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회교 혁명: 라자 팔레비의 치명적 실수였던 계엄령 (아바단 극장 방화 사건 (1978년)에 따른 계엄령) / '이란 인질 사건'의 도화선이 된 팔레비의 미국 망명과 록펠러-키신저 팔레비 망명추진의 배경: 중동 테러리즘을 불붙게 하고, 이란 중앙은행이 록펠러 은행에 맡긴 팔레비 왕실 돈 10억 달러, FRB에 맡긴 이란 채권 13억 달러, 영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맡겨진 이란 기업 자금 40억 달러 등 막대한 자산을 확보 / BBC 페르시아의 호메이니 영웅화 (뉴욕타임스에 의한 피델 카스트로 홍보효과, 타임지에 의한 지미 카터 홍보효가가 떠오르네?) / 호메이니의 여성 인권 탄압 / 회교혁명 이후 이란 국민소득의 감소
1979년 회교 혁명: 라자 팔레비의 치명적 실수였던 계엄령 (아바단 극장 방화 사건 (1978년)에 따른 계엄령) / '이란 인질 사건'의 도화선이 된 팔레비의 미국 망명과 록펠러-키신저 팔레비 망명추진의 배경: 중동 테러리즘을 불붙게 하고, 이란 중앙은행이 록펠러 은행에 맡긴 팔레비 왕실 돈 10억 달러, FRB에 맡긴 이란 채권 13억 달러, 영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맡겨진 이란 기업 자금 40억 달러 등 막대한 자산을 확보 / BBC 페르시아의 호메이니 영웅화 (뉴욕타임스에 의한 피델 카스트로 홍보효과, 타임지에 의한 지미 카터 홍보효가가 떠오르네?) / 호메이니의 여성 인권 탄압 / 회교혁명 이후 이란 국민소득의 감소
**팔레비 전 국왕(모하메드 레자 팔레비)**의 미국 망명은 정치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실패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해 드리면, 단순히 '망명지 선택'의 문제를 넘어 국제적인 외교 참사로 이어졌던 복잡한 사건이었습니다.
1. 미국 입국이 '망명'이 아닌 '치료' 목적이었다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레비 국왕은 이집트, 모로코, 멕시코 등을 전전했습니다. 당시 미국 카터 행정부는 이란 내 반미 감정과 대사관 안전을 우려해 그의 입국을 거부했으나, 국왕의 **암 투병(림프종)**이 악화되자 인도적 차원에서 치료를 위한 입국만을 허용했습니다. 즉, 정식 망명 허가가 아니었습니다.
2. '이란 인질 사건'의 도화선이 됨
팔레비가 1979년 10월 뉴욕 병원에 입원하자, 이에 분노한 이란의 혁명 세력은 테헤란 주재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미국인을 인질로 잡았습니다. 이들은 인질 석방 조건으로 "팔레비 국왕을 이란으로 송환하여 재판에 세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3. 결국 미국에서 쫓겨나듯 떠남
미국 정부는 인질들의 안전이 위협받자 팔레비 국왕이 미국에 머무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결국 팔레비는 치료가 채 끝나기도 전인 1979년 12월, 미국을 떠나 파나마로 향해야 했습니다.
미국의 태도: "우방국 군주" 대우보다는 "골칫덩이" 취급에 가까웠습니다.
최후: 파나마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그는 결국 자신을 유일하게 받아준 이집트로 돌아갔고, 1980년 7월 카이로에서 쓸쓸히 사망했습니다.
요약: 왜 실패라고 하나요?
정치적 보호 실패: 미국은 인질 사건 이후 팔레비를 보호하기보다 조속히 내보내려 했습니다.
외교적 고립: 한때 미국의 핵심 동맹이었으나, 망명 시절에는 어느 나라도 그를 장기 체류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극적 결말: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여러 나라를 떠돌다 타국(이집트)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참고: 현재 미국에 살며 이란 반정부 활동을 하는 인물은 그의 아들인 레자 팔레비 왕세자입니다. 아들은 혁명 당시 미국에서 훈련 중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미국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혹시 팔레비 왕조의 몰락 원인이나 당시 이란 혁명의 배경에 대해 더 궁금한 점이 있으신가요?
