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에 대한 인도 베다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 인간의 얕은 지식으로 카르마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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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쯤 되면 블로그에 있는 글들을 싹 긁어모아, 카르마에 대한 미니북 하나쯤은 정리해서 내놓아도 될 정도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제가 오컬트와 영성 쪽을 공부하면서 이걸로 협박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저도 뉴비일 때 정말 많이 들어봤으며, 반대로 이제 상담을 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받는 분들이 하소연을 하며 얘기를 꺼내기에 더 눈에 띄게, 강하게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상 깊은 카르마 관련 이야기들은 제 머릿속에 쉽게 각인됩니다.


카르마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인도의 베다에서도, 카르마는 너무나도 넓고 거대해서 우리가 그걸 전부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작하기도 어렵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결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마치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감각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카르마를 설명할 때는 '상호성'이라는 개념 즉, 모든 행동은 어떤 형태로든 되돌아온다을 통해 가르칩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돌아올지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실제로 베다에서 말하는 ‘진짜’ 카르마입니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신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날, 인도의 신 브라흐마(Brahmā)는 한가롭게 잠에 들었습니다.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이자, 세계의 구조를 세우는 절대적 존재입니다.

그가 잠들었다는 것은 곧, 우주의 의식이 잠시 멈추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브라만 계급(최상위 계층의 사제)이 죽은 아기를 안고 브라흐마를 찾아옵니다.

“브라흐마께 아뢰옵니다. 제 장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건 분명 어딘가 잘못된 일입니다. 당신의 창조 안에 이런 비극이 있어도 되는 것인지... 살펴주시옵소서.”

브라흐마는 마지못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고, 곧장 지상으로 내려가 조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다 인도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계급인 수드라(Shudra) 중 한 인물이, 하나의 큰 염원 삶 전체를 걸 만큼 간절한 소원 을 품고 사원 안으로 들어간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고대 힌두 사회에서 수드라가 사원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금기 중의 금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드라는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걸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브라흐마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 순간 수드라는 즉시 죽음을 맞이합니다. 브라흐마의 시선을 견딘다는 것은 인간으로선 불가능한 일이며, 특히나 ‘수드라’ 계층의 가장 낮은 자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일어난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수드라는 자신의 삶 전체를 걸고 사원으로 들어섰고, 신의 시선 속에서 죽었기에 ‘해탈’을 이루었고,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죽어 있던 아기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세상은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가기 시작했죠. 모든 것이 뒤틀리고, 순식간에 변화한 순간이었지만 말입니다...


이 신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카르마’의 상호작용은 결코 인간의 논리나 형평성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명백히 잘못된 일처럼 보여도, 그 모든 것 뒤에는 만물을 연결하는 아주 깊고 심오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차원에선,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으로 인해 또 다른 이의 생명이 꺼지거나, 예기치 못한 죽음이 발생하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교차하며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하지만 베다에서는 이 모든 흐름엔 분명한 ‘법칙성’과 ‘질서’가 존재하고, 다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을 뿐입니다. 흔히 말하는 ‘카르마’ 뿌린 대로 거둔다는 단순한 공식이 아닙니다.

인도 베다에서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복잡하고, 거대하며, 인간의 사고로는 결코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인지를, 오히려 이런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러니 자신이 지은 원인이나 행위들이 결코 우리가 예상한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에게 혜택으로, 혹은 전혀 예기치 못한 사람에게 큰 불행의 시작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선의로 한 행동이라고 해도, 악의로 한 행동이라 해도, 그것이 결과적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내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억울한 일, 부당한 일이 터지는 그 순간 그 이면에선 어쩌면, 가난한 노모가 병들어 쓰러져가는 걸 지켜보던 어린 손자 하나가, “제발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라고 울부짖으며, 눈물 콧물 다 쏟아가며 기도했을 수도 있는 겁니다.

그 절규가, 그 순도 높은 간절함이 우주의 깊은 어딘가에 닿게 되고, 그 기도가 응답되어 작동하면서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걸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카르마는, 이해 불능입니다.

인간 사고로는 감당도, 해석도 안 되는 겁니다.

어떤 고통, 어떤 일탈, 어떤 절망 속 몸부림이, 어딘가에서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얽히고 맞물려서, 지금 이 순간 현실을 비틀어버렸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는 ‘카르마 요가’, 불교에서는 ‘무주상보시’ 같은 개념이 나오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겐지스 강의 모래알보다도 작은, 미미한 존재입니다.

모든 걸 판단하려 들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결국엔 지금, 이 순간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입니다. 내 의도, 내 중심, 그거 하나 붙잡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을 공격하고 가스라이팅하고, 영적인 말장난이나 정신적 압박 따위로 ‘카르마’ 운운하며 휘두르지 마세요.

카르마는, 개개인이 생각하는 윤리 기준에 입맛 맞춰 돌아가는 인형극이 아닙니다. 애초에 카르마는 그런 저열한 욕망과 입맛에 맞춰 움직이지 않습니다.

우주의 먼지보다도 작고, 찌든 마음으로 어설프게 휘두른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그런 유치하고 값싼 시스템이 아닙니다.

그저 하늘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정말 카르마가 존재한다면 말이지요.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카르마가 진짜 존재하냐”고 끝없이 묻는 겁니다. 실제로도 베다 속에서 카르마는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너무나도 거대한, 실체조차 흐릿한 시스템으로 그려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존재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지금, 여기서 쌓아가는 내 행동들 그 연속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 결과는 절대로 내가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착하게 산들, 선하게 산들 그게 반드시 그대로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쁘게 살고, 악하게 굴어도 그게 꼭 대가를 치르고 무너진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또 잘 산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본래 세상이 그렇습니다.

보장 따윈 없는 곳입니다.

이게 무섭고, 그래서 신성한 법칙인 것입니다.

그건 하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니깐요

단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화내지 않겠습니다.

단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단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감사하겠습니다.

단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성실하겠습니다.

단지 오늘 하루만이라도 모든 존재들에게 자상하고 친절하겠습니다.

레이키 오계

그렇기에 카르마에 대해서는 레이키 오계 같은 단순한 계율들이 전부이고 이것보다 더 단순하면 그저 매일 하루하루를 자신의 현존하면서 생생하게 그저 존재하며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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