 11월 14일에야 당대 최고의 권력을 뽐내고 있던 펠리페 2세의 알현을 얻게 된다. 정사 만쇼와 미겔은 펠리페 2세에게 포옹을 당하며 파격적인 대접을 받으며, 기독교 다이묘가 국왕에게 보낸 서한을 일본어로 낭독해 제출한다. 다이묘의 친서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우리 주님의 은총으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신성한 지혜를 입어, 저를 비롯한 본국 사람들도 야소회(예수회) 순찰사의 도움과 설교로 광명을 충만히 입었습니다. 귀국에서 폐하의 위대한 권력과 지위로 기리시탄의 비호를 넓히신 일은 본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저도 폐하의 비호와 부조의 큰 자혜를 받들겠습니다. 저는 사촌동생 돈 미겔을 소년단에 봉행시켜 교황 성하의 발에 입을 맞추고, 폐하를 알현케 합니다. 1582년 2월 8일, 위대하고 거룩한 국왕의 발아래 올립니다. 돈 프로타지오.[17]발리냐노의 덴쇼소년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의 유럽 순방과 선교 영향[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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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페 2세는 소년들이 가는 곳마다 여행이 지체 없이 진행되도록 세심하게 지시를 내렸다. 또한 당시 발리냐노가 소년들을 다루는 것에 대해 예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모범이 되는 것만 보이고, 보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지켜라."였다.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은 포르투갈의 식민지 정책인지, 일본인 노예의
목격인지, 교회의 분열 문제나 이탈리아 궁전이나 교회의 빛나는 외양 속에 숨어 있는 타락을 말하는 것인지는 연구자마다 견해는
다르다. 참고로 4명의 견문록은 1590년 마카오에서 인쇄, 간행된 '일본사절의 견문대화록'(라틴어)이며, 일본어 번역은
'데·상대천정부견구사절기'(신이국총서-웅송당)로 출판되고 있다. 이 책에는 노예 무역으로 거래된 "일본인 노예"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 문헌은 당시 남만 무역인들에게 팔려나간 일본인 노예를 목격한 자료로 꼽히고 있다.
미겔 : 이번 여행에서 팔려 노예의 생애에 떨어진 일본인을 가까이 보았을 때는, 도의를 일체 잊고 피와 언어를 같이하는 동국인을 가리키며 가축이나 짐승처럼 이렇게 싼 값에 내놓는 우리 민족에 대한 의분의 격한 분노에 불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쇼: 미겔, 우리 민족에 대해 그 개탄을 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사람들은 다른 일에서는 문명과 인도를 제법 중시하는데, 아무래도 이 일에 있어서는 인도주의, 고상한 교양을 전혀 돌아보지 않는 것 같다.
마르티노: 진짜. 사실 우리 민족의 그 많은 남녀들이나 동남동녀들이 세상의 그처럼 저마다의 지역을 그렇게 싼 값에 휩쓸려가 팔려가고 비참한 천역에 굴복하는 것을 보며 연민의 정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순히 포르투갈인에게 팔려가는 것만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그런대로 참을 수 있다. 포르투갈 국민은 노예에 대해 자비롭기도 하고 친절하기도 하며 그들에게 기독교 교조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가짜 종교를 받드는 열등한 민족이 있는 여러 나라로 흩어져 가서 거기서 야만적인, 빛깔의 검은 인간들 사이에서 비참한 노예의 신세가 되는 것은 물론, 허위의 미망이라도 불어넣어지는 것을 누가 감히 참아낼 수 있겠는가.
