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로가 보는 제1차~4차 중동전쟁 1
아로가 보는 제1차~4차 중동전쟁
전쟁 목적
- 제 1차 (1948): 로스차일드 가문 일부 및 유태 시오니스트들의 오랜 염원이던 이스라엘의 건국. 로스차일드 지배 국가인 미국과 소련, 프랑스 모두 이스라엘을 지원.
- 제 2차 (1956): 이라크 바트당과 마찬가지로 CIA (빅터 로스차일드 라인 - 1954년부터 1975년까지 CIA에서 방첩 국장을 역임했던 유태계 James Angleton)와 긴밀한 관계에 있었고, 소련에 붙으려던 이집트 (가말 압델 나세르)의 외교적 승리를 통해 미소 냉전 체제를 확립. 로스차일드가 소련에 힘을 실어주는 나머지 이스라엘 편을 들었던 영국은 몰락. 물론 이스라엘과 소련 모두 로스차일드 영토지만, 냉전 체제 구상을 위해서는 소련-이집트에 힘을 실어주어야 했던 것. 가말 압델 나세르는 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외교적으로는 소련과 친하게 지냈지만 공산주의에는 반대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수에즈 국유화에 멋대로 침공해서 일어난 전쟁이고, 당시는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국제적으로 매우 높았던 시기라 이스라엘과 영국, 프랑스는 미소 양국에게 뭇매를 맞고 기껏 힘들게 얻은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는 등 온갖 불이익을 받았으며, 정작 이집트는 어느 정도 피해를 복구하고 지도자인 나세르의 정권만 더욱 단단해졌다. 즉, 졌지만 이긴 상황이 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로 미 공화당을 장악했던 로스차일드-모건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
- 제 3차 (1967): 제2차 때와 다르게 미국은 이스라엘을, 소련은 이집트를 지원하면서, 국제투기자본이 기획한 미소 냉전의 대립구도를 격화+이스라엘이 많은 영토를 점령하며 빅터 로스차일드가 이스라엘에 힘을 실어줌.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고, 1962년 쿠바 위기, 1963년 존 F. 케네디 암살 등의 시점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대임을 염두해야 할 것.
- 제 4차 (1973): 중동전쟁과 OPEC을 통해 유가를 4배 급등시켜 페트로달러 체제를 만들고,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려고 데이비드 록펠러와 헨리 키신저가 기획한 전쟁. 이 시기 이집트의 지도자였던 안와르 사다트는 데이비드 록펠러계로, 미국 CFR 모임에도 여러번 참석한 바 있음.
전쟁 초반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얻어맞음.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원해주지 않았기 때문. 로스차일드 영토였던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가 빅터 로스차일드와 데이비드 록펠러 사이에서 눈치를 보기 시작하고, 결국 데이비드 록펠러 측근이었던 헨리 키신저에게 도와달라고 애걸복걸 사정함. 헨리 키신저와 데이비드 록펠러는 이스라엘이 미국 (록펠러)에게 기는 조건으로, 무기를 지원하고,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둠.
관련설명 1:
1974년에 개방 정책을 공식 발표하기 전에 이미 이집트는 서방, 특히 미국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1972년에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이집트는 소련 군사고문 약 2만 명을 축출하기도 했다. (나세르는 1970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1973년 10월에 마지막 전쟁이 끝난 뒤 사다트는 전쟁 결과가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이스라엘의 군사적 우위가 확고해지고 미국의 중동 지배가 더욱 굳건해졌는데도 말이다.
관련설명 2:
미국이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우려한 것은 사실이지만, 메이어가 이를 고려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공개된 이스라엘 내각의 회의록에도 당연히 없는 내용이었다. 이스라엘의 핵정책은 이스라엘이 핵무기를 가지고 노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절대로 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도, 핵을 사용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합의하고 이집트에 핵무기를 제공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음모론에 불과하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공멸을 모의한 소련과의 밀약 관련 공식 문서는 없으며 만약 존재한다 하더라도 현재까지 기밀해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상을 확인할 수 없다.[28] 또한, 위에서 설명이 되어 있듯이 미국과 소련의 상황 판단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29]
한편 엘라자르 장군의 결사적인 반격으로 이집트군의 진격이 멈추자, 골다 메이어는 필사적으로 미국을 설득하는 것에 집중하였다. 이미 시나이 반도에 주둔한 이스라엘 전차의 3분의 2를 상실한 상황이었고, 바르레브 라인을 다시 점령하려면 막대한 양의 탄약과 중화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유럽은 늘 관례대로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판매를 일제히 중지했고, 영국도 센추리온 탱크를 팔아달라는 이스라엘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했다. 이스라엘이 기댈 곳은 미국 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키신저도 이스라엘의 상황이 당초 예상보다 매우 나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니츠 대사에게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게 탱크 400대를, 시리아에게 탱크 100대를 잃었다는 정보를 전해받고 헨리 키신저는 당황하면서 대체 뭘 했길래 이집트에게 400대나 되는 탱크를 잃었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20세기 현실주의의 끝판왕인 키신저답게, 그는 바로 이스라엘이 미국의 도움으로 이긴 후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스라엘이 압도적으로 승리하여 제3차 중동전쟁의 후속편을 찍어버리면, 이후 미국 입장에서 아랍 국가들을 회유하여 평화협정을 주도하고 중동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다지게 될 여지가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었다.[30] 그리고 아랍 국가들은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할 것이고 중동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었다. 이 때문에 키신저는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지원을 계속 미루었다. 골다 메이어 역시도 소화기, 탄약, 포탄 등의 전황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없는 물자만을 요구하여 키신저를 기쁘게 했다. 특히 그러한 무기들은 이스라엘의 엘알 항공기편을 통해서 비밀리에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왜 엘알 항공편을 썼냐면은, 3차 중동전쟁 당시 석유의 무기화를 시도해 서방을 오일쇼크 직전까지 몰아붙였던 아랍측의 보이콧 가능성을 의식한 기업들이 차터 항공편을 내 주지 않았고,[31] 군사적 충돌에 예민했던 국방부도 협조를 거부해 첫 1주 간은 엘알 항공기 7대가 미국까지 날아와 장비를 직접 가져가는 것으로 충당해야 했다.
