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다이토구에 소재한 이와사키 야타로, 미쓰비시 재벌의 주택; 영국적 미를 숭상하고 표준으로 놓으면서도, 일본 전통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융합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던 친일재벌 윤덕영의 덕수산장 역시 프랑스 어느 귀족의 집 설계도를 따라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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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노 공원은 사실 꼭 가려던 곳은 아니고 도쿄에서 마지막으로 가보려고 했던 곳은 우에노 공원 연못 남쪽에 위치한 저택 '구 이와사키 저택'입니다.

여기는 지도로 도쿄 여기저기를 찾다가 알게 된 곳인데 서양식 건축물과 일본 전통 건축물이 독특하게 공존하고 있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에요.

구 이와사키 저택 정원

旧岩崎邸庭園

여는 시간: 매일 9:00 ~ 17:00

입장료: 성인 400엔 / 65세 이상 200엔

구 이와사키 저택은 1896년 이와사키 히사야(岩崎 久弥)가 지은 개인 저택입니다. 말 그대로 이와사키 씨의 저택인 셈이죠.

이와사키 히사야는 우리나라에도 제법 잘 알려진 '미쓰비시 그룹'의 창립자 이와사키 야타로(岩崎 彌太郞)의 장남이자 미쓰비시 그룹의 3대 사장이었던 인물. 2차 세계대전 패망 전까지 일본 3대 재벌로 손꼽힐 만큼 거대한 기업이라 저택 역시 규모가 거대했고 건물이 무려 20동에 달했다고 합니다. 웬만한 궁전보다 큰 수준이었죠.

미쓰비시 그룹 로고

미쓰비시 그룹은 1871년 메이지 유신에 앞장섰던 토사 번 출신의 하급 사무라이 이와사키 야타로가 창립한 회사입니다. 잘 나갔던 시절에는 정말 안 하는 게 없는 수준으로 거대했던 기업이었죠. 사업 분야만 놓고 보면 우리나라 삼성이랑 현대를 합쳐 놓은 정도?

참고로 요 미쓰비시 그룹 로고는 이렇게 탄생했다고 하네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미 군정은 일본의 모든 재벌들을 해체했고 미쓰비시도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재벌과 달리 흩어진 기업들 상당수가 재결합에 성공하면서 과거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시 거대한 재벌로 돌아왔죠.

대표적인 미쓰비시 소속 기업이나 관련 기업으로는 미쓰비시 자동차, 미쓰비시 전기, 미쓰비시 중공업, 미쓰비시 엘리베이터, 니콘 카메라, 로손(편의점) 등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익숙한 기업이긴 합니다.

다만, 미쓰비시 그룹은 다른 이유로도 악명 높으니 바로 일제강점기 한국과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강제징용해 썼다는 것. 미쓰비시 그룹 산하 기업에서 운영하던 탄광이나 전투기 생산 등에 많은 강제징용 노동자가 투입됐고 덕분에 배상 문제에 관련된 대법원 판결과 제3자 변성 안 등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슈가 많이 됐던 기업입니다.

미쓰비시 자체도 당시 대기업이었던 만큼 일본의 전쟁 수행에 크게 공헌했고 태평양 전쟁 때 가미카제 특공대가 많이 탔다고 알려진 '제로센' 전투기 등을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내용을 배경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죠.

그래서... 마냥 이와사키 저택을 예쁜 관광지로만 생각하고 가기에는 여러모로 꺼려지는 부분이 있긴 합니다. 이 저택에 지냈던 미쓰비시 재벌 가문을 생각하면 더더욱...

구 이와사키 저택은 전쟁이 끝난 후 미 군정이 압수했고 이후 일본이 돌려받으면서 국영화하여 지금은 국가 소유입니다. 20동에 달했던 건물 중 3동만 현재는 남아 보존 중. 서양관은 특히, 중요문화재로 지정해서 우리나라로 치면 흥인지문 같은 보물급 문화재입니다.

입구는 우에노 공원 방면에 있습니다. 지도로 보면 반대쪽에도 입구가 있을 법한데 저택이라 그런가? 입구는 한쪽밖에 없어서 만약 우에노오카치마치역 같은 지하철역에서 내린다면 좀 돌아서 가야 입구가 나옵니다.

경사진 언덕 길을 따라가다 보면 매표소가 나옵니다.

