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로스차일드의 일본/아시아 공산주의화 음모에 대항한 데이비드 록펠러-미국 CIA-야쿠자 코다마 요시오-동성회 정건영 라인?

 

‘긴자 호랑이’ 정건영과 야쿠자- 3공 커넥션.
  • 슬러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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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번호 3735173 | 2014-02-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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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회일 듯. 하단 짤리면 클릭 [꼬꼬사 3-1] ‘긴자 호랑이’ 정건영과 야쿠자- 3공 커넥션. 

“고다마를 통해 일본 내 좌익과 노동운동 타도에 동원된 대표적인 야쿠자 조직이 한국계 마치이 히사유키가 이끄는 도세이카이(東聲會)였다. 마치이는 1923년 한국에서 출생해 일본으로 이주한 사람으로 1948년 한국계 야쿠자를 규합하여 도세이카이를 결성했다”(21세기 초국가적 조직범죄와 통합안보, 조성권, 173p)


“역도산이 이북출신인데 이북에 딸이 하나 있다. 그래서 그 딸 편지 받고 이북으로 가려 했으나, 내가(정건영) 가면 죽인다고 해서 못 갔다.” (김대중 대 김영삼, 42p)


“대한축구협회는 구랍 31일 재일교포 정건영(재일대한체육회지부 고문), 이유천, 김세기 씨 등 3명에게 그동안 한국축구 발전에 협조해준 것을 치하하는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살고 있으면서도 한국 축구의 재건을 위해서 오래도록 물심양면의 협조를 해왔었다”<경향> 1968. 1.4 8면


“대한체육회 재일지부 정건영 회장은 20일 하오 6시 10월 유신사업추진에 노고가 많은 국내 체육인들을 반도호텔 「다이너스티 룸」에 초청, 성대한 「칵테일 파티」를 베풀었다.”매일경제 1972.11.21. 7면


“일본에서는 정건영과 문학림이 (정인숙의) 뒤를 봐줬다.”

 



성공한 사업가, 야쿠자, 극우 정치깡패, 스포츠 외교가까지, 정건영(일본명 마치이 히사유키)의 캐릭터는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6-70년대 ‘긴자 호랑이’로 불리며 도쿄 밤거리를 주름잡았던 그는 일본 흑막정치의 실세를 등에 업고‘65년 한일 수교’, 김대중 납치사건 등 굵직한 사건에 개입했던 극우 폭력분자이었으며, KOC(한국올림픽위원), 재일본대한체육회장을 역임하며 열악했던 한국 스포츠현실에 물을 댔던 ‘애국’(?)주의자이기도 했다.

 

역도산의 친구였으면서 그를 억압한 것도, 정인숙의 후견인을 맡았던 ‘3공 정권안보의 첨병’이자 대한민국에 외채를 떠안긴 것도 정건영이었다. 과감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그의 행적은 재일한국인의 슬픈 자화상이었다.



‘인텔리 깡패’의 성장과 시대적 배경

-이시하라 간지 & 미국의 비호아래

 

정건영은 1923년 도쿄의 부유한 재일교포 가정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 한국으로 넘어와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이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일본으로 넘어가 재혼한 아버지와 살게 된다.

 

계모 설움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었나보다. 정건영은 계모와 갈등을 일으키며 가족에 정을 붙이지 못한 채 싸움을 일삼고 다녔는데, 이때부터 그의 주먹은 빛을 발한다. 정씨는 1943년 센슈대학에 입학한 후 도쿄 히가시나카노 청년들을 규합, 이시와라 간지 휘하의 동아연맹이라는 단체를 거느리는 한편, 45년에는 재일조선인연맹(조련)에 반대하는 우파 민족주의집단인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건청)을 결성하며 ‘인텔리 야쿠자’로 발돋움 했다.(정건영이 최배달과 처음 만난 것은 ‘건청’을 통해서였다. 당시 최배달(맹호라는 가명 사용)은 건청에서 경호업무를 맡고 있었다) 일본점령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우호적인 태도도 빠른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20대의 이주민이 점령군의 눈에 들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종전 후 연합군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을 유발했던 극우 정치인·기업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착수했다. 이는 “일본의 전쟁의욕과 능력을 분쇄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으며, 동시에 일본의 좌파(노조,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를 강화시키는 방안도 함께 강구했다.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소수시민(이른바 삼국인-중국, 대만, 한국)역시 점령군의 일본인 불신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암시장 등에서 우선권을 점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중국내 친미인사인 장개석이 자국내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고, 소련은 동유럽으로 세를 확장시키는 등 냉전이 시작되면서 삼국인들의 세상도 삼일천하가 되고 만다. 미국의 동아시아 지배전략이 바뀌는, 역코스(Reverse course)가 일어난 것이다. 미 국무부는 대동아정책의 중심을 중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중국파와, 일본을 중심으로 소련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일본파의 대결에서 일본파의 손을 들어줬고, 일본 내 공산세력은 졸지에 “미군 측에서는 단순한 불안요소가 아니라 소련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곧장 미연합사령관은 ‘노조 내부분열’ 획책안을 수립,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는 동안 우파를 이용해 일본을 확보하”려는 방침을 마련했다. 같은 시기, 한국에 들어선 미군정이 ‘일본 관리유임정책’을 펴며’ 친일, 반조선‘전략을 취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새롭게 등장한 일본인 무장불량배 집단 ‘구렌타이’ 야쿠자가 재일교포 및 중국인들(이른바 三國人)과의 싸움에서 압도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일본 조직폭력연구의 바이블 『야쿠자』의 저자(데이비드 카플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1946년부터 이미 좌익에 대한 비밀공작으로 일본에서 깡패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 작전의 총 지휘는 태평양전쟁 및 SCAP(日점령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책임자였던 윌로우비 소장이 맡고 있었다. …(중략)이러한 비밀공작을 추진시키기 위하여 윌로우비 장군은…전범자들로서 마땅히 처벌받았어야 할 주요멤버들을 정보기관에 고용했던 것이다.” 


