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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사태를 통해 생각해보는 인간관계의 허무함 / 30여년 가깝게 불교와 금강경을 같이 공부했으며, 회사 회장-사장 관계이자 사제관계였다는 사람들 사이의 이 추잡한 고소고발은 불교공부 따위 무슨 쓸모가 있으며, 인간관계 따위 무슨 쓸모가 있냐는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http://m.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601100017

[격정토로] 김강유 회장이 직접 밝히는 ‘김영사 사태’의 전말

“베스트셀러 제조기라는 ‘박은주 신화’는 사실과 많이 달라”

글 : 김성동  월간조선 기자 / 사진 : 서경리  월간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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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교주라 불려도 상관없다. 나는 어차피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김영사에 사이비 집단 같은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 김영사는 90년대 베스트셀러만 139종 낸 국내 최고의 출판사
⊙ “박은주 전 사장의 횡령·배임·사기 고소에 황당했고 적반하장이었다”
⊙ “박 사장이 개인 비리를 ‘사이비 교주’ 등 나에 대한 비난 여론을 이끌어 덮으려 했던 것”
⊙ “신도가 7~8명뿐인 사이비 교주도 있나?”
⊙ “나는 은둔의 삶을 산 게 아니라 성격상 조용한 삶을 산 것”

김강유
⊙ 69세. 성균관대 불문과 졸업. 김영사 설립.
그는 차분했다. 첫인상도 그랬고 긴 시간에 걸친 인터뷰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도 그랬다. ‘사이비 교주’ ‘횡령’ ‘사기’ 등 그의 입장에서는 듣기 거북했을 질문에도 그의 어조는 흔들림 없이 차분함을 유지했다. 참선하고 있는 스님의 모습이라고 할까, 체구는 작지만 참 단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강유 ‘김영사’ 회장. 출판문화계에서도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든 출판사 중 하나인 김영사라는 출판사와 그곳을 이끈 것으로 대외적으로 알려졌던 박은주 전 김영사 사장의 이름은 인구에 회자됐지만 정작 김영사를 만든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최근 갑자기 유명해졌다. 그것도 신도들을 갈취하고 여성 관계도 문제가 있는 ‘사이비 교주’ 이미지로 말이다. 어떤 이유로 그에게는 그런 이미지가 생긴 것일까.
 
  김영사는 1976년 김강유 회장이 만든 출판사다. 첫 이름은 ‘정한사’였으나 1979년 사명(社名)을 바꿨다. 현재까지 인문, 문학, 과학, 환경, 철학,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3300여 종의 책을 발간해 오고 있다. 유명 대형서점과 언론사에서 매년 집계하는 ‘연간 베스트셀러 50’에 가장 많은 책을 등재한 출판사다. 1989년 펴내 최단기간 100만 부 판매 기록과 국내 최초 단행본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비롯해 《빵장수 야곱》 《닥터스》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먼나라 이웃나라》 《정의란 무엇인가》 등의 베스트셀러를 연이어 출간했다. 1990년대에만 이 출판사에서 발간한 베스트셀러가 139종이다. 매달 평균 1권 이상의 베스트셀러를 낸 셈이다.
 
  1989년 출판사 경영이 안정기에 들어서면서 김 회장은 대표이사직을 당시 32세의 편집장이었던 박은주씨에게 물려줬다. 박은주씨는 미국 유학 기간 3년(1995~1998년)을 제외하고 줄곧 김영사 사장으로 재직하다가 2014년 5월 말 갑자기 사직했다. 박 사장의 사직 후 창업자인 김 회장이 다시 대표이사직에 복귀했다. 출판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알려졌던 박은주 사장의 갑작스런 퇴임과 김 회장의 복귀 배경을 둘러싸고 출판계에서는 갖가지 추측이 나돌았지만 이 일은 이내 잊히는 듯했다.
 
  김영사와 김강유, 박은주라는 이름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것은 박 전 사장이 사퇴한 지 1년여가 다 돼 가던 2015년 5월이었다. 한 주간지는 ‘메이저 출판사 김영사 시끄러운 내막’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부제는 ‘전직 직원들 주장 “회장이 법당 차리고 직원들 노동력 요구”’였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김강유 회장이 직원들에게 돈과 노동력을 요구했고, 회사에 대한 배임·횡령 의혹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사장직 사퇴 후 잠적한 것으로 알려졌던 박은주 전 사장은 7월 말 한 중앙일간지와 인터뷰를 가지면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박 전 사장이 7월 23일 김 회장을 검찰에 배임·횡령·사기 혐의로 고소한 직후였다. 그 액수만 350억원 규모였다. 인터뷰를 통한 박 전 사장의 주장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박 전 사장은 “1984년부터 2003년까지 20년 동안 부모님도 버리고 법당에서 숙식을 하며 출퇴근했다”며 “그 20년 동안 자신이 번 돈 총 28억원을 김강유 교주에게 바쳤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그동안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스승’ 또는 ‘멘토’라고 호칭해 왔던 김 회장을 ‘교주’라고 표현한 것이다. 게다가 김 회장이 재산 포기 및 횡령 각서를 들이대며 자신에게 서명하라고 협박했다는 주장도 했다.
 
  김 회장은 그때부터 부정적 이미지의 유명인사가 됐다. 이 인터뷰 후 각 언론이 김 회장의 집이 있는 용인시 마북동 소재 ‘백성농원’을 현장 취재하는 한편, 불교 신자인 김 회장이 이끄는 금강경 공부 모임, 박 전 사장이 주장한 여자 관계 등을 흥미 위주로 보도했다. 일련의 보도들은 어느새 김 회장을 출판인이 아닌 ‘사이비 교주’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 유명세 덕에 김 회장은 지난 9월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내가 이름을 바꾼 이유
 
경기도 용인 ‘백성농원’ 입구에 있는 이탈리아 식당 ‘여시관’. 김강유 회장이 외부 손님들을 맞을 때 애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11월 25일 박 전 사장의 고소에 대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박 전 사장이 고소한 지 4개월이 막 지나던 시점이었다. 그 기간 동안 사건과 관련해 침묵으로 일관해 왔던 김강유 회장을 지난 12월 7일 용인에서 만났다. 그는 용인 백성농원에 터 잡은 이유부터 설명했다.
 
