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군파 사건, 아게오 사건과 수도권 국전 폭동, 나리타 투쟁에서 보듯 1970년대까지는 일본도 사회가 굉장히 과격했다; 1980년대도 버블경제 시기 야쿠자의 부동산 사기, 학교폭력과 등교거부, 폭주족, 생방송으로 중계된 도요타 상사 살해사건 등 살벌했다

적군파 사건, 아게오 사건과 수도권 국전 폭동, 나리타 투쟁에서 보듯 1970년대까지는 일본도 사회가 굉장히 과격했다; 1980년대도 버블경제 시기 야쿠자의 부동산 사기, 학교폭력과 등교거부, 폭주족, 생방송으로 중계된 도요타 상사 살해사건 등 살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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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게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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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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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의 경과3. 사건 이후

1. 개요[편집]

上尾事件(あげおじけん)

1973년 3월 13일 일본 사이타마현아게오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상 초유의 승객 폭동. 말 그대로 시민들이 빡치면 헬게이트를 열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사건이며 뒤이어 일어난 더 큰 규모의 수도권 국전 폭동과 함께 일본국유철도의 운명을 결정한 사건이기도 하다.

한국의 동아일보에서도 이 사건을 보도하기도 하였다.

2. 사건의 경과[편집]

1973년 3월 일본국유철도(JNR) 동력차노조[1]는 2인승무를 요구하면서 산발적으로 '순법투쟁'[2]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국철을 포함해 일본의 공공기업은 현재도 존속하고 있는 '공공기업체 등의 노동관계법'에 의해 파업이 금지되어 있어서 그 대안으로 순법투쟁을 벌이곤 했다. 노조도 노조지만, 국철이나 운수성대체수송 등의 대책이나 노조와의 협상을 진행하지 않아 일을 키웠다. 1970년대 초반은 전후 단카이 세대가 경제활동에 나서면서 대도시권 인구가 폭증하던 시기오다와라시, 우츠노미야시, 타카사키시와 같이 도쿄에서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서도 통근/통학을 위한 철도 승객이 많이 늘어났으나 정작 직원들이 시위를 하느라 열차 배차 간격이 제멋대로였고 국철이 운영하던 모든 노선은 하나같이 지옥철 그 이상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아게오역은 타카사키선의 역이다. 타카사키선은 예나 지금이나 도쿄에서 간토 서북부, 더 가서는 코신에츠호쿠리쿠를 잇는 핵심 간선으로 국철의 경영이 바닥을 기던 1970년대 초반에도 흑자를 낸 노선이다. 즉 도쿄 한복판을 도는 야마노테선에 맞먹게 혼잡했다는 뜻이다. 노조의 순법투쟁 순서가 타카사키선에 돌아온 것이 3월 12일부터로, 당시 보도에 따르면 아게오에서 우에노역까지 보통 37분 걸리던 것이 3시간 이상 걸렸다고 한다.

특급 열차완행 열차[3]로 운행되었을 정도로 엉망인 상황에서 기껏 돌아온 열차도 개찰거부와 운행정지가 연속되자 승객들의 분노는 한계치를 넘기 시작했는데, 아침 6시 30분경 아게오에서 우에노까지도 가지 않고 오미야역에서 타절한다는 안내방송을 들은 플랫폼의 승객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멈춘 열차에 투석을 하기 시작한 것으로 시작됐다. 소란은 열차 내부는 물론 역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기관실로 쳐들어가자 당시 열차를 몰던 기관사는 열차 앞문을 통해서 빠져나와 역장실로 도망쳤으나 이들을 족치려 찾아온 성난 군중들에 의해 경찰에 신고를 못하게끔 비상전화기가 파괴되고 역장과 역무원들은 한데 붙들려 집단 린치를 당했다.[4] 승객들 중에서는 열차 기관실에 불붙은 신문지를 집어넣어 방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아침 7시 30분, 이런 아비규환을 모르고 역을 통과하던 니가타행 급행열차 토키가 시민들의 돌팔매 공격을 받아 기관차와 객차 유리창이 깨져 회송했다.

뒤늦게 보고를 받은 국철은 오미야역에 긴급전화를 걸어 현장 상황을 파악하려 했으나 앞서 밝혔듯이 승객들이 역무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고 역무원들까지 죄다 인사불성이 되었기 때문에 끝내 접촉하지 못했다.

사태는 열차는 물론 역 시설물의 파괴와 방화로 이어진 것은 물론이고 국철이 마비되자 인근 역의 시민들까지 폭동을 시작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관할 경찰이던 사이타마 경찰은 처음에는 사태파악도 하지 못하고 70여명의 경찰을 출동시켰으나 현실을 알고 기동대 550명을 추가로 증파해 진압을 시도했으나 수백명 남짓한 병력으로 몇천 내지 몇만 명의 군중을 진압하기란 불가능했다. 국철 지휘부는 운수성과 함께 긴급 대책회의에 돌입했으나 철길을 따라 인근의 오미야역에서도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다 화가 난 시민들에 의해 폭동이 발생했고, 미야하라역에서는 승객들이 역장과 역무원을 붙잡아 철길을 걷게 하며 조리돌림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낮 12시 30분경 도쿄역에서는 "운영을 이딴 식으로 하지 마라. 오후 1시 5분에 도쿄역을 폭파시키겠다."라는 협박전화가 걸려와 경시청에 비상이 걸렸다. 이런 일련의 폭력사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민들이 운수성에서 급파한 셔틀버스를 타고 자진 해산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었으나 이후 아게오역과 관련된 노선의 운행이 며칠 동안 중단되는 바람에 지역 주민들이 철길을 걸어가서 통근 및 통학을 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한편 일본제 열차를 다량 구매하기 위한 잠비아 교통성 소속 관계자가 때마침 방일 중이었는데, 이 꼬라지를 보고 무슨 열차를 팔아먹냐고 하면서 계약을 파기하고 귀국하면서 나라 망신까지 초래했다.

