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만에 공개된 오우치 가문의 족보, 그들은 누구인가? 이 족보는 일본을 지배했던 오우치 가문이 백제 성황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증명하며, 우리 역사에서 지워진 백제의 또 다른 역사를 보여줍니다. / 시마즈 가문은 좆무위키의 서술과 다르게 한국계 도래인인지 명확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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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년 만에 공개된
1. 1400년 만에 밝혀진 오우치 가문의 비밀: 백제 왕족의 후예
1400년 전 백제를 떠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들이 일본을 지배했던 오우치 가문이며, 그들이 백제의 또 다른 역사를 되살리고 있다.
1.1. 일본을 지배한 오우치 가문의 등장과 백제 후손 주장
서기 597년, 백제를 떠나야 했던 비운의 왕자 임성태자와 그의 지워진 역사
1400년 만에 세간의 화제가 된
임성태자 : 일본 오우치 부부가 자신들을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의 후손이라고 밝힘오우치 부부는 조상의 땅을 1400년 만에 다시 찾았다고 주장하며, 한국 방문 시 백제 왕의 복식을 하고 성왕의 능에 참배하는 등 깊은 감회를 표현했다
오우치 부부는 재산의 일부를 익산시와 부여군에 기부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오우치 부부의 한국 방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1400년의 세월을 거슬러 조상과 마주하는 긴 여정이었다
오우치 가문은 이번 방문이 처음이 아니며, 조선 왕조 실록에도 150년간 63차례나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남아있다
1399년 정종 1년, 오우치 가문 사신은 자신들을 "백제의 후손"이라 밝히며 세계와 성씨를 기록해달라고 요청했다
1.2. 일본 열도를 호령했던 오우치 가문의 위상과 국제 무역
오우치 가문은 한때 교토와 쌍벽을 이루던 도시 야마구치를 건설하고 발전시킨 주역이었다
야마구치는 철저한 계획도시로, 수도 교토를 모델로 관공서, 상가, 주거지가 기능별로 구획되었으며 규모 또한 교토에 필적했다
14세기 중반부터 200년간 일본을 호령했던 오우치 가문의 관저는 영토 집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으며, 화려한 정원에서는 중세 일본 최대 연회가 열렸던 증거가 발견되었다
오우치 가문은 당시 일본 최고의 귀족, 학자, 예술가들이 모여들던 중세 일본 최대 도시의 중심이었다
오우치 가문의 관저는 당시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 관저를 압도할 만큼 거대했으며, 서일본 최대급의 지위를 누렸다오우치 가문은 서부 7개국을 병합한 최강의 군대로, 때로는 쇼군을 쫓아내고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오우치 가문은 야마구치를 중심으로 방대한 세력권을 형성했으며, 국제 무역을 통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야마구치 고류사에서 출토된 8만 9천 개의 조선과 명나라 동전은 오우치 가문의 국제 무역 활동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다오우치 관저에서 출토된 다량의 조선 및 중국 도자기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14세기 일본의 주요 무역항인 하카타와 사카이를 영토 안에 포함시켰으며, 중계 무역 거점인 상중하관 역시 야마구치현 안에 있어 국제 무역을 염두에 둔 영토였다
1.3. 오우치 가문의 백제 문화 흔적과 임성태자의 존재
야마구치현에 있는 백제부 신사는 이름뿐 아니라 구조 또한 특이하며, 신사의 정문이 바다를 향해 열려 있다
오우치 가문은 밀무역과 약탈로 조선을 괴롭히던 외구를 여러 차례 소탕했으며, 조선은 그 대가로 독점적 무역 권리를 부여했다
조선은 충신부라는 일종의 무역 허가증을 발급했으며, 이는 반으로 쪼개진 좌우를 보관하다 무역 시 확인하는 표찰로 사용되었다
오우치 가문이 일본 내 교류 거점으로 활용하던 조후 사회에서 2004년, 조선 군궐 지붕에 올려지는
잡상 조각과 전형적인 한반도 기법으로 제작된 기화가 대거 출토되었다오우치 가문은 야마구치 중심부에 완벽한 조선식 궁궐을 짓고 일본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했다
야마구치 지역은 오우치 가문의 끊임없는 한반도에 대한 그리움을 보여주며, 그들은 백제의 고성이었다
신숙주의
