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가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좌익 이력을 증언한 미국 CIA 요원 래리 베이커 (feat. 문명자)

 
제 2장 - 박정희가 추방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증언'
- " 박정희와 황태성 3번 만났다 " -

황태성 사건 추적하다 추방된 CIA 요원 래리 베이커

5.16 직후 박정희는 미국 내에 남아있는 자신의 좌익 경력 근거를 없애려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5.16 직후 박정희가 보낸 한 특별팀이 워싱턴에 왔다. 거기에는 한국에서 미국통으로 알려진 사람들이 대거 포함돼 있었다. 이 팀의 임무는 미국 국회 도서관 등지에 소장돼 있는 박정희의 과거 좌익 경력수록 자료들을 없애 버리는 것. 그러나 신문자료 같은 것은 빌린 다음 안돌려 주면 된다지만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돼 있는 자료들은 어찌할 것인가. 이 팀은 도서관의 모든 신문 자료들이 마이크로필름으로 소장돼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미국에 왔다가 결국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63년 8월 30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다시는 이 땅에 나와 같은 불행한 군인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었다. 다음날 그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로써 5대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 되었다.
그런데 9월 23일 민정당의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의 사상문제를 언급했다. "여순반란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다. 박정희 씨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라는 것이었다. 이 '박정희 사상 논쟁"은 이른바 '황태성 사건'이 폭로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 박상희(대구 10.1 폭동 때 피살됨)의 절친한 친구로서 대구 10.1 폭동 때 경북도인민위원회 선전 부장을 지냈다. 그는 이후 월북해 북한에서 무역성 부상(차관)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다가 5.16이 발발하자 박정희와의 비밀 회담을 위해 61년 9월 남파되었다. 그런데 박정희는 황태성을 체포한 후 간첩죄로 재판을 진행 하면서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챈 미국 정보 당국이 황의 인도를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박정희는 사건 발생 후 거의 2년이 돼 가는 63년 9월까지도 그것을 계속 거부해 그의 사상에 대한 의구심을 더욱 증폭 시켰다. 시중에는 62년 여름부터 비밀리에 진행된 공화당 사전조직 작업에 황태성이 깊숙이 관여했다는 얘기까지 떠돌았다.

63년 9월25일 야당측은 이 사건을 폭로 했다. 중앙정보부는 이틀 뒤에 어쩔 수 없이 황태성 간첩사건의 전모를 발표하고 그의 공화당 창당 관여 설을 전면 부인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황태성 사건에 접하게 된다. 그런데 그보다 앞선 63년 8월 강문봉 장군이 내게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해주었다.

"미국 정보기관 G2의 비밀 정보원 출신이며 CIA 요원으로 한국에 주재하면서 '황태성 사건'을 제일 먼저 알아챘던 래리 베이커라는 사람이 박정희에 의해 추방돼 지금 자기 고향인 네브라스카에 돌아와 있다고 합니다."

강 장군은 과거 육군 정보국장 시절의 자기 동료들을 통해 그 같은 정보를 입수한 모양이었다. 래리는 주한 미고문단 참모장으로 한국군 창설을 주도한 후 주한 유엔군 사령관 특별보좌관을 역임하는 등 '한국군의 대부'라 불리는 하우스먼 밑에 있던 사람인데 CIA 비노출 요원으로서 보험회사 세일즈맨으로 가장해 한국에서 일했다고 했다. 5.16 후 외교관 추방 1호가 주한 미 대사관의 그레고리 헨더슨 문정관이라면 민간인으로서는 래리가 추방 1호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황태성 사건에 달라붙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는 곧 래리 베이커에게 연락을 취했다. 황태성 사건의 전모를 취재하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를 만나러 오라고 했다. 네브라스카까지 가기가 너무 멀어 인터뷰를 서면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63년 8월 27일 질문서를 보냈다. 그로부터 두 주일 후인 9월 13일 나는 래리 베이커로부터 10여 페이지에 달하는 상세한 답변서를 받았다.