앞서 적었듯 일반 입장료는 400엔. 일본의 비싼 입장료를 생각하면 금액이 큰 건 아니라고 생각.

첫인상은 약간 남쪽 나라의 별장 같은 느낌?

궁전보다는 정말 어딘가 환상 속에 만들어놓은 별장 같습니다. 벽면을 노란빛으로 칠해서 보통 흰색 등으로 칠해 위엄이나 깔끔함을 강조하는 서양의 궁전이나 저택하고는 분위기부터 무척 달랐습니다.

서양 궁전 중에서는 오스트리아 쇤부른 궁전이 벽면이 노란색이라 약간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다만, 역광이라 입구에서 봤을 땐 그 특유의 노란빛이 막 잘 드러나진 않습니다.

입구로 들어가 볼까요?

내부 벽지도 노란빛이 가득.

이와사키 집안이 노란색을 좋아했는지는 몰라도 은행잎이 생각나는 특유의 빛깔 때문에 오후 햇살까지 곁들여 무척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줬습니다.

안에 있는 기둥이나 벽난로 장식은 우리나라에 있는 어떤 근대 건축의 작품보다도 화려했습니다.

솔직히 둘러보면서 크기만 좀 작을 뿐이지, 덕수궁 석조전이 생각날 만큼 거대하고 화려했습니다. 미쓰비시 재벌의 어마어마한 재력을 충분히 실감케 하네요.

지하실도 있다고 합니다. 역시 이런 저택엔 지하실이...

구 이와사키 저택 서양관 모형.

이와시키 저택은 크게 서양관과 화관(일본식 건물)로 나눠져 있고 두 건물이 연결돼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서양을 따라가고 싶어 했던 일본의 욕망과 그렇다고 해서 전통 생활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현실을 독특하게 절충한 것 같아요. 나중에는 아예 서양 스타일과 일본 스타일을 섞은 건축도 많이 나오는 걸 보면 19세기 말 과도기적 형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빅토리안 시대 영국에서 제작한 캐비닛.

앤티크 한 가구네요.

테라스도 제법 예쁩니다.

그나저나 이 시대 때도 라디에이터가 있었군요. 엄청 오래된 물건이었네...

테라스 밖으로 보이는 정원 풍경.

이런 사진만 보고 여기가 정말 일본인지 누가 알까... 서양식 근대건축에 진심이었던 일본.

다음은 2층으로.

여성 게스트룸.

서양식 저택 느낌을 정말 잘 살렸다고 생각. 설계자도 영국인이고 가구도 영국에서 수입한 만큼 당연한 거겠지만요.

황금빛이 나는 특유의 벽지도 특징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요런 벽지로 만든 근대 주택은 못 본 것 같네요.

가구와 방에 대한 설명이 제법 알찬데 기왕이면 옛날 사진 같은 걸 방마다 같이 배치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합니다. 과거에 이와사키 저택을 가문에서 어떻게 썼는지 궁금해서요.ㅎㅎ

2층 역시 베란다가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서양식 주택 옆으로 이어진 일본식 복도.

서양관과 화관이 연결돼 있어서 좀 있다가 1층으로 내려가서 화관으로 갈 예정.

오후에 오니까 이렇게 드리우는 햇살 덕에 노란빛 이와사키 저택 특유의 색감이 더 도드라집니다.

화려함만 따지면 덕수궁 석조전과도 비교할만한데 내부 구조나 가구 등은 그 정도는 아니고 정말 딱 별장이나 부잣집 저택 수준입니다. 궁궐처럼 화려하게 짓고 싶어도 바로 근처가 천황이 사는 궁궐인데 그럴 순 없었겠죠?

정원이 예쁘다고는 하지만... 잔디밭밖에 없어서 그건 모르겠습니다. 하필 공사도 하고 있네요.

사실 정원 자체보다 도심 한복판이라 경치가 썩 예쁘지 않은 게 더 아쉬운 부분.

오옹 당시에 썼던 전구인가 봐요.

다시 1층으로 내려갑시다.

여기까지만 보면 완전히 서양식 그 자체이지만.

코너 한 번만 돌면 갑자기 완전한 일본식 복도가 나옵니다.

층고가 높았던 양관과 달리 화관은 층고도 갑자기 확 낮아져서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아예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건물이 붙어 있으니 신기하긴 하더라고요.

정원도 일본식.

