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의 전모. (5) "독일군은 낙엽이 지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오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영국 앨프래드 밀너 & 에드워드 그레이, 프랑스, 독일 총리/외무부 장관, 러시아 외무부 장관의 전쟁 계획
https://www.youtube.com/watch?v=z-jB4bvtJEY&t=21s
앨프레드 밀너
- 1917년 볼셰비키 혁명 개입
- 영국 내에서 끊임없는 언론플레이
프랑스
전쟁광들이 정부 내각
오스트리아
전쟁 생각 없고 준비일 뿐.
암살범 공조수사 세르비아에 제안했으나 세르비아측에서 거부.
한달간이나 기다림.
영국-에드워드 그레이
- 프랑스, 공조하지 않음
- 벨기에 도움요청 무시
- 미국에 25만 반독 선전물 공수
- 동부유럽으로 오는 편지 3/4 파괴한 그레이
독일 빌헬름 2세 vs
"우리를 없애려고 한다"
"영국 눈치 보느라 배도 못 만들었다"
"룩셈부르크/벨기에 국경 넘지 말라고 했으나 총리가 말을 안 들음."
로스차일드 사람이었던 독일 총리: 전쟁광
개인의 연대보증 = 국가간 상위방위조약
위험도가 비슷
러시아 외무부 장관
총동원령 밀어붙임
매형이 앨프래드 밀너-영국 프리메이슨-사회주의혁명당 소속이었는데 암살당함.
빅토리아 시대의 피가 퍼진 유럽
러시아, 독일, 영국 왕 모두 사촌지간
벨기에의 편향성
1914년 8월 2-3일
- 프랑스 5개 군단 벨기에 입성 OK
- 독일 수출 창고도 닫아버림
독일이 벨기에 침략하자, 정작 영, 프는 도와주지 않음.
에드워드 그레이
"불길이 전 유럽으로 퍼지고 있다. 이 빛나는 불길을 우리 생애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노동당 램제이 맥도날드는 박수치며,
역사에 남을 말이라고 함.
개같은 스타일로.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 왕국의 민족주의 조직 검은 손 소속의 단원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암살한 사라예보 사건을 일으켰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인이 약간이라도 살고 있는 발칸 반도 땅은 전부 세르비아 소유라고 믿었고 매우 호전적이었기에, 오-헝 제국이 1908년에 보스니아를 병합한 것에 대해 응징하러 나선 것이다. 암살 사건의 심각성을 고려하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당장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를 해도 이상하지 않았겠지만, 오-헝 제국은 정부 내부의 토론으로 시간을 보낸 끝에 7월 23일에야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오-헝 제국이 이렇게 한달 가까이 시간을 허비한 이유는 배후에 부담스러운 러시아 제국을 두고 있었기에 다른 국가들과의 외교를 통해 만약 러시아가 끼어들었을 때의 안전보장을 확보하고자 했고, 또한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중 제국을 구성하는 헝가리 왕국
수상의 동의를 얻느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세르비아 정부는 오-헝 제국의 최후통첩에 굴복할 생각이 있었으나, 곧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할 의사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오-헝 제국의 요구를 무시해 버렸다. 이에 따라 오-헝 제국이 7월
28일에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이 열렸다(세르비아 침공). 그러나 얼마 안가 점령될 거라 여겨졌던 세르비아는 오히려 침공을 격퇴하고 1915년 11월까지 버텼다.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7월 30일에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급하게 천명만 했지 두 국가의 공식 방어 동맹은 아니다. 그래서 부분 동원령 얘기가 나왔지만, 외무장관인 사조노프는 황제에게 강권하여 이를 강행했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 총참모부가 사전에 정밀하게 계획해둔 동원령을 이용해 대승을 거둔 이후로,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로이센을 벤치마킹해서 가상 전쟁 시나리오에 대한 총동원 계획을 하나씩은 만들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밀한 총동원 계획을 일단 발동했다가 되돌리면 철도 계획표를 비롯해 수많은 곳에서 대혼란이 발생하여 전군이 몇주간 작전 불능에 빠져버리고 국가가 무방비 상태에 처한다는 문제가 있어서, 한번 총동원이 발동되면 전쟁 계획에 따라 상대 국경을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총동원령 선포는 선전포고와 거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당연히 푸르탈레스가 한 일이다. 하지만 그 요청이 무시되자 다음날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이게 현실이 된 이상, 독일 입장에서 룩셈부르크는 무조건 쳐야 했다. 애초에 엘자스-당시 독일령이라서 이렇게 쓴다.- 일대가 다 보주 산맥(독어 포게젠)이다. 