미겔: 아니, 이 점에서 포르투갈인에게는 조금의 죄도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상인이니까, 비록 이익을 예상하고 일본인을 사들인 후, 인도나 그 외의 땅에서 그들을 팔아 돈을 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는 것은 당치 않다. 그렇다면 죄는 모두 일본인에게 있는 것이고, 당연하다면 소중하게 아껴 주어야 할 친자식을, 얼마 안 되는 대가로 어머니 품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그렇게도 천연덕스럽게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나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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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 로마 방문[편집]
일행은 국경에서 300명의 병정의 보호를 받으며 로마로 행진했다. 교황 알현은 최고의 사절을 맞이하는 '사라 레지아(Sala Regia)'에서 거행하기로 했다. 알현 당일, 정사 이토 만쇼, 치지와 미겔, 부사 하라 마르티노 세 사람이 입장해, 공봉의 행렬을 인솔받은 뒤, 왕과 제후의 사절을 따라 포폴로 문을 들어가, 산탄젤로 다리를 건너,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행진했다. 다만, 줄리안은 열병에 걸려 참석하지 못했다. 다행히 줄리안은 “교황님을 뵈어야 내 병이 낫는다”고 우기며, 알현 당일인 3월 23일 다른 소년들보다 한발 앞서 교황을 만났다.[27] 이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콰트로 라가치(クアトロ・ラガッツィ)>라는 책을 쓴 미술사학자 와카쿠와 미도리(若桑みどり)다.[28] 그는 “예수 탄생 때의 동방박사 3명의 방문을 상기시키기 위해, 줄리안이 참석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상징적인 의미를 담기 위해서 동방에서 오는 사람이 시각적으로 3명이어야 한다는 것이 와카쿠와 미도리 교수의 주장이다.
황금으로 장식한 검은 벨벳 덮개를 두른 준마에 올라탄 세 소년은 흰 날개와 금송이 회색 모자를 쓰고, 금실과 색실로 화조를 단 하얀 비단옷, 우아한 목도리를 가슴으로 교차시켜 띠처럼 매고, 허리에는 옻칠로 장식된 칼을 차고 있었다. 선두는 만쇼였고, 2번째는 미겔, 2번째는 마르티노였다. 세 사람의 좌우에는 각각 대주교가 따랐다. 그 뒤에 통역으로서 메스키타가 뒤따르고, 그 뒤를 헤아릴 수 없는 귀족들이 기마를 타고 따라왔다. 산타젤로성의 다리를 건너자 축포가 울렸고, 축포는 점점 커져 그 수가 무려 300발이나 되었다. 최대의 축포가 울리면 그에 호응하듯 이번에는 바티칸 궁의 축포가 울리기 시작하고, 대포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묘한 음악소리가 울렸다.와카쿠와 미도리 《콰트로 라가치 덴쇼 소년사절과 세계제국》
당시 로마에서 일본인 소년들을 처음 본 작가들은 이렇게 적고 있다.
로마에 왔을 때, 그들은 대충 16세 정도였다. 보통의 유럽인보다 신체는 작았는데, 고기를 먹지 않는 일본인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짐작이 간다. 그들의 피부색은 대체로 희었다. 그러나 날씨가 추운 탓인지 아니면, 긴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부가 올리브처럼 파랬다. 눈은 작지만 예리했고, 코끝은 약간 넓은 편이고, 얼굴은 마르지도 살이 찌지도 않았다. 요컨데 전체적으로 상당히 지적이고 품위 있는 용모로 보였다.[A]
역시 로마에서 소년 사절단을 본 베네치아의 메이에토는 이렇게 적고 있다.