한편 소련에서는 정치국 회의가 소집, 국방장관 그레치코와 국방부 제1차관 겸 총참모장 쿨리코프가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의 작전상황에 대한 종합보고를 올렸다. 쿨리코프는 소련제 무기들이 아주 뛰어난 성능을 발휘했다는 것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면서 보고하였고, 특히 말륫카 대전차미사일의 성능을 칭찬했다. 코시긴 총리는 그렇다면 이제 전차는 전장에서 쓸모가 없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2차 대전 중에 전차병으로 복무했던 쿨리코프는 이스라엘 전차들이 무력했던 것은 기계화보병의 협동이 없어서이기 때문이고, 전차는 기계화보병과 협동하면 여전히 전장을 지배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소련 군부는 아랍 병사들이 기존의 예측과는 다르게 매우 용맹하게 싸웠음을 인정하면서도, 아랍군 지휘부의 작전술적 능력은 졸렬하기 그지없고, 특히 제공권 확보를 등한시하고 초반의 성공에 도취되어 공세를 중지한 것을 역겨울 정도의 실수라고 혹평했다. 보고를 듣던 소련 지도부는 왜 소련 군사 고문단이 이러한 실수를 교정해주지 않았냐고 반문했고, 쿨리코프는 아랍인들이 전략가 행세를 하느라 소련의 조언을 듣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대답했다. 소련 군부의 이러한 냉혹한 평가로 인해 소련 지도부는 아랍 세력이 초반에 선전했으나 곧 이스라엘 쪽으로 전세가 기울어지리라 정확히 예측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소련이 다마스쿠스가 이스라엘 공군에 공습당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아랍에 무기를 공수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고, 브레즈네프는 전쟁 초반부터 소련의 국제 프롤레타리아 해방운동, 반제국주의 민족해방운동의 지도자로의 지위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아랍에 무기를 공수해주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10월 8일과 10월 9일부터 소련의 무기 공수가 시작되어 부다페스트와 베오그라드를 경유하여 아랍 측에 무기를 전달했다. 거대한 안토노프 공수기들이 막대한 양의 무기를 적재하고 카이로와 다마스쿠스에 나타나자 아랍 지도부는 감격해했다.
하지만 공수의 규모에 대해서는 소련 지도부 내에서도 입장이 갈렸다. 포드고르니는 소련 내부 상황을 신경쓰지 말고 아랍이 달라는 대로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였고, 안드로포프와 군수공업 담당 서기 드미트리 우스티노프도 아랍에게 무기를 더 많이 공주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코시긴 수상과 그로미코를 비롯한 나머지 간부들은 이미 아랍에게는 무기도 충분하고 군수공업력도 이스라엘을 상회하며 함부로 무기를 퍼줬다간 전쟁이 장기화될 수 있다고 반대했다. 군부는 무기 공수 없이 아랍이 곧 수세에 몰린다고 예측했으나, 또한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소련제 무기들이 이스라엘에게 노획되는 사태를 두려워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10월 9일, CIA가 이스라엘이 이번엔 쉽게 이기지 못할 것이며 무기 부족이 심각하다는 분석을 올리면서 국무부의 심경도 복잡해졌다. 그리고 소련이 시리아와 이집트에 무기를 공수하고 있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이미 해상 공수는 시작된 상황이었다. 소련이 전쟁 확대를 원치 않기 때문에 아랍에 대한 추가적인 무기 지원을 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던 키신저는 크게 당황했다. 그럼에도 키신저는 디니츠 대사에게 미국의 지원에 대한 매우 과장된 약속만을 하면서 그를 가지고 놀았고, 이를 알게 된 디니츠 대사가 항의하자 국방장관 슐레진저를 탓했다. 이를 보고받은 골다 메이어는 절규했다.
당신들은 베트남에 무려 50만명을 쏟아부었습니다. 우린 그런 걸 바라지 않습니다!
