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때 조센징들끼리 좌파네 우파네 하며 서로 학살했던 미개한 역사 / 6·25 사흘만에 서울대병원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 [호준석의 역사전쟁]
김일성의 남침이 시작된 지 3일 만인 1950년 6월 28일. 전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끔찍한 만행이 서울 한복판에서 자행됩니다. 제네바협정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국군 부상병 수백 명이 집단학살 당한 것입니다. 당시 국내 최고 종합병원인 서울대병원에 들이닥친 북한 인민군은 움직이지도 못하는 국군 부상병들과 민간인 환자까지 무차별 살해했습니다. 2025년 3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 사건을 북한 정권에 의한 집단학살로 규정하고, 추정 희생자 규모가 천여 명, 확인된 희생자만 33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이 참혹한 사건은 놀랄 만큼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기습 남침에 개전 초기의 국군은 맨몸으로 맞서다시피 했습니다. 3일 만에 무려 4만 4천명이 전사했고 부상병 수천 명이 쏟아졌습니다. 의정부 지구에서 싸우던 부상병들은 전선에서 가까운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마침내 서울이 적의 수중에 떨어진 6월 28일, 인민군은 미아리를 뚫고 중앙청을 지나 아침 9시쯤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쳤습니다. 병원을 지키던 육군 1개 소대가 소대장 남 모 소위의 지휘로 끝까지 싸웠지만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인민군은 병원을 둘러싸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 뒤, “원수 놈들의 앞잡이들이 누워있다”며 병실마다 들이닥쳐 총을 난사하고 칼로 찔렀습니다. 부상병 뿐 아니라 민간인 환자들도 사방으로 도망쳤지만 인민군은 숨바꼭질을 하듯 기어이 찾아낸 뒤 모두 살해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중대장 이강국(당시 36세)은 포로가 된 뒤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에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6월 28일 서울대병원에 가니 한 인민군이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 방에는 9명의 노동당원이 있었다. 인민군 군관이 와서 “이놈들은 동무들의 원수니까 동무들의 손으로 원수를 갚으십시오”라고 랬다. 우리들은 다발총(多發銃)과 소련제 권총을 분배받은 뒤 각 병실로 들어가 침대 위에 누워있는 국군 부상병을 총살시키기 시작했다. 그때 시간이 오후 12시 반경이었다. 1층에 있는 국군부상병을 총살시키자, 다시 2층, 3층에 올라가서 총살시켰습니다. 이리하여 30분 후 우리들은 약 150명의 국군부상병을 총살시켰다. 그러는 동안 한 인민군 군관이 권총을 빼 들고 우리들의 뒤를 따라다녔다. 내가 국군부상병을 사살한 단 하나의 이유는 그들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1차 학살에서 살아남은 부상병들에 대한 학살이 다음날 계속됐습니다. 부상병에게 수류탄을 던지기까지 했습니다. 인민군 4사단 전사 곽찬규(당시 21세)의 진술입니다.
“6월 29일 새벽 6시경 병원 뒤 야산에 약 180명의 국군 부상병을 한곳에 모은 후, 2소대와 3소대원 약 50명이 20미터 거리를 두고 1열로 서서 중대장 이낙기 중위의 구령으로 일제히 총살하였으며, 때를 같이하여 2소대원 이남규를 포함한 4명의 대원은 각각 수류탄을 부상병들에게 던졌는데 이것도 중대장이 지시하였던 것이다. 약 50명의 대원이 각 4・5발 발사한 후, 중대장 이낙기 중위와 제3소대장 김성열 소위, 제2소대장(성명 미상)이 각기 권총으로 완전히 죽지 않은 부상병들을 쏘아 죽였다. 현장에는 연대장 이임철 대좌와 연대참모장(중좌)이 같이 있었다.”