  “제가 농사를 지으며 수행하는 것을 꿈꾸어 왔는데, 30년 전 우연히 이곳을 소개받게 되었습니다. 뜻 맞는 사람 몇 분에게 이야기해 함께 농사짓고 공부하는 장소로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많이 유명해졌는데요.
 
  그는 한숨을 쉬듯 “하” 하며 입을 열었다.
 
  “박은주 전 사장 덕분에 뜻하지 않게 유명해졌네요. 덕분에 난생처음 검찰에도 출두해 보고 국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도 해보고….”
 
  ―이름을 김정섭에서 김강유로 바꿔서 유명해졌나 봅니다.
 
  “제가 이름을 바꾼 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지….”
 
  ―뭔가 과거를 숨기고 싶어서 이름을 바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숨길 것도, 숨긴 것도 없는 삶을 살고 있고, 살아왔어요. 제 한자 이름이 성명학적으로 획수가 맞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저도 원래 제 이름의 어감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 7년 전쯤에 어떤 분이 이름을 바꾸는 게 좋겠다고 하면서 이름을 하나 지어주었는데 제가 듣기에 괜찮았어요. 그래서 바꾼 거예요.”
 
  ―박은주 전 사장에게도 이름을 바꾸라고 권했는지요?
 
  “제 개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길래 ‘너도 바꾸겠니?’ 하고 물었더니 좋다고 하면서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박상휘’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좋아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개명하는 것이 무슨 그렇게 이야깃거리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번 고소 건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는데요.
 
  “처음에 박 사장이 저를 고소했다고 해서 굉장히 황당했습니다. 믿어지지도 않았고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가까운 절에 갔습니다. 부처님이 제게 ‘무슨 일 있었니? 그게 무슨 특별한 일이냐?’ 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마 제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으니까 부처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로 들렸겠죠. 저는 스스로 잘못된 길을 걸어오지 않았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검찰 조사에 응했습니다.”
 
  ―박 전 사장이 왜 김 회장을 고소했다고 보는지요.
 
  “사건의 본질은 저명인사가 된 박 전 사장이 대표이사의 지위를 남용해 배임 등 개인 비리를 저질러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고 이 같은 사실이 내부감사를 통해 적발되자 악의를 가지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저와 김영사 이사진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자신의 비리를 감추고 왜곡시키려는 데 있었다고 봅니다. 그 밖에도 입에 담기에 민망한 다른 이유들도 있지만 여기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검찰 조사 중 박 전 사장과의 대질신문도 있었을 텐데요. 얼굴 보기 민망하지는 않았습니까.
 
  “세 차례 있었어요. 민망하다기보다는 (그런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그런 일로 우리 둘이 검찰에 출두해 대질신문을 하고 그러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못했으니까요. 대질신문 후 지금이라도 부르면 ‘네, 선생님’ 하고 대답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지요.”
 
  ―스승과 제자 사이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겠군요. 박 사장 본인도 언론과의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서 김 회장을 ‘스승’ 또는 ‘멘토’라고 지칭해 왔으니까요.
 
  “저에 대한 호칭을 선생님이라고 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다 금강경을 공부하는 입장이니까. 제가 가르치기는 했어도 ‘내가 너희 스승이다, 너희는 제자다’라고 그렇게 말한 사실은 없습니다. 저 스스로도 그런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특별한 관념이 없었고요. 그런데 박 사장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면서 제가 자기의 스승이니 멘토니 이런 언급을 했죠. 언론에 나온 인터뷰를 매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나중에라도 언론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을 알게 되면 그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자꾸 스승이라고 내세우지 말라고요. 또 공부하는 사람이 금강경 공부한다고 내세우고 자랑할 일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죠.”
 
 
  금강경 공부모임이 사이비 종교?
 
‘백성농원’ 내에 김강유 회장이 거처하는 집. 2층이 ‘법당’이다. 지금은 매주 일요일 7~8명이 모여 《금강경》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김강유 회장의 사적인 모습은 거의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김 회장은 그 이유에 대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까닭인지 김 회장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게 ‘베일에 싸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김 회장은 1947년 전체 가구가 20여 호에 불과한 전남 고흥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를 고흥에서 마친 김 회장은 광주에 있는 학교로 진학해 그곳에서 광주일고를 졸업한 후 성균관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한때 교회를 다니던 그는 대학 3학년 때 불교의 금강경을 알게 되면서 금강경 공부에 심취하게 된다.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금강경 독송회에 참여하고 있다. 금강경 독송회는 동국대학교 총장을 지낸 백성욱 박사가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고안한 불교 공부법이고 수행법이라고 한다.
 
  박은주 전 사장이 김 회장에 대해 ‘교주’라는 표현을 쓴 것은 김 회장이 금강경 독송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이 ‘사이비 교주’라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도 금강경 독송회 때문이라고 한다.
 
  “금강경 독송회는 출가와 같은 신분 변경 없이 모두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면서 아침저녁 금강경을 소리 내어 읽고 기도하는 수행법이에요. 그러한 수행을 하는 수행자 모임이 전국에 여러 군데 있는데, 제가 참여하는 모임은 30년째 15명 내외의 인원이 모여서 해왔고, 현재는 7~8명이 일요일 아침에 모여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도라는 말을 쓰지도 않지만 신도가 7~8명밖에 안 되는 사이비 교주도 있습니까?”
 
  ―김영사 직원들을 의무적으로 법당 예불에 참석하게 했다는데, 금강경 독송회만의 특별한 예식이 따로 있습니까.
 
  “직원들에게 예불에 참석하라고 권유한 적이 없어요. 저는 제 종교나 수행을 김영사 경영과 철저히 분리시켜 관리했습니다. 또 저 자신을 종교인으로 내세우거나 주위에 제 믿음을 권유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오히려 박은주 전 대표가 인터뷰 때마다 저를 스승이니 멘토니 하며 내세우고, 금강경 공부하고 수행한다며 자랑하는 걸 제가 나무라곤 했습니다.
 
  김영사 역사가 40년이고 현재 직원이 100명 가까이 되지만, 제가 직원들에게 특정 종교 및 공부를 내세우거나 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김영사 직원 누구에게라도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도서목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김영사는 다양한 종교와 견해를 가진 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직원들도 저마다 다양한 종교와 일상을 누리고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확인해 보시면 알 겁니다.”
 