1979년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란의 여성들은 현대적인 법적 권리를 누리며 사법부의 핵심적인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혁명 직후 이들의 지위는 극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핵심 내용을 정리해 드립니다.
1. 혁명 이전: 여성 사법 진출의 황금기
1960년대 팔레비 국왕의 '백색혁명' 이후, 이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매우 활발했습니다.
법적 권리: 여성의 투표권이 인정되었고, '가족보호법'을 통해 이혼 및 양육권에서 여성의 권리가 크게 신항되었습니다.
여성 판사의 등장: 1968년 이란 최초의 여성 판사들이 임용되었습니다.
상징적 인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린 에바디(Shirin Ebadi)**가 대표적입니다. 그녀는 1975년 이란 최초의 여성 법원장(테헤란 시립법원)이 되어 사법부의 높은 위치까지 올랐습니다.
2. 혁명 직후: "여성은 판사가 될 수 없다"
1979년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사법 체계는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엄격히 따르는 방식으로 개편되었습니다.
자격 박탈: 호메이니 체제는 **"여성은 감정적이고 판단력이 흐리다"**는 보수적인 율법 해석을 근거로 여성의 판사 임용을 금지했습니다.
강제 강등: 당시 재직 중이던 모든 여성 판사들은 하루아침에 판사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이들은 법원 서기나 행정직, 혹은 법률 자문역으로 강제 강등되었습니다.
시린 에바디의 사례: 법원장이었던 그녀 역시 행정 요원으로 강등되었고, 이에 항의하며 사직한 뒤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훗날 그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3. 이후의 변화와 현재
여성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사회적 필요성 때문에 1990년대 이후 제도가 약간 완화되었습니다.
제한적 복귀: 현재 이란에서 여성은 '조사 판사'나 '가족 법원'의 자문역 등으로 활동할 수 있지만, 여전히 최종 판결권을 가진 수석 판사(Presiding Judge)는 될 수 없습니다. 즉, 형을 확정하거나 사형 선고를 내리는 등의 최종 결정은 남성 판사만이 할 수 있습니다
호메이니의 경제 무지는 이란의 산업 인프라를 무너뜨리고 경제를 제3세계 수준으로 떨어뜨렸으며, 국제 외교 감각 부재로 미국과 이스라엘에 이용당해 국가 재정을 탕진 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 호메이니 집권 후 이란 경제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호메이니 집권 10년간 이란의 개인 소득은 2.5배 감소하여 터키보다 못 살게 되었고, 2016년에는 한국보다 700배나 못 사는 나라가 되었으며, 석유 수출량도 급감했습니다. 이란 혁명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며, 국가와 국민이 겪는 비극의 근본 원인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혁명의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음모와 문화적 특성을 분석하여,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이란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입니다.
1. 이란 혁명의 복합적인 원인과 결과 이란 혁명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문화적 특성, 정치적 음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우연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며, 그 후유증은 이란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1.1. 혁명에 대한 이란 내부의 복잡한 시각 혁명에 대한 회의론 확산:
이란의 한 교수는 2014년, 현재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한다면 70% 이상이 반대할 것이라고 인터뷰했으며, 이는 2018년 18개월 징역형으로 이어졌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없음을 시사하며, 겉으로는 반미·반이스라엘 구호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혁명에 대한 후회를 하는 이들이 많다는 판단을 뒷받침한다.
전 대통령의 딸이자 국회의원이었던 파제 하셈 역시 1979년 혁명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언급했으며, 좌파 정당들 역시 호메이니가 혁명을 망쳤다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표명한다.
정부의 반박과 현실:
이란 정부는 이러한 의견을 해외 거주 이란인이나 불순분자들의 농간으로 치부하지만, 다수의 이란인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슬람 공화국을 지지하거나 호메이니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이민 증가와 혁명에 대한 불만:
1979년 이후 100만 명 이상의 이란인이 해외로 이민을 떠났는데, 이는 혁명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자신들이 원했던 혁명이 아니었음을 의미하며, 젊은 세대와 40-50대는 현 체제에 대한 불만이 많다.
정부 역시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으며, 시위 단속 방식이 과거보다 유화적으로 변한 것도 이를 반영한다.