인면수심의 대학살에는 놀랍게도 서울대병원의 좌익 의사와 간호사들도 한 몫을 했습니다. 서울의대부속 고등간호학교(서울대 간호대 전신) 학생이던 박명자 씨의 증언입니다.
‘6.25전쟁이 터지자 자원해서 서울 혜화동 동성중학교 강당에서 밤새 부상병들을 돌봤다. 그러다 서울대병원으로 이송시키라는 지시에 따라 서울대병원으로 함께 이동했다. 6월 28일 아침 9시경 낙산과 창경궁 쪽에서 총과 포 소리가 귀가 떨어지도록 들리더니 인민군이 병원으로 들이닥쳤다. 한 의사가 수술실 바닥의 철판 아래 있는 지하실로 의료진을 대피시켰다. 그러나 잠시 뒤 우리는 모두 끌려 나왔다. 우리를 끌고 나온 사람은 바로 우리를 지하실로 들어가게 한 그 의사였다. 그는 인민군 군의관과 악수를 나눴다. 따발총을 멘 인민군 군의관은 전쟁 전에 월북한 서울의대 교수였다. 해방 후 의대생의 40%가 좌익이었다는 말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중략) 병실을 차례로 쳐들어간 인민군은 중상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는 국군 부상병들을 모조리 죽였다. ’인민군이 환자 죽여요‘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 민간인 환자들도 무고한 목숨을 잃었다. 몇몇 간호사와 의사들이 부상병들을 보일러실이나 지하실에 숨기기도 했다. 그러나 인민군들은 이 잡듯 모두 끌어내 간호학교 담벼락이나 나무 밑에 줄줄이 세워놓고는 모두 총살시켰다. 서울대병원은 학살의 붉은 피로 물들었다. 같은 동족끼리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1999년 6월호 월간조선 기사 요약)

서울대병원 비뇨기과 수간호사였던 배명애 씨의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이 일어난 다음날부터 국군 부상병들이 실려 오기 시작했다. 병실 바닥과 복도까지 빼곡이 부상병들로 채워졌다.(중략) 얼마 후 인민군이 충혈된 눈으로 총을 겨눈 채 들이닥쳤다. 나는 수술실로 끌려갔다. 하루 종일 인민군 간호를 하는데 수술실 밖에서는 총소리가 우당탕 났다. 꼼짝없이 잡힌 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다.(중략) 영안실 쪽 언덕에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울창한 나무들이 우거진 함춘원(사도세자의 묘를 썼던 곳) 동산에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학살의 광풍이 쓸고 간 다음날 6월 29일, 좌익 계열의 의사와 간호사들이 병원 정문 앞 광장에 모였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으샤 으샤’ 소리를 질러댔다. 개중에는 유명한 의사와 경력이 오래된 간호사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해방 후부터 전쟁이 나기 전까지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이들이었다.’ (1999년 6월호 월간조선 기사 요약)

6.25당시 육군 헌병사령부 소령이었던 송효순 전 육군 2사단장은 인민군의 만행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는 신념으로 서울대병원,대전형무소,정읍 등 인민군의 학살 현장 목격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1979년 송장군이 취재기록을 모아 출간한 ‘붉은 대학살’에는 더 구체적인 증언들이 담겨 있습니다.
“인민군은 오후 1시부터 환자들을 무료진료소에 집합시켰다. 병실에서 죽이면 한꺼번에 죽일 수가 없고, 자기들 부상자들을 치료할 때 곤란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파리한 모습에 구부정한 몸가짐을 한 환자들을 향해 인민군은 발포 명령도 없이 차례차례 죽이기 시작했다. 숨이 넘어가지 않아 헐떡이는 환자들은 총창으로 찌르고 개머리판으로 난타하고 발길로 목을 짓눌러 죽이기도 했다. 더 잔인한 인민군은 큰 돌을 번쩍 올려 환자의 머리에 내리치기도 했다. 어떤 부상병은 시체 더미 속에 살아남아 숨을 헐떡였다. 이를 본 인민군은 트럭 2대를 가져와 시체 더미 위를 서너 번 깔아뭉갰다.

