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스트 자주인라디오 병쉰색희의 살리자르 옹호: 살리자르를 민주주의 투사로 칭송하는 얘 이야기만 들으면 살리자르가 모든 계층에 비밀경찰을 심어놓고, 반대파들을 정치범수용소게 가두고 고문시키고, 국제엠네스티 창설에 기여하고, 발레 로즈 스캔들을 권력으로 덮으려고 한 것은 파시즘이 아니고 그냥 불가피한 '국가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네; 자주인라디오를 보면 뭐 이런 병쉰같은게 다른 사람들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지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파시스트는 본인에게 불리한 댓글들 싹 다 지우고 단 한마디의 비판을 용인하지 못하는 밴댕이 소갈머리인 너잖아; 이런 입만 산 어용 유튜버가 권력을 잡았으면 세계는 지옥불 파탄 그 자체다; 살라자르 측근들에 의한 트루먼 쇼; 우민화 정책을 위해 중화학 육성정책을 하지 않고 1차 산업에 머무른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살라자르에 대한 마르세루 카에타누의 평: "우리는 천재의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만은 이제 다시 평범한 인간의 통치에 적응해야 합니다" / 프리메이슨에 의한 1908년 국왕 암살 사건 (Lisbon Regicide) / 영국 프리메이슨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동시에 영국 눈치를 보고, 영국과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했던 살라자르 - 포르투갈에 의한 남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을 막은 것도, 프리메이슨을 침투시켜 국왕을 암살시킨 것도, 포르투갈의 기지를 빌리고 NATO 창설 등 협조를 받아낸 것도, 살라자르 정권 견제용으로 발레 로즈 스캔들을 터뜨린 것도, 엠네스티를 만든 것도 영국 1

파시스트 자주인라디오 병쉰색희의 살리자르 옹호: 살리자르를 민주주의 투사로 칭송하는 얘 이야기만 들으면 살리자르가 모든 계층에 비밀경찰을 심어놓고, 반대파들을 정치범수용소게 가두고 고문시키고, 국제엠네스티 창설에 기여하고, 발레 로즈 스캔들을 권력으로 덮으려고 한 것은 파시즘이 아니고 그냥 불가피한 '국가통치의 수단'이었을 뿐이네; 자주인라디오를 보면 뭐 이런 병쉰같은게 다른 사람들을 파시스트라고 부르는지 혀를 끌끌 차게 된다; 파시스트는 본인에게 불리한 댓글들 싹 다 지우고 단 한마디의 비판을 용인하지 못하는 밴댕이 소갈머리인 너잖아; 이런 입만 산 어용 유튜버가 권력을 잡았으면 세계는 지옥불 파탄 그 자체다; 살라자르 측근들에 의한 트루먼 쇼; 우민화 정책을 위해 중화학 육성정책을 하지 않고 1차 산업에 머무른 살라자르의 포르투갈; 살라자르에 대한 마르세루 카에타누의 평: "우리는 천재의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만은 이제 다시 평범한 인간의 통치에 적응해야 합니다" / 프리메이슨에 의한 1908년 국왕 암살 사건 (Lisbon Regicide) / 영국 프리메이슨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서 동시에 영국 눈치를 보고, 영국과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했던 살라자르 - 포르투갈에 의한 남아프리카 식민지 건설을 막은 것도, 프리메이슨을 침투시켜 국왕을 암살시킨 것도, 포르투갈의 기지를 빌리고 NATO 창설 등 협조를 받아낸 것도, 살라자르 정권 견제용으로 발레 로즈 스캔들을 터뜨린 것도, 엠네스티를 만든 것도 영국 1

 

https://m.youtube.com/watch?v=q-Fpwh51y0w&pp=0gcJCTIBo7VqN5tD

 


파시즘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은 독재자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도 살아 남았다는 점에서 이웃나라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프랑코와 살라자르는 꽤 친했다고 한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살라자르가 프랑코를 지지했던 것도 있고, 내전이 끝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마자 추축국 편을 드는 듯 안 드는 듯 간보는 프랑코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고수하였으며 중남미콘도르 작전을 지원해 망명 온 중남미인들을 송환시켰던 것도 유사하다.