1.2. 이란 혁명의 비의도성과 외부 세력의 개입 부재 1953년 쿠데타와의 차이점:
1953년 모사데크 축출은 미국 CIA, 영국 MI6, 모사드의 계획된 쿠데타였으나, 1979년 호메이니 혁명은 이들 세력의 직접적인 개입이 적었다.
혁명은 우연하고 갑작스럽게 발생했으며, 외부 세력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국민 주도의 혁명:
이 혁명은 이란 국민들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이며, 주변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1977년까지 호메이니를 아는 미국이나 영국 정치인은 없었으며, BBC 페르시아의 보도 이후에야 알려지기 시작했다.
CIA가 개입하기에는 혁명이 너무 진전되어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란 혁명에 대한 음모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1.3. 혁명의 불씨를 당긴 사건들 아바단 극장 방화 사건 (1978년):
1978년 8월 19일, 아바단 영화관 방화 사건으로 377명이 사망했다.
초기에는 팔레비 비밀경찰 소행으로 지목되었으나, 2년 후 재판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 범인은 영화를 싫어했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었으며, 친호메이니 주민들을 대상으로 불을 질렀다.
이는 의도적인 정치적 사건이라기보다는, 영화관을 싫어하는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소행이었다.
계엄령 선포와 시위대 발포 사건 (1978년):
1978년 9월 8일, 팔레비가 계엄령을 선포했으나, 청년들은 이를 모르고 시위에 나섰다가 발포로 64명이 사망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당시 통신 수단의 한계를 보여준다.
팔레비의 계엄령 선포는 큰 실수였으며, 이는 시민들의 반항을 불러내 내전으로 치닫게 할 수 있는 위험한 조치였다.
이 사건으로 팔레비는 악마로 낙인찍혔고,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정상들은 과달라하라에서 팔레비를 끝장내기로 합의했다.
혁명의 역효과와 팔레비의 몰락:
이러한 갑작스러운 사건들은 호메이니 세력을 결집시키고, 중산층마저 팔레비에게 의심을 품게 만들었다.
결국 팔레비는 망명을 떠났고, 이는 이란 여성들의 거리 시위로 이어졌다.
여성들은 더 큰 자유를 요구하며 남녀 평등을 주장했으나, 이는 당시 상황에서 실현 불가능한 요구였다.
1.4. 외부 세력의 관망과 호메이니의 부상 외부 세력의 무관심: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은 이러한 모든 움직임을 멀뚱멀뚱 지켜볼 뿐, 끼어들 수 없었다.
호메이니의 스타 부상:
팔레비가 버림받으면서 호메이니가 스타로 떠올랐고, 서방 국가들은 호메이니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이는 호메이니가 누구인지 몰랐던 상황에서 발생한 급작스러운 사건들이 외교적, 정치적, 심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결과임을 보여준다.
1.5. 중동 문화의 특성과 이란 혁명 단기성 지향 문화:
중동 지역의 문화는 연속적인 변화를 싫어하며, 한두 번의 변화는 겪지만 변화가 계속되면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모두가 함께 움직여 사태를 편하게 만들고 시간을 고정시키려는 '단기성 문화'로 나타난다.
이는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한국과 같은 '장기성 문화'와 대조된다.
정신적 가치 중시:
중동 문화는 물질적 이익보다 정신적인 헌신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노력보다는 운이 좋기를 바라는 심리가 있다.
성공한 부자들에 대한 노력을 높이 평가하기보다 운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서구 사회와 다르다.
영웅 숭배와 즉각적 결과 추구:
이란 사람들은 갑자기 영웅을 숭배하고 일을 빨리 단박에 끝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냄비 근성과는 다르며, 변화를 정지시키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작용한다.
민족적 특성과 외교적이지 않은 성향:
이란 사람들은 눈치 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민족적 특성이 있으며, 외교적이지 않은 성향을 보인다.
이는 남에게 잘 휘둘리지 않는 성격으로 나타난다.