닉슨과 키신저를 설득하기 위해서 골다 메이어는 철저한 비밀 미국 방문을 타진하였다. 하지만 키신저는 디니츠 대사에게 골다 메이어가 미국에 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그녀의 방문을 일축하는 대신,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무기, 탄약, 전자장비의 제공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정전령이 내려지기 전에 아랍을 최대한 신속하게 강타할 것을 주문했다. 김재명의 책 <오늘날의 분쟁>에서 메이어가 눈물을 흘리며 닉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실려서 많은 사람들을 낚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메이어 총리는 워싱턴을 방문하지 않았다. 김재명이 인용한 『Crisis』에서 키신저는 당시 주미 이스라엘 대사였던 심하 디니츠가 메이어 총리의 방문, 닉슨과 1시간 면담을 요청해 왔으나 닉슨과 상의하지도 않고 단숨에 거절했다고 밝혔다. 군 최고 통수권자가 긴박한 상황에 하루 이상 자리를 비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메이어 총리가 미국에 있다는 소식이 새어나갈 경우 별 움직임 없이 보고만 있던 레바논, 요르단 등 주변국들도 공세에 가담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원 요청은 주로 디니츠 대사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디니츠도 이와 같이 회고했다.
미국은 전선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12-13일 사이 영국에 부탁하여 휴전 중재를 시도하였다. 골란 고원에서 이미 박살난 아사드는 휴전 협정에 동의했지만 아직까지 우세국면이었던 사다트는 이를 완강하게 거부했다. 무엇보다도 휴전하는 사이 이스라엘군이 재정비를 할 게 분명하였다. 소련으로부터 아사드가 휴전에 동의할 것이라는 정보를 받고 안심하고 있었던 키신저는 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생각보다 장기전으로 돌입될 위험에 처하자 14일경에야 최대 물량 지원을 시작하였다. 소련이 이미 10월 10일부터 자국 선박과 수송기,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 현지에 파견된 기술진을 동원해 항공기와 전차, 미사일을 포함한 대규모 군수물자 지원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뒤늦은 조치였다.
이는 미국이 이스라엘의 지원 요청을 받은 뒤에도 약 사흘 동안 직접 개입을 피하고자 물자를 날라다줄 민간 항공편을 수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동 시장에서 입을 피해를 우려한 항공사들은 단 한 곳도 물자 수송에 참가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10월 13일 닉슨이 공군 수송기를 동원하기로 결단하면서 문제가 해결됐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리처드 닉슨 행정부였지만 핵무기가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함도 있었기에 일단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결정되자 대응은 빨랐다. NATO 최전선, 즉 서독에 주둔하고 있던 신예 M60A1을 포함한 전차와 항공기가 포함된 지원이 봉쇄된 바다와 지상을 넘어 항공로를 통해 날아들었다. 키신저는 마지막까지도 최소한의 지원만을 고려했으나, 닉슨은 어차피 조금 보내든 많이 보내든 받는 비난은 똑같으니 있는대로 지원해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공장에서 갓 나온 F-4들이 공중급유기의 급유를 받으며 이스라엘까지 날아왔고 대서양과 지중해에 전개해있던 미 해군 항공모함들은 A-4를 잔뜩 싣고 와 이스라엘 근해에서 이함시켜 배달해주었다.[32] 이 무제한 작전(니켈 그래스 작전; Operation Nickel Grass)은 33일 동안 계속되었다. # 골다 메이어는 이 공수편을 '원시적 비행 괴물'들이라고 불렀으며 미국의 지원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참았던 오열을 터트렸다. 텔아비브 해안에는 수천명의 이스라엘 시민들이 몰려들어 미국 군수지원의 도착을 환호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당면한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니켈 그래스 작전이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군수물자가 공급되기 시작한 10월 14일 저녁 이전인 10일부터 이미 골란 고원 방면에서 이스라엘 지상군의 반격이 극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시나이 방면에서도 14일경 벌어진 대규모 전차전에서 이집트군의 최후 공세를 완전히 꺾어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쟁 전 기간을 통틀어 이스라엘 공군이 수행한 소티 1만 1천 회 중에서 전쟁 도중 미국에서 지원받은 항공기가 차지하는 비율은 300소티에 지나지 않았다. 수송기가 실어나른 전차 역시 10여 대에 불과했다.