체구는 작고 피부는 올리브빛의 갈색이었다. 눈은 작았다. 입술은 두껍고 코는 끝이 뭉툭했지만 지적이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어디에서도 야만인의 용모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태도는 교양 있고, 예의 바르고, 겸손했다. 서로를 존중하며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상황을 신중하게 판단하고 현명하게 처신했다. (중략) 모든 것을 깊이 관찰하지만, 모든 것에 크게 놀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심지가 깊고 품격이 있어 보였다. (중략) 그들은 매우 가벼운 비단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의 문양으로 다채색의 일본 꽃과 새와 동물이 그려져 있었다. (중략) 그들이 신고 있는 신발(조리)은 카푸친회의 수사들의 것과 유사했다.Relatione del Viaggio Et Arrivo in Evropa Et Roma de' Principi Giapponesi[A]
이들은 호위한 행렬은 장엄했다. 수백 명의 기병대가 호위하고 군악대가 연주를 하며 기모노를 입고 말에 오른 만쇼, 미겔, 마르티노를 둘러싸고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갔다. 200여발의 축포가 쏟아졌고, 소년들은 외국의 제왕에 준하는 대접을 받으며, 교황을 알현했다. 그들은 교황 앞으로 다가가 발밑에 입맞춤한 후, 이토 만쇼는 오토모 소린, 치지와 미겔은 아리마 하루노부, 오무라 스미타다의 서한을 교황에게 바쳤다. 친서의 내용은 대부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는 것과 ‘교황께 절대 순명하겠다’는 약속이었다. 당시 미겔은 그 순간의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교황님은 당신의 발에 입을 맞추는 우리를 보고 따뜻하게 아버지처럼 포옹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감격하여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소년단의 방문에 감명을 받은 교황은 그들에게 일본 포교 사업에 막대한 지원금을 약속했고, 소년들에게 적색과 검은색의 양복을 각 2벌씩 8벌에 모자와 구두, 외투까지 선물했다. 교황은 소년들에게 일본에 대해 자세히 물었고, 소년들은 교황에게 일본열도에 기독교인이 얼마나 되는지, 몇 개의 성당이 있는지, 그곳에서 선교사가 몇 명이 활동하고 있는지 자세히 보고했다.[A] 그러나 그레고리오 13세와 만난 지 불과 18일 만에,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급서하고 만다. 미겔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로마 거리를 달리고 있는데, 시스토 주교님이 사람을 보내어 교황님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는 말에서 내려 비탄한 마음을 표했고, 울면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교황 선출 콘클라베에서 차기 교황이 된 것은 그레고리오 13세와는 노선이 다른 식스토 5세였다. 소년 사절단은 교황 알현이라는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을 달성했고, 게다가 2명의 교황을 만난 최초의 일본인이 된 것이다. 5월 1일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교황 즉위 미사에서 4명의 소년은 주빈으로 초대되어 참례한다. 일행은 교황에게, 오다 노부나가가 카노 에이토쿠에게 그리게 해 발리냐노에게 주었다는 '아즈치 성시 병풍'을 헌정했다.[33] 이토 만쇼는 미사에서 복사를 맡아, 교황이 세수례 때 보좌하는 영예로운 역할을 맡기도 했다.# 4일 후에는 로마 교구 주교좌 성당인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까지 장엄한 행렬이 이어졌는데, 사절단은 거기에도 초대받아 그레고리오 13세에게 선물 받은 옷을 입고 말에 올라 행렬에 참석했다. 이 장면은 바티칸 도서관에 있는 벽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행차도'에 소년 사절단도 그려져 있다.