그러나 내전기와 내전 이후에도 자국민 수십만 명을 처형하고 탈출한 사람들을 체포 및 처형시켜 탈출을 법으로 금지하면서 연좌제를 시행하는 등 스페인 전역을 피로 물들인 프랑코와는 달리, 살라자르의 독재정권위주의적이고 고압적이긴 했지만 프랑코에 비해 온건했다. 실제로 반(反) 살라자르 야권의 거두였던 포르투갈 공산당 3대 당수 알바루 쿠냘만 하더라도 콩밥은 오래 먹었지만 사형은 당하지 않았고[25], 한때 손을 잡았지만 사이가 틀어진 프란시스쿠 홀랑 프레투 역시 국외 추방시키는 선에서 처리했다.[26] 그리고 자국민들이 탈출했을 땐 체포하지 않는 대신 국적 박탈을 하는 수준에서 끝내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해빙 무드를 타 비록 손발은 꽁꽁 묶어 두었지만 제대로 된 야당의 형성 또한 몇 년간 허가한 적이 있다. 물론 몇 년 뒤에 다시 금지했지만... 스페인은 실제로 피비린내나는 정치적 사형을 프랑코 정권 말엽까지 지속했지만, 포르투갈의 경우 대대적으로 처형하지는 않았다. 물론 사회의 거의 모든 계층에 비밀경찰을 심어놓거나 반대파들을 정치범수용소[27]에 가두고 고문하는 것은 독재자다웠다.

[27] 리스본 근처 카시아스 교도소, 카보베르데 섬의 타라팔 수용소 등이 있었으며, 카시아스 교도소는 도심 한가운데에 있어서 거리에서 고문당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외교적으로는 미국의 심기를 크게 거스르지 않고, 스페인의 프랑코 같은 강력한 억압 통치를 한 것도 아니라서 30여 년간 장기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살라자르 정권에서 수혜를 입었던 가톨릭 교회 측도 지지 세력 중 하나였다. 2007년 포르투갈 국영방송RTP가 시행한 위대한 포르투갈인 설문 조사에선 인판트 동 엔히크,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바스쿠 다 가마대항해시대를 연 세계사적 위인들이 포함된 20명의 최종 후보들 중 41%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28] 물론 이와 같은 설문 조사는 대부분 현대 정치인이 포함되면 진영논리에 따라 이전 위인들이 배제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꽤나 충격적인 결과였다. 그리고 이때 2등을 한 인물은 살라자르 정권기 반정부 인사 중 최대 거물이었던 포르투갈 공산당의 당수 알바루 쿠냘이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라이벌 민간방송사 SIC에서는 최악의 포르투갈인 설문 조사를 했는데, 여기서도 1위 살라자르, 2위 쿠냘이 차지했다. 즉, 가장 위대한 포르투갈인이자 최악의 포르투갈인인 셈이다. 

 


  • 1967년 12월 10일 살라자르 정권에 알려진 영국 언론의 보도가 실로 충격적이었는데, 당시 사회 고위층들[35]8 ~ 12세의 어린이들과 난교와 사디즘, 마조히즘적 행각을 벌여 최소 1명의 소녀가 사망했다는 끔찍한 사건이었다. 일명 발레 로즈(Ballet Rose) 스캔들. 살라자르는 이 스캔들을 은폐하기 위해 외국 변호사와 언론인들에 대해 추방과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고, 이에 안투네스 바렐라 법무장관은 항의 차원으로 사임했다. 또 이 스캔들을 폭로한 기자 2명은 3개월 동안 체포되어 1968년 3월에 풀려났고, 이 소식을 폭로한 마리우 소아르스(Mário Soares)는 해외에서 포르투갈에 대한 허위 소식을 퍼뜨리고 국제 신문의 뉴스 소스가 된 혐의로 기소되어 카시아스 교도소에 감금되어 크리스마스를 보낸 후 상투메프린시페로 추방되었다. 수사는 실질적인 결과를 거의 얻지 못하고 주요 및 가장 악명 높은 가해자의 유죄 판결 없이 사건이 종결되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진 고위 인사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참고 자료
  • 예기치 못하게 유명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의 창설에 기여하기도 했다. 1961년에 피터 베넨슨(Peter Benenson)(1921년 ~ 2005년)이라는 영국인 변호사가 살라자르 치하의 포르투갈에서 술자리에서 "자유를 위한 건배"라는 말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청년 2명이 잡혀갔다는 소식에 분개하여 국제앰네스티를 창설했기 때문이다.
  • 향년 81세로 독재자치고는 장수한 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살라자르 정권을 지식인 독재라고 할 정도로 정권 수뇌부에 기술관료들을 배치하여 실무를 분담한 것을 들 수 있다. 일반적인 독재자들은 여러 권력과 권한을 모두 본인이 쥐고 관리하려다 보니 국정 운영을 위한 격무를 감내해야 한다.[36] 살라자르는 이런 식으로 업무를 분담해 과로를 줄였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1958년 1월 13일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와의 인터뷰에서 살라자르에 대해 "내가 아는 모든 정치인 중에서 가장 완벽하고 가장 존경받는 정치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살라자르. 이 사람은 지성, 정치적 감각, 인간성 면에서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의 유일한 단점은 아마도 겸손함일 것입니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일각에서는 경제 문제로 스페인 독재자 프랑코를 살라자르보다 상대적 고평가하는 의견도 있다. 어차피 비슷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국가적 역량 자체가 차이가 난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스페인은 2류 국가로 몰락했어도 여전히 열강으로 분류되었던[31] 반면,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가 막을 내릴 때 열강에서 탈락하여 중소 국가로 전락했다. 그리고 오히려 스페인은 프랑코의 집권 초중기 경제적인 실책으로 원래 잠재력은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지만 살라자르 치하 포르투갈은 1차 산업으로 인해 장기적인 성장률은 프랑코의 스페인보다는 나았다.