방 구조는 니조성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니면 일본에 있는 여러 절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일본에 여행 다니면서도 개인 주택을 유심히 돌아본 적은 별로 없네요. 오히려 대만 단수이나 우리나라 군산 등에서 일본식 가옥을 더 열심히 돌아본 것 같아요.

암튼, 절이 생각나는 건 구조도 구조지만, 규모가 거대해서 우리나라나 대만에서 본 일본식 주택하고는 정말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 그렇습니다.

찻집도 중간에 있더라고요.

거의 맨 마지막쯤에 있는 후지산 그림.

은은하게 안개 너머로 보이는 듯한 후지산.

도쿄에서 운이 좋으면 멀리 후지산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4년 전 디즈니랜드 가다가 일본 친구가 멀리 후지산 보인다며 가리킨 덕에 아주 잠깐 봤었습니다.

언젠가 꼭 가까이서 볼 수 있기를.

이렇게 보면 생각보다 길었던 이와사키 저택 구경은 끝.

바깥에서 본 정원이랑 서양관도 아름답습니다.

과거에는 20동이나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규모가 상상이 안 가긴 해요.

2층보다 1층에서 보는 정원 풍경이 좀 더 예쁜 듯?

진짜 궁전 그 자체.

여기는 당구실.

정원에 따로 있는 건물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순 없고 요렇게 밖에서 볼 수 있어요.

저 반들반들한 탁자가 당구대...는 아닐 거고 그냥 테이블?

여기도 약간 노란빛 도는 벽지인 건 같네요.

구경하기에는 참 예뻤던 구 이와사키 저택.

미쓰비시 그룹에 관해서도 오랜만에 상기시킬 수 있어서 역사 공부도 되는 곳이었습니다.

가을에 오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면 저택이랑 어울렸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은행나무는 잘 안 보이네요.

도쿄에 와서 반드시 가봐야 하는 곳!이라고까지는 추천하기 어렵겠지만

손님이 많이 없어서 여유롭게 서양 분위기와 일본 특유의 근대유산을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곳. 우에노 공원에서 멀지 않아 시간이 된다면 천천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말로만 듣던 미쓰비시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도 제대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이상! 구 이와사키 저택 정원에서 김나신이었습니다.

2023.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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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울/ 최종현, 김창희 공저. 동하,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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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서울』 238쪽에는 모두 고만고만하게 엎드린 초가집들 뒤에 산을 배경으로 유럽의 고성 같은 대저택 사진이 있다. 주변 풍경과 너무도 안 어울리는 이 건물은 1929년에 찍었다는 벽수산장이다.

벽수산장은 순종 황제의 장인 윤택영의 형인 윤덕영이 프랑스 어느 귀족의 집 설계도를 따라 자그마치 20년 이상 걸려 지었다고 한다.

위치는 현재 옥인동 47번지, 책에는 지도도 한 장 나오는데 이완용과 윤덕영 집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다.

<오래된 서울>, 233쪽. 왼쪽 붉은 부분이 윤덕영의 땅, 오른쪽 초록색이 이완용의 집이 있던 터다.

집에는 연못도 있었는데 크기가 무려 200평이 넘어 뱃놀이도 했다고 하며 어찌나 땅이 넓고 건물이 컸던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한양 아방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 집에 대한 여론이 워낙 나쁘다보니 윤덕영은 1935년 완공된 다음 중국의 신흥종교인 홍만자회 조선지부에 빌려주어 버렸다. 그 자신이 조선지부의 주석이어서 실질적으로 자신이 사용했으나 공식적으로 그의 사무실은 벽수산장과 안채 한옥 건물 사이에 별도로 붙여 지은 작은 서양식 건물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윤덕영은 1940년 10월에 사망했다.

이후 벽수산장의 유전은 우리나라 역사의 풍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들이 일찍 죽어 절손된 윤덕영의 집안에 양손으로 들어온 윤강로가 1945년 해방 직전 미쓰이 광산주식회사에 팔아 넘겼기에 벽수산장은 광복 후 적산, 즉 적의 재산이 되었다.

벽수산장 건물은 덕수병원에 불하되었다가 6.25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 측의 조선인민공화국 청사로 쓰이다가 수복 후에는 미군 장교 숙소와 언커크(UNCURK. UN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1966년(심윤경 작가는 식목일이었다고 썼다.) 사소한 보수공사 중의 실화로 2,3층이 전소되어 건축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고 1973년 이 일대의 도로정비사업 중에 철거되고 말았다고 한다.