‘여시관’ 한편으로 김영사가 출간한 책들이 전시돼 있다. 김영사는 창립 이후 현재까지 3300여 종의 책을 발간했다.
  ―그래도 그 법당의 존재 때문에 사이비 종교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습니다.
 
  “박은주 전 대표가 사이비 종교 단체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법당’이란, 몇몇 불교인이 각자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교의 대표 경전 중 하나인 금강경을 독송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가지는 곳입니다. 불상 같은 종교적 상징물도 없는 큰 방과 같은 곳인데, 편의상 ‘법당’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인연 따라 오가는 일이라 여겨 포교 활동 자체가 없습니다. 그런 공부 모임을 김영사와 연관시켜 마치 사이비 종교에 연루된 것처럼 박 전 사장이 언급함으로써,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에까지 허무맹랑한 종교적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습니다. 불교의 보편적인 경전인 금강경을 읽고 기도하는 것을 사이비라고 한다면, 불교 자체는 물론 한국의 천만 불교도를 모독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박은주 전 사장은 불교 공부를 위한 여자 합숙소가 따로 있었다고 했는데요.
 
  김 회장은 또 “하” 하고 숨을 내쉬며 말을 길게 이었다.
 
  “박은주 전 사장이 말한 ‘여자 합숙소’라는 것은 원래부터 없었습니다. 1978년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 2명이 심한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며 상담차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 권유로 금강경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수행 장소(당시 명륜동)가 그들의 학교(동숭동)와 가까웠기 때문에 거기서 기거하며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학업과 금강경 공부를 병행하기가 용이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장소를 가회동으로 바꿨는데, 바로 옆에 김영사 사무실이 있었고, 거기서 근무하던 박은주 전 대표가 몇 년간 그들을 지켜보다가 함께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서 1985년 7월에 허락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박은주 전 대표의 남동생까지 그곳에 수시로 드나들며 상담하고 진로 지도를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학사(學舍) 개념에 더 가깝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하던 4명 중 의대생 2명은 졸업 후 모두 의과대학 교수가 되었고, 다른 1명은 박은주 전 사장이며, 박은주 전 사장의 동생도 의대에 진학하여 안과의사가 되었습니다.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했으며 박은주 전 대표를 제외한 3명은 현재에도 여전히 금강경 공부를 하면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박은주 전 대표가 주장하듯 ‘사이비’ 종교에 빠져 착취당하고 희생당한 결과라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동생도 잘 알고 있는 곳, 수많은 언론 인터뷰에서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고 108배하며 수행한다고 자랑하던 그곳에서 30년간 혜택을 누리고서는, 자신의 비리가 드러나자 여자 합숙소라고 폄하하고, 마치 이상한 종교단체의 은밀한 시설인 것처럼 오해받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박은주 전 대표의 지난 7월 27일자 언론 인터뷰와 입장문을 살펴보면, 저를 3가지 콘셉트로 몰아가려는 걸 읽을 수 있습니다. 그 3가지는 종교의 교주, 여자, 돈 갈취입니다. 대중을 현혹시키기 가장 좋은 3가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주라는 소리를 듣고 보니
 
김강유 회장이 2015년 9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참석해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사진 맨 왼쪽).
  ―회장님의 ‘은둔자적 삶’ 때문에 ‘베일에 싸인 교주’라는 이미지가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닐까요.
 
  “김영사라는 회사가 제법 이름이 나고 박 전 사장의 이름도 많이 알려졌는데 제가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런 측면도 있었겠죠. 하지만 제 성격이에요. 제가 대외적인 활동에 익숙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성향이 아니거든요.”
 
  ―그런 성향을 박 전 사장이 잘 활용한 측면도 있다는 건가요.
 
  “박 전 사장이 회사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부정을 저지른 걸 덮으려니까 사이비교, 사이비 교주, 베일에 싸인 교주 이런 식으로 창업주인 제 이미지를 끌고 들어갔다고 봅니다. 세월호 사건 때 ‘사이비 교주’ 유병언에게 쏟아졌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봅니다.”
 
  ―교주라는 소리를 들을 때 상당히 언짢았죠?
 
  “아, 원래 사이비 교주와 나는 관계가 없으니까 개의치 않았어요. 당치도 않은 일이니까요. 아 그렇게도 얘기를 하는구나 하고 말았죠. 또 제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죠. 제가 무슨 큰 단체를 이끌고 있어서 그 단체가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고요. 저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거에 대해서는 별로 느낌이 없었는데 회사를 자꾸 사이비 종교와 연관된 회사인 것처럼 몰아가는 데에는 조금 위기의식이 있었죠. 우리 김영사가 마치 무슨 사이비 집단처럼 비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저는 전혀 그렇지 않은데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네요(웃음). 저는 열심히 회사도 챙겼고 여기서 이런 일(금강경 공부)도 했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말이죠.”
 
  ―세상과 전혀 떨어져 살지 않았다?
 
  “네. 저는 의식적으로 세상과 떨어져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원래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고 싶다는 생각은 늘 가지고 있었죠.”
 
  ―수도자의 삶 같은 것을 동경하지는 않았나요.
 
  “수도자의 삶 같은 것? 그러지 않았어요. 그냥 뭐라고 할까, 그냥 조용히 나중에 부처님 가르침이 좋아서 그 가르침대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거기에 가깝게 살도록 노력을 했죠.”
 
 
  형님의 권유로 출판업 시작
 
서울 가회동에 있는 김영사 사옥.
  김 회장의 둘째 형 김충섭 박사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시절 해외 과학자를 유치할 때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원 책임연구원과 한국화학연구원 원장을 지냈다. 김 회장이 출판사를 하게 된 것은 김충섭 박사 때문이다.
 
  ―출판사를 하게 된 동기는?
 
