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랑쉬 모니에 감금 사건

 

1. 개요[편집]

프랑스 부유층 집안 출신의 여성 블랑쉬 모니에(Blanche Monnier, 1849~1913)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 의해 25년간 감금되었다 풀려난 사건.

2. 상세[편집]

블랑쉬 모니에 부친
블랑쉬 모니에 모친 원본
부친 샤를 에밀 모니에[1]
모친 루이즈 모니에르[2]

블랑쉬 모니에는 1849년 푸아티에의 왕당파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1876년 부모가 정해준 정혼자 대신 나이 많고 가난하며 공화주의자이기까지 한 변호사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했으나,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은 왕당파와 공화파간의 정치대립이 극심했고, 부친인 샤를 에밀도 정치 위기 때문에 학장 자리에서 해임되었으니 공화주의자와의 결혼을 보수파 부모가 반대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어머니인 루이즈는 블랑쉬가 '돈없는 변호사'와 결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가족들이 이것을 빌미로 블랑쉬를 감금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3]

감금생활 동안 그녀는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로 생활해야 했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창문까지 폐쇄해 다락방에 햇빛조차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었고 1885년 그녀가 사랑한 변호사가 교통사고로 예기치 않게 사망했음에도 가족들은 그녀를 풀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1901년 당시 푸아티에의 검사장(Procureur général)은 블랑쉬 모니에의 감금생활을 폭로한 익명의 편지를 받게 된다.[4]
"검사장님. 심각한 사건을 신고하려고 합니다. 모니에 여사 댁에 감금되어 반쯤 아사한 채로 25년 동안 쓰레기더미에서 살고 있는 노처녀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기 오물 속에서 말입니다."
편지를 읽은 검사장은 경찰을 동원해 모니에 일가의 저택을 조사하였고 다락방에서 감금당한 블랑쉬 모니에를 발견하였다.
블랑쉬 모니에 발견 사진 원본
"그 불쌍한 여자는 썩은 짚 매트리스 위에 완전히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그녀의 주변은 온통 배설물, 고기 조각, 채소, 생선과 썩은 빵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굴껍질과 벌레들이 모니에 양의 침대에 굴러다니는 것도 봤습니다. 공기가 너무 숨이 막히고, 방에서 풍기는 악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 경찰관의 증언
발견 당시 블랑쉬 모니에는 몸무게가 약 55파운드(25kg)에 불과하여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으며, 침대는 음식물과 배설물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위 사진은 구출 후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 찍힌 것이다.

체포당한 어머니는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어 15일 뒤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아버지(1820–1882)는 이미 사망하였고 오빠 마르셀은 방관한 죄로 징역 1년 3개월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모친의 가정내 권위가 매우 강해 마르셀에게 통제권이 없었다는 점을 인정했고, 당시 프랑스 형법에는 구조 의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부작위범으로 판단할 법 조항도 없었다고 한다.#

한편 풀려난 블랑쉬 모니에는 신경성 식욕부진증, 조현병, 노출증, 분변기호증 등의 정신질환을 진단받고 남은 여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다 1913년 향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관련 문서[편집]

  • 요제프 프리츨 친딸 감금 강간 사건: 2008년에 전 세계를 경악시킨 오스트리아의 근친, 납치, 감금 및 강간 사건. 영화 《룸》과 《걸 인 더 베이스먼트》의 모티브가 되었다. 1984년 8월 29일부터 2008년 4월 26일까지 무려 24년간 요제프 프리츨은 딸 엘리자베트를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서 가두고, 그녀를 완전히 요제프 자신에게 의존하게 만들고, 그녀에게 성적 학대를 하고, 마치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취급함으로써 그녀를 노예와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
[1] Lycée de Poitiers의 수사학 교수이자 문학부 교수직을 맡은 후 1875년부터 1879년까지 학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딸의 삶에 절망하는 착하고 마음이 약한 남자였다고 한다.[2] 혼전 성은 드마르코네(Demarconnay).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교계 명사였다.[3] 거식증 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블랑쉬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힐까봐 집안에 감추기로 한 것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4]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현재까지도 누군지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해당 저택에 고용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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