다만 살라자르의 경제 정책은 1, 3차 산업에 치중하여 제조업을 키우지 못했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물론 살라자르도 철강, 기계 제조업 분야의 기업들을 육성하려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결국 당시 제조업은 국영기업이 주도하는 경공업 위주로 발전했고, 이 기업들의 상당수가 1980년대민영화되자 외국계 다국적 기업에 인수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외국계 자본은 오래 지나지 않아 경쟁력이 떨어지는 포르투갈 내 생산 시설을 폐쇄하면서 포르투갈의 제조업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유로화 사태 당시 포르투갈에 치명타를 안겨줬고,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에 비해서도 회복이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틀린 주장은 아니다.[32] 

 

 










 

 

2.3. 건강 악화와 실각, 사망[편집]

살라자르는 말년인 1968년 들어 국제정세의 급변과 건강 악화로 인해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평소 살라자르는 유럽에 다시 질서를 부여했다고 높이 평가해온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68혁명으로 실각하는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는데, 그는 온 세계가 '폭도'들의 '난동'으로 '미쳐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6월 12일의 내각회의에서 살라자르는 옛날에 처리가 완료된 안건들을 가져와서 중언부언하기 시작했으나 각료들은 아무도 살라자르에게 토를 달지 못하고 눈치만 보았다.

7월 들어서 살라자르는 좀 회복된 것처럼 보였으나 8월 3일 오전 9시에 신문을 보면서 이발을 하던 도중 의자가 부러지는 바람에 돌로 된 바닥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다. 이후 살라자르는 심각한 두통을 호소하였으며 각의에서도 맛이 간 상태였고 글씨도 잘 쓰지 못했다. 이후 뇌출혈이 발견되어 9월 7일에 뇌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잘된 것 같았고 살라자르는 집에서 요양을 하기로 했는데, 9월 16일에 심각한 뇌졸중이 발생하면서 살라자르는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미국 의료진이 소환되어 살라자르의 상태가 심각하다고 진단하였고 내각은 신속하게 살라자르의 후임을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삶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중략) 우리는 천재의 지배를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만은 이제 다시 평범한 인간의 통치에 적응해야 합니다.

마르셀루 카에타누
이에 따라 마르셀루 카에타누가 신임 총리로 선출되었다.

투병 중이던 살라자르는 11월 말에 스스로 다시 호흡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밥을 먹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오른팔이 마비되고 한 쪽 눈도 보이지 않았다. 1969년 1월에 이르러 살라자르의 용태가 호전되어 그는 프랑스어로 유창하게 다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1969년 2월 5일에 다시 자신의 관저로 돌아갔다.

살라자르의 측근들은 살라자르가 실권했다는 진실을 알지 못하도록 노력하였고, 그 덕분에 살라자르는 자신이 이미 실각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자신이 요양하고 있다고만 여겼다. 그는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빨리 직무 복귀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며,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고 생각했다.