국철노조는 당초 폭동의 원인으로 노조를 탄압하려는 당국이 개입하여 조장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훗날 자신이 폭동을 선동했다고 주장한 우익 인사는 있었다.

3. 사건 이후[편집]

당시 일본 정부가 집계한 손해는 다음과 같다.
  • 운행 중단: 약 3만 5천 량
    • 여객 열차: 약 만 2천 량
    • 화물열차: 약 2만 천 량
  • 물량 감소: 약 260만 톤
  • 고객 부상자: 총 92명
총 7명이 검거되었는데 엉뚱하게도 혼란한 틈을 노려 남의 지갑을 훔친 사람, 기자를 폭행한 사람뿐이었다.[5] 또 이 사건 이후에도 국철노조의 시위는 끝나지 않았고 결국 한 달 후 수도권 국전 폭동이라는 스케일 업된 시민 폭동으로 이어지면서 국철의 몰락이 시작되었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오늘날의 JR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발생의 원인이었던 국철노조와 타카사키선의 혼잡으로 요약 가능한데 국철노조는 JR그룹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고 타카사키선의 혼잡도 바이패스 역할을 하는 사이쿄선이 1985년에 개통되어 승객이 분산되고 호쿠리쿠 신칸센의 오미야 - 나가노 구간[6]이 1997년에 개통되면서 장거리 재래선 열차 숙청으로 선로 용량에 숨통이 트이면서 아게오 사건 발생 당시보다는 많이 완화되었다.



당시 사건을 다룬 뉴스 영상. 나중에 터진 수도권 국철 폭동도 함께 다루고 있다.

비슷하게 일본인 전투종족이 출현한 사례로 나리타 공항을 둘러싼 나리타 투쟁을 들 수 있다.

[1] 일반적으로 단순히 국철노조로 묶어 인식되곤 하지만 국철의 노조는 직렬과 노선에 따라 사분오열되어 있었다. 거의 어용노조 급에서 일본 극좌의 핵심세력까지 다 갖추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중 동력차노조는 기관사들이 소속된 조합의 집단이다. 여담으로 과거의 국철노조 집단은 지금도 JR그룹 계열의 노조로 남아 있는데 그 중 치바 지역의 국철 동력차노조인 '도로치바'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다.[2] 한국에서는 준법투쟁으로 부르며, 정비, 점검, 운전 등 열차 운행의 모든 부분에서 법규와 내부 규정을 준수한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통상적인 영업에서) 슬그머니 횡행하는 규정 위반 없이 안전을 위한 절차를 준수하는 것을 내세우지만 실질적으로는 사보타주에 해당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1990년대 한국의 철도노조에서도 곧잘 행해졌는데 가령 정차역 개문 30초를 준수한다고 하고(당시 수도권 전철에서는 승강객만 적으면 10초 단위 개문도 흔했다.) 실제로는 분단위 정차가 횡행하거나 속도 제한이 붙으면 그 제한을 한없이 밑도는 속도로 굴러가는 식으로 열차를 늦춘다. 결과적으로 분명히 모든 차량과 인원을 투입했는데 다이어그램이 꼬이고 소요시간과 배차간격이 몇 배씩 늘어나게 된다.[3] 이때 우스이 급구배 전용으로 제작된 169계 전동차(1967년 제작)가 완행열차로 운행되었다. 그러나 2비차에 크로스시트인 169계 전동차는 수송능력이 통근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아 차내 혼잡만 가중시켰다.[4] 결국 이들은 몰매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 실려갔다.[5] 폭동 자체는 그럴만한 경위가 있었고 가담자가 너무 많은 데다 주모자도 불분명해 시민들을 체포할 수 없었다. 죄없는 역장을 두들겨 팬 것 역시 엄연한 강력범죄 행위이지만 불특정 다수에 의한 집단 린치 사건이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정말 엉뚱한 사람만 잡은 셈이다.[6] 이때는 나가노 신칸센이라는 명칭으로 개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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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국전 폭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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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유철도
관련 문서

수도권 국전 폭동
首都圏国電暴動
Tokyo Metropolitan National Railway Riot
발생 일시
1973년 4월 24일
유형
발생 위치
주요 원인
일본국유철도 노조 단체의 파업으로 인한 승객들의 반발
피해
수도권 내 기차역 내부 시설 및 다수의 전철 파괴
검거 인원
총 138명 검거
영향

1. 개요2. 배경3. 상세
3.1. 오미야역 소요 사태3.2. 불타는 아카바네역3.3. 다른 역으로 번진 폭동
4. 사태 진압 이후5. 그 외

1. 개요[편집]

首都圏国電暴動(しゅとけんこくでんぼうどう)


1973년, 일본국유철도 노조들의 파업에 승객들이 반발하면서 일으킨 폭동.