  “제가 출판사를 뜻이 있어서 한 게 아닙니다. 회사 경험도 없고, 군대에서 제대한 후 바로 시작하게 됐습니다. 김영사의 전신은 1976년 시작한 정한사입니다. 제약회사 연구소 소장을 지내기도 했고, 나중에는 한국화학연구원 원장을 지낸 둘째 형님이 권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외국의 전문서적이 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책들의 번역본을 빠르게 찾아내 출판하는 게 주된 일이었습니다. 외국의 전문 분야 도서 정보를 발 빠르게 파악할 수 있던 연구소에 근무하던 형님이 추천하는 책을 가장 많이 펴냈고, 또 다른 형님이 미국에서 리더십과 인간공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이 통로를 통해서도 다양한 최신 출판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외국서적의 경우 저작권 계약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에 여러 출판사에서 똑같은 책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업이 더욱 중요했는데, 매번 찾아가 사줄 것을 부탁한다는 것이 성격에 잘 맞지 않았습니다. 점차 대중이 서점에 와서 스스로 구입하는 책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고, 1979년 5월 17일 ‘김영출판사’라는 이름으로 출판 등록을 했습니다. 몇 종의 책을 펴냈지만 신통치 않아 경영 상태가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1986년 영국에 유학 중이던 지인이 추천해 준 《비밀일기》를 펴냈는데 크게 히트했고, 이어 펴낸 《사랑하는 아빠가》 등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파산 직전에서 극적으로 회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8월,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출간했는데 이 책이 밀리언셀러에 오르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김영사의 이미지가 많이 퇴락한 감이 없지 않은데 만회할 방법은 있는지요.
 
  “실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왜곡된 주장이 고스란히 보도되었고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 없이 급속히 전파되면서 오해가 확대 재생산됐습니다. 저희와 책을 펴내신 일부 저자, 편집 진행 중이거나 집필 중인 일부 저자의 동요도 있었고요. 저희의 기획원고 필자 섭외 시도에 대한 응답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또한 경험했습니다. 출판사의 본업에 충실히 임해 참신한 기획으로 양서를 출판하고, 좋은 책으로 독자를 찾아가다 보면 다시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박은주 신화’는 거짓말의 산물?
 
  ―박은주 전 사장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박은주 전 대표는 1982년에 입사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주 작은 회사였기 때문에 따로 신문 등에 사원모집 광고를 내기 어려웠죠. 편집부 직원이 필요했는데 마침 알고 지내던 출판사 사장이 편집부 사원 모집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떨어뜨린 지원자 중 한 사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렇게 해서 채용하게 된 사람이 박은주 전 대표입니다.”
 
  ―출판사 대표직을 박은주 전 사장에게 맡길 때 불안감은 없었는지요.
 
  “처음 박 전 사장에게 맡길 때는 주변 사람들이 불안해했던 것도 사실이고 업계에서는 이상한 추측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부분의 사람이 기회가 주어지면 평소에 하던 것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아왔고 그동안 박은주가 일하는 것으로 봐서 잘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습니다. 또 박 대표에게 경영을 맡길 당시는 회사 재정 상태가 매우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던 대로만 하면 큰 문제없이 해나가리라 생각했습니다.”
 
  ―박은주 전 사장은 ‘출판계 미다스 손’으로 평가를 받아왔는데 실제 그녀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고 보는지요.
 
  “박 전 사장은 기획자라기보다 실행자 스타일에 가까워요. 과감한 추진력이 돋보였고요. 제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 그것을 실행해 내는 데 있어서 능력을 발휘하곤 했습니다. 또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사람을 만나 사귀는 걸 잘하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흔히 하는 술, 담배, 골프 같은 것도 못 하는 데다가 관심사가 인간의 완성이랄까 이런 거였기 때문에 공통되는 화젯거리도 찾기 어려웠습니다. 반면 박 전 사장은 제가 갖추지 못한 이런 면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다만 ‘출판계 미다스의 손’은 과장된 것입니다. ‘기획의 여왕, 출판계 신데렐라, 베스트셀러 제조기’라는 것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金宇中·金大中 책 출간 비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등 김영사가 만든 베스트셀러들.
  박 전 사장은 김영사를 명문 출판사의 반열에 올려놓은 대우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의 출간과 관련해 언론 인터뷰 등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업인의 자서전은 그전에도 많았어요. 하지만 대부분 성공스토리를 나열하는, 일종의 위인전이었죠. 저는 그 틀을 깨고 싶었어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공과 더불어 실패도 하는데 그 경험을 솔직히 털어놓는 게 독자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제가 읽고 싶은 책이 바로 그런 거였고요. 그 마음을 김우중 회장께 전했고 김 회장도 동의하셔서 ‘세계는 넓고~’를 출간하게 된 거죠.”(《신동아》 2011년 6월호)
 
  “네.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많이 했고 본인의 경험을 제대로 전해보고 싶다는 말도 많이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기획안을 만들어 대우 측에 제안했고 김 회장님께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셨죠.”(《주간조선》 2008. 4. 23.)
 
  이들 인터뷰에 대해 김 회장은 이렇게 반박했다.
 
  “박은주 전 대표가 대우에 기획안을 보냈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대우 측에서 먼저 제안해 온 것을 제 지휘하에 출판한 것입니다. 당시 대우의 서재경 부사장은 김우중 회장의 이야기를 청소년들까지도 쉽게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김영사에서 출간한 책 《비밀일기》를 자녀가 재미있게 읽는 것을 보고는, 그런 책을 만든 김영사에 관심을 갖고 연락한 것이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를 출간하게 된 배경입니다. 당시 박은주의 직책은 사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편집 책임자였습니다.”
 
  ―박 전 사장의 기획으로 잘못 알려진 베스트셀러 몇 가지를 더 꼽는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도 마찬가지죠. 2004년 9월 14일자 ‘인물뉴스닷컴’은 박 전 사장에 대해 ‘1993년에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씨를 일면식도 없는 상태에서 옥스퍼드로 직접 찾아가 설득 끝에 자전 에세이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를 펴내 주목을 받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요,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은 제 아이디어를 제 고교 스승인 전 한양대학교 교수 김용운 박사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 측에 전달했고, 이후 제 기획하에 여러 차례 김영사 편집자인 최봉수(전 웅진출판 대표)의 인터뷰를 거쳐 출판한 것입니다. 김 전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는 박은주 전 대표가 영국으로 찾아가서 설득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소설에 불과합니다.”
 
  ―200만 부 판매 기록을 세운 에릭 시걸의 《닥터스》와 또 다른 밀리언셀러인 스티븐 코비의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도 박 전 사장의 기획이 아닌가요?
 
  “모두 박은주 전 사장의 기획이 아니에요. 《닥터스》는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제가 그 작가의 신간이 나오자 이를 번역 출간토록 한 것이고,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은 저의 형인 김경섭 박사가 소개해 출간한 것이고요.”
 