그래서, 엘자스의 연장선이지만 북쪽 끝인 룩셈부르크를 확보해서, 거기서 남쪽을 피해서 샹파뉴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독일은 그보다 더 큰 실책과 범죄를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 점령 기간동안 독일은 벨기에의 강간 등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질러 큰 악명을 얻는다.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영국 원정군을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했다. 1. 오스만 제국 : 애진코트 호 사건으로 분노해 있다가, 괴벤과 브레슬라우를 거저 받는 대신, 독일이 오스만의 영역에서 협상국을 쳐서 자동 참전. 2. 불가리아 : 계속 양쪽 진영에서 자기 편에 서라고 회유받다가, 애초에 세르비아가 협상국인 이상 원하는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맹국으로 참전. 그리고 이 둘 관계 발칸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철천지원수다. 3. 이탈리아 : 계속 일단 독일의 동맹이었으나, 독오가 자신들을 배제하고 군사 계획을 의논하는 데 분노하였고, 내심 이탈리아는 훗날 확보하는(이마저도 다가 아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령인 지역을 원했기 때문에 밀약을 맺고 이를 깨며 협상국이 된다. 4. 그리스 : 최후까지 중립이나, 이 땅에서 양진영이 대치했다. 국왕이 친독이었으나, 베니젤로스 수상의 극구 반대로 협상국이 된다. 5. 루마니아 : 그리스 참전 직전에, 이전까지는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준괴뢰국이었으나, 동맹국에 점점 불리해지자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의 트란실바니아를 얻기 위해 협상국으로 참전하나, 최악의 전략을 택하여 바로 패배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무위가 될 때까지 계속 독일의 식민지로 남았다. 근데, 이 브레스트 조약이 완전 무위는 아니다. 독일 패전 후, 협상국이 이 지역에서 독일 제국판 레벤스라움을 부정했지만, 러시아에 돌려주지는 않고 그 자리에 기존에 원래 있었던 나라들을 다시 만들었다. 단, 발트만은 과거에 리투아니아만이 존재했고 나머지 두 나라는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묶여 있었는데, 독일 패권을 부정하기 위해 둘을 가른 것이다. 이 역사 때문에 지금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매우 친독적이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를 공격, 갈리치아의 중심 도시인 렘베르크를 비롯한 갈리치아의 상당 지역과 동프로이센의 국경 지대 일부를 점령했지만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협상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기에 실패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그 뒤 세르비아의 보호를 이유로 러시아가 7월 30일에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급하게 천명만 했지 두 국가의 공식 방어 동맹은 아니다. 그래서 부분 동원령 얘기가 나왔지만, 외무장관인 사조노프는 황제에게 강권하여 이를 강행했다. 보오전쟁과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군 총참모부가 사전에 정밀하게 계획해둔 동원령을 이용해 대승을 거둔 이후로, 당시 유럽의 강대국들은 프로이센을 벤치마킹해서 가상 전쟁 시나리오에 대한 총동원 계획을 하나씩은 만들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정밀한 총동원 계획을 일단 발동했다가 되돌리면 철도 계획표를 비롯해 수많은 곳에서 대혼란이 발생하여 전군이 몇주간 작전 불능에 빠져버리고 국가가 무방비 상태에 처한다는 문제가 있어서, 한번 총동원이 발동되면 전쟁 계획에 따라 상대 국경을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총동원령 선포는 선전포고와 거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독일은 러시아에게 총동원령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당연히 푸르탈레스가 한 일이다. 하지만 그 요청이 무시되자 다음날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를 최대한 빨리 굴복시켜 동쪽의 러시아 제국 방면으로 집중해 전쟁을 수행한다는 내용의 슐리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고 1914년 8월에 서쪽으로 진군을 시작한다. 이게 현실이 된 이상, 독일 입장에서 룩셈부르크는 무조건 쳐야 했다. 애초에 엘자스-당시 독일령이라서 이렇게 쓴다.- 일대가 다 보주 산맥(독어 포게젠)이다. 그래서, 엘자스의 연장선이지만 북쪽 끝인 룩셈부르크를 확보해서, 거기서 남쪽을 피해서 샹파뉴 쪽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독일은 그보다 더 큰 실책과 범죄를 저질렀다.
