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전쟁에서 (이론이 아닌) 실전의 중요성: 마이크 타이슨, 외국어/시험 준비방법, 조괄의 사례, 1961년 중인전쟁과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사례
"그리고 합의 보지마세요! 절대! 네버!!! 경찰서에선 그냥 합의보고 좋게 끝내라고들 말하지만 절대 노우! 한번의 실수로 젊은 인생 어쩌구하면 "야이 씨팔새끼야 인생에 연습이 어디있어??? 인생이란건 실전이야 좆만아" 라고 그넘 귓가에다가 속삭여주세요!! 욕적은건 죄송하지만 이렇게 말하면 뭔가 있어보임."
- 2009년 10월 오늘의유머에서 한 유저가 썼던 댓글에서 유래된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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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 마이크 타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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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를 학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먼저 모국어로 문장을 쓴 다음 그것을 외국어로 말하고 쓰게 해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실전 테스트를 하면 고통스럽긴 하지만 빠른 시간 안에 실력이 비약적으로 는다.
시험 준비를 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배운 내용을 반드시 스스로에게 질의응답하듯 질문을 해서 테스트를 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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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괄의 사례
이 자에게서 유래한 성어가 지상담병(紙上談兵), 즉 "종이 위에서 병법을 논한다" 이다. 종종 조괄병법이라고 표현할 때도 있다.
조사와 조괄이 병법을 논할 때도 조괄은 막힘없이 대답하였으나 조사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을 하였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조괄이 조사보다 똑똑한 것으로 보이나, 실상은 조사는 모든 변수와 대응방법까지 생각하고 답을 말했고 조괄은 자신이 외운 대로만 답을 내놓은 거라 쉽게 대답한 것이었다. 즉 이론만 강하고 현실에서는 전혀 쓸모없다는 뜻이다.
<사기>에 인상여 曰, 조괄은 합변(合變)이 없다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그 악명은 이어져 임진왜란 때 안중홍(원균의 사돈 집안 사람)이 원균을 평할 때 '조괄과 기겁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평을 내릴 정도로 졸장의 대표주자로 악명 높았다. 조선 말기 순조 재위 초기에 유배된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중에서 아들들이 책을 읽지 않은 것을 책망하면서 조괄이 천하의 불효자식이라고 하지만, 아버지의 글을 잘 읽었기 때문에 어진 아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라면서 독서에 관심이 없는 아들들을 조괄만도 못하다며 디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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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vs 소련 갈등은 이미 버트런트 러셀 시기부터 시작된 것?
19세기말 마침내 베어링 가문이 파산합니다. 1895년까지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베어링 가문 충직한 신하였던 일본 정부도 로스차일드 가문으로 말을 바꿔탑니다. 이때, 부상한 세력이 좌우익파쇼 흑룡회입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당대 미치광이 일본 정권과 흑룡회를 통해 홍콩을 흔들기를 원하였지만, 영국 프리메이슨 세력의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하고 맙니다. 파리 로스차일드가 일으킨, 일차 세계대전을 반대하여 반전운동으로 감옥에 갔다 풀려난, 300인위원회 회원이자 페이비언협회 회원이고 케임브리지 사도회 멤버였고, 영국 런던정경대학의 마스터이자 채텀하우스 수장이 되고, 마침내 국유본 황제가 되는, 베드포드 공작가문 방계인 러셀 세습백작인, 버트런트 러셀은, 영국대표단으로 파리 로스차일드가 만든 괴물 정권 두목, 좌익파쇼 인간도살자 레닌, 트로츠키를 만나 경멸을 표한 뒤, 중앙아시아를 통해 중국으로 갑니다. 분노한 좌익파쇼 인간백정 트로츠키가 1920년대 파리 로스차일드 가문 지시를 받아 영국 총파업을 일으켰다가 실패합니다. 버트런트 러셀은 중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에 맞서 영국 국유본 귀족 영향력을 키울 목적으로 중국 찬양 발언을 하였습니다. 실제로 버트런트 러셀은 중꽁에서 충직한 가신 주은래를 통해 그때그때마다 중꽁 방향성을 지시한 바 있습니다. 좌익파쇼 인간도살자 모택동을 세우고, 국공내전에서 중꽁이 승리하게 만들고, 오늘날 중꽁을 만든 8할 이상이 버트런트 러셀입니다. 버트런트 러셀이 중국에서 병을 얻어 요양을 하였는데, 일본에서는 그가 죽었다고 할 만큼 예민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1920년대 영일동맹이 깨진 이유 중 하나입니다. 후일 태평양전쟁 한창일 때, 당대 파쇼 일본 정권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HSBC를 작살내며 뒤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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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중인전쟁
철저히 전쟁 준비를 거친 중국군의 장비와 훈련 수준은 인도군을 훨씬 상회하는 것이었다. 존 키건의 <세계전쟁사>에는 "중국군이 티벳 지방에서 1년 이상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마친 상태였던 반면에 인도군은 고산지대 적응훈련을 받지도 않은 부대를 투입했다."고 나온다. 여기에 인도군의 주력소총은 수동식 볼트액션 방식의 리-엔필드인데 반해 중국군은 1956년부터 라이선스 생산을 하기 시작한 AK-47의 중국버전 56식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군 지휘관들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6.25 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이 많았고, 특히 6.25 전쟁 때는 초강대국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위에 두고도 산악지대에서 수없는 기동전을 치뤄본 적이 있었다.
