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일본에서 뻥튀기된 사카모토 료마를 만든 것이 1960년대의 시바 료타로였다면, 뻥튀기된 미야모토 무사시를 만든 것은 1930년대의 요시카와 에이지다

 

11. 미야모토 무사시 허구성의 연혁[편집]

그렇다면 과연 어느 시대부터 무패의 검성 미야모토 무사시 열풍이 시작된 것인가!도 살펴볼만한 문제인데 대체적으로 이 시발점으로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를 꼽고 있지만 사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일단 에도 시대. 일부 미야모토 무사시 추종자들은 에도 시대에는 전쟁이 사라져서 무술이 필요가 없어져서 검술이 대우를 못받았다라는 굉장히 일차원적인 사고에서 나온 주장을 하는데 일견 그럴싸하게 들린다. 전쟁에서 검객이 명성을 떨치고 관직에 오르는 일이 막혔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전쟁이 사라지면서 검객으로서, 관직에 임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검술 뿐이었다.센고쿠 시대는 워낙 전쟁이 많이 벌어진 시대다 보니 꼭 무예에 능통하지 않더라도, 머리가 비상하거나, 교양이 넘치거나, 시대의 흐름을 잘 타거나, 운이 미칠듯이 좋으면 무사로서 대출세도 할 수 있었다. 히데요시나 다나카 요시마사 같은 평민도, 사이토 도산, 고니시 유키나가같은 상인 출신도 무사로 대다이묘가 될 수 있는 시대였으나, 에도 시대에는 전쟁이 아예 사라지면서 전공을 세울 길이 막혀버린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조선이나 명나라처럼 과거제를 시행하여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있던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무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검술이었다. 실제로도 나카니시 일도류 3대 종가 나카니시 츠구마사(中西子政)의 제자였던 마타시치로는 조개를 파는 미천한 상인이었었는데 나카니시 츠구마사의 제자가 되어 열심히 수련한 끝에 검술 실력을 인정받아 무사가 되고 성을 아사리(바지락)라고 지어 아사리 마타시치로가 된다. 이게 무려 에도 시대 말기의 일이다.

이렇듯이 에도 시대에 무술의 위상이 높다 보니 수많은 유파가 융성하고 난립하였는데, 에도 시대 초기에는 일본 전체에 200개 미만의 유파가 존재했다는 조사 기록이 있고 에도시대 말기 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검술 유파의 숫자만 718개, 다른 분야에도 유술 179개, 창술 148개, 궁술 52개 유파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쨌든 이렇게 수많은 유파가 난립하면서 각각의 유파들이 자기 PR과 유파의 역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에도 시대의 레전드로 평가받는 인물들을 각각 자신의 유파의 개조나 시조라며 소개하거나 또는 날조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텐도류같은 경우 '우리 텐도류는 사이토 카츠히데라는 전설적인 검호가 만들었는데, 그의 스승은 그 유명한 검성 츠카하라 보쿠덴이다', 혹은 '우리 유파는 그 유명한 야규 쥬베가 방랑 중에 우리 유파의 창시자의 재능을 보고 감격하여 신카게류를 전수해주어 수제자로 삼아서 만들어진 검술이다, 그러므로 위로 가자면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아이스 히사타다가 우리 유파의 시조다' 등등. 물론 사실인 경우도 일부 있을테고, 거짓도 많았겠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이렇게 자기 유파의 시조로 많이 쓰이던 인물들이 이이자사 이에나오, 카미이즈미 노부츠나, 츠카하라 보쿠덴, 이토 잇토사이, 행적 자체가 불분명한 장점을 가진 야규 주베에, 심지어 스스로 제자를 자칭한 인물들의 기록까지 확실히 존재하는 야규 무네노리 등이었다.

즉 이들이 진짜로 당대의 레전드라고 불린 인물들이며,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경우 애당초 행적도 상당히 불명확한 만큼 유파의 스승으로 뻥치기 좋은 조건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무사시가 당시에도 레전드 검객이었다면' 무사시를 유파의 스승으로 놓는 검술 유파가 부지기수로 있었어야 정상일 텐데, 실제로는 구마모토번만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약소 유파인 진짜 니텐이치와 엔메이류 정도의 한둘뿐만이 무사시를 유파의 스승으로 놓고 있다는걸 생각하면 아무래도 에도 시대에 일류 검호로 여겨지진 않았던 것 같다. 실제로 에도 시대 후기 만들어진 츠카하라 보쿠덴과 상대했다는 일화에 의하면 츠카하라 보쿠덴이 무사시의 일격을 밥 먹다가 젓가락으로 막는 식으로 차원이 다른 검호로 묘사되기도 하고.. 또 사실 일도류와 야규 신카게류의 시대에 진짜 레전드도, 일도류나 신카게류도 아니면 조명을 받기 힘들기도 하고..

