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일본대사 지낸 무토 마사토시의 김대중 납치 사건 증언: 김대중을 납치사건에서 견제, 감시한 것은 미국 헬기; 김대중 납치사건의 배후는 박정희-이후락 중앙정보부 라인인가, 아니면 CIA-도널드 그레그-이후락 중앙정보부-야쿠자 정건영 동성회 라인인가?

 

  • 2019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에 대해 중요한 증언을 하였는데 자신이 외무성 북동아 과장 시절 일본 자위대나 일본 해상보안청에서 헬기 출동 사실에 대해 알아보았으나 출동 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이 말인 즉슨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바다에 수장당할 위기에 있던 김대중이 자신이 납치된 배 위에 한 헬기가 와서 견제, 감시한 덕분에 살았다고 한 적이 있는데 이 헬기가 미국 헬기냐 일본 헬기냐라는 논쟁이 있어왔는데 무토 본인은 미국 헬기라고 추정한 것이다. 인터뷰 전문.
    무토 마사토시 
     
     

  • 도널드 그레그(Donald Gregg[5]), 1973년 - 1975년, 주한미국대사&조지 H. 부시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6], 한국 정부에 김대중 납치사건 제지, 경고[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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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일본 도쿄 그랜드 팰리스 호텔 객실중 가장 위층인 22층 2212호에서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당수 양일동, 김대중의 조카뻘이자 국회의원 이던 김경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며 담화를 나누고 자유민주당의 중의원인 키무라 토시오(木村俊夫)[1] #와의 약속장소로 향하던 김대중은 한국인으로 보이는[2] 괴한 5명에게서 납치당했다. 범행 현장에는 백두산 담배, 배낭, 휴지, 노끈, 마취제, 탄창 등의 유류품이 남아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끌려가는 도중 엘레베이터 에서 마주친 일본인 남녀에게 김대중은 일본어로 "납치된다, 살려주시오" 라고 소리쳤지만 그들은 야쿠자의 싸움인 줄 알고 엮이기 싫다는 생각으로 외면해 버리면서 김대중은 그대로 차량에 태워져 실려갔다.

      괴한들은 오사카 또는 고베로 추정되는 안가에서 김대중의 옷을 작업복으로 갈아 입히고, 눈과 입을 포장용 테이프로 막은 다음, 다시 차에 태워 1시간 가량 달려 바닷가에 이르렀다. 여기서 모터보트에 태워 30~40분 항해한 뒤, 정박해 있던 중앙정보부의 공작선 536톤 용금호에 김대중을 인계했다.

      용금호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을 배밑 쪽 선실로 끌고 가 손발을 다시 묶고 눈에는 테이프를 여러 겹 붙인 다음 그 위에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오른손목과 왼발목에 각각 수십 kg의 바위를 매달고, 등에 판자를 대어 몸과 함께 묶었다. 이때 이들은 "던질 때 풀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어" "바다에 후카(상어)가 많던데", "솜이불을 씌워 던지면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공포에 질린 김대중은 속으로 "하느님 예수님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며 기도했다고 한다.

      용금호가 전속력으로 항해하던 중 김대중은 눈이 번쩍하는 불빛과 함께 굉음을 느꼈으며 선실에 있던 자들은 "비행기다!" 하면서 뛰쳐 나갔고, 배와 비행기가 서로 쫓고 쫓기를 30분 이상 계속하였다. 훗날 SBS 다큐멘터리 그것이 알고싶다는 이 비행기가 미국 CIA의 연락을 받은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무토 마사토시는 자기가 동북아 과장 시절 여러 자료를 찾아봤지만 일본 자위대 비행기나, 해상보안청 헬기가 출동한 기록을 못 봤다고 일본의 인터뷰에서 증언하였다. 용금호를 추격한 비행체가 일본 소속인지 미국 소속인지 아니면 다른 국가인지는 아직도 불명이다. 일본이 아니라는 주장과, 일본이 맞지만 이를 알리고 싶지 않아서 기록을 말소했다는 주장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한다.

      당시 미국 CIA는 김대중의 납치 소식을 즉시 파악하고, 납치된 김대중의 소재를 24시간 안에 파악하고자 별도의 액션을 취했다. 이 때 주한 미국 대사이던 필립 C 하비브는 CIA 한국 지부장이었던 도널드 그레그[3]에게 "박정희는 김대중이 납치된 이후 24시간 동안은 미국의 눈치를 볼 것이니 그 안에 찾아내도록 하라"며 조언했고, 서울에 있었던 도널드 그레그 본인 역시 감청 요원으로부터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직접 중앙정보부에 전화를 걸어 "김대중을 죽이지 말라"고 경고했다고 한다.