▲ 식스토 5세의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에서 행렬하는 소년 사절단 |
말에 올라타고 나아가는 소년들이 그려져 있다. 당시 관행에 따라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행차하는 새 교황의 행렬에 4명의 사절단도 말에 탑승하여 참석하였는데, 그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향하는 기념할 만한 그림인 '라테라노 대성당 행차도'가 바티칸 도서관에 남아있다. 당시 소년 사절단은 로마의 주요 7개 성당을 돌고 있었고, 5월 11일에는 소년들에게 로마 시의회부터 명예 로마 시민권과 귀족 작위를 수여받는다. 다음날 새 교황으로부터 성 베드로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 교황은 그들에게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 오르토 성당을 희사했다.[34] 5월 말에도 소년 사절단은 바티칸에 초대되어 훈장과 검을 수여받았다. 이후, ‘교황 알현’이라는 최대 목적을 달성한 이들은 로마를 떠날 채비를 하며, 총 70일간의 로마 체류를 마무리한다. 당시 사절들의 포르투갈·스페인, 이탈리아 순방 모습은 수많은 책자에 실려 유럽 각지에서 출판되고 있다. 당시 소년 사절단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소년단을 수행하던 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몰려드는 군중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길에서건 식사하는 궁에서건 우리가 들어간 성당에서건 군중들은 우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밀려들었다. 조금 떨어져 달라고 해도 듣지 않았고, 우리는 더워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A]
1585년 한 해에 유럽 전역에서 이들에 관한 서적 48권이 쏟아졌다.## 특히 소년 사절단의 이탈리아 체재 당시에 대해서는 ‘로마에서의 교황 알현’이라는 일대의 이벤트도 포함되어 있어, 당시 이탈리아인들로부터 특히 주목을 받아 이탈리아어로 된 사절단에 관한 책자가 매우 많이 출판되었다. 유럽 각지에서 성대한 환영의식이 거행되고, 이때의 연설집과 사절 일행의 행적에 관한 팸플릿이 잇달아 출판되어 열풍이 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책이 바로 구이도 과르티에리가 저술한 《천정견구사절기》다. 당시 과르티에리는 라틴어 비서관에 취임했는데, 같은 시기에 로마에 체재하고 있던 소년 사절단이 교황 식스토 5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즉, 콰르티에리가 교황 측근이라는 인생의 절정기에 서양인과는 차림새도 외모도 전혀 다른 사절단 4명의 소년들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로마의 소년 사절단이 방문한 이듬해인 1586년, 당시 이탈리아에서 출판업이 번성했던 베네치아 출판사에서 이 책을 출판했다. 내용은 일행에 관한 교황 알현식의 성의와 그들을 환대하는 행사 등을 중심으로, 로마 체류 13일간의 기사를 담고 있는 자료다. 이 보고서는 출판과 동시에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그해에만 3쇄를 찍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 덴쇼 소년 사절단의 교황 알현에 관한 보고서 |
또한 베네치아의 파올로 메이오토가 파도바대학교 출신의 철학자이자 의사 지롤라모 메르큐리알레(Girolamo Mercuriale) 앞으로 보낸 일종의 보고서로 '일본 왕자들의 유럽과 로마 여행 및 도착 보고서'가 있다. 이 문서는 1585년 4월 23일자, 베네치아에서 나온 최초의 소년단 관련 공식 문서다. 소년단이 아직 로마에 체류하고 있을 때 나온 것으로, 그들에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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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끝난 1586년, 코임브라를 출발한 소년 사절은 바탈랴의 미완성 성당이나 알코바사의 수도원에 들렀다. 1586년 1월 9일 코임브라를 나와 해안 쪽 레일리아, 버터랴, 알코바사, 나자레를 지나 리스본으로 돌아온다. 리스본에서 사절단은 각자 맡은 과제를 완수하고 귀국을 준비했다. 발리냐노의 요청에 의해 메스키타 신부는 ‘라틴어-일본어 이동식 인쇄기’ 및 부품 등 장비를 구입했고, 남은 시간동안 호르헤 데 로욜라와 콘스탄티노 도라도에게 금속 인쇄기로 카타카나로 행렬을 맞추어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또 요청받은 유럽의 지도와 그림을 챙긴다.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의 1년 8개월의 여행은 끝난다. 참고로 프랑스와 독일 국왕, 제후들도 이들을 초청했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덴쇼 소년사절단의 가장 큰 의의는, 서양 세계에 일본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렸다는 것이다. 소년단의 유럽 방문은 이후 교체된 일본의 정권하에서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일본이 세계 정세에 민감하게 움직이고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는데 주저하지 않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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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0년 7월 28일, 덴쇼 소년사절단은 약 8년 반에 이르는 영광스러운 장기여행을 완수하고, 게다가 사절단 소년들이나 활판 인쇄술을 배우러 간 소년들이 1명도 목숨을 잃지 않고, 무사히 나가사키에 돌아왔다. 이 시대로서는 굉장히 드문 사건이며 쾌거였다고 할 수 있다. 불과 13~14세의 고향을 떠난 소년들은 이제 20대의 성인이 됐고, 부모들도 그들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사절단의 출발 후 8년이 지난 나가사키는 새로운 집들이 즐비한 커다란 마을이 되었다. 마중하러 나온 사람은 미겔의 어머니, 마르티노의 부모님과 형제, 줄리안의 누나였다. 만쇼의 어머니만이 며칠 늦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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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나카우라 줄리안[편집]
▲ 나카우라 줄리안 동상[47] |
소년 사절단 4명 중 가장 두드러진 선교활동을 펼친 것은 나카우라 줄리안이다.
