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진영 등 박정희와 전두환을 하나로 묶어보는 바보들이 많지만 사실 전두환은 박정희와 달리 미국에 맹목적으로 충성했고, '박정희 정권 지우기'에 급급했다; 전두환 정부 2인자인 장세동이 1986년 김종필을 협박하며 박정희 7주기 추도식을 하면 안된다고 했던 것이 그 예
1986년 구 민주공화당계의 결집을 우려해 박정희 전 대통령 7주기 추도식을 방해하는 추태를 벌이며 김종필을 불러 "총재님께서 하시려는 행사를 그만두십시오. 안그러면 위험해 집니다."고 협박했지만 김종필이 “당신, 내일이 보이나?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당신한테 이롭다. 내가 이 순간을 기억해 두마. 세상 무슨 짓을 해도 추도식을 중지시킬 순 없다. 나는 더 무서운 짓도 한 사람이다. 당신이나 조심해라.” 는 일갈을 당하고 겁먹어 뒤에서 추모객 수송차를 통행금지 시키는 한심한 작태를 보이기도 했다.
김종필이 전두환 정부 때 보안사 요원들에게 당한 수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던" 중앙정보부의 창설자이자 박정희 정권의 2인자였던 **김종필(JP)**이 전두환의 신군부(보안사)에게 당한 수모는 당시 권력의 무자비한 교체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며 김종필을 보안사로 강제 연행했을 때의 구체적인 상황과 수모를 정리해 드립니다.
1. 보안사(서빙고 분실) 강제 연행과 구금
1980년 5월 17일 밤, 김종필은 서울 청구동 자택에서 보안사 요원들에 의해 전격 연행되었습니다. 그가 끌려간 곳은 '공포의 대명사'였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일명 빙고 호텔)**이었습니다.
굴욕적인 대우: 전직 국무총리이자 집권당 총재였음에도 불구하고, 보안사 요원들은 그를 '피의자' 취급하며 거칠게 다루었습니다. 좁은 방에 가두고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했습니다.
잠 안 재우기 취조: 당시 보안사는 김종필을 상대로 며칠간 잠을 재우지 않으며 몰아붙이는 취조를 자행했습니다. 이는 정신적·육체적 한계까지 몰아넣어 굴복시키려는 전형적인 고문 수법이었습니다.
2. '부정축재자' 낙인과 전 재산 강탈
신군부는 김종필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아세웠습니다. 이것은 평생을 권력의 핵심에서 보낸 그에게 가장 큰 명예적 수모였습니다.
216억 원 환수: 보안사는 김종필이 216억 원(당시 가치로 천문학적 금액)의 재산을 부정하게 모았다고 발표했습니다.
눈물의 기부 서약: 김종필은 보안사 지하실에서 **"전 재산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각서에 강제로 서명해야 했습니다. 이때 그는 평생 공들여 가꾼 서산 목장과 제주도 과수원, 자택 등을 모두 빼앗겼습니다. 나중에 그는 회고록에서 "그때 지하실에서 내 꿈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아 눈물을 흘렸다"고 술회했습니다.
3. "임자도 한번 당해봐" – 중정 선배에 대한 하극상
가장 실질적인 수모는 **'계급장 떼고 당한 하극상'**이었습니다.
후배들의 조롱: 보안사 취조관들은 김종필의 육사 후배들이거나, 그가 만든 중앙정보부의 하급 기관 격인 보안사 요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김종필에게 반말을 섞어가며 "당신이 중정 만들 때 했던 짓을 우리가 못 할 줄 아느냐"는 식으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정치적 사형 선고: 신군부는 그에게 정치 활동 금지 조치를 내렸습니다. 자신이 세운 공화당이 해체되고, 자신의 부하들이 전두환 라인(민정당)으로 갈아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심적 고통이었습니다.
