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재능이 많았지만 군사적으로도 뛰어났던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2세와 다르게 그림, 서예 등 예술에 무척 뛰어났으나 가혹하게 세금을 올리고, 이민족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대표적 암군으로 꼽히는 송휘종 - 수호지의 악역 최종보스로 묘사되기도 한다
북송의 제8대 황제이자 금나라의 혼덕공. 묘호는 휘종(徽宗), 시호는 체신합도준렬손공성문인덕헌자현효황제(體神合道駿烈遜功聖文仁德憲慈顯孝皇帝). 휘는 길(佶). 도교에 심취하여, 재위 중 존호로 옥청교주휘묘도군황제(玉淸敎主徽妙道君皇帝)가 올려졌는데 흔히 사서에 송 도군(道君) 혹은 도군황제라 하면 이 사람이다. 대단한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위정자로서의 능력은 최악이라 중국 역사의 수많은 암군 및 폭군중에서도 손꼽힐 만한 인물이다. 송 제국이 영토의 절반을 잃어[1] 후세 사람들이 송나라를 북송과 남송이라는 두 개의 이름으로 기억하게 만든 원흉이나 다름없다.
6대 황제 신종의 11남이며 생모는 흠자황후(欽慈皇后)에 추존된 진귀인(陳貴人)이었고 7대 황제 철종의 이복동생이다. 황자 시절에는 단왕(端王)으로 불리었다. 그는 황제와 항렬이 멀었다. 즉, 원래라면 제위 계승권이 없었을 것이다.
철종이 붕어할 당시, 그의 살아있는 동복, 이복 동생 중에서 신왕 조필에 이어서 두번째 연장자였고, 철종의 친동생인 간왕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어서 즉위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신종의 생존한 아들들 중에서도 제위 계승권 상 휘종 앞에 2명이나 있었고, 앞에 있는 두명이 무슨 불상사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황제 자리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더해 철종의 아들인 조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제위 계승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철종이 붕어할 당시, 그의 살아있는 동복, 이복 동생 중에서 신왕 조필에 이어서 두번째 연장자였고, 철종의 친동생인 간왕 조사가 멀쩡히 살아있고 개인적인 흠결도 없어서 즉위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신종의 생존한 아들들 중에서도 제위 계승권 상 휘종 앞에 2명이나 있었고, 앞에 있는 두명이 무슨 불상사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황제 자리는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더해 철종의 아들인 조무가 만약 살아있었다면 제위 계승 자체를 꺼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철종의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요절하고 철종 본인도 일찍 붕어하자 후계를 세워야 했다. 당시 황태후였던 흠성헌숙황후는 '누구는 황제 친동생이라서 예법상 되고, 누구는 안 되는 건 공평하지 않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반대, 철종의 바로 아래 동생인 신왕 조필은 눈병이 있는데 황제 업무 보기 힘들 것이라고 반대했는데 당시 신왕 조필의 눈병이 심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신왕은 심한 안질로 거의 앞에 있는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거의 장님 수준이었다고 한다.[2] 황태후 상씨(상태후)[3]가 단왕을 직접 차기 제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따라서 철종의 뒤를 이어 북송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장돈 등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분 노는 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 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그분이어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상태후가 회의에서 황실 예법을 무시하고 단왕을 후계로 지명하자, 장돈이 "단왕께서는 성품이 가벼워 황제로선 불가합니다."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래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유독 단왕을 좋게 보았다고 한다. 평소 행실과 달리 단왕은 황궁을 들러 상태후를 뵐 때 예의를 갖추고 상태후의 비위를 워낙 잘 맞춰 다른 왕들과 달리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태후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단왕의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고 멋쟁이인 데다 외모 역시 단정하다고 하여 단왕을 좋게 보았다.