병력은 물론 전술, 지형적으로도 우위를 점했던 중국은 은밀하고도 철저한 기습에 성공하여 파죽지세로 인도 영내를 향해 밀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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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7일만에 중국군은 파죽지세로 160㎞를 진군했고, 인도 동북부 아삼 지방의 브라마푸트라 평원까지 진출한다.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중국은 공세종말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은 전략적 요충지인 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압박을 가했고, 다른 제3세계 국가들도 양국의 충돌 격화를 말리고 있었다. 자칫하면 양국과 이해관계로 얽힌 제3세계 국가들끼리도 대립이 일어나 3차 세계대전이 날 판이었다.
중국 정부 역시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하여,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정치적 판단 하에 인도에 휴전을 제의했다. 하지만 인도 정부는 그 제의를 거부했고, 그에 따라 중국군은 11월 18일 대대적인 공세를 재개하여 인도 정부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중국군은 뉴델리의 20㎞ 근방까지 진주해 있었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전쟁 막바지까지 여전히 전투는 변두리에서 진행 중이었다. 인도 영내 깊숙히 밀린 건 사실이지만, 인도도 중국 못지 않은 거대한 영토를 지닌 국가다. 국경에서 좀 밀렸다고 수도 함락 위기까지는 아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인도의 네루 총리는 비동맹주의를 잠깐 잊고 비밀리에 미국에게 중국을 폭격해 줄 것을 요청한다. 상당히 친소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던 인도가 말이다! 미국은 위와 같은 이유로 태평양에 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 전단을 인도양으로 급파한다.
이는 소련 지도부에도 곧바로 전달되지만, 놀랍게도 소련은 인도를 이해해 주었다. 게다가 소련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벌이기 전까지 인도에게 군사적 원조를 지속할 정도였다. 소련에게 있어서도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테고, 스탈린도 그러하였고 그 후계자도 중국을 소련의 우방으로 생각하지 않고 잠재적 적국이라 믿었다. 마오쩌둥도 역시 중국이 소련의 위성국으로 취급되는 걸 원치 않았고 저우언라이를 필두로 미소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않은 신생 독립국들의 리더로서 국제정치 에서 한 축을 담당하려 했다. 그리고 흐루쇼프가 표방하던 수정주의를 중국에선 대놓고 반동이라 욕했고 소련도 거기에 모든 지원을 끊는걸로 답했다. 이런 살얼음 판 같은 상황에서 두 공산권의 거두인 소련 중국의 관계는 결국 완전히 깨지고 중국은 원래 최대의 적과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중국은 전쟁에서는 이겼음에도 오히려 대외적으로 불안해지는 상황을 우려했는지, 일방적으로 휴전을 선언하고 군대를 모두 철수한다. 심지어 붙잡은 인도군 포로를 조건없이 모두 석방하고, 무기와 차량, 탄약 등의 모든 압류한 장비들을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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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데이비드 록펠러는 1961년 중인전쟁 당시 중국이 소련에 의해 고립되어, 인도와 미국 양국을 상대로 대치하게 되는 상황에 쳐할까 두려워, 서둘러 전쟁을 끝냈던 과거의 역사를 기억했을 것이다.
이 중국과 소련의 오랫동안 밋밋했던 관계를 록펠러는 역이용했다.
급기야 1979년에는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해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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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의 중국-베트남 전쟁
1979년에 있었던 중국-베트남 전쟁은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유사한 성격을 보여주는데, 문화대혁명과 베트남 전쟁 이후 혼란한 상태에 있던 중국-베트남간 국경선을 정리하기 위해 중국군이 먼저 도발해 일어났다. 하지만 초기 중국군의 호언장담과 달리 베트남의 저항은 실로 완강했고, 급기야 중국군은 먼저 공격해 놓고 깨져서 철수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야말로 중국-인도 국경분쟁과 비교될만한 점이며, 전쟁 결과 중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남을 도와주고도 뒤에 가서는 욕을 먹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반면 당시 중공군은 열악한 물적 상황에서도 창의력과 오랜 실전에서 다져진 경보병 발로 하는 기동전으로 UN군을 깜짝 놀라게 한 하드웨어는 부실했어도 소프트웨어는 상당히 숙련되었던 30년 전 6.25 전쟁 시절의 중공군이 아니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어도 당장 구식 전술과 구식 장비들로 인해 승리를 할 수 있을까 말까인데 무엇보다 이 시기 중국은 여전히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군부 숙청과 군대를 포함한 사회 전반의 전문성 마비의 여파가 생생하했다. 애초에 강대국의 정규군과 최근에 총력전까지 치른 상태였던 (중국에 비하면)소국의 2-3선급 민병대 간의 결과가 뻔한 싸움으로 보였던 전쟁이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이러한 내부의 조직적 차이가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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