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시대의 향거리선제와 위진남북조 시대의 구품관인법을 뛰어넘어 수문제가 세계 최초로 과거제를 실시한 이유: 지방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관직을 다 해 먹으니 황제의 명령이 영이 서질 않아서 - 즉, 귀족세력의 약화를 위해 / 군주제, 왕정제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역사적 아이러니 / 역사는 서로 대립되는 세력간 (국가/기업/파벌/개인간) 대립에 의해 발전
세계 최초로 과거제를 시행한 나라는? 중국과한국에서는 어느 나라가 최초?
- 쿼리 성공
세계 최초로 관리 선발 시험인 과거제(科擧制)를 시행한 나라는 중국입니다.
과거제의 도입과 한국에서의 시행 시점을 정리해 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세계 최초 (중국)
국가: 수(隋)나라
시기: 서기 587년(문제 때)
배경: 당시 막강했던 세습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며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이후 당나라 때 체계화되었고 송나라 때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2. 한국 최초
국가: 고려(高麗)
시기: 서기 958년(광종 9년)
배경: 중국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관료 쌍기(雙冀)의 건의로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의의: 고려 이전인 신라 시대에도 '독서삼품과(788년)'라는 시험 제도가 있었으나, 이는 국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성적 등급제에 가까웠습니다. 본격적으로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제'의 형태는 고려 광종 때가 최초입니다.
요약
세계(중국) 최초: 수나라 (587년)
한국 최초: 고려시대 (958년)
과거제는 서양에도 영향을 주어 영국의 공무원 선발 시험 모델이 되는 등 세계 역사에서 매우 선진적인 관료 등용 시스템으로 평가받습니다.
수나라 이전, 이를테면 한나라 때도 복잡한 계급제도가 있었을텐데 그럼 과거로 안하면 어떻게 뽑았단거야?
- 쿼리 성공
수나라 이전, 즉 과거제가 도입되기 전에는 '추천제'가 관리 등용의 핵심이었습니다. 시대별로 한나라와 그 이후의 위진남북조 시대를 나누어 보면 당시 인재 선발의 모습이 아주 명확해집니다.
1. 한나라 시대: 향거리선제 (鄕擧里選制)
한나라 때는 지방관이나 유력자가 자기 관내에서 인품과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중앙에 '추천'하는 방식을 썼습니다.
선발 기준: '효(孝)'와 '렴(廉)'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을 뽑는다는 뜻에서 '효렴(孝廉)'이라는 과목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작동 방식: 지방의 군수들이 매년 정해진 인원을 추천합니다. 이렇게 추천받은 사람들은 황제 앞에서 간단한 면접이나 필기 시험(대책)을 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평판'이 합격을 좌우했습니다.
문제점: 시간이 흐를수록 지방의 힘 있는 호족(豪族)들이 자기들끼리 서로를 추천해 주는 '인맥 잔치'로 변질되었습니다. 결국 "실력은 없어도 아버지가 호족이면 관리"가 되는 세습 구조가 형성되었습니다.
2. 위진남북조 시대: 구품관인법 (구품중정제)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위나라)가 되면서 추천제를 조금 더 체계화한 것이 구품관인법입니다.
중정관(中正官)의 등장: 정부에서 각 지역에 '중정관'이라는 인사 담당관을 파견합니다. 이들이 지역 인재들을 조사해서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점수를 매깁니다.
가문의 권력화: 이론적으로는 재능과 덕망을 보겠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가문의 등급'이 곧 인재의 등급이 되었습니다.
결과: "상품(상위 등급)에는 가난한 집안 사람이 없고, 하품(하위 등급)에는 권세 있는 집안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벌 귀족 사회가 고착화되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느냐보다 "누구 집 자식이냐"가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3. 왜 과거제로 바뀌었나?
수나라를 세운 문제(양견) 입장에서는 이 꼴이 보기 싫었던 겁니다.
왕권 강화: 지방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관직을 다 해 먹으니 황제의 명령이 영이 서질 않았습니다.
귀족 세력 약화: "가문 배경 다 치우고, 나라에서 낸 시험 문제 맞히는 사람만 뽑겠다"라고 선언한 것이 바로 과거제의 시작입니다.
요약: 계급과 선발의 역사
| 시대 | 주요 제도 | 선발 방식 | 핵심 기준 |
|---|---|---|---|
| 한나라 | 향거리선제 | 지방관의 추천 | 효심, 청렴함 (효렴) |
| 위진남북조 | 구품관인법 | 인사관의 등급 심사 | 가문 배경 (귀족) |
| 수나라 이후 | 과거제 | 국가 고시 (시험) | 개인의 유교 지식 (능력) |
즉, 과거제 이전에는 '혈연'과 '인맥'이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과거제 이후부터는 비로소 '공부해서 개천에서 용 나는' 시스템이 (이론적으로나마) 가능해진 것입니다. 2026년 현재의 공무원 시험이나 수능의 아주 먼 조상님인 셈이죠.