2. 배경[편집]

1970년대 초반은 일본에서 전후 단카이 세대가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에 나서게 되면서 대도시권 인구가 폭증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도쿄의 집값은 이미 버블경제 이전부터 살인적이었기 때문에 하치오지, 타치카와, 오미야, 아게오 등 도쿄 근교는 물론이고 오다와라, 아타미, 우츠노미야, 타카사키 등과 같이 도쿄에서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서도 통근/통학을 위한 철도 승객이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1] 정작 국철 노조원들이 시위를 하느라 열차 배차 간격이 제멋대로였고 당연히 헬게이트가 열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던 상황이었다.

1973년(쇼와 48년) 춘계 임금 협상과 관련한 투쟁의 일환으로 국철노조(약칭 국노)국철전동차노조(약칭 동노)에서는 준법투쟁으로 사측에 대항했는데 말만 준법투쟁이지 상당한 운행 지연을 야기하는 태업으로 교통 대란이 발생하자 3월에 아게오 사건이 터졌다. 아게오 사건 자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수습되었으나 국철노조와 전동차노조는 지속적인 파업을 진행하였고, 운수성과 국철은 파업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엄청난 교통마비를 계속해서 만들어 갔다.

여기에 더해서 국노와 동노는 "아게오 사건은 운수성국철선동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라는 근거가 전혀 없는 반론을 냈는데 이 발언은 한창 불타오르고 있던 이용객들의 교통체계에 대한 분노에 기름을 드럼통째 들이부었다. 그 결과 아게오 사건 이후 한 달이 지난 같은 해 4월 24일에 승객들의 불만이 제대로 폭발하여 대규모 폭동이 일어났다.

3. 상세[편집]

4월 24일 당시 국철의 노선들은 4월 27일부터 있을 교통계 총파업에 대비해 준법투쟁이 강화된 상태였다. 오후 4시 30분 경 오미야역에서는 준법투쟁의 영향으로 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이 60~90분 지연되었고 귀가시간과 겹치면서 역 승강장은 사람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일부 승객이 역장실을 점거하는 소란이 발생하는 등 분위기가 잠시 험악해졌으나 사이타마현 경찰 병력이 급하게 파견되어 진화에 나섰고 도부 철도 노다선과 버스로 승객들을 유도해 분산하여 일단은 수습되었다.
문제는 아카바네역이었다.

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 하행 플랫폼에 전혀 오지 않는 열차에 승객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이었는데 오후 8시에 아오모리행 급행 츠가루 1호를 우츠노미야역까지 보통열차로 운행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정시 운행 중이었다면 츠가루 1호는 오후 7시 35분에 우에노역에서 발차해야 했으나 준법투쟁과 화물 적재 지연의 영향으로 오후 8시 15분이 돼서야 발차했고 출발할 때부터 열차 안에는 지옥도가 펼쳐진 상황이었다.

츠가루 1호가 아카바네 역에 도착하기 전에 상행 중거리 열차가 역에 들어왔는데 홈 안의 승객 1,500명이 오지 않는 하행열차에 불만이 폭발해 "열차 돌려서 빠꾸해라!" 라고 요구하고 기관사를 끌어낸 후 전차를 박살내기 시작했다.

오후 8시 30분, 츠가루 1호가 수백 명이 기다리는 아카바네역에 들어왔으나 우에노역에서부터 승객을 마구잡이로 우겨넣고 도착했던 터라 이 이상의 승객을 더 태울 수 없었다. 이에 이용객들은 기관차를 둘러쌌고 이 기세에 놀란 기관사는 임무를 내팽개치고 도망갔다.[2] 츠가루 1호는 꿈쩍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승객들은 움직이지 않는 열차 창문을 깨부수기 시작했으며 국철 측은 케이힌토호쿠선으로 승객을 분산하려고 안내방송을 내보냈다. 그러나 이 노선의 열차 또한 신호기 고장으로 아카바네역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고, 이를 기다리다가 버티지 못한 승객들이 철길 위를 걸어서 이동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오후 9시 경, 아카바네역은 6천 명이 넘는 승객들로 넘쳐났다. 화가 날 대로 난 승객들은 역장실로 몰려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급히 경찰기동대가 출동했으나, 이를 본 시민들의 분노가 더욱 커져 결국 대치상황까지 흘러갔다.

오후 9시 30분 경에는 1번 선에 정차되어 있던 케이힌토호쿠선 이소고역행 열차 내부에서 발연통이 폭발해 차내가 파괴되었다. 오후 10시 30분 경에는 어느 남성이 운전대에 불을 질렀다.

아카바네역에서 열차 운행이 중지되면서 야마노테선 등 다른 국철 노선에도 영향이 전해졌고 수도권 일대 철도는 유례가 없는 대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폭동은 철로를 따라 다른 역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3.3. 다른 역으로 번진 폭동[편집]

한편 우에노역에서는 9시 전부터 출발하지 않는 열차 때문에 지친 승객들이 타카사키선 카고하라역행 열차에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타카사키선과 토호쿠 본선 양쪽의 기관사를 끌어내어 열차를 끌고 가 버렸다. 7번 선 승강장에서 승객 3천 명이 발화통에 불을 붙이고 유리창을 깨부수기 시작한 것을 시작으로 역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때부터 역의 모든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승객들이 더욱 폭력적으로 변하자 출동한 경찰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폭도들은 역사의 매표소 등을 파괴하기 시작했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직원들은 전부 도주해 역이 무인상태가 되었다. 이후에도 파괴행위는 계속되어 다음날 0시 20분 경에는 역 광장에서 방화소동이 일어났고 움직이지 않는 열차의 행선판을 뜯어내 불 속에 던져넣는 사태도 벌어졌다.