살라자르의 측근들이 살라자르에게 진실을 감추기 위해 들인 노력은 상당히 공들인 것이었다. 우선 정부 각료들은 살라자르가 더 이상 총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였다. 살라자르에게 배달되는 신문은 살라자르 1명만을 위해 가공된 특제 신문이었고, 살라자르가 의식을 회복한 뒤로는 측근들이 국내 지역 방문 등 총리로서의 대외활동을 빙자한 연극도 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라자르가 조금만 제대로 알아보려 노력했다면 진실을 알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쉽게 속아넘어간 이유는 그가 사저에만 틀어박힌 채 기자회견도 안 하고 해외순방도 안 하는 등의 폐쇄적인 생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결혼도 하지 않았고[20] 당연히 가족도 없는 무연고자였으니 진실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21] 그러니 정보통 몇 개만 통제해줘도 진실을 알기 어려웠다.[22]

그리고 살라자르가 회복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살라자르의 정신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노인들 중에서 정정하다가 갑자기 부상을 당하거나 병을 앓고 나서 섬망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살라자르가 딱 그 경우였다. 일반적으로는 그냥 골골대던 살라자르가 측근들의 현실판 트루먼 쇼에 속았다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살라자르를 옆에서 모신 측근들에 따르면, 뇌졸중 이후로 살라자르는 확실히 정신이 나가서 마치 리어 왕처럼 과거의 자신만 기억하며 행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살라자르는 새 총리인 카에타누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더러 자신에게 감히 맞설 용기가 있는 인물이라고 칭찬하면서 그가 정말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교편을 놓고 정부에서 일해야 한다고 훈수를 두는 등 현실과 동떨어진 말만 했다.[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측근들이 살라자르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은, 살아남은 그의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기억력을 보고 살라자르가 정상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어쩌면 살라자르가 정말로 회복해서 정계에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여겼으며 정부 각료들도 차마 살라자르에게 그의 정치적 경력이 끝장났다고 감히 통보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를 40년간 시중든 가정부는 의식 회복 이후 그에게 건강이 나쁘다며 총리직을 사임할 것을 부탁했지만 자신 외에 포르투갈을 이끌 사람은 없다며 죽을 때까지 사임을 거부했다고 한다.[24] 출처

카에타누가 살라자르의 측근들을 쫓아내면서 자신만의 정치를 실현해 가던 중인 1970년 7월, 살라자르의 건강은 급격히 악회되었다. 그의 콩팥에 감염이 발생했고 투석기에 의존하면서 끈질기게 버텼으나 7월 27일 오전 9시 15분에 사망했다. 이미 그가 실각했음에도 포르투갈은 충격에 휩싸였고 정부 기관지들은 살라자르의 부고에 무려 11페이지를 할애하면서 '지난 40년간 곧 포르투갈이었던 분이 서거하시였다.'라고 보도했다. 나토 회원국인 만큼 브뤼셀의 NATO 사령부도 조기를 게양했으며 조문객도 많았다. 사후 그의 시신은 고향인 산타콤바당의 묘지에 묻혔다.

그가 죽은 지 4년 후인 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으로 포르투갈은 민주화되고, 식민지였던 앙골라, 기니비사우, 모잠비크, 상투메 프린시페독립을 승인하는 등 그때까지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에 대한 권리도 중국 정부가 반환을 미룬 마카오만 제외하고 모조리 포기한다. 참고로 카네이션 혁명은 좌파 성향의 젊은 장교들이 주축이 된 군부 주도 하에 이루어졌는데 흔히 군부가 쿠데타로 독재 테크를 타는 나라들이 많은 것을 고려하면 이것도 묘한 지점. 살라자르는 생전 열악한 경제상황 때문에 장교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그 해법으로 젊은 장교들에게 부르주아 가문의 여성과 결혼하라고 권하기도 했으니 어찌 보면 장교들의 불만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포르투갈 제1공화국 수립 과정에서 **프리메이슨(Freemasonry)과 카르보나리(Carbonária)**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에 매우 근접한 지적입니다. 다만, '왕의 암살'과 '공화국 수립' 사이의 선후 관계와 주체를 명확히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공화주의 세력(그 중심에 프리메이슨이 있음)이 조직적으로 왕실을 압박하고 결국 혁명을 통해 공화국을 세운 것은 사실입니다.


1. 1908년 국왕 암살 사건 (Lisbon Regicide)

1908년 2월 1일, 포르투갈의 국왕 카를루스 1세와 왕세자 루이스 필리피가 리스본 광장에서 암살당합니다.