 
  박은주가 만든 베스트셀러는?
 
  김영사가 낸 대표적 베스트셀러들의 진짜 기획자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김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춘 다음 기자에게 “더 할까요?”라고 물었다. 기자는 “조금만 더요”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여행》 시리즈 또한 저의 기획입니다. 그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재미있는 물리여행》의 원서를 제가 발견해서 출판했는데 물리학 서적인데도 베스트셀러가 됐죠. 저는 다시 유사한 포맷의 《재미있는 수학여행》을 기획하고 고교 스승인 김용운 박사를 필자로 추천했습니다. 이 책 또한 성공함으로써 각 분야의 ‘재미있는 ~여행’ 시리즈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나 《빵장수 야곱》 시리즈 모두 저 또는 제 지인을 통해 해외의 원서를 소개받아 제 아내와 지인들에게 번역을 의뢰해서 펴낸 경우입니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원래 ‘고려원’에서 펴냈던 책인데 김영범 사장 시절에 인세 지급 시스템 등 김영사의 경영과 거래가 투명하다는 점을 눈여겨본 이원복 교수가 김영사에 먼저 연락하여 펴내게 된 것입니다. ‘앗! 시리즈’도 외국 도서를 제 감수하에 출판한 것이며, 이 외에도 사장이었던 박은주 전 대표의 작품처럼 세상에 소개된 많은 책이 저를 비롯한 회사 안팎의 여러 분에 의해 기획되고 출간됐습니다. 《안철수의 생각》이 김영사에서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김영사의 한 편집자가 ‘바이러스 의사’로 알려진 안철수 사장의 인생에 관심을 갖고서 여러 차례 만나 출판을 권유하는 등 오랜 시간 공을 들였고, 마침내 원고를 받아내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라는 책을 출판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안철수 사장은 김영사의 저자가 되어 다른 차기 작품들도 김영사에서 계속 펴내게 된 겁니다. 《안철수의 생각》은 그 세 번째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모두 박 전 사장의 공이 된 겁니까.
 
  “당시 회사 대표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박은주 한 사람의 이름과 공으로 대부분 잘못 각색되고 전파된 거죠. 굳이 하나하나 공적자를 적시하고 공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대로 둔 채 시간이 흘러왔고, ‘박은주 신화’는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저는 1989년 박은주 전 대표를 대표이사로 임명하기는 했지만, 창업 초기부터 현재까지 새로운 책을 기획하는 데에 주도적으로 관여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박은주 전 사장이 기획해서 출판한 대표적 베스트셀러는 없다는 건가요?
 
  “《정의란 무엇인가?》가 있고 《감자탕 교회 이야기》란 책도 있는데 종교의 벽을 넘어 큰 사랑을 받았던 책입니다.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 않아 더 답하기 어려운데 어쨌든 박은주 전 사장은 대중의 관심사를 포착해 내거나 생각을 발전시켜 내는 독특한 아이템을 만들어내는 기획자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박은주 전 사장이 언론 인터뷰 등에서 사실과 다른 말을 했다는 건데 왜 그대로 두고만 있었던 겁니까.
 
  “사실 인터뷰라든가 언론에 보도될 바로 그 당시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어요. 제가 그런 인터뷰들을 일일이 챙겨보는 스타일이 아니라서요.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됐는데 뒤늦게 새삼 그게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 당시 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공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여하간에 책임을 통감합니다.”
 
 
  합의서를 작성한 까닭
 
  김강유 회장과 박은주 전 사장은 박 전 사장의 검찰 고소가 있기 전인 2014년 9월 22일 서울 팔레스 호텔 중식당에서 합의서를 작성했다. 합의서 작성에는 양측이 증인으로 내세운 전직 언론인과 전직 국회의원이 참석했다. 이 합의서는 합의서를 작성한 다음달인 10월 8일 공증까지 받았다.
 
  합의서는 박 전 사장이 김영사의 대표이사로 재직하면서 저지른 부정행위로 김영사에 입힌 피해에 대해 박은주 전 대표의 퇴직금(20억~30억원 추정) 포기 등 최소한으로 배상하고, 박은주 전 대표 명의로 신탁된 김영사 사옥과 김영사 주식, 전세보증금 등을 반환하면 박 전 사장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
 
  ―2014년 박 전 사장을 횡령 혐의 등으로 고소하지 않고 합의서를 작성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회사의 이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영사도 별 수 없네 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해서 이런 일이 김영사에 있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드러내 보이기가 솔직히 부끄러웠습니다. 고소 사태로 번질 경우 박 전 사장 또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힘들어질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에 그런 어려움만은 발생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고 싶었습니다. 25년 이상 근무한 전직 대표이사의 문제이기에 신중하고 조용히 처리하고자 했습니다. 또 여성계, 불교계, 출판계 멘토로 알려져 있던 박 전 사장의 비리로 대중이 받게 될 커다란 실망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박 전 사장이 합의서 작성에는 쉽게 응했던 겁니까.
 
  “합의서 작성까지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박 전 사장은 5차례나 참회와 번복을 되풀이했습니다. 2014년 5월 말 일방적인 사퇴 이후, 박은주 전 대표는 회사 관계자나 저와 일체 연락을 끊고 잠적해 버리는 등 소통을 피했습니다. 2014년 9월 22일, 조용한 해결 노력을 포기하고 박 전 사장을 고소하려는데 그 직전에 합의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고소장 접수를 중지하고 합의서를 작성하게 된 것입니다.”
 
 
  “돈 욕심 없어 보였다”
 
김영사 사장 시절 박은주씨가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이번 검찰 조사 과정에서 보면 사실상 회장님이 주요 결정을 한 것으로 돼 있는데 김영사의 주요 결정을 하면서 박은주 전 사장의 자회사 설립, 자신에 대한 높은 연봉 책정 등 ‘경영상 실수’들을 바로잡아주지 않은 이유는 왜입니까.
 