그 과정에서 8월 2일에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3일에 프랑스에 대해 선전포고한 뒤 중립국 벨기에가 독일군의 통과를 거부하자 4일부터 침공해 점령한다. 점령 기간동안 독일은 벨기에의 강간 등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질러 큰 악명을 얻는다. 영국은 중립을 표방했었으나 영국이 독립을 인정했던 벨기에의 중립이 무시당한 것을 이유로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 한 뒤 프랑스로 영국 원정군을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발칸 반도의 국가 등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전포고를 교환했다. 1. 오스만 제국 : 애진코트 호 사건으로 분노해 있다가, 괴벤과 브레슬라우를 거저 받는 대신, 독일이 오스만의 영역에서 협상국을 쳐서 자동 참전. 2. 불가리아 : 계속 양쪽 진영에서 자기 편에 서라고 회유받다가, 애초에 세르비아가 협상국인 이상 원하는 영토를 차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동맹국으로 참전. 그리고 이 둘 관계 발칸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철천지원수다. 3. 이탈리아 : 계속 일단 독일의 동맹이었으나, 독오가 자신들을 배제하고 군사 계획을 의논하는 데 분노하였고, 내심 이탈리아는 훗날 확보하는(이마저도 다가 아니다.) 당시 오스트리아령인 지역을 원했기 때문에 밀약을 맺고 이를 깨며 협상국이 된다. 4. 그리스 : 최후까지 중립이나, 이 땅에서 양진영이 대치했다. 국왕이 친독이었으나, 베니젤로스 수상의 극구 반대로 협상국이 된다. 5. 루마니아 : 그리스 참전 직전에, 이전까지는 사실상 오스트리아의 준괴뢰국이었으나, 동맹국에 점점 불리해지자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의 트란실바니아를 얻기 위해 협상국으로 참전하나, 최악의 전략을 택하여 바로 패배하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무위가 될 때까지 계속 독일의 식민지로 남았다. 근데, 이 브레스트 조약이 완전 무위는 아니다. 독일 패전 후, 협상국이 이 지역에서 독일 제국판 레벤스라움을 부정했지만, 러시아에 돌려주지는 않고 그 자리에 기존에 원래 있었던 나라들을 다시 만들었다. 단, 발트만은 과거에 리투아니아만이 존재했고 나머지 두 나라는 쿠를란트-젬갈렌 공국으로 묶여 있었는데, 독일 패권을 부정하기 위해 둘을 가른 것이다. 이 역사 때문에 지금도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매우 친독적이다.
8월 7일부터는 독일군이 프랑스 영토 안에서 국경 전투를 열어 승리해 파리 50여km 앞까지 진격할 정도로 선전한다. 한편 러시아가 급하게 8월 중순부터 독일의 동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를 공격, 갈리치아의 중심 도시인 렘베르크를 비롯한 갈리치아의 상당 지역과 동프로이센의 국경 지대 일부를 점령했지만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에게 반격당해 큰 피해를 입고 동부전선 우위를 내줬으며 오스트리아군도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9월의 마른 전투에서는 독일군이 프랑스+영국 협상군에게 저지당하며 진격의 힘을 잃고 주저앉게 된다. 결국 독일은 계획대로 프랑스를 조기에 굴복시키기에 실패했고, 우려했던 대로 서부전선과 동부전선 양면에서 싸워야 하는 상황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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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은 8월 5일에 마흐디 전쟁과 보어 전쟁의 영웅이었던 허버트 키치너를 전쟁부 장관(Secretary of State for War)으로 임명했다. 육군과 사이가 썩 좋지 않았던 영국 해군은 육군과 함께 전쟁부의 지휘를 받으려고 하지 않아서 따로 놀았기에, 전쟁부 장관이라고 직역하기 보다는 육군성 장관이라고 의역하는게 더 옳겠지만, 일단 대부분의 서적에서 전쟁부 장관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참고로 제1차 세계 대전 시절에 영국 해군은 사실상 해군성 소속으로 움직였으며, 심지어 해군성 휘하에 해군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육군 사단들도 보유했다. 키치너는 단기전만을 준비하던 영국 내각 내에서 유일하게 전쟁이 3년 이상 지속될 것이라 예상했고, 장기전에 대비하기 위해 유명한 모병 운동을 펼쳐 총 250만명의 병력을 모았다. 이를 키치너의 신군(new army)이라고 부른다. 키치너는 징병으로 추가 병력을 충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시대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모병만으로 이런 대군을 모으는데 성공했으나, 같은 지역 출신으로 하나의 부대를 편성했기 때문에 그 부대가 궤멸되면 상응되는 동네에서 젊은 남성이 씨가 말라버리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는다.
아프리카나 아시아 등지에서도 유럽의 식민지였던 지역을 중심으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특히 독일과 영국 식민지에서는 종전까지 현지 병력들의 전투가 계속 일어났다. 라이베리아가 개전 1주만에 대독 선전포고를 한 이래 8월 말에 일본 제국도 영국과 함께 독일령이었던 칭다오를 침공해 점령했고 9월에는 호주가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했다. 태평양 지역에 있던 독일 함대는 본국으로 귀환을 시도했지만 영국 함대의 습격을 받다가 포클랜드 해전에서 궤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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