윤덕영이 손에 넣은지 60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벽수산장 건물 이외에 옥인동 47번지 일대, 원래 아취가 흐르던 송석원 지역은 윤덕영 사망 직후인 1941년에 새로 지번이 부여된 곳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재벌에 팔리기 전에 이미 소형 필지로 분할되었음을 알 수 있고,

지금 남아있는 흔적은 윤덕영의 안채 건물 (옥인동 47-133. 현 서용택 가옥. 이집이 윤덕영의 소실이 살던 집이라는 정보가 나와서 2024년 현재, 윤씨가옥이라고 부른다. 서울시에서 리모델링해서 2025년에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과 1938년경에 윤덕영이 딸 부부를 위해 지어준 2층 집 (옥인동 168-1. 박노수 가옥. 종로구립 박노수 미술관)이 있으며 벽수산장 정문의 4개 기둥 가운데 3개가 옥인동 47-27과 47-33에 남아있다고 한다.

내가 벽수산장에 꽂힌 것은 원래 건축물과 장소에 대하여 관심이 있기도 하지만

완전히 철거된 것이 1973년이라면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였고 아직은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라 동창들은 거의 강북에 주소를 두었으며 사직동, 삼청동, 효자동, 옥인동, 등의 동네에도 많이 살고 있었으니 동창들 중 누군가는 그 건물을 알았겠구나 싶고 그 누군가 중에서 내가 아는 누가 있다면 붙잡고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고3땐가, 135번 버스를 타고 세검정까지 갈 때는 그 동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저택이나 불타고 남은 폐허를 볼 수 없었다.

지금처럼 자하문로가 넓게 뚫려 있지 않고 버스도 경복궁 서쪽 담을 낀 지금의 효자로로 다녔으니 있었어도 못봤을 수도 있다.

영원한 유산/ 심윤경. 문학동네, 2020.

http://aladin.kr/p/Wy1jY

그런데 심윤경의 소설 『영원한 유산』은 바로 그 벽수산장을 소재로 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직동에 살았던 작가가 어느 날 오래된 사진첩에서 돌이 안된 자기를 할머니가 안고 찍은 사진에 유럽식 건물이 있는 것을 보고 아버지께 물어보자 '언커크'라는 답이 나왔다고 한다. 그 동네 사람들에게 언커크는 익숙한 단어였으나 그게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의 약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작가는 벽수산장을 '믿어지지 않도록 아름다운 유럽식 저택'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잊히고 사라지는 것이 우주의 순리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기억마저도 절멸에 이르렀는지에 대하여 자그마치 8년간 궁리하고 썼다는 소설 『영원한 유산』.

사기죄로 복역하고 출소한 친일파 윤덕영의 막내딸 윤원섭이 벽수산장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러 언커크로 쓰이고 있는 그 집으로 들어와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벽수산장의 역사에 관심을 보이지만 윤원섭의 미모에 혹해 끌려다니는 언커크 호주 대표 애커넌, 그리고 애커넌의 통역으로 일하는 이해동을 등장시켜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해방 후 적산으로 분류되어 유엔에 불하되었다가 물질로도 정신으로도 박멸된 벽수산장의 예를 통해 적이 남긴 유산 앞에 선 우리의 마음을 돌아보고자 했다."고 저자 후기에 쓰고 있다.

나는 독립기념관을 충청도가 아니라 지금은 서울시립미술관이 된 대법원 건물을 활용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옛날 대법원 건물도 조선총독부 건물과 마찬가지로 日자를 가로로 돌려 지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두고 보기 마음 불편하다고 무조건 없애버릴 것이 아니라 두고 보면서 되새겨야 할 과거니까.

구한말 역사를 공부하며 가까이 두고 보기에 덕수궁 일대보다 더 좋은 위치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마찬가지로 들추고 싶지 않은 부끄럽거나 민망한 기억이어도 다시 떠올리고 기록하는 것이 그 시대를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아닐까. 국가적, 학술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가족사를 들어보는 것도 필요하고 재미 있을 수도 있지 싶다.

어쨋건 추억도 많고 내가 좋아하는 동네.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삼청동, 서촌 일대, 부암동, 백석동 계곡, 평창동 언덕배기를 걸어다니며 그 동네 어디메 잠깐이라도 살아보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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