신주쿠역에서는 우에노역의 소란 발생 영향을 받아 9시 10분 경부터 소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9시 30분 경에는 역장이 야마노테선의 운행 중지를 안내했고 사철과 다른 노선들로 승객을 분산시키려 했다. 이에 승객들이 역장실에 난입하는 소동이 있었다. 10시 경 서쪽 출구 요금정산소와 매점이 습격당했다. 동쪽 출구에서는 철도공안실에 방화가 벌어지는 소동이 일어났다. 폭동은 그 다음날 7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가담자는 최대 2만 명에 이르렀다. 그래도 신주쿠역의 직원들은 도망가지 않고 사태 수습에 끝까지 힘을 써서 후에 감사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시부야역, 아키하바라역, 유라쿠초역 등 총 38개 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파괴, 방화 등 폭동이 벌어졌다. 군중은 32,000명에 이르렀고 일부는 현금, 승차권, 매점의 상품을 약탈하기도 해서 피해액은 현금으로만 1천만 엔이 넘어갔다. 이케부쿠로역에서는 군중끼리 싸움이 벌어졌고 칸다역에서는 택시를 향해 돌을 던지는 일도 있었다. 신바시역에서는 역 시설의 파괴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가스 누출도 일어났다.

이에 오후 10시 경에 경시청에서는 파괴행위 방지, 역무원과 차량보호를 위해 기동대를 최대한으로 소집하는 한편 각 역장들과 역무원들에게 대기명령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11시 30분에는 각 경찰관에게 악질행위자를 체포, 검거하고 사건 확대 방지를 위한 대체 열차편 확보 지시를 내리고 각 사철에 전동차와 버스의 임시운행과 막차시간 연기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미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소란에는 유효한 방법이 없었고 군중에 겁을 먹은 역무원들이 줄행랑을 치는 사태가 줄줄이 발생해 사태를 수습할 수 없었다.

한편 이 사태를 야기한 국철 양대 노조 측에서는 9시 30분 경에 투쟁을 중지하고 전면 협력하기로 했으나 이미 물그릇은 엎어진 뒤였고, 9시 45분 경에는 아카바네선, 케이힌도호쿠선, 야마노테선, 도호쿠 본선, 타카사키선, 조반선(조반선 각역정차 포함)이 이미 운행정지된 상태였다.

결국 다수의 철도차량과 시설이 파손되어 수도권 내의 철도 운행은 4월 25일 10시까지 전면 중지되었다.[3]

4. 사태 진압 이후[편집]

"분할 민영화는 국철을 좀먹던 노조 해체가 목적이었습니다."

인계서

일본국유철도는, 쇼와 24년 일본국유철도법의 시행에 의해, 국책사업으로써 철도사업을 인계하여, 이후 나라의 기간적 수송기관으로써 우리 나라의 수송의 근간을 맡아, 국가의 발전, 국민생활의 향상에 큰 공헌을 해 왔다. 그러나, 최근 우리 나라의 수송구조의 변화, 경제정세의 진전에 의해, 철도수송은 그 독점성을 상실하고, 경영현황의 악화 일변도를 걸어, 파국적 상황에 빠져 있다.
(중략)
일본국유철도는, 민영분할에 따른 철도사업의 재생이야말로, 철도를 미래지향적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유일의 방도라고 확신하여, 국가와 한 마음으로, 또한 임직원이 한마음 한 뜻으로 뭉쳐, 역사적 대개혁에 임해, 마침내 이 어려운 사업을 완수하는 순간을 맞이했다.
(중략)
쇼와 62년 3월 31일 24시 0분 현재
국철 전 노선에 사고 발생 보고 없음. 일본국유철도는, 모든 열차 운행을 무사고로 확실히 각사에 인계하고, 여기에서 철도 사업의 역할을 마친다.
쇼와 62년 3월 31일
일본국유철도
(후략)
- 1987년 3월 31일, 국철이 JR그룹에 업무를 이관하면서 국철 총재 스기우라 타카야 외 4인[5] 명의로 쓴 인계서 중 일부 내용에서.
- 문맥에 맞게끔 일부 의역한 부분이 있음.
당연하지만 폭동의 원인을 제공한 일본국유철도 및 폭동 주모자인 국노와 동노 등 주요 국철 노조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성난 여론과 정치권의 질타 속에 몰락했고[6], 이후 민영화 과정을 거쳐[7] 제3차 나카소네 내각 때인 1987년 4월 1일부로 해체되어 JR그룹으로 바뀌었다.