  “박 전 사장은 입사 후에 굉장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게다가 제 출판 철학과 불교 수행에 적극적이었고 매사에 성실했습니다. 돈에 욕심이 없어 보였고 순수했습니다. 당연히 깊이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15년 전쯤부터는 주요한 전망과 사업상의 중대사 승인 결정, 기획, 리스크 관리 등 신간과 광고 모니터 등 지원만 했을 뿐 인사·회계 등 경영을 다 맡겼습니다. 오직 회사뿐이고 회사만을 위해서 일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고 25년간 흑자가 계속됐기 때문에 그렇게 믿었습니다. 일부에서 박은주 전 대표의 행동을 지적하는 보고가 들어오기도 했지만 ‘박 사장만큼만 하라’며 오히려 보고자를 나무라곤 했습니다. 자체 감사 결과 자회사를 통한 비리가 많이 발견됐는데, 자회사도 사업장을 김영사 가회동 사무소 안에 두어 마치 김영사의 한 부서인 것처럼 운영했기 때문에 그런 줄로만 알았습니다. 자회사의 직원들도 자신들이 김영사 직원인 줄만 알았고, 김영사 직원들조차 박은주 전 대표 개인회사인 줄 알지 못했습니다.”
 
  ―박 전 사장의 연봉 8억원은 우리 출판계에서 상당한 고액일 뿐만 아니라 김영사가 적자 날 때도 고액 연봉을 유지했던데요.
 
  “다소 고액 연봉을 받는 줄은 알았지만 ‘김영사는 선생님(김 회장을 지칭) 가르침대로 비자금 없이 투명하게 운영하는 회사라 접대비나 기자들, 저자들 관계 유지에 필요한 비용 등은 모두 제 급여에서 지출하고 있어서, 제 연봉을 비자금으로 운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2014년 3월 26일 이사회에서, 자기가 8억원의 고액 연봉을 받은 것은 모두 접대비와 판공비 등에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하는 내용이 녹취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연봉을 결정하거나 횡령이 본격 시작된 시기는 회사 자금 현황 등을 박 전 사장 스스로 관리할 수 있도록 보장하던 때였습니다.”
 
  ―박은주 전 사장이 고소했을 때 맞고소를 하지 않은 이유는요.
 
  “어쨌든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제지간으로 알려져 있었고, 그동안 공이 있었던 것도 사실인데다가 기다려보면 뉘우치고 돌아오지 않겠나 하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또 저를 고소했기 때문에 제 잘못이 있다면 맞고소를 해서 희석할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법의 판단을 받아보고도 싶었습니다. 그리고 박은주에 대한 고소는 김영사 주주로서 저 개인이 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은 애초에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고, 박은주의 부정으로 회사가 거액의 손해를 입은 사건이기 때문에 회사가 박은주를 고소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은 2014년 9월 22일 합의서를 이행하면 법적인 책임을 묻지 않기로 주주동의를 얻은 상태로, 이제 사정이 바뀌었기 때문에 다시 주주들의 의견을 묻기 위해 주주총회를 소집해 놓은 상태입니다.”
 
 
  박은주 주장에 별 반응 안 보였던 이유
 
  ―언론이 회장님과 관련한 박은주 전 대표의 주장을 전할 때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이유는요.
 
  “당시 박 전 사장이 그 같은 일을 벌인 것은, 자신이 김영사 재직 당시 벌였던 수백억 원대 비리와 횡령 사실이 드러나자 본질을 흐리고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박 전 사장의 거짓을 입증하고 실체를 밝힐 구체적인 자료도 합의서를 작성하기 전에 이미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며 일일이 대응하다 보면, 결국 시끄럽고 볼썽사나운 진흙탕 싸움이 되어 많은 분의 눈과 귀를 불편하게 해드리는 상황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 명백해, 그렇게 될 때 무엇보다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은 회사이기 때문에 지켜본 것입니다.”
 
  박 전 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그동안 부모님께 보내던 월급 송금을 중단하고 1984년부터는 내 월급 전액과 상여금 전액을 법당에 기부했다. 백성욱 박사의 수행법과 금강경 공부를 지원하기 위해서였다”라고 주장했다. 또 “김 회장은 1994년 내 통장의 돈 6억원과 만들어준 돈을 합하여 10억2000만원 나가던 가회동집을 내게 사주었고, 나는 계속 급여와 상여금, 배당금을 계속 보냈는데 36억원이 넘었다”는 주장도 했다.
 
  ―박 전 사장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본인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것이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서 공부를 지원하기 위한 보시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수행을 위해 보시한 것을 이제 와서 ‘기부’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법당’ 운영비에 관해서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액을 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만은 당시 박 전 사장은 소위 ‘법당’에 살면서 의식주를 모두 ‘법당’에서 해결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기부’했다는 돈은 실제로 ‘기부’나 ‘보시’라기보다는 대부분 박은주 전 사장이 자신의 생활비로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30년 전이 아니더라도, 오늘날 직원 10여 명 안팎인 소기업의 신입사원이 서울 한복판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한 후 급료 중에서 얼마나 남을지 생각해 보면 상식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김 회장은 잠시 말을 멈추고 “굳이 액수를 따져 계산해 볼까요”라고 묻더니 자료를 꺼내들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박은주 본인이 국세청에서 뗀 소득금액 증명을 보면 1986년 소득 총액이 408만원, 1987년 444만원, 1988년 464만원입니다. 매년 10% 정도씩 인상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월급과 상여금을 다 냈다는 1984년부터 1994년 2월 사옥 매입까지 앞뒤로 추정하여 계산해 보면, 그 10년간 박은주의 소득 총액이 6000만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실제는 이 급료에서 세금을 내야 했고, 먹고 입고 자고 타고 등등 생활비가 당연히 들어갔다면 저축한 금액이 얼마나 됐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급료와 보너스 전액을 법당에 기부했다고 하는데 결국 박 전 사장은 법당 기부금, 생활비, 사옥 매입 시에 통장에 있었다는 6억원(현재 가치로 약 50억원 이상), 이 셋을 같은 기간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나 앞의 계산에서 보듯이, 6억원이라는 돈은 터무니없는 것이고, 기부와 생활비도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야 합니다. 곧 법당에 전액 기부했다면 생활비가 없고, 생활비로 사용했다면 기부할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영사가 다시 과거와 같은 명성을 되찾게 될까요?
 