재밌게도 기자는 “확고한 실력이 있었던” ‘마치이’의 활약상도 기록했다.

 

“윌로우비 휘하 장교들은, 물론 G-2(미군정 방첩대)의 계획에 도움은 됐으나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하지는 못했다. 음모를 꾸미는 것과 가두시위 및 파업에 대처하는 것은 그래도 문제가 달랐다. 정말로 궂은 일에는 무명인물들의 비밀동원이 필요했다.

(중략)그런데 캐넌부대(비밀공작조)에 속해 있던 한인장교 한 사람이 분쟁을 맡아서 처리했다. 그는 당시 야쿠자의 주요 갱단 중의 하나인 동성회를 조직하고 있던 한국계 일본인 마치이 히사유키의 도움을 요청했다…마치이는 그의 부하들에게 장총과 기관총을 동원하여 문제를 결말짓도록 명령했다. 결과 실력과시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미군의 요청을 받은 스물여섯 앳된 주먹패 리더가 중무장을 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한 셈이다. 하지만 정건영 본인은 미군정과의 연루설,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갱단임을 부인했다. <경향> 66년 7월 13일자 보도에 따르면, 정씨는 “일본 「매스콤」이 나를 왜곡악평했다”면서 ‘긴자경시총감’이란 별명도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반공 교포들의 전위기관 동성회(東聲會)를 갱단과 혼동한 때문이라고 밝혔다. 동성회가 조직폭력집단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은 이어지는데, 사실여부는 후술할 내용에서 상세히 드러난다.

 

‘마치이의 날개’, 日흑막정치의 대부 ‘고다마 요시오’ 이야기

한국-야쿠자 커넥션




미군정을 등에 업은 정건영은 상해, 공갈, 사기 등의 혐의로 10번 넘게 체포됐으나 구치소에 들어간 것은 한 번 뿐이었고, 살인을 저질렀을 때도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등 언제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한갓 재일교포출신 야쿠자가 김종필, 석정선, 김형욱 등 3공 실세와 술잔을 기울이며 외교적 핫라인을 꾸릴 위치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고다마 요시오와의 만남이 컸다. 조직폭력단 전문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사우스웰은 『조폭연대기』에서 고다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길에는 두 편이 있다. 하나는 햇빛이 내려쬐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그늘이 진 곳이다. 바쿠토(도박꾼)는 반드시 그늘에서 걸어야 하고 햇빛 쪽은 다른 시민들을 위해 내버려둬야 한다.

그러나 1945년 이래 많은 야쿠자 주요 인사들이 그늘을 떠나 대중들이 면밀하게 주시하는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다르게 일본에서 그들이 선택한 노출에는 비방 못지않게 갈채가 뒤따랐다. 거리의 양쪽 모두를 활보했던 야쿠자 인물들 중 가장 돋보이는 이가 바로 고다마 요시오다.“ 


사실이 그랬다. 고다마 요시오는 “지하세계와 합법적인 기업세계, 주류정치”를 넘나들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휘두르는, 현대 흑막정치의 숙주였다. 정건영과 함께 65년 한일협정을 막후에서 지휘한 것도 그의 솜씨였다.


고다마는 1911년 2월 18일, 니혼마츠에서 기울어가는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어린 나이에 조선으로 넘어와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의 모교가 고교야구명문 선린상고였다는 점은 이채롭다. 그 후 고다마는 잠시 사회주의에 심취했었으나 곧장 극우로 전향, 국수주의 집단이자 비밀결사·테러집단인 현양사에 가담해 우두머리 도야마 미츠루 밑에서 일을 배웠다. “조직범죄와 정치를 결합시킨 (극우의) 영도자”라 불리는 도야마 미츠루는 폭력조직과 정치세력이 교묘히 결합된 지금의 야쿠자 형태를 만든 장본인으로, 극우집단이나 야쿠자들의 사무실에는 정신적 지도자를 상징하는 의미에서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고 있다.

 

이후에 고다마는 사이토 수상 암살사건에 연루되며 1937년까지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출소 후부턴 육군 본부에서 근무하며 정보원 생활을 시작한다. 훗날 前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고다마가 자신에게 “나도 옛날엔 정보쟁이였다”고 말하며 자신을 긴장시켰다고 밝혔지만, 실제로 그의 첩보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사들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아 동아시아 전역을 대상으로 간첩활동을 펼쳤고, 30세가 되던 해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亞玉機關(고다마 기관)이라는 군수업체를 창설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다. 전 월간조선 기자 조갑제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다마 기관은 상해에 본부를 두고 전성기엔 2천 명의 직원을 부렸다. 아편 밀매에도 손을 대 방대한 자금을 마련했다는 의심도 받았으나 정확한 활동상황은 지금도 미스터리다. 태국에 약 30억 엔어치의 재산을 갖고 있었다. 지금 화폐가치로 치면 조엔대를 웃도는 재산이었다.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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