반면에 혼초부게이쇼덴에 무사시의 일화, 즉 간류지마의 결투가 기록되어 있으며 간류지마의 결투가 가부키로도 공연됐던 것, 카이쇼노모노가타리라는 소설책에 무사시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존재하는걸 보면 완전히 삼류 검호로 취급된 건 또 아닌 것 같고, 시골에서 어느 정도 실력은 있었고 간류지마의 결투로 나름 유명한 이류 검호 정도로의 취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에도 시대가 끝나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검술사에 큰 변혁이 시작된다. 메이지 정부에서 폐도령을 내려버린것. 여기서 검술이 끝나는가 했는데 폐도령및 징병제 기타 정책에 빡친 사족들이 들고 일어난다. 이게 바로 사츠마의 사이고 다카모리 반란이다. 이 세이난 전쟁에서 사츠마 측의 시현류를 보고서 메이지 정부 측에서도 검술의 가치를 느끼고서 경시청에서 검술 과목을 만들고 경시청류를 만들게 된다. 이후에 검술은 격검 흥행으로 어찌저찌 명맥이 이어지다가 1895년 대일본 무덕회가 생기게 되고, 여기에 유도, 검도, 궁도들이 들어가게 된다. 이에 참가한 것이 직심영류, 북진일도류, 신도무념류등 몇몇 유파였고, 당시에는 다카노 사사부로와 나이토 타카하루등 쇼와의 검성으로 불리는 일도류 계열의 선생들이 검도계에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현대의 검도의 형, 기술, 수련법은 일도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쨌든 이렇게 검도가 만들어진다. 검도는 후에 중등교육 과목에 들어가게 되는 등 국가적 지원을 받게된 반면에 기존 고류 검술들은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는 수준으로 쇠락하고 만다. 이렇게 검술의 대세가 고류검술에서 검도로 바뀌면서 시대의 변화로 생긴 가장 큰 변화가 도장에서 구전+대면하여 소수의 인원을 교육시키는 도장 검술에서, 다수 대중에게 전파하는 검도 교육으로 바뀌게 된다.[38] 이렇게 많은 수를 가르치다 보니 소수를 구전+대면하여 가르치는 것보다 잘 정립된 교본 중심의 대중 지도자가 가르치는 식으로 검도 교육의 체계가 옮겨가면서, 예전에는 소수의 제자를 눈 앞에서 보고 틀린 점이 있으면 짚어주고, 훈련이 부족한 거 같으면 훈련을 더 시키고, 심법이 이상한 거 같으면 마음가짐을 가르칠 수 있었고, 또한 비전서에 너무 자세히 오의를 서술했다가 다른 유파가 우리 유파의 오의나 훈련법 등을 훔쳐가는 것도 큰일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도장 검술에서의 비전이나 교육은 대체로 구전 중심이고 비전서 같은 건 대체로 우리 유파의 검술에 능한 사람만 정확히 알 수 있도록 은밀하고 잘 알 수 없는 형식으로 묘사했지만, 현대의 검도는 다수의 제자를 가르쳐야 하고, 심법같은 것도 다수 대중을 가정하여 설득력이 있게 써야 하며, 훈련 방식도 교본만 보고도 따라 할 수 있도록 상세한 방식으로 써야 한다. 그런데 글을 쓰면서 설득력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이 권위자의 권위를 이용하는 것이고 그래서 이 시기 검도인들로부터 자주 인용되던 검술에 관련된 작품들이 크게 3개 타쿠앙 소호의 부동지신묘록,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 그리고 무사시의 오륜서이다.[39] 그러니 이들이 현대 검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잘 알 수 있을 듯 하다.

그런데 이 3작품들 중 당대의 검도가들이 인용하기 쉬운 작품과 어려운 작품들이 당연히 존재했는데, 우선 부동지신묘록은 애초에 승려인 타쿠앙 소호가 만든 작품이다 보니 대체로 불교적이고, 검도 이야기보다는 심법이 중심이 되고 그걸 병법=검술로서 설명하는 형식이라 인용이 쉽지가 않은 편이고, 야규 무네노리의 병법가전서는 사실 권력의 최상위권에 올라간 배부른 검호가 이제 정신적으로도 한번 고민해볼까! 하는 느낌이다. 내용도 불교를 이용하여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훈화나, 도교를 이용하여 유교를 비판[40]하면서 자신의 활인검+살인검+무도토리 등의 개념을 최종적으로 서술하는 형식이라 역시 인용의 어려움이 좀 있는 편이다. 또한 아무래도 북진일도류 중심의 현대 검도에서 대립각을 세운 신카게류의 인물이라는 것+에도 야규류 종가는 에도시대 말에 이미 망해서, 이제는 라이벌인 오와리 야규에서 야규류를 계승하여 동경야규회로 계승된 것도 큰 단점이었다.