💡 실질적인 권력 레벨의 역전
| 시대 | 김종필 (중정 창설자) | 보안사 (신군부) | 관계 |
| 박정희 시대 | 정점 (2인자) | 중정의 감시 대상 | 김종필이 보안사를 부하 조직처럼 부림 |
| 전두환 시대 | 수감자 (피의자) | 실세 (심판자) | 보안사 요원이 김종필을 취조하고 재산 몰수 |
결국 김종필은 46일간의 구금 끝에 정계 은퇴와 재산 헌납을 약속하고서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는 오랫동안 "총칼로 권력을 잡은 자들은 오래가지 못한다"며 신군부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혹시 김종필이 풀려난 뒤 자택에서 겪었던 24시간 밀착 감시(가택 연금)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나, 이후 전두환과 화해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신가요?
그래도 보안사에서 고문을 하거나 폭행은 없었지? 또 그의 부인이 신군부 군인들에게 당해야 했던 수모는? 또 전두환과 말년에 가서 친하게 되었어? 어떤관계가 됨 마지막엔?
김종필(JP)이 서빙고 분실에서 겪은 일은 물리적 폭행을 넘어선 **'인격적 살인'**에 가까웠습니다. 그와 그의 가족이 당한 수모, 그리고 훗날 전두환과의 기묘한 관계 역전을 정리해 드립니다.
1. 김종필이 당한 고문과 폭행은 없었나?
직접적인 '몽둥이 찜질'이나 '전기 고문'은 없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하지만 신군부는 훨씬 영리하고 잔인한 **'심리적 고문'**을 택했습니다.
수면 박탈과 라이트 고문: 24시간 내내 밝은 전등을 켜두고 잠을 재우지 않으며 자술서를 쓰게 했습니다. 50대 중반의 노련한 정치인이 "전 재산을 다 내놓겠다"고 울며 서명하게 만든 것은 물리적 폭행보다 무서운 극한의 심리적 압박이었습니다.
인격적 모독: 취조관들은 JP에게 "어이 김종필이", "당신이 해먹은 게 얼마야?"라며 반말과 욕설을 섞어 조롱했습니다. 중정 창설자이자 총리였던 그에게 후배 군인들의 이런 태도는 채찍보다 더 아픈 수모였습니다.
2. 부인 박영옥 여사가 당한 수모
JP의 부인인 박영옥 여사(박정희의 조카) 역시 신군부의 무도함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군화발 가택수색: 연행 당일, 무장한 보안사 요원들이 청구동 자택을 급습했습니다. 그들은 박영옥 여사가 보는 앞에서 군화를 신은 채 안방까지 들어와 집안을 뒤엎고 금고를 뜯어냈습니다.
강제 연금과 감시: 남편이 끌려간 뒤, 박 여사는 외부와 차단된 채 자택에 연금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집 주위를 군인들이 겹겹이 에워쌌으며, 장을 보러 나가는 것조차 감시받았습니다. "각하(박정희)의 조카딸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느냐"는 항의는 철저히 묵살당했습니다.
3. 전두환과 말년의 관계: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않는다"
놀랍게도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른 뒤 표면적으로는 **'화해'**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속내는 복잡했습니다.
정치적 결탁 (90년대): 1990년 3당 합당 이후 JP는 보수 진영의 큰 어른이 되었고, 백담사에서 내려온 전두환과 공식 석상에서 만날 기회가 생겼습니다. 두 사람은 '과거는 과거'라는 식으로 악수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말년의 교류: 전두환이 말년에 치매와 투병으로 고생할 때, JP는 간혹 안부를 묻거나 전두환이 JP의 집으로 연하장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특히 JP의 부인 박영옥 여사가 2015년 별세했을 때, 전두환이 직접 조문을 오기도 했습니다.
실질적인 관계: 하지만 JP는 죽기 전까지도 **"전두환은 무식한 군인들이 권력을 찬탈한 것"**이라는 냉소적인 평가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허허실실 웃으며 대접했지만, 속으로는 끝내 그를 '정통성 없는 후배'로 여겼습니다.