1급부터 9등급까지 다 계급이 다른데어떻게 추천만으로 돌아갔다는거임? 8급이 9급을, 7급이 ㄱ8급을, 6급이 7급을 추천매기고 이런식으로 돌아갔다는거임?
위진남북조 시대의 구품관인법(구품중정제)이 돌아갔던 방식은 등급이 낮은 사람이 바로 위 단계를 추천하는 계단식 구조가 아니라, 중앙에서 파견된 '인사 평가관(중정관)'이 지역구 전체를 훑으며 점수를 매기는 '중앙 집중식 평가 시스템'에 가까웠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현대적인 비유를 섞어 설명해 드릴게요.
1. 누가 평가했나? (중정관의 역할)
당시 정부는 각 주(州)와 군(郡)마다 '중정관(中正官)'이라는 직책을 임명해 보냈습니다. 이들은 일종의 '중앙정부 파견 인사팀장'입니다.
이 중정관은 대개 그 지역 출신이면서 중앙에서 높은 관직을 지낸 인물이 맡았습니다. 지역 사정을 잘 알면서도 중앙의 눈높이를 가진 사람을 보낸 것이죠.
2. 어떻게 등급을 매겼나? (향품과 관등)
중정관은 지역 인재들을 조사해서 1등급부터 9등급까지 점수를 매기는데, 이를 '향품(鄕品)'이라고 부릅니다.
평가 방식: 중정관은 해당 인물의 가문 배경(가세)과 개인의 평판(상상)을 종합해서 등급을 결정합니다.
임용 방식: 만약 어떤 청년이 중정관에게 '2품'이라는 향품을 받으면, 이 사람은 중앙 관직에 나갈 때 그보다 4단계 낮은 '6품' 직위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를 '향품 2품, 기가 6품'이라 합니다.)
승진: 일단 관직에 들어가면 실무 능력에 따라 위로 올라가지만, 출발선(시작 등급) 자체가 중정관이 매겨준 등급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3. 왜 '추천만으로' 돌아갔다고 하나?
질문하신 것처럼 하급자가 상급자를 추천하는 방식이 아니라, "중정관이라는 한 명의 심사위원이 지역 내 모든 후보자를 줄 세우기" 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가문의 아들이 장성하면 그 동네 중정관에게 가서 "우리 애가 이렇게 똑똑하고 가문도 좋습니다"라고 로비를 합니다.
중정관이 "음, 이 친구는 가문도 좋고 평판도 좋으니 2품을 주겠네"라고 장부에 적어 중앙정부(이부)에 보고하면, 그 등급대로 발령이 나는 구조였습니다.
4. 실제 운영의 모습: "금수저의 고착화"
이 시스템이 추천제로 불리는 이유는 시험 성적 같은 객관적 지표가 아니라, 중정관 개인의 판단과 가문의 배경이라는 주관적인 '추천'에 의해 등급이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끼리끼리 문화: 중정관 자체가 중앙의 고위 귀족입니다. 그러니 자기랑 비슷한 수준의 명문가 자식들에게는 무조건 높은 등급(1~3품)을 줬습니다.
흙수저의 한계: 아무리 똑똑해도 집안이 별로면 중정관은 7~9품의 낮은 등급만 줍니다. 그러면 평생 말단 관리만 하다가 끝나는 거죠.
요약하자면
하급자가 상급자를 추천하는 게 아니라, 중앙에서 보낸 심사위원(중정관)이 지역 인재들에게 1~9등급 성적표를 줬다.
그 성적표에 적힌 등급에 따라 중앙 관직의 출발점이 정해졌다.
결국 중정관이 "얘가 짱이다"라고 써주는 게 곧 추천이었으므로, 실력보다 인맥과 가문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에 "상품(높은 등급)에는 가난한 집안 사람이 없고, 하품(낮은 등급)에는 귀족이 없다"는 비판이 쏟아졌고, 이를 타파하기 위해 수나라가 '시험 한 판으로 결정하자!'는 과거제를 만든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입학 사정관제'나 '추천 전형'만 있다가, 비리가 너무 심해지자 '수능(과거제)'을 도입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이해가 좀 더 명확해지셨나요?
그럼 승진도 추천에 의해 이루어졌나?
과거제가 완전히 정착하기 전, 특히 구품중정제가 지배하던 위진남북조 시대의 승진은 현대의 '인사 고과'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돌아갔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승진 역시 '추천과 평판'이 핵심이었지만, 그 바탕에는 '가문의 급수'라는 보이지 않는 천장이 강력하게 존재했습니다.
당시의 승진 시스템을 3가지 핵심 포인트로 정리해 드릴게요.