여기까지 이스라엘이 치른 전술적 대가는 막대했지만 지난 3차 중동전에서 압승을 거두고도 선제공격을 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33] 미국의 압박으로 2차 중동전에 이어 두 번이나 연속으로 외교적 패배를 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략적으로는 아랍 측의 공격 가능성을 48시간 전에 파악하고도 선제공격보다 먼저 공격을 당하고, 그 뒤에 방어전에 들어간다는 도박수[34]가 외교적인 성공을 거둬 이것으로써 다시 전략적인 승리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군을 재정비해 반격에 성공한 것도 이스라엘군의 전술적 승리라 하겠다. 무기를 줘도 운영하지 못해 패하는 경우도 많다. 당장 아랍군을 상대로 소련도 무기를 공수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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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란 고원 작전 |
시리아 공군 역시 10일 마지막 결전을 노리고 대규모로 출격했으나 이스라엘 공군이 그동안 애를 먹은 것은 지대공 미사일이지 시리아 공군기 따위가 아니었다. 시리아 공군은 조종사 기량으로 따지면 미 공군보다도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스라엘 공군에 순식간에 격퇴당했다. 고작 하루만인 10월 11일, 시리아 전선은 이스라엘군 에이탄 사단과 라네르 사단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다마스쿠스에는 이스라엘군의 포격이 떨어지고 있었고 시리아 정부는 일대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중립을 지키는 요르단에 대한 성의와, 다마스쿠스로 진격하면 재미없을 거라는 소련의 으름장으로 인해 이스라엘군은 소련군까지 적으로 만들기 전에 암만-다마스쿠스 가도에서 진격을 중단했다.[35] 이 과정에서 시리아가 하도 박살이 난 관계로 이라크군과 요르단군도 시리아 영토에서 벌어진 이스라엘군과의 전투에 일부 참전했다. 다만 이스라엘도 애초에 전쟁이 이 지경까지 오면 요르단이 아랍 연합국을 구원하기 위해 뭔가 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고, 요르단도 전쟁을 요르단 본토 쪽으로 확대시키지 않으려 했기에 투입한 병력의 수가 적었다. 이라크군은 투입되자마자 이스라엘군에게 관광당하고[36] 공군은 시리아를 도와주러 급파된 소수의 요르단군 전투기와 오인 교전을 벌이다가 패해서 퇴각하는 등 시리아군을 구원하려 했으나 전투력 면에서는 별 도움은 안 되었던 모양이다. 사우디군도 일부 참전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공식 주장은 여단 규모 부대를 골란 고원에 파병해서 시리아의 방위를 지원하긴 했으나, 파견 시점이 늦어져서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나 시리아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영내 작전 기간 중 미국제와 영국제 장비를 상당량 노획했는데 이것이 사우디아라비아가 조기참전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한편, 시나이의 이집트군은 지난 제3차 중동전쟁과는 다르게 시리아가 말아먹는 상황이었다. 이집트군 입장에선 선전하던 전쟁을 이대로 질 수는 없었다. 이미 시리아 방면을 정리한 이스라엘의 총 전력이 몰려올게 뻔하니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맞붙느라 피해를 입은 사이 피해를 입히자는 전략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집트군은 어쩔 수 없이 시나이 반도에서 뛰쳐나와 이스라엘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집트군은 시나이 반도의 핵심 교통 거점인 타사, 발루자, 미틀라 고개와 기디 고개를 점령하기 위해 전 전선에서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스라엘 정보당국은 10월 12일경부터 이미 이집트의 공세 징후를 포착하고 있었고, 역시 제대로 준비된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정면 대결은 무리였는지 아주 박살이 나버렸다. 10월 14일의 대규모 전차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전차 15~20대를 손실하는 동안 이집트군 전차 200~260대를 파괴하며 이집트 지상군의 공세 여력을 완전히 소진시켰다.
결국 시나이 방면에서도 대역전을 향한 이스라엘군의 결정적인 반격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군 참모본부와 남부사령부는 14일 이후 이스라엘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는 이집트군 기갑부대가 크게 약화된 것을 이용해 운하를 건넌 뒤 수에즈 남단의 이집트 제3군을 포위한다는 대담한 결정을 내렸다. 작전명은 "용감한 사나이들(Operation Abirey-Lev)"로 정해졌다. 16일 새벽 아리엘 샤론 소장(나중에 총리가 된 바로 그 사람)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 제143기갑사단이 이집트 제2군과 제3군 사이의 전투 지경선을 파고들어 수에즈 운하를 기습도하, 텅텅 빈 수에즈 서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스라엘군은 악명 높은 '중국 농장'[37] 전투(Battle of the Chinese Farm) 등 돌파구 확장 단계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지만 어떻게든 이집트군을 밀어내고 운하 동안에 폭 5km짜리 회랑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으며, 무모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유명한 샤론은 전차와 포병 지원도 없이 보트를 탄 보병만으로 도하를 실시하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다음날 이스라엘 후속 부대가 샤론을 따라잡으면서 이집트군은 반격의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야음을 틈타 회랑 내의 사실상 유일한 가용 도로인 "아카비시(Akavish)로"를 따라 거의 무모하다시피한 부교 수송 작전을 성공시킨 이스라엘군 공병대가 수에즈 운하를 도하할 가교를 부설하였고, 이집트 포병대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필사적인 포격을 가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돌파구 남쪽 제3군 지역에서 이스라엘군의 좌측방을 찌르기 위해 북상하던 이집트군 제25전차여단은 이스라엘군 제2제대 아브라함 아단 소장의 제162기갑사단이 벌인 사단급 매복공격에 걸려 완전히 분쇄됐다. 운하 서쪽의 이스라엘군 선견부대는 이집트군 후방을 마구 휘저으며 무방비상태의 SAM 포대를 닥치는대로 파괴하여 공군이 마음 놓고 교두보 일대에 근접항공지원을 퍼부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안정적인 돌파구가 확보되자 아단 휘하의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기계화 보병들이 수에즈 운하 서안으로 돌입, 수에즈 운하 남반부의 이집트 제3군 병력을 포위함으로써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집트군은 철수했다가는 이번 전쟁으로 얻은 모든 것을 잃을까봐 철수하지도 못했고, 철수하지 않았다간 이번 전쟁에 투입한 전병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딜레마 속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포위되는 결말을 맞았다.