5. 그 외[편집]

  • 도호쿠 본선, 카와고에선[8] 등 우에노역을 시, 종착역으로 하는 급행, 특급은 준법투쟁에 더해서 운행정지의 영향을 받아 도중에서 옴짝달싹도 못하거나 운행이 중지되어 폭동의 영향은 수도권 밖에서도 있었다. 사이타마현에서는 4개 편, 도치기현에서는 11개 편이 정지되어 승객들이 열차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 아오모리역에서는 다음날 25일 세이칸 연락선에서 토호쿠 본선으로 환승하려는 승객들이 열차가 운행될 조짐이 없자 기다리다 지쳐 버스를 대절해 도쿄로 향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 날 16시 20분에는 본래 시간보다 10시간 지연되어 하행 급행 핫코다편이 도착했는데 그 안에서 보통승차권 131매가 발견되었다. 폭동 때 누군가가 훔쳤으나 도장이 찍혀있지 않아 환금 가능성이 없었기에 핫코다 열차 안으로 던져넣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 세이칸 연락선은 운항 시간표가 열차 운행과 맞아떨어지게끔 짜여져 있었기 때문에 둘 중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수백 내지 수천명의 승객들이 발이 묶이지만 도쿄에 비하면 폭력사태는 비교적 적게 벌어졌는데 열차 승무원을 제외한 역무원들에 대해서 "저 사람들이 뭔 죄가 있겠냐"는 여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 이 사건으로 귀가가 곤란해진 시민이 다수 발생해서 에이단 지하철(현 도쿄메트로)에서는 29개 편성, 케이오 전철(당시 케이오 테이토 전철)이 9개 편성을 추가하여 야간운행을 실시했다. 토큐와 도영 지하철 이외의 각 회사들도 야간운행 체제를 갖추었다. 25일 아침에도 국철은 운행중지 상태였고 사전 예고된 파업이 아니라서 이용객들이 자구책은 생각도 못 한 채 러시 아워 시간에 집중되어 각 사철과 지하철 역으로 쇄도했다. 가장 혼잡했던 노선은 도카이도 본선과 병행하는 케이큐, 토에이 지하철 아사쿠사선케이세이선으로 최대 30분 지연을 기록했고 혼잡도도 케이큐 노선이 보통의 2.5배에 도달하는 막장 상태가 오전 10시까지 계속되었다. 이외에 토큐가 각 노선에서 평상의 2.5배, 오다큐 에노시마선후지사와역에서부터 대체운행으로 2배를 기록하는 등 대혼란이었다. 입장제한, 개찰제한 등이 실시되었으나 토부 이세사키선, 닛코선, 케이큐등에서는 승객들이 다 타지 못하는 사태가 속출했고 요코하마역에서는 승객 5천 명이 개찰구로 몰려들면서 7명이 부상을 입었다.
  • 야마노테선 지역 내의 운송을 일임하게 된 모양새가 된 에이단 지하철에는 승객이 집중되어 마루노우치선 이케부쿠로역에서는 탑승하는 데 60 ~ 90분이나 걸렸다. 다른 역에서도 입장제한을 실시하고 러시아워 다이어를 연장하는 것으로 사태에 대처했다.
  • 버스도 영향을 받아 신주쿠역 서쪽 출구광장에서는 마루노우치선을 타려는 승객들로 지상 정류장까지 사람이 넘쳐나 버스가 진입을 못하여 8시 반부터 10시까지 마비 상태였다. 이케부쿠로역 앞에서는 버스 승객이 긴 줄을 만들어 일반 차량의 진입을 제한하고 승객의 일부를 조시가야공원(雑司ヶ谷公園)으로 이동시키는 조치가 이루어졌다.
  • 25일, 마츠도역에서는 운행하지 않는 열차에 분노한 승객 100명이 역 사무실로 난입해 직원들을 납치해 아야세역까지 걷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오미야역에서도 7시 경에 승객 4천 명이 몰려들어 국철 직원을 압박하는 등의 소동이 있었다. 가장 피해가 컸던 건 조반선이었는데 지금이야 츠쿠바 익스프레스가 2005년에 개업했기에 해당 없지만 그 당시에는 조반선 대체 노선이 전혀 없었다.
  • 25일 새벽까지 138명이 절도, 방화 등으로 체포되었다. (우에노역 35명, 신주쿠역 43명 등)

[1] 오다와라, 아타미, 우츠노미야, 타카사키는 도쿄에서 80~110km 정도 떨어진 곳들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천안, 원주, 춘천 등과 같이 서울에서 거리가 먼 교외 지역에서 통근/통학을 위한 대중교통 수요가 생긴다고 보면 된된다. 어찌 보면 그린벨트도 없고 아파트보다 주택 또는 저층 맨션에 많이 거주하는 일본의 주거환경에 따른 당연한 현상이다.[2] 하지만 다소 추할지언정 어떤 의미에서는 현명한 선택이기도 했는데 이 사건이 일어난 원인 중 하나인 아게오 사건 당시 미처 피신하지 못한 역장이 집단 린치를 당해 부상을 입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때는 분위기도 훨씬 험악했던 데다 역장과 달리 지연운행에 대한 직접적 책임이 있는 기관사였으니 그대로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3] 그러나 그 이후에도 사실상 복구하지 못했다.[4] 분할 민영화 당시 내각총리대신이었으며 과거 폭동 사건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 사토 에이사쿠 내각에서 철도 분야를 총지휘하는 운수대신을 지냈고, 사건 당시에는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통상산업대신을 지냈다.[5] 부총재 하시모토 마사시, 기사장 오카타 히로시, 총재실장 이데 마사타카, 총재실 문서과장 혼다 유이치로.[6] 다만 국철 노조 중 하나였지만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던 철도노동조합(철노)은 살아남았는데 이후 이들은 JR 경영 체제에서 제1노조가 된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JR 노조 총련)의 주요 자리를 차지했다. 국노와 동노는 도로치바 등의 소규모 세력으로서 유지 중.[7] 사실 까고 보면 민영화 과정도 매끄럽게 이뤄지진 못했다. 음주운전이나 대리운전을 비롯한 국철 기관사들의 막장 행위는 고사하고 중핵파가 국노와 연합해서 수도권 내 주요 노선 설비에 테러까지 가했기 때문.[8] 현재와 달리 1973년 당시 카와고에선은 도호쿠 본선의 지선 취급을 받아 우에노역에서 시종착했다. 현재처럼 신주쿠 방면으로 운행하게 된 것은 1985년 사이쿄선 개통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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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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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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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원인3. 투쟁의 전개4. 10.20 나리타 지역 투쟁5. 이후6. 영향7. 대중매체에서8. 기타9.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成田闘争(なりたとうそう) / 三里塚闘争(さんりづかとうそう)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며 전개된 나리타 전공투의 투쟁.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지금도 나리타 공항 라인 곳곳에 알박기하고 있는 사유지들이 그 흔적이다.