      결국 CIA 한국지부 요원들이 김대중의 소재를 찾아냈다. 이때 관련 정보를 소지한 요원이 직접 청와대로 찾아가자 박정희는 앞에선 '아이 돈 노'를 외친 다음 뒤로는 풀어주란 명령을 했다고 하는 루머가 있었으며, 거의 맞는 내용으로 보인다. 참조[4] 
       
       
       
       
      • 박정희는 1974년 12월 미국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잭 앤더슨을 만났을 때 자신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며 중정의 소행이라고 말했고, 그 책임을 물어 이후락을 중정부장직에서 해임시켰다. 김종필은 1980년 3월 12일 아사히 신문 논설주간에게 이후락이 납치 계획을 세우고 미국 CIA에 통보했다고 말했다. 이후락은 1980년에 전 국회의원이자 고향 친구인 최영근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후락은 그 후 박정희는 이 사건에 대해 관계가 없다고 말을 바꿨다.
      • 당시 공화당 정책위 부의장이던 이만섭은 김대중 납치 소식을 듣자 중앙당 기둥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건 분명히 중앙정보부의 소행이다. 한때 대통령 후보였던 인사를 백주에 도쿄 한복판에서 납치하다니, 유신 정권도 얼마 못가겠다" 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 현재는 당사자인 박정희, 김대중, 이후락이 전부 고인이라 납치를 지시한 인물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낼 길은 없다. 그나마 김종필이 직접 인터뷰를 했다. JP의 증언에 의하면 이후락이 단독으로 범행을 지시해놓고 박정희한테 갑작스럽게 보고를 했다고 한다. 결국 JP는 일본까지 직접 가서 사과하게 되었고, 일본행 비행기에서 타는 속을 달래려 재떨이를 4번이나 비울 정도로 담배만 태웠다고 한다.[9] 내용을 보면 이후락이 이런 일을 벌인 이유는 윤필용 사건 때문에 박정희한테 엄청나게 갈굼을 당하자 박정희에게 잘 보여서 만회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 전 주한 미국대사 성 김 부친인 김기완[10] 공사가 여기에 관여했다가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했기에 성 김도 완전한 미국인이 되었다. 여기에 관여하지 않았거나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오늘날 주한미국 대사는 다른 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이러니하게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한인 2세 최고위직 인사들이 박정희와 악연을 가져 미국 국적을 취득한 부친으로 인해 자신도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 점이다.
        특히 성 김의 부친 김기완은 임택근의 매형으로 즉, 임택근이 성 김에게는 외숙부가 되며, 김기완이 손지창, 임재범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손지창, 임재범과 성 김은 외사촌과 고종사촌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임택근이 5.16 군사정변 당시 박정희와 거리 인터뷰하는 사진도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어찌보면, 권력에 들어갈 입장임에도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 치부를 잘 드러냈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김기완은 창랑호 납북 사건의 피해자였다. 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가 된 아이러니이다.
      •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은 자기 아버지가 직접 지시한 일이 아니며, 박정희 본인도 납치사건을 언론 보도를 통해 처음 들었을 때는 북한의 소행으로 의심하는 등 진상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증언하였다.[11]
      • 서강대학교의 손호철 교수가 과거사진상규명위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이 사건도 조사했는데, 그에 따르면 중정 측에서 애초에 김대중 의원을 죽이려는 계획도 논의했지만 최종 단계에서는 납치만 하는 것으로 결정났다고 한다. 또한 박정희가 김대중 납치사건에 관해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한다.
      • 한국의 중정요원들이 불법적인 공작을 일본에서 벌인 것이 주권침해에 해당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은 한국 정부가 김대중의 일본에서의 반유신투쟁과 통일운동 등의 활동을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을 일본 정부에 하고 무마가 되었다. 그런데, 이후 소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에서 김대중의 일본 내 활동이 사형을 언도한 근거로 인용되어, 일본의 반발을 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전두환의 신군부는 판결문에서 이 부분을 삭제한, 변조된 판결문을 일본 정부에 전달하는 기상천외한 조작극을 벌이기도 했다.
      • 2020년 8월 12일 이런 보도가 나왔다. 이게 이상하지 않은 게 당시 중정에서도 이후락만 강력하게 작전을 추진했고 휘하 요원들은 전부 반대했던 걸로 알려졌다. 납치를 지시했던 총책임자도 당일 갑자기 종적을 감춘 데다 미국 정보부에서는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던 걸로 봐선 내부에서 사보타주가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 2021년에 1973년 당시 뉴스위크 동경지국과의 인터뷰 육성이 공개되었다.# 박정희 정권에 비판하면서도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발언했다.
      • 여담 수준의 이야기지만 이 사건 당시 중정의 J차장보는 모처럼 여름 휴가를 얻어 춘천을 여행 중이었는데 김대중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서울로 복귀하려 중정에 연락했지만 뜻밖에도 이후락 부장의 비서실장인 이 모씨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차장보가 급히 올라오면 오해가 커질수도 있습니다. 오지 말고 휴가나 며칠 더 보내세요. 연락망은 항시 유지하시고...
        이 말에 대략 상황을 파악한 J는 포항, 남원, 전주 등을 돌아다니며 사나흘 정도 지난 후에 상경했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휴가가 연장된 셈이지만, 곱씹어보면 뭔가 의미심장한 대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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