  “사실 저나 김영사 사람들이 꼭 명성을 위해 일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김영사라는 존재를, 우리 김영사 사람들이 저마다의 행복을 위해 맘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로 여기기를 희망합니다. 창업 초기부터 자신의 행복을 어떻게 하면 극대화할 수 있는지 마음껏 실험해 볼 수 있는 터전을 만들고 지원하겠다는 생각으로 일관해 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삼성전자 같은 규모의 회사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희가 추구하는 방향에서 저희의 방식으로 성공을 거둔다면 그것으로 의미 있는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일이 성공하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면 명성을 얻는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김강유 회장과의 인터뷰와 관련해 박은주 전 사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전화 통화 등을 시도했지만 회신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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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사 박은주 사례] 도대체 인간이 뭘까 : 인간관계의 변질과 상호 확실 파괴/파멸 자초

 

 

출판계에서 마이더스의 손으로 불리며 박은주 신화를 써내려가던 김영사의 전 사장 박은주(1957년생) 2017.11.7. 징역 4년형*을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28년 성공 신화의 몰락이지만, 그 사건 진행의 이면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관계의 변질 인자가 책갈피처럼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를 경악하게 합니다.

 


(좌) 2012년의 박은주 사장

(우) 2017년 환갑을 맞이한 미결수 박은주 

 

선고 내용에 따르면 피고인은 김영사를 운영하며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김영사와 자회사 자금 60억 원 상당을 횡령하고, 수익이 나는 김영사의 체험학습 사업을 아무 절차 없이 피고인이 실질 주주인 회사에 이전해 김영사에 손해를 입혔다... 박 전 사장이 작가들에게 인세를 준 것처럼 꾸미고 직원에게 허위 급여를 주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만들었고, 이 돈으로 아파트와 건물을 매입한 것으로 판단된다입니다.

아울러 출간된 책을 다시 사재기하는 수법으로 베스트셀러 목록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비자금과 개인 자금, 회사 자금을 구분 없이 사용하였을 뿐이지 사적 용도로 쓴 일은 전혀 없다는 피고인의 주장도 배척하였습니다. 이를테면, 2009년에 출판한 문선명 자서전을 사재기하는 데에만 20억 원을 썼다고(당시 발간 1달 만에 10만 부 이상 나갔다고 선전했음) 주장했는데, 재판부는 그 돈이 박 사장의 주머니에서 나간 것인지 회삿돈인지 구별되는 증빙이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렇게만 본다면 박은주는 회사 운영과 관련하여 잘못된 방식으로 회계 처리를 하였고, 회사 키우기 과정에서 출판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일(책 사재기)을 하였으며, 사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임의로 김영사의 수익 부서를 그녀의 회사라 할 수 있는 계열사로 이전하였다...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히 법인체 김영사에 대해서 박은주가 배임과 횡령을 범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사건의 표면에 떠오른 거품들과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애초 이 사건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전폭적으로 신임하고) 떠난 전임 사장 김정섭(현재는 김강유로 개명)이 어떤 연유론지 다시 경영에 참여하면서 박은주를 배제하자, 그녀가 2015 7월 김 사장을 먼저 고소하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

박은주가 편집장으로 입사했던 1983년 김영사의 연 매출액은 1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그녀가 사장을 맡은 게 1989년인데 20년 후인 2009년 매출액은 526억 원. 그 공로를 인정받은 박은주의 2008년 연봉은 8억 원이었습니다. 그처럼 잘 나가던 박 사장이 오늘의 몰락을 맞은 거죠. 그런 대변전을 이해하는 데는 저간의 과정을 대충 아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 1989: 편집장으로 입사한 지 6년 만에 32세의 박은주가 김영사 설립자 김강유 회장에 의해 사장으로 발탁됨. 김 회장은 불교 수행 차 낙향하여 은거.

- 2014 5: 25년 만에 김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며 박은주 사장이 사퇴하고,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직에서도 물러남.

- 2015 7 23: 박은주가 김 회장을 350억 원의 배임과 횡령, 사기 혐의로 고소. 이후 검찰에 의해 무혐의 결론. (2016 3 24: 서울고검, 박 전 사장 항고 기각).

- 2016 6 23: 김 회장이 박은주를 상대로 고소 : 허위로 인세를 지급한 것처럼 꾸며 자신의 개인계좌로 이체 허위로 직원을 등재하여 급여 및 퇴직금 횡령 거짓 자문료 및 기획료 명목으로 회사 돈을 횡령( 853000만 원)

- 2017 4 29: 서울중앙지법 오민석 영장전담 부장판사, 박은주 전 사장 구속영장 발부.

- 2017 10 24: 검찰, “박 전 사장이 회사 경영을 맡아 회사 자금 수십 억 원을 임의로 사용해 회사에 큰 타격을 입혔다며 징역 7년을 구형.

- 2017 11 7: 서울중앙지법 형사31(재판장 나상용), 박 전 사장의 횡령 혐의액 59억 원을 모두 유죄로 판단해 징역 4년 선고.

 

앞서도 적은 것처럼 이 사건은 박은주가 자신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주고 경영에서 물러났던 은인 김강유 회장을 고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김 회장은 박 사장이 평생 존경하고 따르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2012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이하 인터뷰로 약칭] “제 멘토는 그 한 분이에요이라고 단언했을 정도로요.

 

그녀는 처음으로 김 회장과 만난 날을 인터뷰에서 이렇게 묘사합니다. 당시 그녀는 가톨릭 계통의 탄탄한 출판사인 평화출판사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번역자분과의 점심식사 자리에서 처음 김정섭 사장님을 뵈었죠. 짧게 자른 머리에 맑고 밝게 생긴, 수도자의 풍모를 가진 분이셨어요. 인품이 높은 분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는데, ‘같이 출판 일을 해보지 않겠느냐 그러시길래 두말없이 그러겠다고 했지요. 저런 훌륭한 분을 사장님으로 모시고 일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했지요.”

 

그 뒤 편집장으로 입사한 그녀는 1일 업무보고를 끝내면 사장 앞에 앉아서 철학 공부를 시작합니다. 살아오면서 지니고 있던 온갖 궁금 사항을 김 사장에게 묻고 답을 듣습니다. 그걸 박은주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요약합니다.