2. 원인[편집]

1966년 6월 일본 정부나리타시에 국제공항을 건설하기로 하고 1972년에 완공하기로 했다. 문제는 나리타에 사는 히키아게샤 계열 농민들 및 나리타 주민들 상당수가 사유지를 빼앗기고 소음 문제가 발생한다는 등 여러 이유로 이 사업에 반대하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합의 없이 사업을 밀고 나가려 하자 분노한 이들은 결국 일본사회당좌파 정당의 지원을 받아 조직적인 투쟁에 나서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주민들에게 보상을 대충 지급하고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정부가 준 얼마 안 되는 보상을 받고 타지로 가봐야 먹고 살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이미 국가의 무관심 속에 추방당한 경험을 가진 주민들은 이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결국 정부의 강제집행으로 인한 무력으로 진압으로 전투종족이 된 나리타시 후보지 주민들의 정체는 대부분 히키아게샤 농민들이었다. 게다가 이 농민 대다수는 과거 일본 제국 시대에 정부의 말만 믿고 만주와 조선 등으로 이주했으나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거의 무일푼으로 쫓겨나듯 귀국해 겨우겨우 자리를 잡아가는 와중이었는데, 자신들을 개고생시킨 일본 정부에서 이번엔 사전 설명도 없이 강제로 또 다시 땅을 내놓으라고 했으니 당연히 곱게 비켜줄 리가 만무했다.

애초부터 보상이라도 많이 해줬다면 모를까, 일본 정부에서는 쥐꼬리만한 돈으로 보상을 해주려고 했으니 정말로 갈 곳도 없었고, 자신들이 힘들게 정착한 땅에 애착도 있는데다 이제 와서 다른 직업을 구할 수도 없으니 농민으로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가야하는데 억울하게 재산권을 침해당하고 있으니 생계가 걸려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일본 정부는 히키아게샤 농민들이 경제력이 없으니까 사유지 토지 보상이 쉬울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이렇게 억울하게 땅을 뺏기게 된 상황에 대해 분노한 히키아게샤 농민들은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항의하다가 끝내 전투종족이 되어버렸다.

3. 투쟁의 전개[편집]

1966년 7월 20일 지역 농민들은 산리즈카 시바야마연합 공항 반대 동맹을 결성하였다. 공항용 토지 매수 협상을 어렵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토지를 1평 또는 그 이하의 단위로 잘게 분할하고 서로 매매하여 지권자의 수를 인위적으로 늘리는 '1평 운동'을 전개했다.

처음에는 공항 반대 운동에 정당들도 참여했지만 일본사회당은 치바현 지사와 신사협정을 맺고 일본공산당은 반대 동맹이 신좌파 당파와 공투 관계를 맺은 것에 반발하여 반대 동맹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반대 운동에서 이탈했다. 이 두 정당의 행동은 큰 비극을 불러왔다.

1967년 신좌파의 각 파가 반국가 권력투쟁에 나서면서 특히 베트남 전쟁사토 내각을 향한 반발을 상징하는 대상으로 반대 투쟁에 참여하면서 투쟁이 과격해졌다. 지역의 기독교도가 모인 토무라 일작의 반대 동맹 대표가 활동을 선도하고 지역 농민들과 좌익 혁명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제휴하면서 지속으로 투쟁하였다. 그러나 운동 방침과 좌익 각 정파 간의 관계를 놓고 의견이 차이나는 탓에 새로운 좌익 여러 정파 간 반목으로 말미암아 공항 반대 동맹은 '오가와파', '아츠타파', '키타하라파'로 나뉘어 활동했다. 계급투쟁 지상주의의 일본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도 '나리타 투쟁은 프티 부르주아지 농민의 자기보호'라고 야유하자 운동에서 추방되었다. 산리즈카 시바야마연합 공항 반대 동맹은 무장투쟁 노선에서 신좌익 당파와 신좌익 당파에 영향받은 전일본학생자치회총연합의 도움을 받았다.

1967년에는 시위대가 다리를 건너려고 하자 경찰기동대가 버스로 막았지만 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해 근처의 살수차나 지원 오는 경찰버스에 충돌시키는 사건이 발생했고 며칠 뒤엔 거리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기동대가 최루탄을 발사해 해산시키려 했지만 발사된 최루탄을 시위대가 기동대에게 도로 던지는 일이 생겨 오히려 기동대들이 해산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반대 투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비타협하는 자세로 건설 계획을 수행하면서 1971년 2월 22일 건설 예정지에서 경찰력을 이용하여 제1차 행정대집행을 시행하자 반대 동맹과 기동대가 충돌하였다.