이스라엘은 3군을 포위 섬멸하여 이후 이집트의 전쟁 의지를 아예 소멸시켜버리고 이집트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려 했지만, 이스라엘의 후견국인 미국, 이집트/시리아의 뒤에 있던 소련이 대대적으로 개입했다. 미-소 양국은 모두 이스라엘이 3군을 물리적으로 섬멸하여 이집트에 불필요한 굴욕을 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천명했으며 이스라엘이 포위된 3군에게 식량, 의료 지원을 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키신저는 만약 이스라엘이 미국을 무시하고 3군을 섬멸하려 한다면 소련과 손을 잡는한이 있더라도 미국은 이집트 편에 서서 군사적 개입을 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에 가까운 엄중한 경고를 하면서 선을 넘는 순간 이스라엘이 얻은 모든 성과가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38]
우리는 브레즈네프를 자기 친구들 앞에서 병신새끼처럼 보이게 하는 망신을 시킬 수 없습니다.
물론, 소련과의 데탕트 말고도 후견국을 다시 미국으로 갈아치울 기미를 보이던 이집트의 체면도 중요했다. 기필코 이집트라는 중동 최고의 외교적 카드를 손에 넣고 싶었던 키신저는 여기서 반드시 사다트의 면목을 세워줘야만 했다. 디니츠 대사는 이집트가 정전협정을 위반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자위조치를 하는 것이라고 강변했고, 이집트가 정전협정을 위반하고 있던 것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3군을 구출하기 위한 움직임에 가까웠던데다 이스라엘이 3군을 작살내서 중동불패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가 너무 명백해서 닉슨과 키신저 모두 이스라엘의 항변을 씹었다. 한편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싶었던 사다트는 미국과의 수교까지 도모하는 조건으로 아예 미군이 이집트 편으로 개입해달라고까지 요청했으나 키신저는 사다트가 이스라엘만큼이나 황당하게 군다고 혀를 찼다.
어쨌거나 미국의 이러한 중대한 개입 때문에 이스라엘은 이집트 3군 섬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키신저는 이스라엘을 주저앉히면서 이스라엘이 하도 오랫동안 대화를 거부하며 고집을 부리는 아랍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외교정책은 없어지고 국방정책만 남은 모양이라고 촌평했다. 동시에 소련 대사 블라디미르 비노그라도프는 사다트에게 당장 정전에 동의하라고 다그치는 브레즈네프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이집트 역시 통제하였다. 한편 시리아는 이라크를 끌어들여서 또 한번의 반격을 준비하려 했으나 소련은 아사드에게 헛짓거리하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였고 이 때문에 아사드는 분노하면서도 반격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군이 초반 고전을 면치 못했던 지상전과 달리 해상전에선 이스라엘 해군이 압승을 거두었다. 개전 첫날 저녁 시리아 라타키아 항 부근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이스라엘군은 자국산 가브리엘 함대함미사일을 이용해 시리아 해군 소속 미사일 고속정 3척과 어뢰정 1척, 소해정 1척을 격침시켰고 시리아군이 발사한 스틱스 미사일은 ECM에 의해 모조리 빗나가버렸다. 그리고 이후 발팀에서 벌어진 이집트 해군과의 결전에서도, 이스라엘군 고속정 6척이 이집트군 고속정 4척 중 3척을 격침시키는 압승을 거두었다. 게다가, 전쟁기간 내 해군은 단 1척의 함정도 1명의 승조원도 잃지 않았다. 3차 중동전쟁까지 연전연승한 이스라엘 육군 및 공군과 달리, 해군은 당시로선 신병기인 스틱스 대함미사일에 주력 구축함 에일라트를 잃는 굴욕을 당한 바 있어 아랍국을 얕잡아 보고 있던 타군과 달리 긴장도가 높았고 그에 대한 대비도 철저히 했기에, 육공군과 다르게 전쟁 내내 승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군은 그렇게 자랑하던 정예 육군 기갑부대와 공군의 항공 전력이 이스라엘군의 자만심과 방심으로 인해 이집트 대전차 보병들과 방공군에게 초반에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그리고 일이 닥치면 자연히 해결된다는 임기응변적 사상과 예비군을 빨리 소집하면 된다는 현역병 최소화 사상이 동시에 파기된다. 이는 실제로 전쟁에 돌입하니 예비군이 동원 완료되는 72시간을 소수의 현역병이 다수의 적군을 상대로 버티지 못해서 파국이 일어났으며, 후방에 비축해둔 물자도 일선부대로 제대로 수송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탈 장군(이후의 메르카바 전차 개발로 유명하다)의 회고에 의하면 이스라엘군이 소모한 각종 탄약은 비축되어 있던 물량 내였고 유일하게 175mm 포탄(M107 자주포)만 비축분을 다 소모하고 미국의 긴급 지원 포탄까지 사용했을 뿐 105mm 전차포탄의 경우 약 30만 발의 비축분 중 절반 정도를 소모했다고 한다. 급박한 전황 속에 보급 체계도 혼돈에 빠져 급한 대로 전방 탄약고들의 탄약들이 우선 일선 부대에 공급되어 소모된 후 후방 비축탄들이 보급대의 트럭에 실린 채 원활하게 보급되지 않아 일선 부대들이 탄약 부족에 시달린 것이다.