1. 출발선이 곧 도착지를 결정한다 (정치적 천장)
가장 중요한 점은 처음 받은 등급(향품)이 이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최종 승진 한계선을 사실상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관품과 향품의 관계: 중정관에게 2품(명문가)을 받은 사람은 6품으로 시작해서 2품 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천장의 존재: 반면, 집안이 평범해 7품을 받은 사람은 9품(말단)으로 시작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추천을 받아도 7품 이상으로는 승진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결과: 실무 능력이 뛰어나서 승진하는 게 아니라, "승진할 수 있는 신분인가"가 먼저였습니다.
2. 승진을 결정하는 '청의(淸議)'와 추천
일단 관직에 들어온 후 위로 올라갈 때는 '청의(淸議)'라고 불리는 지식인 사회의 여론과 상급자의 추천이 필요했습니다.
여론 정치: 당시 고위 관료들과 귀족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특정 인물에 대해 비평을 했습니다. 여기서 "저 친구는 인품이 맑고 학식이 깊다"는 평판(추천)을 얻어야 승진 코스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청요직(淸要職): 실무는 힘들지만 명예로운 '청요직'은 오직 명문가 출신들에게만 추천되었습니다. 힘든 세무나 군사 실무를 맡는 '탁직(濁職)'은 하급 귀족들이 전담했기 때문에, 승진 속도 자체가 출발부터 달랐습니다.
3. '중정관'의 주기적인 재평가
등급은 한 번 매기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정관은 대략 3년마다 지역 인재들의 등급을 재심사했습니다.
승강제: 만약 어떤 관리가 불효를 저질렀거나 평판이 나빠지면 중정관이 등급을 깎아버립니다. 등급이 깎이면 현재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강등되었습니다.
역설적 상황: 하지만 이 재심사 권한마저 고위 귀족들이 장악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자기 집안 사람들의 등급을 유지해주거나 더 높여주는 '인맥 세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 요약하자면
승진 역시 추천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맞지만, 그 추천은 '능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계급'에 대한 확인이었습니다.
시작 등급이 승진의 최고 한계선을 정해두었다.
상급자와 동료 귀족들의 평판(추천)이 있어야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가문의 급'이 낮으면 추천 리스트에 이름조차 올릴 수 없었다.
결국 이 "추천을 빙자한 끼리끼리 승진 파티" 때문에 국가의 행정 능력이 엉망이 되었고, 이를 지켜보던 황제들이 "이대로는 나라 망하겠다" 싶어 만든 것이 객관적 점수로 승진과 임용을 결정하는 과거제였습니다. 과거제 도입 이후에는 시험 성적과 실무 평가(고과)가 승진의 주요 잣대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위사전찬(衛士傳餐)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정관정요》에서 당 태종이 신하들에게 수 문제에 대해 물으니 신하는 혼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 문제를 뛰어나고 근면하다고 평가했는데 당 태종은 그 말을 부정하고 그건 그가 근면하다기보다는 의심이 많아서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다 맡은 것일 뿐이며, 그래서 국가 운영이 늦어진다고 깠다. 다만 여기서 알 것은 수 문제가 중요한 국정 운영과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처리했다는 것을 신하들과 당 태종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근면성실했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전술한 수 문제의 위사전찬(衛士傳餐)이라는 고사를 똑같이 실행한 이가 후대의 당 문종이었다.
수 문제 시절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제주 참군 왕가라는 사람이 70여 명의 죄수를 수도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죄수들이 너무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죄수들의 몸에 걸친 칼과 쇠사슬을 풀도록 명령하고, 아울러 압송을 담당한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언제까지 장안에 도착하라고 했다. 만약 죄수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형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모두 약속한 날짜에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전부 장안에 도착했다. 그러자 수 문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 그들에게 주안상을 하사하고 죄를 사면했다. 그리고 왕가의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렸다.
한 번은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수 문제는 측근을 보내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 문제에게 진상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수라의 반찬을 줄이고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수 문제가 이질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어의가 궁궐에서 이질약을 조제하는데 필요한 호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황제에게 처방할 약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궁궐에서 근검절약했던 것이다. 수 문제는 태자 양용에게
"자고로 사치한 제왕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자는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 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00만 호를 채우지 못했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를 거쳐 당 현종 시절의 전성기인 개원지치에 다다라서야 겨우 복구되었다.[11]
인구 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 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당 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았다.[12]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 - 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 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이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건설을 중단했다.
이처럼 수 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 드문 성군이었으며,
물론 이런 수 문제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고, 601년에는 군현의 모든 교육 기관들을 폐지한 뒤 장안에 국자감만을 두어 귀족 자제들만 공부하도록 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법의 함정을 파놓고 관리들이 걸려들면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툭하면 매질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 자신의 기분에 따라 신하들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점은 있었지만 수 문제가 정립한 정치 제도는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국가들[13]과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14]이 확립한 정치 제도의 뼈대로 군림하게 되었다.
또한 수 문제는 581년 태형, 효수, 차열(거열) 같은 혹형들을 폐지시켰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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