같은 해 9월 16일에도 건설 예정지에서 제2차 행정대집행을 하자 격렬한 투쟁으로 양측에서 사망자와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주민들은 바리케이트를 봉쇄했고 경찰들은 바리케이트를 뚫기 위해 중장비로 바리케이트와 안에 있는 시민들을 공격했다.

1972년 3월 15일, 반대 동맹은 A활주로 남단 접근 영역 내 이와야마 지역에서 높이 63m 철탑, 소위 '이와야마 철탑'을 건설하여 비행 전 검사를 중지하게끔 했다.

1977년 1월 11일, 후쿠다 다케오 내각은 각의에서 1년 내에 개항하게 하겠다고 호언했다. 항공기 운항을 방해하는 이와야마 철탑을 철거하고자 1월 19일 중장비를 운행하는 도로 건설에 들어갔다. 4월 17일 산리즈카 제1공원에서 2만 3천 명이 결집해 철탑 방위 전국 총궐기 집회를 열었다.

같은 해 5월 2일 공항공단은 일본 항공법 제49조 제1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치바현 지방재판소에 이와야마 철탑 철거 가처분을 신청했다. 5월 4일, 치바현 지방재판소는 서면 심리만으로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5월 6일 오전 3시 기동대원 2100명이 철탑 주변을 포위했다. 4시에는 당시 치바현 지방재판소 집행관인 키타하라 코오지가 현장에 도착하여 철탑 검증 종료와 철거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반대파를 내쫓고 오전 11시 경 철탑 철거를 완료했다.

5월 6일 오전 5시부터 반대파와 기동대가 서로 간간이 충돌하기 시작했다가 5월 8일에는 대규모 충돌이 발생했다. 그런데 충돌 당시 반대파의 저항이 강해서 기동대가 최루탄을 마구잡이로 발포하다가 야전병원에 있는 학생의 머리를 직격으로 맞춰 죽음에 이르게 했다.

개항을 앞둔 1978년 3월 26일 공항반대파들이 관제탑으로 무단침입하여 점거하고 시설들을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나 개항은 4월로 미루어졌다.

4. 10.20 나리타 지역 투쟁[편집]


10.20成田現地闘争

1985년 10월 20일 국제공항의 2기 건설을 반대하는 대규모총궐기 집회가 일어났는데 공항 폐쇄를 목표로 일어났으며 일본 경시청의 제1, 제3, 제4 기동대가 산리즈카 제 1공원부터 교차로까지 배치되었다.

약 3900명이 참여했다고 알려졌는데 경찰에서는 궐기대회의 폭도화, 테러 및 게릴라전 사건을 미연에 예방한다는 이유로 집회 장소 부근에서 엄격한 검문을 시행하고 궐기집회 참여자에 대한 심문을 하였으며 소지품 검사도 시행했다.

집회가 종반에 들어간 오후 4시 10분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중핵파)을 비롯한 철저한 항전을 내걸고 지원한 여러 당파가 궐기 집회 예정 몇 주 전에 산리즈카 제1공원의 관목이나 흙 속에 숨긴 대량의 쇠파이프, 통나무, 화염병 등을 꺼내어 참가자들에게 나눠주었다. 투석용 자갈이나 깃대, 매우 작은 플래카드가 붙여진 장대 및 각목을 싣은 트럭과 덤프트럭이 집회장에 난입해 폭력화되었다.

4시 22분 1천 명 남짓 무장한 중핵파와 농민들은 교차로에 있는 경찰 지지선을 통나무로 뚫고 전진하여 폭력사태를 일으켰다. 지지선이 뚫리자 시위대는 혼란에 빠진 기동대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기동대가 뒤로 빠져 지지선을 다시 세우려고 하자 화염병과 자갈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 폭력사태는 2시간 동안 더 이어졌다. 기동대는 중상자 9명을 포함한 경찰관 59명이 부상을 입었고 살수차 및 장갑차 3대가 화염병으로 파괴되었으며, 시위대는 총 241명이 공무집행방해죄로 체포되었다.

같은 시간대에 나리타 공항에선 혁명적 노동자 협회의 구성원들이 택시로 위장한 차량과 가짜 신분증으로 경찰의 검문을 통과하고 공항 내로 진입하여 5시 35분 공항 여객 터미널 빌딩 주차장에서 자신이 타고 온 차량 외 1대, 총 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고 도주했다.

이 방화 사건의 혼란을 틈타 화염방사기산탄총으로 무장한 결사대가 위장 소방차 2대를 몰고 방화 사건의 소화 활동 명목으로 경찰을 속여 진입했다. 관제탑 앞에 위장 소방차 1대를 정지시키고 시한장치를 작동시킨 이후 다른 위장 소방차로 도주했다.

약 8분 후 소방 호스 노즐로 위장한 산탄총의 화약으로 한 번에 구슬탄 200개 가량이 발사되어 관제탑 창문을 파괴했다. 혁명적 노동자 협회의 계획은 창문이 파괴된 이후 창문을 향해 화염방사기가 작동하여 나리타 국제공항의 관제탑이 파괴돼 사실상 폐항시킨다는 것이었지만 화염방사기가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고 위장 소방차에 불이 붙었다.

관제탑 파괴라는 상황은 면했지만 관제탑의 일부가 손상을 입어 공항의 일부 기능이 상실되었다.