 

회사 출근해서 아침에 업무 보고하러 들어가서는 보고를 간략히 끝내면, 제가 풀지 못한 철학 과제들을 사장님께 쏟아놓았어요. 그러면 귀찮다 하지 않고 하나하나 정성껏 답변을 해주셔서 보람 있는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어요. ‘사람은 왜 사나요?’, ‘내세는 있나요?’, ‘우주에 끝은 있나요?’, ‘윤회(輪回)를 믿나요?’ 등등 물음에는 끝이 없었고, 거의 6개월 문답 시간이 지났던 것 같아요. 그분의 답변을 들으면서 눈이 훤히 뜨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 답을 해준 김 회장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광주일고, 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진학했는데, 거기서 당시 도인(道人)으로 명망이 높은 백성욱(白性郁·1897~1981. 동국대 총장도 역임) 박사를 만나 그의 법문을 들으면서 일생의 방향이 바뀌게 되었다 합니다. 그의 소사 농장으로 찾아가 10년 동안을 함께 기거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는데, 효과적인 불교 수행 방식을 묻자 백 박사가 아침저녁으로 금강경 하나만 읽어도 된다고 해서, 김 회장은 그 뒤로 평생 매일 금강경을 읽게 됩니다.

 

이 금강경 읽기가 박은주에게도 고스란히 전승(?)되는데, 그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김 사장님의 감화를 받아 아침저녁으로 금강경을 읽기 시작했고, 1984년 이후 지금까지 28년째 읽어오고 있습니다.” (하루도 안 빠뜨리고 금강경을 읽었느냐고 묻자) “거의 그렇습니다. 출장 중이나 아주 특별한 경우를 빼고는요. 오히려 하루 두 번 이상 밤새워 읽은 적도 많았어요.”

 

참고로 이 금강경은 1독에 28분 정도 걸리는 소경전인데요. 김영사는 그러한 사연이 있는 금강경을 금박 표지로 해서 정성스럽게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 박은주가 사장이 된 이후 김영사 직원들은 아침 7시에 출근하여 전원 사무실 청소를 하고 일과 시작 전 체조를 하는데요.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 체조를 우리 교주가 개발한 체조라고 공공연하게 이를 정도로, 짙게 드리워진 김 회장의 그림자 속으로 박은주가 앞장서서 걸어 들어갔습니다.

 

***

그런 두 사람 사이가 어떤 연유로 그처럼 심각한 대치 상태로 변하게 된 것일까요.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면서 오래 전 행복한 마음을 냈고, 2008년에 행복한 공부라는 책을 내기도 했던, 마음의 평화 추구파인 김 회장을 경영 일선으로 불러낸 건 도대체 무슨 일이었을까요. 박은주는 김 회장에 대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송전으로 치닫기 겨우 3년 전에 말입니다 : “내색이 안 드러나지요. 얼굴에 희비(喜悲)가 그려지지 않는 무심한 얼굴을 가지신 분이세요.” “현자와 같은 분이었어요.”

 

그리고 2012년 기준, 박은주는 4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1대 주주이었고, 김 회장은 2대 주주였습니다. 나머지는 직원들의 지분이었고요. 그런 절대 우위의 지배/수익 구조에서 박은주는 어째서 자신 소유의 계열사 확장에 골몰하고, 수익 부서를 계열사로 편입시키는 무리수를 두었을까요. 출판계에서 해서는 안 될, 베스트셀러 목록용 책 사재기를 해댄 짓은 차치하고라도요.

 

두 사람 사이의 그런 특별한 관계가 틀어진 이유는 그 둘만이 나누는 비밀이겠지요. 그럼에도 관찰자일 뿐인 우리도 확실하게 알게 된 건 있습니다. 연유가 무엇이건 둘 사이의 인간관계가 뒤틀리자 그토록 굳건해 보이던 두 사람이 서슴없이 상호 확실 파괴 단계에까지도 내딛게 되더라는 것이죠. 이른바 너 죽고 나 죽자는 치킨게임도 서슴지 않는 인간 파멸의 길을 선택하더라는 것입니다. [* : ‘상호확실파괴(相互確實破壞)’는 미국 핵전략 이론에서, 적대 관계에 있는 쌍방이 서로를 확실하게 파괴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 서로에게 손해를 줄 수 있는 상태를 뜻하는 말]

 

두 사람이야 그렇다 치지만, 그런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들도 엄청 씁쓸해집니다.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읽었다는 금강경의 다음 구절을 떠올리면 더욱더요 : “무릇 모든 형상 있는 것은 본디 다 허망한 것이니라. 만일 모든 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님을 본다면, 즉시 여래를 볼 것이니라(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엄청 화도 납니다. 그런 그들이 이끄는 김영사 책들을 양서의 표본으로 여기면서 출판사 이름만 보고도 책을 사들었던 이들이 맛볼 실망을 떠올리면요. 선량한 독자들은 이런 흔한 말을 뱉으면서 또다시 비애감을 곱씹게 되지나 않을까요 : “세상에 믿을 연놈 하나 없단 말, 정말 맞네. 이번에도.”

-溫草 [Nov. 2017]


[추기] 2018년 6월 19일 서울고법 형사 12부(재판장 홍동기)는 박은주 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오래전 박은주사장을 사업때문에 여러번 만났어요...샤프한 인상과 똑똑함을 여실히 느낄수 있었구요.....그때 박사장에게 출판사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오니 잘골라 결혼하라고 권유한 기억이 있어요...소개해 줄 만한 사람도 있었구요 ㅎ 왠지 이 여자는 이때 결혼 못하면 평생 결혼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고 결국 적중했지요...

하지만 이미 그때 박사장에겐 한 존재가 자리잡고 있었어요...바로 김사장.... 김사장은 스승이자 영혼의 남편이었어요...대화 몇마디에서 금세 감을 잡았지요....그리고 박사장에겐 보통 남녀의 따스한 사랑의 정 자체가 없다는 것도 알았어요...지금 생각하니 터미네이터 같다고 할까..

저는 주변에서 신이니 종교니 믿음이니 하면서 일평생 몰입해 살던 사람들도 황금앞에 속절없이 무너지는걸 많이 봤어요...하늘아래 그 누가 황금앞에서 당당할수 있겠어요..오히려 그런게 더 인간적으로 보입니다...박사장도 따지고보면 나이들어 인간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지요...

박사장도 젊은 시절엔 종교와 신념만으로 살수 있다고 믿었겠지요..그러다가 나이들어 재물의 위력을 뒤늦게 깨달은 거지요...박사장 축하합니다...인간다운 삶으로 복귀한 것을.......
2018.10.7. 07:54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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