1.6. 록펠러의 음모와 이란 자산 동결 시도 록펠러의 한계:
데이비드 록펠러조차 이란의 큰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으며, 그의 계획은 팔레비를 미국으로 데려와 자산을 동결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CIA의 분석:
CIA 창립 멤버 마일스 커플랜드는 이란 국민이 한곳으로만 달려가는 '양떼' 같았다고 언급하며, 혁명이 국민 주도로 벌어졌다고 판단했다.
팔레비의 근대화에 대한 이중적 시각:
이란 국민들은 1970년대 비교적 잘 살았고 미래를 밝게 보았으나, 종교와 전통을 무시하는 팔레비의 근대화를 두려워하고 억압적으로 보기도 했다.
먹고 살게 해주는 것은 좋았지만, 이슬람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는 이중적인 시각으로 비춰졌다.
성직자 정권에 대한 기대:
왕정이 무너지면 성직자들이 팔레비보다 더 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성들의 자유 요구와 차도르 의무화:
당시 이란 여성들은 상당한 자유를 누렸으나, 더 큰 자유와 상속법 개정 등을 요구했다.
하지만 혁명 직후인 1979년 3월, 차도르가 의무화되면서 여성들은 얼굴까지 가려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호메이니는 혁명 한 달 만에 여성의 판사 임용 금지, 남성만 이혼 청구 가능, 스포츠 참여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1.7. 국민 투표와 헌법 투표 결과 이슬람 공화국 지지 투표 (1979년 3월):
85%의 참여율로 99%가 찬성표를 던졌다.
부정 선거는 거의 없었으며, 반대 정당들은 투표 자체를 거부했다.
결과적으로 20%를 제외하더라도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이슬람 공화국 헌법 투표 (1979년 12월):
99.5%가 찬성표를 던졌다.
이는 안정을 찾고 싶어 하는 보수적인 이란인들의 기질과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결과이다.
1.8. 이란 혁명 결과에 대한 책임론 국민 스스로의 책임:
이란 혁명 참여 국민들은 남 탓을 할 수 없으며, 모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다.
경제 제재, 전쟁, 호메이니 추대 등 모든 결과는 국민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정부나 외부 세력 탓을 하는 것은 성인의 자세가 아니며, 아기들이나 하는 행동이다.
역사 변화에서 남 탓하지 않는 것이 이란 사람들에게 정확한 이야기이다.
1.9. 호메이니의 부상과 서방의 지원 서방의 호메이니 지지:
영국과 미국 정부도 호메이니를 차기 지도자로 선택하고 그 방향으로 움직였다.
국민들이 그렇게 움직이니 따라간 것이며, 팔레비가 망명하자 카터는 나토 사령관을 보내 이란 군대의 반란을 막았다.
호메이니의 이미지 메이킹:
호메이니는 독서를 잘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보였으며, 이슬람 정신을 강조하여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처럼 비춰졌다.
BBC 페르시아가 호메이니를 성인으로 만들면서 이란 국민들이 쉽게 넘어가 버렸다.
1.10. 미셸 푸코의 오판과 호메이니의 실체 미셸 푸코의 감탄과 오판:
미셸 푸코 역시 호메이니를 만나보고 정신적인 사람이라며 감탄했고, 이란 혁명이 국민의 집단적 정신을 대변한다고 보았다.
이는 루소의 일반 의지 표현으로 해석되었으나, 훗날 푸코는 이러한 생각을 엉터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호메이니의 고립과 BBC의 역할:
호메이니는 금욕적인 사람이었고 친구도 없었으며, 정치권이나 종교권 내부에 정치 세력도 없었다.
BBC 페르시아가 그를 스타로 만들었을 뿐이다.
호메이니의 불확실성:
팔레비 망명 후에도 호메이니는 체포되거나 살해될 경우를 대비해 헌법 봉투를 기자에게 맡길 정도로 스스로 확신이 없었다.
1.11. 록펠러와 키신저의 음모: 팔레비 망명 추진 알파 프로젝트:
체이스 맨해튼 은행 이사 헬리 키신저와 데이비드 록펠러는 팔레비를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수개월간 '알파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음모의 목적:
팔레비를 미국이 보호해야 이란과 적대적 관계를 만들고, 전쟁을 유발하거나 자산을 동결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자산 동결의 배경:
이란 중앙은행이 록펠러 은행에 맡긴 팔레비 왕실 돈 10억 달러, FRB에 맡긴 이란 채권 13억 달러, 영국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 맡겨진 이란 기업 자금 40억 달러 등 막대한 자산을 확보하려 했다.