이때 다수의 이스라엘군 장교와 장군들이 전사해서 여단장과 대대장, 중대장이 전사하지 않은 부대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39] 이에 이스라엘은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화를 겪었다. 사전에 전쟁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는 비난 여론이 빗발쳐 이스라엘 의회에서는 전쟁 대비 실패에 대한 조사를 위해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구성되어 청문회를 벌였고,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모세 다얀 국방 장관은 하루아침에 나라를 말아먹을 뻔한 졸장이 되어 사직서를 내야만 했다.[40] 전쟁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노동당은 간신히 승리를 거두고 메이어는 총리직은 유지하긴 했으나, 결국 새 내각이 구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다. 그나마 다얀과 메이어는 아그라나트 위원회에서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기 때문에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메이어의 사임 이후에 이스라엘 노동당의 인기가 서서히 사그라들고 리쿠드로 대표되는 우파 세력이 고개를 들었으며, 처음에는 온건파였던 인물들[41]이 강경파로 전향하며 레반트 지역에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아그라나트 위원회가 이스라엘의 기습 허용에 가장 커다란 책임이 있다고 지목한 것은 이스라엘 군사정보국 아만이었다. 아만 국장 엘리 제이라 장군은 파면됐고, 부국장 아리예 샬레브 장군도 보직해임당했다. 제이라의 오판을 지지했던 아만 이집트과장 요나 반드만 중령 역시 정보 관련 업무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아만 쪽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 했다. 모사드가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정보를 전달했음에도 군사정보는 자신들의 전문분야라며 그럴 리 없다고 무시한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고위 지휘관들도 화살을 피하지 못했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다비드 엘라자르 중장은 개전 직전 상황 판단과 전쟁 준비 실패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됐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상상도 못한 재난에 메이어와 다얀이 모두 흔들리던 순간에도 침착하게 대응하여 국가지도부의 패닉을 막고 마침내 대역전을 이끌어낸 이 또한 그였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내각과 참모본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아그라나트 위원회는 이 점을 참작해주지 않았다. 엘라자르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고 군을 떠났다.
시나이 반도에서 이집트군의 초기 공세에 대패한 남부사령관 슈무엘 고넨 소장은 아예 아그라나트 위원회에서 강제 예편 대상으로 이름이 올라 1974년 군복을 벗었다. 개전 초 반격 실패 이후 엘라자르가 직접 복귀시킨 전임 참모총장 하임 바르-레브 장군에게 사실상 남부사령관직을 넘겨준 상태였던 데에서 알 수 있듯 고넨의 지휘는 군 내부에서도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그는 수긍하지 않았다. 고넨은 남은 평생을 국외의 오지를 떠돌며 보냈고[42] 조국은 가끔씩만 방문할 뿐이었다. 언젠가 "실종"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던 그는 199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간 이스라엘군에서 가장 미약하고 천대받던 해군만이 라타키아 해전의 승리 덕분에 아그나라트 위원회의 책임 추궁에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또한 이전에 미사일 고속정으로 재미를 봤던 아랍 해군을 같은 수단으로 역관광시켜, 21세기 이후 조금씩 초계함을 도입하기 전까지 수상함은 죄다 소형 고속정으로만 꾸리게 됐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사 전략은 다시 6일 전쟁 때처럼 외부의 위협이 들이닥치기 전에 예방적으로 선제 공격하는 옵션을 대폭 수용했고, 이는 오시라크 원자로 공습에서 증명되었다. 또한 미국의 F-15 전투기를 해외 도입국 중 최초로 도입하고, 자국 사정에 걸맞은 메르카바 전차를 개발하는 등 무기 도입 과정에서 욤 키푸르 전쟁의 뼈저린 교훈을 대폭 반영했고, 1982년 레바논 내전에서 일방적으로 시리아군을 격파하며 복수를 단행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이스라엘군은 놀라울 정도의 회복탄력성과 적응력을 바탕으로 군사사에 길이 남을 역전승을 거두면서 어째서 스스로가 주변국 군대와 질적으로 격을 달리하는 정예인지를 다시금 증명했다. 이스라엘은 적시에 동원령을 발효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전략적 기습을 허용한 것은 물론 물론 대전차미사일과 지대공 미사일에 의해 기술적으로도 기습을 당했지만, 휘청이고 비틀대면서도 아랍 연합군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동원예비군을 전장으로 투입하고 일개 전차장부터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등의 일선 지휘관들이 임무형지휘에서 강조하듯 스스로 전장 상황을 읽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전투를 수행함으로써 개전 초 기습의 충격을 흡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 점이 특히 빛났던 순간은 방어 책임을 맡은 현역 부대인 제188 "바라크" 기갑여단이 사실상 궤멸했음에도 분산, 고립됐거나 부대 집결을 기다릴 새도 없어 동원되자마자 달려온 개별 전차[43]와 소대, 중대가 자발적으로 끈질기게 싸운 끝에 골란 고원의 이스라엘군 최대 거점인 나파크 기지 코앞에서 시리아군의 공세를 저지해냈던 골란 고원 남부 전투에서였다.