  • 배후: 이 암살을 실행한 이들은 비밀 결사인 카르보나리(Carbonária) 단원들이었습니다. 카르보나리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혁명 조직의 포르투갈 지부 격으로, 프리메이슨보다 훨씬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는 하부 조직 성격을 띠었습니다.

  • 프리메이슨과의 관계: 당시 포르투갈 프리메이슨(Grande Oriente Lusitano)의 고위 간부들이 카르보나리의 핵심 인물들과 겹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프리메이슨이 '이념과 전략'을 제공했다면, 카르보나리는 '행동대'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프리메이슨이 공화국을 세웠는가?

예, 사실상 그렇습니다. 1910년 10월 5일 혁명을 주도한 포르투갈 공화당(PRP)의 핵심 인사들 대다수가 프리메이슨 단원이었습니다.

  • 조직적 기반: 당시 프리메이슨 지부(Logias)는 공화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거점이었으며, 군대 내 장교들을 포섭하여 혁명을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인 네트워크를 제공했습니다.

  • 제1공화국의 성격: 공화국 수립 후 구성된 임시정부 각료들 중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었으며, 이들은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박탈하고 국가와 종교를 분리하는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는 프리메이슨의 핵심 기조와 일치합니다.


3. '혹자의 지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

"왕을 암살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옳은 사실로 받아들여집니다.

  1. 연속성: 1908년 왕실 암살 사건은 군주제의 권위를 완전히 무너뜨렸고, 이는 1910년 혁명으로 가는 결정적인 길을 닦았습니다.

  2. 인적 구성: 공화국 수립을 이끈 정치인, 군인, 지식인의 대다수가 프리메이슨의 일원이었습니다.

  3. 반가톨릭 주의: 제1공화국이 추진한 극단적인 반교회 정책은 당시 프리메이슨이 지향하던 '합리주의와 세속주의'의 결과물이었습니다.

4. 주의할 점 (음모론 vs 역사)

일부에서는 이를 단순한 '비밀 결사의 음모'로만 치부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당시 포르투갈 군주제는 부패와 경제난으로 이미 붕괴 직전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무너져가는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공화제)를 수립한 실질적인 정치 세력으로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요약하자면: 포르투갈 제1공화국은 프리메이슨이 설계하고, 카르보나리가 행동(암살 및 폭동)으로 옮겨 세운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혹시 이 역사적 사실이 아까 물어보신 **살라자르(Salazar)**의 등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궁금하신가요? 살라자르의 '에스타두 노부' 독재 정권은 바로 이 제1공화국의 혼란과 프리메이슨 세력에 대한 반발로 등장하게 됩니다. 살라자르와 프리메이슨의 갈등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가요?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Salazar)**와 프리메이슨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싸움을 넘어, '가톨릭 보수주의'와 '세속적 자유주의'의 정면충돌이었습니다.

살라자르는 프리메이슨을 자신의 정권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탄압했습니다. 그 갈등의 핵심 내용을 3가지 포인트로 정리해 드릴게요.


1. 이념적 충돌: "신, 조국, 가족" vs "자유, 평등, 박애"

살라자르가 내세운 통치 이념은 **'에스타두 노부(Estado Novo, 신국가 체제)'**였습니다.

  • 살라자르의 가치: 권위주의, 가톨릭 전통, 국가의 질서, 가족 중심주의.

  • 프리메이슨의 가치: 합리주의, 정교분리(세속주의), 개인의 자유, 민주주의.

살라자르에게 프리메이슨은 포르투갈의 전통적인 가톨릭 정신을 파괴하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던 '제1공화국'의 배후 세력이었습니다. 그는 프리메이슨을 **"외세와 결탁하여 국가를 전복하려는 비밀 결사"**로 간주했습니다.

2. 1935년: 프리메이슨 금지령 (Law No. 1901)

갈등이 정점에 달한 것은 1935년이었습니다. 살라자르는 법률 제1901호를 통과시켜 모든 비밀 결사(Secret Societies)를 불법화했습니다. 이 법의 타깃은 명확히 프리메이슨이었습니다.

  • 철저한 탄압: 프리메이슨의 모든 지부(Logias)가 폐쇄되었고,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 공직 배제: 모든 공무원은 "나는 비밀 결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서약을 해야 했으며, 프리메이슨 단원임이 밝혀지면 즉시 해고되었습니다.