이를 위해 이슬람 정부를 전복하거나 자산을 동결하려 했으며, 이는 1979년부터 현재까지 275번의 국제 소송으로 이어졌다.
1.12. 팔레비 망명과 미 대사관 점거 사태 팔레비 망명에 대한 이란 국민의 우려:
이란 국민들은 팔레비가 미국에 들어가면 미국이 이란 대사관과 협력하여 왕위를 복귀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팔레비의 미국 망명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 대사관 점거의 배경:
록펠러는 이러한 국민들의 불안감을 이용해 미 대사관 점거를 유도했다.
2월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기에, 팔레비가 미국에 들어가면 미 대사관이 점령될 것을 예상했다.
대학생들의 점거:
이란 대학생들은 미국이 팔레비 왕정 복고를 시도할 것이라는 비밀 문서를 확보하기 위해 미 대사관을 점거했다.
이 사건은 세계사를 바꾸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다.
1.13. 미 대사관 인질 사태의 결과와 후회 이란에 미친 영향:
인질 사태는 중동과 지정학을 바꾸었으며, 현재의 이란을 만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대부분의 이란 국민은 이 사건을 혁명보다 더 후회하고 있다.
경제적 압박과 관계 단절:
인질 사태는 카터 행정부로 하여금 이란 자산을 동결하게 하여 이란 재정에 큰 압박을 주었다.
이란은 미국과의 교류 관계를 끊었고, 호메이니 정권은 민간 경제 교류마저 막았다.
거짓 정보 유포:
미국이 팔레비 왕정 복고를 시도했다는 거짓말을 진실로 둔갑시켜 홍보했다.
이란과 교류하고 싶었던 서유럽 국가들도 이란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1.14. 호메이니의 비열함과 레이건의 집권 록펠러의 계획:
호메이니는 록펠러에게 이용당했으며, 카터 행정부의 인질 구출 작전 실패는 록펠러가 원했던 결과였다.
록펠러는 1980년 신자유주의 플랜을 위해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점찍어 두었다.
인질 사태의 정치적 이용:
호메이니는 인질 사태를 400일 동안 끌면서 이란을 서방과 적대적으로 만들었고, 레이건과 비밀리에 만나 인질 석방 시기를 조절했다.
이는 카터를 실각시키려는 호메이니의 비열한 행동이었다.
미국 국무부의 시각:
미국 국무부는 호메이니를 비열하고 음모를 꾸미는 인물로 보았으며, 속아 넘어가는 이란 국민들을 함부로 대했다.
1.15. 팔레비의 노력과 호메이니의 파괴 팔레비의 비판:
팔레비는 자신은 죽도록 일하는데 비판하는 성직자들은 알락의자에 앉아 헛소리만 한다고 한탄했다.
뉴욕 타임즈의 예측:
뉴욕 타임즈는 팔레비가 기술 분야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호메이니는 일상에 매진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호메이니의 폭정:
호메이니는 무상 주택 제공이라는 허황된 약속으로 팔레비 지지자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간통범 돌팔매질을 부활시켰다.
미국과 교류를 주장했던 임시정부 내각을 사퇴시키거나 처형했으며, 미셸 푸코 역시 이에 실망했다.
여성 해방의 좌절:
혁명 1년 후 가족 보호가 폐지되었고, 여성 해방을 기대했던 여성들은 배신당했다.
항의했던 전 여성 교육부 장관 파르루 파르샤는 처형당했다.
호메이니의 경제 무지와 정치적 수완:
호메이니는 경제를 전혀 몰랐고 경제 관료들을 싫어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뻔뻔한 능구렁이였다.
자신의 정적뿐 아니라 지지했던 공산당 출신 인사들까지 처형했으며, 그 명단은 이스라엘 모사드와 미국 CIA의 도움으로 얻었다.
그는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정적 처단을 위해 이스라엘과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이라크 전쟁과 무기 거래:
이라크 전쟁 시 미국 무기를 세 배 비싼 가격으로 사들였으며, 이는 군산복합체만 배불려주는 행위였다.