병원 식당에 근무하던 김수복 씨(당시 48세)는 학살된 시체를 들것에 담아 영안실 근처 숲으로 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시체 대신 경상자나 산 환자를 실어내 숲 속에 숨겨주다 발각됐다. 인민군은 현장에서 그를 사살했다.
좌익 의사,직원들은 병원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학살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들의 안내로 인민군은 마지막까지 숨어있던 환자 수십 명을 석탄저장소로 끌고 가 5m 가량 쌓여있던 석탄더미를 그들의 위에 부어 학살했다. 석탄이 총상이나 파편을 맞은 부위에 떨어지면 환자들은 괴로운 신음소리를 냈다. 몸을 서너번 파르르 떨다가 이내 석탄의 무게에 짓눌려 숨이 끊기고 말았다. 서울대병원 기관실에 근무하던 김학영 씨는 “9.28 수복 직후 미군이 시체 발굴 작업을 했는데 석탄 속의 시체는 학살 당시 모습 그대로 모두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명륜동에 살던 황진아 씨는 경찰관이던 남편을 찾기 위해 중앙청 옆 남편 친구의 집에 찾아가는 길에 서울대병원 영안실 근처에서 시체더미를 목격했다. “병원 숲 속에 버려진 시체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시체 썩는 냄새는 이미 인근 동네에 퍼져 있었지만 막상 현장 가까이 와보니 코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시체는 모두 옷이 벗겨져 있었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퉁퉁 불어 곧 터질 것만 같았고 파리들이 까맣게 달라붙었다. 목불인견은 이를 두고 하는 말 같았다.”
1950년 7월 중순 인민군은 악취를 견딜 수 없었는지 시신을 소각했습니다. 창경원 앞과 혜화동 로터리 근처 아스팔트 도로에 시신을 쌓아 올린 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장마철이라 습도가 높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서울대 의예과 2학년이던 이석형 씨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시체를 쌓아놓은 뒤 불을 질렀는데 좀처럼 타지 않았다. 석유를 한차례 더 뿌리고서야 타기 시작했다. 불에 탄 시체들은 돌돌 말려 꼭 콜타츠처럼 되었다.”
목격한 참상을 그림으로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훗날 유명한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을 그린 김성환 화백입니다. 김 화백은 6월 28일 집을 나와 종로 쪽으로 가다 서울대병원 후문 바로 안쪽에 사체 십여 구가 어지러이 누워있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언뜻 봐도 입원해 있던 국군 부상병이라고 생각한 김 화백은 저녁 무렵 귀가해 그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인민군과 좌익 의사들은 의료진과 직원들에게 이 사건을 일절 발설하지 못하도록 위협했습니다. 많은 서울대병원 의사와 간호사들이 강제로 인민군을 위해 일하다 인민군이 퇴각할 때 납북됐습니다.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된 뒤에야 이 사건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서울대병원에 진주한 미 제5공군은 석탄저장소, 쓰레기장, 뒷산, 뜰 곳곳에서 시신과 유골 천 여구를 수습했습니다. 1950년 10월 창설돼 1954년 5월까지 활동한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Korean War Crimes Division)’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인민군에 대한 심문, 목격자와 주민 조사, 현장조사를 통해 1953년 6월 14일 80여 쪽에 이르는 상세한 보고서(KWC 사건파일 36)를 남겼습니다.

미군의 조사보고서는 사건 발생 3년 만에 나왔지만, 대한민국 정부의 결론은 사건 발생 75년 후인 2025년 3월 30일에야 나왔습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북한 정권에 의한 집단학살’로 규정하고 희생자를 ‘최소 330명에서 1,000명’으로 추정했습니다. 인민군 포로들이 구체적으로 증언한 6월 28일과 29일 두 번의 집단학살 희생자만 330여명입니다. 그러나 당시 800여개 병상인 서울대병원의 바닥과 복도까지 부상병들이 가득 차 있던 것을 감안하면 희생자가 천 명이 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은 희생자 수를 ‘150명에서 200명’으로 판단했지만, 이는 전범재판을 전제로 ‘기소를 위한 증거’가 있는 경우로 한정해 소극적으로 추산한 결과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인민군은 같은 날인 6월 28일 오전 11시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도 국군 부상병 100명을 병원 광장에 끌어내 4열 횡대로 앉힌 뒤 10미터 전방에서 ‘아시보 총’으로 살해하고, 11시 30분경 시신을 2대의 트럭으로 병원 밖으로 실어 날랐습니다. 이 역시 미군 한국전쟁범죄조사단이 인민군 이창범,김영구의 진술과 세브란스병원 의사 서상우 등의 진술을 통해 규명한 내용입니다.(KWC 사건파일 1183)
1949년 8월 12일 채택된 제네바 협약 12조는 적군 부상병에 대한 인도적 대우와 간호를 의무화한 국제법입니다. 그러나 서울대병원 집단학살사건은 제네바 협약은 커녕 사람과 짐승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 것인지 막막하게 만듭니다. ‘인간을 우선으로 한다’는 공산주의의 실체를 똑똑히 께닫게 됩니다. 희생된 국군 장병들의 시신이 쌓여있던 자리는 현재 서울대병원 후문 주차장 옆입니다. 이곳에는 1963년 7월 29일 건립된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여기에 자유를 사랑하고, 자유를 위해 싸운 시민이 맨 처음 울부짖은 소리 있었노라.
여기 자유 서울로 들어오는 이 언덕에 붉은 군대들이 침공해 오던 날
이름도 모를 부상병, 입원 환자.
이들을 지키던 군인,시민,투사들이 참혹히 학살되어 마지막 조국 부른 소리 남겼노라.
그들의 넋은 부를 길이 없으나 길게 빛나고
불멸의 숲 속에 편히 쉬어야 하리.
겨레여, 다시는 이 땅에 그 슬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말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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