  • 지하 활동: 많은 프리메이슨 단원이 체포되거나 국외로 망명했으며, 남은 이들은 비밀 경찰(PIDE)의 감시를 피해 아주 깊은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3. 왜 살라자르는 그토록 프리메이슨을 두려워했나?

살라자르가 프리메이슨을 탄압한 실질적인 이유는 그들의 '엘리트 네트워크' 때문이었습니다.

  • 군대와 지성계 장악: 프리메이슨은 군 장교, 대학 교수, 고위 관료들 사이에 촘촘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재자였던 살라자르에게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는 이러한 '엘리트 비밀 네트워크'는 언제든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는 시한폭탄과 같았습니다.

  • 제1공화국의 악몽: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왕을 암살하고 공화국을 세웠던 주역들이 프리메이슨이었다는 사실은 살라자르에게 강력한 경계심을 심어주었습니다.


결과: 1974년 카네이션 혁명까지의 긴 겨울

살라자르 집권기 내내 프리메이슨은 포르투갈에서 숨을 죽여야 했습니다. 이들의 활동이 다시 양지로 나온 것은 1974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살라자르 체제가 완전히 붕괴된 이후였습니다.

재미있는 지점: 살라자르가 그토록 수호하려 했던 가톨릭 교회 역시 프리메이슨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살라자르의 탄압을 지지했습니다. 즉, 살라자르-가톨릭 교회라는 강력한 보수 연합이 프리메이슨이라는 자유주의 세력을 40년 가까이 억눌렀던 것이 포르투갈 현대사의 비극이자 특징입니다.

혹시 살라자르가 프리메이슨 외에 또 어떤 세력을 탄압했는지, 혹은 그가 구축한 **비밀 경찰(PIDE)**의 잔혹한 감시 체계에 대해서도 궁금하신가요?

 

 

 

역사적으로 **포르투갈 프리메이슨은 영국 프리메이슨과 매우 긴밀하고도 특수한 '형제적 관계'**에 있었으며, 영국의 강력한 지원과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관계는 단순히 종교적, 사상적 유대를 넘어 **포르투갈과 영국의 오랜 군사·정치적 동맹(윈저 조약 등)**과 궤를 같이합니다.


1. 역사적 뿌리: 영국식 프리메이슨의 도입

포르투갈에 프리메이슨이 처음 전파된 경로 자체가 영국이었습니다.

  • 18세기 초: 리스본에 거주하던 영국인 상인들과 해군 장교들에 의해 첫 지부(Logia)가 설립되었습니다.

  • 명칭의 유래: 초기 포르투갈 프리메이슨은 영국의 영향을 받아 '영국적 합리주의'를 따랐으며,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눈에는 '영국 스파이'나 '이단'으로 비치기도 했습니다.

2. 살라자르 집권기 영국의 '보이지 않는 손'

살라자르가 프리메이슨을 탄압할 때, 영국 프리메이슨(UGLE, United Grand Lodge of England)은 포르투갈 형제들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도왔습니다.

  • 망명지 제공: 살라자르의 비밀경찰(PIDE)을 피해 도망친 포르투갈 프리메이슨 단원들은 주로 런던으로 망명했습니다. 영국 프리메이슨은 이들이 런던에서 지부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장소와 자금을 지원했습니다.

  • 국제적 압력: 영국 정부 내의 고위 관료들 중 상당수가 프리메이슨이었기 때문에, 영국 정부는 외교적인 경로를 통해 살라자르 정권의 과도한 탄압을 견제하는 비공식적인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 정보 공유: 유럽 내 프리메이슨 네트워크를 통해 살라자르 정권의 동향을 파악하고, 지하로 숨어든 포르투갈 단원들과 소통하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3. 왜 영국은 포르투갈 프리메이슨을 도왔을까?

영국 입장에서 포르투갈 프리메이슨은 '포르투갈 내의 친영파 엘리트' 집단이었습니다.

  1. 동맹 유지: 영국은 전통적으로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어왔습니다. 프리메이슨 네트워크는 이 동맹을 민간 엘리트 차원에서 유지하는 강력한 끈이었습니다.

  2. 가톨릭 견제: 영국은 개신교 국가(혹은 세속 국가)로서, 포르투갈이 극단적인 가톨릭 보수주의(살라자르 체제)로 흐르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프리메이슨의 세속주의 사상은 영국의 이익과 부합했습니다.