줄리안이 만쇼나 마르티노와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을 때는 40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교토나 하카타에서 포교 활동을 계속했고, 마르티노가 마카오에 추방된 후에도 일본 국내에 잠복한다. 1613년, 구로다 나가마사가 기독교 탄압을 시작하자 나가사키로 옮겨갔고, 그 후부터는 박해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구치노츠를 거점으로 야나가와, 구루메, 아마키, 아키즈키, 오구라와 규슈 각지를 포교로 돌고 있었다. 잡혀있는 신자를 풀어주기 위해 관리들의 눈을 피해 잠입한 적도 있었다. 1627년 구치노츠에서 나와 고쿠라로 옮긴 줄리안은 다이묘가 되어 있던 호소카와 다다토시 밑에서 포교를 계속했지만, 1632년 이해자였던 다다토시가 구마모토에 부임하자 결국 체포되어 포박당하고 말았다. 20여 년에 이르는 잠복 생활의 종언이었다.
오구라에서 나가사키 쿠루스초(사쿠라초)의 감옥으로 옮겨진 줄리안의 체력은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약해졌다. 감옥에 갇힌 10개월 동안 봉행은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 고문을 가했지만, 줄리안의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1633년 10월 18일, 줄리안은 예수회 사제 페레이라 등과 함께 등 뒤에 묶여 쿠루스쵸의 감옥에서 오가와마치를 향해 언덕을 내려갔다. 시냇물을 가로질러 지쿠고쵸의 혼렌지 앞을 지나 처형의 땅, 니시자카의 언덕으로 향했다. 형장에 들어서면서 "내가 로마로 갔던 나카우라 줄리안 신부이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처형은 구멍에 거꾸로 매달린 형이었다. 온몸을 꽁꽁 묶어 3m 정도 깊이의 구멍에 거꾸로 매달아 금방 죽지 않고 고통스럽게 죽는 형벌이었다.[사진] 사흘 후, 줄리안은 향년 65세로 순교한다.
유언은 "이 큰 고통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였다. 당시 8명이 같은 형에 처해졌지만 고문을 견디지 못해 배교한 사제 크리스토방 페레이라도 있었다.[49] 줄리안의 시신은 불에 탔고, 그 재는 나가사키항에 뿌려졌다. 4명의 사절단 중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줄리안은 2008년 11월 14일 시복식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복자로 시복됐다. 나가사키에서 187명의 순교자와 함께 시복되었다. 소년 사절단 중 유일한 복자품에 오른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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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치지와 미겔[편집]
▲ 치지와 미겔 동상[50] |
4명의 사절단 중에서 가장 대척점에 후반생을 보낸 것이 치지와 미겔이었다. 미겔은 예수회를 퇴회하고 배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 돌아와 아마쿠사의 코레지요에서 공부하고 있던 미겔은, 몸이 약했던 탓인지 공부에 뒤쳐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601년, 마카오 유학 시험에서 불합격한 것을 계기로 예수회를 퇴회(환속)한다. 이름도 치지와 세이자에몬(千々石清左衛門)으로 고쳐 사촌인 오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를 섬기게 된다. 그리고 다시 5년 후, 요시아키가 불교(니치렌종)으로 전향하자, 미겔 역시 그에 따라 기독교(가톨릭) 신앙을 버렸다. 