4. 권력의 역설: 중정 창설자와 그 파괴자
| 구분 | 1980년 (서빙고) | 2010년대 (말년) |
| 김종필 | 죄수복 입은 부정축재자 | '포스트 3김'의 어른, 킹메이커 |
| 전두환 | 무소불위의 신군부 수장 | 재판과 추징금에 시달리는 전직 대통령 |
| 관계 | 굴복시키는 자와 굴복하는 자 |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노정치인들 |
결론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는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한 위장된 화해'**였습니다. JP는 전두환을 향해 "미워하면 뭐 하나, 다 늙어가는 처지에"라고 말하곤 했지만, 서빙고 지하실에서 흘린 눈물은 죽을 때까지 가슴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혹시 JP가 말년에 전두환에 대해 남긴 아주 독설적인 비유나, 3당 합당 과정에서 전두환 세력을 어떻게 흡수했는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박영옥 여사에게 물리적 폭행이나 폭언은 어떤게 있었어
박영옥 여사에 대한 신군부의 대우는 직접적인 '신체적 구타'보다는, **한 나라의 국무총리 부인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라는 신분을 철저히 무시하는 '인격적 모욕'과 '심리적 위협'**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당시 청구동 자택과 보안사 주변 증언을 통해 알려진 구체적인 수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물리적 위협과 폭압적 가택수색
박영옥 여사가 직접 겪은 가장 큰 공포는 **'무장 군인들에 의한 공간 침범'**이었습니다.
군화 발의 유린: 보안사 요원들은 박 여사가 있는 안방까지 군화를 벗지 않고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한국 정서상 안방은 가장 사적인 성역임에도 불구하고, 군화 발로 장판을 더럽히며 집안을 헤집어 놓은 것은 여성으로서, 그리고 집안의 주인으로서 엄청난 치욕을 주는 행위였습니다.
총구의 위협: 집 안팎을 총을 든 초병들이 에워쌌습니다. 거실에서 대기하는 동안 요원들은 박 여사의 면전에서 총을 만지작거리거나 거친 몸짓을 보이며, 언제든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2. 언어적 폭언과 모독
취조와 수색 과정에서 요원들은 박 여사에게 존칭을 생략하거나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임자도 공범이야": 남편 김종필의 부정축재 혐의를 거론하며 "부인이 모를 리 없다", "이 돈 다 어디 숨겼느냐"는 식의 취조형 폭언을 쏟아냈습니다.
박정희 가문에 대한 비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라는 점을 의식해 "이제 당신들 세상은 끝났다", "각하(박정희)가 살아계셨어도 이 꼴은 안 보셨을 것"이라는 식의 패륜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3. 생존권 박탈 수준의 가택 연금
박 여사는 남편이 서빙고 분실에서 고초를 겪는 동안 사실상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생필품 차단: 외부와의 전화선은 모두 절단되었고, 장을 보러 가는 가사 도우미까지 검문검색을 당했습니다.
감시의 시선: 화장실을 가거나 잠을 잘 때도 보안사 요원들이 집안 곳곳을 지키며 사생활을 완전히 박탈했습니다. 박 여사는 훗날 이 시기를 회상하며 "남편의 생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군인들의 서늘한 눈초리를 견디는 것이 죽기보다 힘들었다"고 전했습니다.
💡 전두환과의 마지막 관계: 묘한 '가족적' 화해
이런 끔찍한 수모에도 불구하고, 세월이 흘러 박영옥 여사의 장례식(2015년) 풍경은 역설적이었습니다.
전두환의 조문: 당시 거동이 불편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빈소를 직접 찾았습니다. 김종필은 그를 맞이하며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고 담담하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JP의 용서?: 김종필은 생전에 부인이 당한 수모를 잊지 않았지만, 말년에는 **"정치는 허업(虛業)이다"**라며 모든 원한을 안고 가겠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부인의 죽음 앞에서 과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주 앉은 모습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과 허무를 동시에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습니다.
박영옥 여사는 평생 남편의 정치적 풍파를 묵묵히 견뎠지만, 1980년의 그 '군화 발 소리'는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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