4. 한계: 전략적 모호성

하지만 영국 정부가 살라자르를 대놓고 무너뜨리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살라자르가 중립을 지키며 영국의 아조레스 제도를 기지로 빌려주는 등 전략적 협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국 프리메이슨의 지원은 주로 **'인도적 차원의 보호'와 '지하 조직의 유지'**에 초점이 맞춰졌습니다.


요약하자면: 포르투갈 프리메이슨은 탄생부터 탄압의 시기까지 **영국 프리메이슨의 정신적, 물리적 지원을 받은 '영적 지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살라자르가 프리메이슨을 "외세(영국)와 결탁한 세력"이라고 비난한 것에는 이러한 역사적 근거가 있었던 셈입니다.

영국과 포르투갈 프리메이슨의 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깊죠? 혹시 이들의 관계가 나중에 카네이션 혁명이나 현대 포르투갈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궁금하신가요? Would you like me to explain how this Freemason network influenced the fall of the dictatorship?

 

 

 

 

//

 


따라서 먹물 중 먹물인 교수님 살라자르는 먹물들이 많아지면 정권 유지가 힘들다면서 노골적인 우민화 정책을 실시했다. 옆나라의 프란시스코 프랑코만 해도 지식인, 문화인사 가리지 않고 신나게 공식적, 비공식적 사형을 남발했지만 살라자르는 나라의 절반을 작살낸 내전을 통해 집권한 것도 아니고, 군인도 아니었을 뿐더러, 무엇보다 포르투갈의 핵심적이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맹이라고도 할 정도의 전통적 동맹이자 비호 열강이면서도 자유주의 국가였던 영국의 눈치를 봐야 했다. 지식인들을 노골적으로 처형하면 이웃나라처럼 안좋은 국제적 주목만 끌걸 뻔히 알고, 비폭력적 수단을 선호했던 살라자르는 이런 골치아픈 반체제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려 한 것이다. 다만 초등교육은 보편화시켰는데 글을 쓰거나 기본적인 셈은 할 줄 알아야 제대로 일을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11] 문맹률도 1950년에는 40.4%로 감소했다.[12] 하지만 중등 교육이나 고등 교육에 대해서는 냉담했다.[13]

본국의 교육 사정이 이러하니 당연히 식민지에서의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어서 앙골라는 전체 인구의 98% 가량이 문맹이었고 모잠비크도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 이상이었다. 또 내수 산업 개발보다는 해외 식민지 경영에 집중해 포르투갈의 산업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비록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 유럽이 쑥대밭이 되어가는 와중에 중립을 지키면서 추축국연합국 모두에 군수 물자를 수출하면서 어느 정도의 경제 발전을 이루는 듯 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탈식민지화의 바람이 불어 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식민 통치에서 벗어날 때, 포르투갈은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등은 영구한 포르투갈 영토라는 논리 하에 해외 식민지에 집착하여 오랫동안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벌였고, 이는 국가 재정과 경제 전체에 많은 악영향을 끼쳤다.[14] 결국 포르투갈은 살라자르가 물러난 1968년에야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을 넘겼을 뿐더러 그 포지션을 80년대 중반까지 맴돌았을 정도로[15] 서유럽의 최빈국이 되어버렸다.[16] 

 

독재 체제임에도 외교에서 상당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븐 사우드와 함께 연합국 측에 호의적이었고 아소르스 제도 등의 군사기지를 영국미국에 제공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냉전기 미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해 나가면서 OECD, NATO, EFTA국제기구 창설에도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줬다.[18] 바로 옆의 스페인이 내전의 기억을 통해 전후 유럽 외교가에서 동서방을 초월한 국제왕따로 추락하고, UN을 비롯한 각종 국제 기구도 '파시스트와 야합하는 서방'에 대한 소련동구권의 가열찬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유럽 동맹국들을 겨우겨우 어르면서 참여시키는 등[19] 악명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을 겪은 것과 대조적이다.

 [7] 19세기 후반 앙골라, 모잠비크에 있던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를 육로로 연결하려고 한 번 시도했으나 남아프리카 일대에 막대한 관심을 가졌던 전통적인 우방 영국의 견제로 실패한 이후 포르투갈 제국은 열강의 식민지 확장 경쟁에서 실질적으로 탈락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