이스라엘군의 엄청난 전술적 적응 속도를 잘 보여준 것은 대전차미사일과 RPG-7이 밀집된 보병 진지에 대한 대응이었다. 시나이 반도에서 끔찍한 피해를 유발했던 대전차 방어선에 대한 전차의 정면돌격은 개전 수 일만에 포병의 이동탄막사격과 전차의 직사화력으로 엄호받는 보병의 근접전투로 대체되었다. 지대공 미사일 또한 적 후방으로 고속침투한 기계화부대가 SAM 포대를 지상에서 직접 타격하는 방식으로 무력화했다. 기존에 이스라엘군이 누리던 강점 역시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다. 골란 고원 전선 반격과 시나이에서의 대규모 전차전에서 입증됐듯 이스라엘군 기갑부대는 기갑전에서는 주변국 전차부대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파괴적인 전투력을 발휘했고, 수에즈 운하 도하작전에서는 위험을 감수하는 대담성과 호기를 포착하면 즉시 이용하는 신속한 작전템포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과시했다. 개전 초 국가의 존망을 걱정하던 이스라엘은 전쟁이 끝났을 때 다마스쿠스와 카이로를 지상군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모르데카이 가지트 장군이 후일 회고했듯, 이스라엘군은 "2년이 아닌 2주일만에 진주만에서 회복했다." 이러한 군사적 탁월성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의 억제력은 전쟁 이후에도 공고하게 유지될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전후 어떤 목표를 추구할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6일 전쟁 당시의 전투만 벌어지면 달아나는 겁쟁이 아랍 군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랍 연합군, 특히 이집트군은 여전히 서툰 면은 있어도 달려드는 전차 앞에서 절대 물러나지 않는 용기만큼은 존중받아 마땅한 전사들이었다. 그 결과 1973년의 노동당/조정당 정권 뿐만 아니라 1977년 총선으로 성립된 우파 리쿠드당의 메나헴 베긴 내각 역시 이집트와의 외교 협상을 매우 진지하고 신중하게 다루었다. 메나헴 베긴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맡아 양국의 평화협정 체결과 국교 수립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 사실을 직접 체감한 모세 다얀이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편 이집트는 놀라운 선전(善戰) 덕에 협상 테이블에서 당당한 기조를 유지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이러한 당당함은 고압적 자세가 아니라 유연한 협상 태도로 나타났다. 이스라엘군이 반격하여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으나 전쟁 초반 이집트군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입은 피해는 실로 어마어마했던 것처럼 이집트 역시 전보다 훨씬 선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은 지난 전쟁과 똑같았고,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무릎 꿇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안와르 사다트가 이스라엘과의 화평정책으로 외교정책을 180도 선회했던 것이다. 당장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에서 승인한 "시나이 반도 반환 대 평화협정 및 외교적 승인, 시나이 반도 비무장 지대화 교환"과 욤 키푸르 전쟁 이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실현된 "시나이 반도 반환 대 평화협정 및 외교적 승인, 국교 수립 교환"을 보면 대차대조표에서 시나이 반도 비무장지대화가 국교 수립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다만 키신저의 회고에 따르면 사다트는 전후에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개전 이전부터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물론 이제 명목상으로나마 그런 목표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이집트의 국익에 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은 내세울만한 군사적 성과를 통해 이집트 국민이 6일 전쟁의 대참패로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여론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과 수교를 수용할 수 있는 국내정치적 조건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관대한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키신저는 개전 초 외교전문에서 사다트의 이러한 속내를 읽어낸 뒤 찬탄을 담아 "나는 지금 우리가 일류 정치가를 상대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결국 이집트의 전향적 태도와 미국의 보상 제안[44]에 이스라엘이 한 발 양보해 1974년 시나이 잠정 협정으로 이스라엘군이 수에즈 운하에서 철수하면서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었다. 그 후 몇 년에 걸친 협상 끝에 지미 카터 행정부 때인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과 1979년 워싱턴 D.C. 협정으로 이스라엘이 시나이 반도에서 단계적으로 철수한 후 시나이 반도는 1982년 완전히 이집트의 손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대신 이집트는 욤 키푸르 전쟁 이전까지 이스라엘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는 것조차 거부하던 극단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국교 및 공식적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적성국 대열에서 반영구적으로 이탈했다. 