그는 답변서에서 황태성 사건의 진상은 물론 박정희와 그 주변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에 대해서도 자세히 언급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놀라운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서재에서 36년 전 래리 베이커가 보내온 답변서를 찾아내 다시 읽어 보았다. 래리 베이커의 미국적 시각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황태성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여전히 귀중한 자료로 생각되었다.

[ 차례로가기 ]

나의 질문서와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내용을 간추려 소개한다.

Q) 질문서

1. 5.16 세력들이 공산권 제도를 모방해서 정부기구를 개조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불안해하고 있다. 이 같은 행태에 대해 논평해 달라.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을 가졌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은 그들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

3. 한국 중앙정보부는 대공 정보활동보다는 국내 정치사찰 부문에서 더 활발히 움직이고 있다. 중정이 어디에서 어떻게 운영자금을 조달하는지 밝혀 줄 수 있는가.

4. 귀하는 군사 정권하에서 체포된 다음 사실상 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해 달라.

5. 귀하는 미국 정보기관에서 일한 경력이 잇는가. 또 앞으로 사정이 허락한다면 한국에 돌아갈 계획이 있는가.


A) 래리 베이커의 답변서

문명자 기자에게.

오레곤 주 변두리에 있는 나의 목장을 한 친구가 사겠다고 해서 그 목장의 장비 목록을 정리하고 소 마리 수를 헤아리느라 두 주일을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는 우편을 포함해서 외부 접촉을 하기가 어려워 63년 8월 27일 귀하의 서신에 대한 회답이 이렇게 늦었습니다.

먼저 귀하의 질문에 대해 귀하가 원하는 만큼 구체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 이유는 나는 법치주의가 확립된 미국에 돌아와 있어 안전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모두 폭로하면 정부가 법을 제멋대로 좌지우지 하는 한국에 남아있는 나의 한국 친구들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내가 우려하는 점을 이해하리라고 믿습니다.

반도호텔 602호실에서 박정희-황태성 회동

1. 공산권 제도를 모방에서 정부기구를 개조한 박 정권의 행태에 대한 논평 및 2. 박정희와 그의 동료 일부가 공산주의 경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그들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는 것. 또 그들이 현재도 공산주의자이며 공산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볼 근거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대한민국을 통제하는 현 정권의 구조는 전부 공산주의 행정구조에 따라 조직되었음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주도한 행정기구의 개편 결과 61년 5월 이후 한국의 각 부처와 군에는 지휘계통과 관계없이 군사위원장(박정희)에게 직접 보고할 자격을 가진 자가 한두 명씩 끼어 있습니다. 공산권 통제 기구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중 명령계통은 사실상 정치위원 제도임을 명백히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중 계통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예로서 국립경찰 경감과 총경 자리에 위관급 장교들을 대거 부임 시켰다는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평소에는 각자 맡은 임무를 수행하지만 상관이 군사위원장에게 불리한 사항을 보고하지 않을 때에는 그 사실을 군사 위원장이나 그의 측근자에게 직접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근무하는 이상태 중령이 또 다른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63년 3월에서 4월까지 본인이 중앙정보부 조사부에 체포, 구속되어 있는 동안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해임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그의 후임인 김재춘 부장은 중앙정보부 숙청이란 명목으로 인사 개혁을 했습니다. 이 중령은 그 때 김재춘 부장이 데리고 온 다섯 명의 상급자 밑에 있었지만 사실상 조사부의 실권자였습니다. 그는 하루 24시간 언제라도 박정희 의장과 직접 연락할 수 있었으며 그 때 일어난 중앙정보부의 대전환 속에서도 그런 위치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두 번째 질문과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 논평하고 싶습니다. 5.16 이후 군사혁명위원회(이하 군사위원회)가 처음으로 결성 됐을 때 그것은 외부에서 보기에는 단일한 조직 같았으나 실제로는 여러 그룹을 대표한 것이었고, 중요한 결정을 할 때는 토론 절차를 거쳤습니다.