예수회 퇴회 경위와 미겔의 행적에 대해서는 증언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코레지오에서 미겔의 교사였던 마레혼 신부는 호의적으로 "병으로 손발이 거의 마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수회에서 퇴회하고 결혼해, 사촌인 오오무라를 섬겼다"고 말하고, 그 후의 미겔에 대해 "이교에도 돌아가지 않고, 기독교를 박해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기독교 또는 유럽 체험을 호의를 가지고 말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한편 미겔의 교사였던 루세나 신부는 미겔을 엄격하게 비판하며 "그는 퇴회를 요구했고, 또 거기에 어울리기 때문에 제명되었지만, 오오무라와 그 가신이 배교했을 때 그 또한 신앙을 버려 이교도, 아니 대단한 이단자나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오오무라 요시아키를 섬기고, 이키 지카라에게 600석의 영을 부여받은 미겔이었지만, 이윽고 요시아키와의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해, 요시아키의 목숨을 노리게 된다. 미겔은 사촌인 하루노부를 의지해 아리마로 도망치지만, 이번에는 하루노부의 부하에게 칼을 맞고 아리마에도 살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결국 그의 사촌에게도 추방되며, 소문에 의하면 전과 마찬가지로 이교도로서 나가사키에 살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의 말년에는 수수께끼가 너무 많아 자세한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략 줄리안이 순교한 해인 1633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3년 12월 14일 이사하야시 다라미쵸 이키치카라에서 치지와 미겔의 무덤으로 보이는 비석이 발견되었다. 2014년 9월 발굴조사에서는 이 무덤이 2.7m 사방의 기단을 가진 영주급 인물의 무덤이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었다. 2017년에는 그의 관으로 추정되는 것이 발견됐다. 또한 미겔의 아내로 보이는 여성의 치아나 뼈, 유리편이나 묵주의 부품들이 출토됐다. 그래서 “미겔이 말년에 회개하고 다시 기독교인이 된 것이 아니냐”고 추정하고 있다.
2021년 조사에서는 인접하는 곳으로부터 미겔로 보이는 유골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이 무덤에서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발굴된 두 무덤이 일체적으로 계획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과 서로의 신앙을 존중한다는 점 등을 짐작할 수 있다. 발굴 책임자인 벳푸대학 타나카 유스케 교수는 "17세기 전반의 묘지로서도, 부부의 묘소로서의 매장의 본연의 자세가 매우 드물다. 그것이 미겔 부부와 매우 강하게 추정된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치지와 미겔의 후손으로 발굴조사 프로젝트 팀 대표 아사다 마사히코는 "감격의 한마디입니다. 덴쇼 소년 사절, 치지와 미겔에 관련하는 유적은 일본에는 전무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이 묘소가 가능성이 있는 곳이고, 이 무덤을 밝히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셈입니다. 향후, 뼈는 전문가가 조사해 그 후 이사하야시에 기탁할 방침입니다."라고 말했다.#
2022년 4월 23일 민간 단체는 23일 무덤 현장 가까이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해 실시한 4차 발굴조사 결과 “치지와 미겔 부부의 무덤으로 확정했다”고 밝혔다. 제4차 조사에서는 인골의 일부가 출토되어, 감정에서 남성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조사를 지도한 타니가와 아키오 전일본 고고학 협회 회장은, 묘석에 새겨진 연대와 출토 유물의 연대가 일치하는 것 등을 근거로 해 "미겔 부부의 무덤이 틀림없다"고 하고 있다.# 조사에서는, 1호묘로부터 묵주가 발견된 것이나, 미겔의 매장 방법이 불교식이 아니라는 견해가 강해진 것으로부터, 미겔이 배교했다는 통설에 대한 이론도 나와 있었다. 현시점에서 통설을 뒤집는데는 이르지 않았지만, 조사단은 "거기에 대해서는 향후, 출토품이나 문헌, 자료의 연구를 진행시키게 된다. 이번에는 미겔의 무덤을 확정할 수 있었던 데 조사의 의의가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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