이스라엘이 건국 직후부터 기다려온 외교적 돌파구였다.[45] 사다트 대통령은 이 공로로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78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대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아랍 국가 가운데 최초로 "이스라엘과는 평화도, 협상도, 승인도 없다" 하는 아랍 정상회의의 "3 No 원칙"을 깨뜨리고 이스라엘과 수교한 이집트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1979년 아랍연맹에서 퇴출당했고, 카이로에 위치하던 아랍연맹 본부 역시 튀니스에 빼앗겼다. 아랍 세계의 리더를 자임하던 이집트로서는 커다란 외교적 타격이었다. 사상 처음으로 아랍 지도자가 이스라엘 크네세트(의회)를 방문한 역사적인 장면에서 "앞으로 전쟁은 없습니다"라고 연설한 사다트 본인도 1981년 이스라엘과의 평화 협정 체결에 반발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손에 암살당했다. 그의 뒤를 이어 30년간 권좌에 앉은 사람은 전쟁 중에 활약했던 호스니 무바라크였다. 그러나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집트-이스라엘 국경에서는 몇몇 사소한 사건을 제외하면 평화가 깃들었다.또한 아랍의 반이스라엘 대열의 왕초이자 최강국이던 이집트의 이탈은 다른 아랍국의 적극적인 이스라엘 공격을 무기한 보류하게 만들어 2023년 하마스 전쟁 이전까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의 대규모 전쟁은 없었으며,그마저도 4차까지 이어지던 중동전쟁에 비하면 규모가 훨씬 작았다. 이때의 이집트의 대타협으로 이전까지의 전면전 구도가 완전히 뒤집힌 셈이다.
선빵 여부
- 제 1차 (1948): 겉보기에는 아랍연합이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 열강과 결탁한 이스라엘이 아랍인들의 영토를 빼앗은 것이므로, 이스라엘이 선빵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1차 중동 전쟁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이로 인한 팔레스타인 문제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에 벌어졌다. 5월 16일에 이집트 전투기들이 이스라엘을 폭격했고 전 아랍이 전쟁 상태에 돌입했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5개국 아랍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 제 2차 (1956): 이스라엘이 선빵 (수에즈 운하 빼앗음)
- 제 3차 (1967): 이스라엘이 선빵
이스라엘이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를 상대로 선제 공격을 감행, 단 6일 만에 대승을 거두어 엄청난 영토를 획득했던 전쟁. 6일 전쟁이라는 별명으로 매우 유명하다.
- 제 4차 (1973): 제3차에서의 복수를 위해 이집트가 선빵.
키신저의 회고에 따르면 사다트는 전후에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라 개전 이전부터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의 멸망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은 물론 이제 명목상으로나마 그런 목표를 내세우는 것 자체가 이집트의 국익에 해가 될 뿐이라는 것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켰던 것은 내세울만한 군사적 성과를 통해 이집트 국민이 6일 전쟁의 대참패로 자존심에 입은 상처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여론이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과 수교를 수용할 수 있는 국내정치적 조건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크게 상한 사람보다 심리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상대에게 관대한 협상 조건을 받아들이기 쉽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간단하다. 키신저는 개전 초 외교전문에서 사다트의 이러한 속내를 읽어낸 뒤 찬탄을 담아 "나는 지금 우리가 일류 정치가를 상대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 결론: 아랍 새키들도 문제지만, 이스라엘 새키들이 더 큰 문제다.
3. 승전국
- 제 1차 (1948): 이스라엘의 승리
- 제 2차 (1956): 이스라엘/영국/프랑스의 전투 승리, 외교적 패배 (국제여론에 밀려 시나이 반도 반환)
- 제 3차 (1967): 이스라엘/미국의 일방적 승리.
- 제 4차 (1973): 초반에 궤멸상태까지 밀리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이스라엘의 역전극. 그렇지만 이집트와 안와르 사다트도 제3차 전쟁에서의 일방적 패배를 설욕하고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이 점령하던 이집트 수에즈 운하는 이집트로 반환되었으므로, 외교적으로는 이스라엘, 이집트 양국 모두의 승리로도 볼 수 있다.
4. 미소 냉전 구도
- 제 1차 (1948): 미국, 소련이 동시에 이스라엘 지원 (그만큼 국제투기자본과 로스차일드에게 이스라엘 건국이 중요했다는 뜻)
- 제 2차 (1956): 미국, 소련이 동시에 이집트 지원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도 버리는 패로 쓸 만큼 국제투기자본과 로스차일드에게 냉전 체제의 확립이 중요했다는 뜻)
- 제 3차 (1967): 미국이 이스라엘 지원, 소련은 이집트 지원 (국제투기자본과 로스차일드가 원했던 냉전 구도의 고착화)
- 제 4차 (1973): 미국 (데이비드 록펠러)이 처음에는 이스라엘을 지원해주지 않았지만, 계속된 압박으로 이스라엘이 로스차일드에서 록펠러로 충성서약을 갈아타니까 지원해줌. 소련 (로스차일드)은 이집트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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