이 전략이 수 년 전부터 준비했던 것임이 알려지자 극좌 과격파 및 농민들과 시가전을 일으켜 2시간 가량 진압을 지연시키고 공항 중추 시스템까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었던 경찰은 콩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5. 이후[편집]

정부는 농민들과 대화를 시작하고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시 정신적 고통을 입은 농민들에게 사과하면서 충돌이 줄어들었으며 1995년 이후 공항 2기 공사에 쓸 토지매수에 응하는 농민들도 증가했다.[1] 한편 토지이전에 응하지 않는 농민들과 급진 좌파 단체 회원들이 활주로 예정지에서 생활, 경작을 계속하면서 나리타 국제공항은 처음 계획의 절반도 이루지 못한 채 운영 중이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기존 활주로를 연장하고 새로운 3활주로 증설하며 신 터미널 건설등이 포함된 대규모 확장계획이 진행중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반대파 농민들은 행진을 하며 반대 구호를 외치고 다닌다.

나리타 투쟁은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나 과거 대중들의 대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활동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활동세와 지지가 줄어들었다.

이들의 활동이 줄어든 가장 큰 원인은 1990년대 이후 대중적 지지와 정치적 기반을 상실한 것과 함께 시민들이 나리타 공항이 개항한 이후 40년 동안 나리타시의 발전상을 직접 목도한 현실적 원인이 가장 크다. 나리타 공항의 건설로 나리타시는 일본에서 가장 재정자립도가 높은 도시중 하나가 되었고 나리타 공항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세수로 중앙정부에 의존하지 않아도 될 수준이 되었고 공항반대파의 가족과 자녀를 포함한 수많은 나리타 시민들이 나리타 공항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그들 또한 여행을 위해 나리타 국제공항을 이용하게 되었다. 나리타 국제공항이 하네다 국제공항와 함께 도쿄의 관문으로 자리잡은지 반세기가 다되어가는 현 시점에서 공항반대, 폐항 슬로건은 과거 공항 반대파였던 시민들 입장에서도 더 이상 현실적이지 못한 구호가 된 지 오래인것.

1970~1980년대 나리타 건설과정과 개항초기 당시 최대 만단위의 반대파 시위대와 경찰 수천명이 동원된 대규모 반대시위와 대조적으로 가장 최근인 2023년 2월 15일에 집행된 행정집행당시 현장에 모인 반대파 시위대는 50여명#에 불과해 과거에 비해 상당히 위세가 줄어든 상태이며 과거와 같은 수준의 대규모 저항운동 능력은 상실한 상태이다. 2월 15일 강제집행 역시 소규모 충돌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기류로 나리타 공항당국도 경찰경비인력을 점진적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나리타 반대운동이 사실상 종말로 가는 현 시점에서 더이상 대규모 경비인원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3년 2월 15일 오후 8시, NAA(나리타국제공항회사)가 2003년에 소유권 취득이 완료한 나리타 공항 북쪽에 위치한 양 4600㎡의 토지에 대한 강제집행이 진행되어 토지에 울타리를 설치하고 항공기를 방해하는 망루와 간판이 철거되었다.[2]

철거 당시의 생방송(철거개시는 20:00부터)

6. 영향[편집]

나리타 투쟁은 일본의 공공사업 진행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투쟁의 발단이 정부의 권력을 믿고 강압적으로 토지수용을 추진한 것이므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주민들을 설득하여 신중하게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공공사업에 따른 갈등은 크게 적어졌으나, 대신 사업이 적기에 추진되지 못하고 지연되는 결과를 낳았다.[3]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공항을 지을 때 가급적 토지 수용 문제가 적은 해상에 짓는 방침을 택했다. 간사이 국제공항이나 센트레아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이 해상에 지어진 것도 부분적으로 나리타 투쟁이 영향을 미쳤다.

7. 대중매체에서[편집]

오제 아키라의 우리마을 이야기는 나리타 투쟁을 다룬 대표적인 작품이다.

오가와 신스케는 이 투쟁을 가지고 산리즈카 연작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반드시 거론되는 역작으로 꼽힌다.

8. 기타[편집]

제주 제2공항 건설 논란 당시 산리즈카 지산연합 공항반대동맹(키타하라파)가 반대 시위에 참여하기도 했다.

9. 같이 보기[편집]

[1] 이들은 공항 서측 바로 옆에 마련된 '새로운 산리즈카'(혼산리즈카, 산리즈카고료 등)으로 옮겨 살거나 아예 타 지역으로 이주했다.[2] 지금까지 해당 토지의 소유권자는 아니고 토지를 가진 지주와의 계약으로 해당 토지를 경작하던 소작농이었던 "市東孝雄"(시토우 타카오. 72세, 반대파 출신)이 농지로 경작을 계속하고 공항반대파는 항공기의 이착륙을 방해하는 목적으로 망루와 간판을 세워서 저항하고 있었지만 2022년 9월에 NAA가 해당 토지부터의 퇴거를 요청한 소송에서 반대파 및 시토우의 항소가 기각되면서 강제집행에 대한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3] 가령 나리타 투쟁보다 좀 더 늦은 시기에 터진 도호쿠 신칸센 우에노-오미야 구간 건설 반대운동에 대해 정부가 강경하게 나가지 못하고 사이쿄선 건설, 신칸센 저속 주행 등으로 양보하게 된 것도 이 사건이 영향을 미쳤다. 그 대신 사업은 약 10년 가량 지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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