팔레비가 만들어 놓은 강력한 군사력 덕분에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호메이니는 무기 주문을 취소했음에도 선불금을 받지 않았고, 오바마 때 4억 달러를 17억 달러로 계산해 돌려받았다.
1.16. 이란의 경제 파탄과 호메이니의 책임 전쟁 장기화와 경제 손실:
호메이니는 1982년 휴전 제안을 거부하고 전쟁을 장기화했으며, 이로 인해 50만 명 이상의 젊은이가 사망했다.
이란의 석유 인프라는 67차례 공습으로 파괴되어 92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다.
유가 하락에도 불구하고, 호메이니는 서방으로의 석유 수출을 막아 이란의 석유 기술자들을 괴롭혔다.
석유 시장에서의 위상 하락:
팔레비 시절 전 세계 원유 공급량의 10%를 차지했던 이란은, 호메이니 이후 가스 시장 1% 이상, 석유 시장 1.5% 이상을 차지한 적이 없다.
GDP 및 소득 급감:
1979년 대비 1989년 이란의 GDP와 개인 소득은 두 배 반으로 떨어졌으며, 터키보다 못 살게 되었다.
2016년에는 한국보다 700배나 못 살았다.
이 모든 경제적 실패는 호메이니의 책임이다.
1.17. 팔레비의 산업화와 호메이니의 파괴 팔레비의 비전:
팔레비는 가난한 민족의 왕이 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았으며, 모든 이란 사람들이 함께 잘 살 때 대관식을 갖겠다고 했다.
호메이니의 산업 인프라 파괴:
호메이니는 팔레비가 충실하게 만들어 놓은 산업 인프라를 모두 무너뜨리고, 신흥 기업과 산업 계층을 제거했다.
석유를 통한 경제 발전의 토대도 무너뜨렸으며, 이는 호메이니와 후계자 30년간 지속되었다.
실업률 증가:
이란의 교육률은 높았으나, 일자리가 없어 경제 활동 인구의 50%가 실업자였다.
이는 팔레비를 쫓아내고 호메이니를 수장으로 만든 이란 국민의 선택 결과이다.
1.18. 혁명의 목표와 변명 야지디의 주장:
호메이니의 제자인 야지디는 혁명의 목표가 잘 사는 것이 아니었으며, 정신적 혁명과 고귀한 이슬람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경제 실패에 대한 변명:
이는 경제 운영 실패에 대한 비겁하고 고귀한 변명일 뿐이다.
이란 사람들은 정신적인 사람들이지 물질적인 사람들이 아니라는 주장은 변명에 불과하다.
1.19. 중국과 인도의 부상과 이란 경제 회복 중국과 인도의 지원:
2003년부터 중국과 인도가 이란 석유를 사주면서 이란 경제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2010년에는 가시를 부리지 않게 되었다.
산업 인프라 재건:
중국과의 경제 협력을 통해 팔레비가 기초를 다져놓았던 철강, 전기, 중공업, 자동차, 항공기 산업을 다시 일으키고 있다.
정권 유지 방식:
이슬람 공화국은 국민들을 세뇌시키며 미국과 이스라엘을 적대시하여 정권을 유지해왔다.
브릭스 참여: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통해 자존심을 챙긴 이란은 브릭스 참여를 통해 지난 30년간의 만행을 만회할 길을 찾고 있다.
이란은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등 산업 분야에서 다시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1.20. 이란의 미래와 젊은 세대 미래 전망:
이란은 다시 실수하지 않을 것이며, 국민들도 이를 알고 있다.
여성 인권 문제:
젊은 여성들을 괴롭히는 것을 중단하고, 여성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최근 시잡 문제로 사망한 사건 이후, 이란 정부는 여성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화해와 재건:
이슬람 공화국과 호메이니가 망쳐버린 인프라와 문화가 다시 깨어나고 있으며, 이슬람 공화국은 반성하고 있다.
이란 사람들은 한번 화나면 모든 것을 뒤집어버릴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 평화와 번영:
서방 세계가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중국, 러시아와 함께 이란이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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