해동 제국기 지도에는 야마구치 지역에 오우치라는 이름까지 표기되어 있으며, 오우치 가문의 군사력이 일본 최강이고 백제 후손으로 한국과 가장 친하다고 기록되어 있다오우치 가문은 당시 일본 내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였으며, 조선풍 집을 짓고 외구를 토벌하며 백제계임을 주장했다
도쿄의 한 사찰에서는 매년 열리는 축제에서 한국의 부채춤이 공연되고 있으며, 이곳은 임성태자를 모시는 불교 종파에 속한다
사찰 벽면에는 임성태자가 그려져 있으며, 그는 일본에서 불교를 전해준 백제 왕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오우치 부부의 집안 족보는 수백 년의 흔적이 배어 있으며, 임성태자가 가문의 시조로 또렷이 쓰여 있다
족보는 임성태자와 그 후손들의 행적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야마구치현
구다마스 시의 옛 이름은 구다라스, 즉 백제진이었으며, 이곳 사찰에는 임성태자와 관련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1300년 전 세워진 주토사는 창건 당시 큰 산 전체가 사찰이었을 만큼 대규모였으며, 내부에는
임성태자 관련 기록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구다마스시의 상징탑은 큰 별이 소나무에 떨어져 7일 밤낮으로 빛났다는 전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호우시 향토지에는 임성태자의 일본 도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있으며, 그가 상륙한 곳은 오우치 가문의 본래 성인 '
타라 '와 일치하는 타라 해안이다임성태자는 아직 철을 만들지 못하던 야마구치 지역에 제철 기술을 전파했으며, 야마구치 지역은 고대 최고의 제철 단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호우시 지방 관청 유적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쌀을 바친 사람의 성이 '파타라'로 기록되어 있어, 임성태자와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임성태자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코류사에는 임성태자가 직접 사용했다는 관모, 피리, 칼이 보물로 전해진다
특히 칼은 양날의 일본도와 다르며, 손잡이에는 오우치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최소 7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임성태자는 1400년 전 일본에 불교와 제철 기술을 전파한 오우치 가문의 시조였다
1.4. 오우치 가문의 쇠락과 역사 기록의 단절
오우치 가문은 16세기 중반 쇠락하기 시작했으며, 한일 관계가 불편해지자 집안 어른들이 관련 유물과 기록을 불태웠다
다행히 족보는 집안 며느리가 숨겨두어 소실을 면할 수 있었다
임성태자가 한국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이유는, 조선 조정이 오우치 가문의 요청에도 제대로 된 답변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임성태자가 우리 역사에서 지워져야 했음을 암시한다
일본 역사서에는 임성태자를
백제 26대 임금 성황의 셋째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나, 삼국사기에는 다른 왕자나 공주에 대한 언급이 없다삼국사기 등은 왕 중심의 기록만 남겨, 왕이 되지 못했거나 다른 역할이 없었던 왕자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임성태자가 백제를 떠난 597년은 백제 왕실 역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며, 왕권 다툼으로 인한 심각한 혼돈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임성태자가 일본으로 거취를 결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임성태자의 어머니인 왕비 역시 아들을 그리워하여 신하들을 이끌고 일본으로 건너와 정착했다는 전승이 있다
1400년 전 사랑했던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백제 왕자 임성태자는 후손들에 의해 일본에서 여전히 생생하게 존재하고 있다
임성태자는 백제 왕실 권력 투쟁에서 패배해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후손들은 그의 존재를 기억하며 역사의 중심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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