반면에 오륜서는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가 제발 저 좀 취직시켜주세요, 저 취직 시켜주시면 이렇게 꼼꼼하게 가르쳐드립니다. 하는 식으로 자기 PR을 위해 만들어낸 서적이고, 그러다보니 한 25%만이 심법이고 나머지 75% 이상은 검도의 형이나 기술, 수련에 관한 묘사들이다. 구문 몇 개를 예를 들면 칼을 들었을 때는 눈을 크고 넓게 뜨며 상대의 칼에 시선을 두지 마라, 손가락은 처지지 말게 쥐고서 사람을 벨 때도 두려움으로 움츠려들지 마라. 등등 직접적으로 검술에 관해 묘사한 부분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인용하기에 정말 가장 편하고 훌륭한 검술 서적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사실 위에서 서술했지만 대개 이름 높은 검호의 도장은 도장에서 구전 + 대면하여 가르치는 방식이고, 그런 검호중에서 글재주가 좋은 사람이 드물어서 오륜서처럼 말이 아닌 글자로 출판하기가 상당히 곤란한 경우가 많았으나, 무사시는 당대 검호 중 최고 수준의 교양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그걸 체계적이고 편하게 요약해서 책으로 남길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실력없는 입만 산 하수였다면 그 정도의 책을 써내기 힘들었을테니 무사시는 다른 검호에는 못 미치더라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시기 활동하던 사람들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쇼와의 검성"으로 불리는 5인방, 즉 타카노 사사부로(10단), 사이무라 고로(10단), 모치다 모리치(10단), 나카야마 하쿠도, 나이토 다카하루 같은 현대 검도의 창시자 격인 인물들의 경우에도 전부 다 수많은 대회들의 우승 경험도 우승 경험이지만, 교본 등의 텍스트로서 자신의 검도론을 설파했던 사람들이고, 현대에도 이 인물들이 쓴 경시청 관련 기록이나 검술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자신의 저서에서 인용한 구절들을 보면 대체로 오륜서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연습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쭉 적은 다음에 "무사시가 오륜서에서 말하길 '천(千)일의 연습을 단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이라 한다. 이 단련이 있고서야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부단하게 연습을 게을리하지 말 것이다." - 나이토 다카하루. 이런식으로 오륜서를 계속해서 인용한 것이다.

검성으로 불리는 당대 최강의 5인방, 심지어 현대 검도를 창시한 공로로 현대 전일본 검도 연맹에 현창까지 된 이 인물들이 모두 다 무사시를 인용하고 있으니, 당연히 "무사시가 대체 누구야!", "진짜 레전드인가보다!" 이런 식의 무사시 열풍이 몰아쳤고, 심지어 니텐기와 오륜서를 보니까 60번을 이겼느니, 요시오카를 멸망시켰느니 라고 하니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며 검도사에 관한 책들은 이제서야 막 나오기 시작하는 정도의 태동기에 사료 교차 검증은 하기가 쉽지도 않았다. 또 대체로 무부에 가까운 검도인들이기도 하니 결국 검도계에서는 대체로 반박없이 사실로서 받아들여져 '검성' 무사시 열풍이 몰아친다.

물론 모두가 그런 건 아니고, 역시 전 일본 검도연맹 현창자인 지키신카게류의 야마다 지로키치(山田次朗吉)같은 경우 자신의 저서에서 "무사시가 최강이라면 에도에서 싸웠을텐데 그런 적이 없으니 최강이라기에는 의심스럽다." 라고 조심스럽게, 나오키 산주고 같은 경우는 "무사시가 최강은 무슨!" 하고 대놓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자만 검도계에서는 현대 최강의 인물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계속 인용하고 있고, 니텐기 보니까 최강이라고 나오니 최강의 검호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즉 무사시 열풍의 시발점은 이 시기부터인 것이다.

그렇게 검도계에서 무사시가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쪽 vs 무사시는 별 것 아니라는 사람들의 의견 대립이 계속되다 1931년, 요미우리 신문에서 주최한 좌담회에서 무사시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여기서 미야모토 무사시를 옹호하는 쪽이 기쿠치 간과 요시카와 에이지였으며, 무사시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쪽이 나오키 산주고였는데, 여기서 요시카와 에이지는 나오키 산주고의 맹공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첫 번째 모노가타리 이하 문단 참고.[41]

한편 요시카와 에이지는 좌담회가 열린 지 4년 후인 1935년 아사히 신문에서 한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그 유명한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였다. 덕분에 일각에서는 이것이 나오키 산주고의 논파에 대한 요시카와 에이지의 답변이다라든가, 혹은 "이 좌담회가 없었다면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소설도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도 나오고 있을 정도며, 소설 구상과 자료 체크에 걸리는 시간을 감안했을 때 단 4년 후에 소설이 쓰였다는 건 시기적으로만 봐도 분명 엄청난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해 보인다.

어쨌든 요시카와 에이지의 검성 무사시가 소설로 구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에 검성 무사시가 대중적으로도 널리 퍼지며 각종 대하 드라마 등의 소재가 되었고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42]

다만 현재는 각계의 연구자들에 의해서 사료의 교차 검증 등이 이어지며 1962년에는 시바 료타로가 '진설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책을 통해 무사시가 최강이었다기보다는 그냥 '''입신 출세를 원하던 검객이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NHK에서 무사시 검증을 위해서 현대 교토에서 염색집을 하고 있는 요시오카 가문을 찾아가서 요시오카 가문이 멸족된 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 등 무사시에 대한 과도한 신격화는 많이 없어진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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