그런데 이 군사위원회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비밀계획에 따라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금년(63년) 2월, 박은 김윤근 소장과 동료들을 군사위원회에서 몰아냈습니다. 게다가 김종필이 갑자기 국외로 나가게 됨에 따라 군사위원회는 실질적으로 박정희의 노골적인 1인 독재를 위장하는 도구가 돼 버렸습니다.

미국 대사 사무엘 D 버거는 '군사정부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김종필이 군사위원회 내의 반대파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지지하는 수많은 조처를 취했는데 이는 대단히 위험한 짓이었습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가 대규모의 증권파동을 대담하게 일으키고 박정희가 행한 화폐개혁의 진정한 의도가 밝혀지자 버거 대사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화폐 개혁은 사회주의로 가는 장기계획의 첫 조처임이 명백했습니다. 침략적인 공산국과 인접하고 있는 한국에서 그런 조처는 한국을 급속히 공산화 시키는 수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하튼 박정희와 김종필이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군사위원회로부터 축출하는데 필요한 모든 지원을 미국 대사가 다 해주었기 때문에 그런 경향에 반대했을 때는 이미 시기가 늦었던 것입니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득세한 후 한국에는 수많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한국 국민은 박정희와 밀접한 관계를 다시 맺으려고 2년 전에 북한에서 장관급 공산주의자가 남하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면 크게 당황했을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파업 담당자, 연락원, 정치 선동가 등등 여러 가지 임무를 띤 북한 첩자가 한국에 침투했다는 데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그 같은 이북 첩자들은 대부분 이남에 사는 친척이나 친지와 먼저 접촉합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한국 국민들은 대부분 고민하다가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그들을 고발합니다.

내가 알기로는 정전 이후 북한이 각료급 공산주의자를 남파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61년 9월 얼마 전까지 이북에서 차관으로 일했고 박정희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사람이 서울에 나타났는데 그가 바로 황태성입니다.
그가 온 다음 두 달 동안 박정희와 황태성은 반도호텔에서 적어도 세 번 만났습니다. 602호실은 한국 중앙정보부가 그 방 바로 건너편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24시간 감시하는 장소였습니다. 본인은 이 세 번 모임에서 그들이 무엇을 논의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박정희는 다른 '애국적인 한국사람들'의 경우와는 달리 황을 투옥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후 61년 10월 경찰에서 황을 체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그 사실을 발표하기도 전에 중앙정보부가 황을 가로채 가지고 비밀리에 군사재판에 회부했습니다. 황에게 사형이 언도 되었으나 집행되지는 않았습니다.
62년 5월 이남의 공산주의 죄수들은 모두 대구 형무소로 집결되었는데 이 중 황태성만은 62년 7월 말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현재 황은 서대문 형무소 귀빈 감방에 갇혀 있습니다. 이상으로 귀하의 처음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대답했다고 봅니다.

...


나는 래리 베이커의 증언을 즉시 기사화해서 [조선일보]로 타전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특종성 기사가 보도되지 않았다. 실망이 컸지만 그 무렵 내가 보낸 기사 중 상당수가 휴지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를 코앞에 둔 군사정권의 압력 때문에 그렇게 됐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문봉 장군이 다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었다. 그는 자유당 때 육군 정보국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그 분야에 매우 밝았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여순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으로 체포돼 재판을 받았는데 그 사건 재판장 최석 장군이 지금 미 국방성 장학생으로 미시간에 와 있다는 것이다. 정일권과 백선엽, 이용문 장군 등이 박정희를 구출 하느라 힘썼는데 결국 박정희는 3천여 명에 달하는 군내 남로당 명단을 군 수사기관에 넘겨주고 자신은 구제받아 문관으로 군에 복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곧바로 나는 최석 장군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강문봉 장군의 말대로 "박정희는 남로당 군책으로 있었다"라고 확인해 주었다.

나는 곧 국회도서관에 가서 당시의 신문들과 미군 정보자료 등을 찾아냈다. 자료 내용은 강문봉의 증언과 일치하고 있었다. 수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나는 박정희의 좌익 전력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 본사에 보냈다. 필자는 그 기사의 첫 줄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 사건 당시 남로당 군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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