이런 까닭에 상태후는 "내가 정실임에도 불운하여 후사가 없고, 신종의 자제들이 모두 서출이라서 모두 내겐 똑같다."라고 말하며, '공평하게' 연장자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눈병이 있어서 일찌감치 참석자 모두에게 황제 후보에서 탈락한 신왕 다음 연장자인 단왕을 지지한 것이다. 더해 '단왕 조길의 외모가 잘생기고 단정하며,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펼쳤고, 평소 같은 신법당파였지만 재상 장돈을 시기한 증포[4][5]가
그러나 황제 지명 당시에도 장돈 등 신하들 사이에서는 '그분 노는 걸 너무 좋아하지 않나? 적장자라면 몰라도 황족 자제를 지명하는데 꼭 그분이어야만 하나?'라는 여론이 있었다. 상태후가 회의에서 황실 예법을 무시하고 단왕을 후계로 지명하자, 장돈이 "단왕께서는 성품이 가벼워 황제로선 불가합니다." 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나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본래 상태후와 그 측근들은 유독 단왕을 좋게 보았다고 한다. 평소 행실과 달리 단왕은 황궁을 들러 상태후를 뵐 때 예의를 갖추고 상태후의 비위를 워낙 잘 맞춰 다른 왕들과 달리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태후는 자신에게 예를 갖추고 공손하게 행동하는 단왕의 예술적 재능을 칭찬하고 멋쟁이인 데다 외모 역시 단정하다고 하여 단왕을 좋게 보았다.
이런 까닭에 상태후는 "내가 정실임에도 불운하여 후사가 없고, 신종의 자제들이 모두 서출이라서 모두 내겐 똑같다."라고 말하며, '공평하게' 연장자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눈병이 있어서 일찌감치 참석자 모두에게 황제 후보에서 탈락한 신왕 다음 연장자인 단왕을 지지한 것이다. 더해 '단왕 조길의 외모가 잘생기고 단정하며, 신종께서도 생전에 단왕이 인자하고 효행도 있고 장수할 것이라고 했다.’는 주장까지 펼쳤고, 평소 같은 신법당파였지만 재상 장돈을 시기한 증포[4][5]가
장돈은 저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태후마마 의견이 맞습니다.
태후마마의 의견이 맞사옵니다. 이대로 해야 합니다.
라고 합세하면서 그대로 상태후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단왕 조길은 상태후의 수렴청정 아래 철종의 뒤를 잇게 됐다. 이후 즉위를 반대하던 장돈은 장지로 가는 상여꾼들이 철종의 관을 진흙탕 위에 올려놓고 잠시 유숙한 것을 관리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파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 탄핵받고 지방으로 쫓겨났다.
이는 당시 구법당파와 신법당파의 당쟁, 궁중 여인들의 암투와도 관련 있었다. 즉 신종의 정처[7]와 철종의 모후[8]가 사이가 나빴다는 점과 선인태후 고씨 사후 상태후를 중심으로 재편된 구법당파와 신종의 정책을 계승한 철종과 장돈 등 신법당파의 향후 헤게모니 다툼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간왕, 신왕 대신 단왕이 선택된 것이다.[9] 따라서 철종 사후 철종의 유지와 장돈 등 신하들이 예법대로 동복동생 간왕, 생존한 신종의 아들 중 철종 다음으로 연장자인 신왕이 뒤를 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 무시되고 휘종이 옹립됐다.
신종 사후 어린 철종을 대신해서 수렴청정을 했던 선인태후 고씨가 구법당을 복권시켰던 원우연간 시기와 철종 친정기인 소성,원부 연간의 기간 동안 장돈 등 신법당파가 집권한 이후 북송의 당쟁은 점점 심해져갔다. 따라서 철종 사후 휘종을 수렴청정한 상태후는 구법당과 신법당의 균형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구법당의 한충언, 신법당의 증포를 재상으로 하여 국정을 운영했다.[10] 하지만 이런 구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증포와의 대립 끝에 한충언이 사퇴하면서 증포가 모든 국정을 쥐게 된다.
그런데 상태후가 얼마 안 가 갑자기 죽고 채경이 등장하자 정국은 다시금 요동쳤다. 평소 그림 그리기와 회화첩을 좋아한 휘종에게 총애를 받은 환관 동관이 휘종의 명으로 항주로 가서 회화첩을 가지러 올 때마다 그 옆에서 비위를 잘 맞추던 채경은 신법당이었지만 장돈 등 당시 집권 대신들이 신용 없는 인사로 평가하여 파직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종의 측근 환관인 동관의 추천과 평소 채경과 친했던 휘종의 후궁 유씨의 도움으로 채경이 다시금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후 채경은 증포의 도움과 추천을 통해 대명부지사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했으며 휘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16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증포를 시작으로 자신에 반대된다면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증포를 탄핵할 때 채경은 “재상 증포가 부정한 뇌물들을 받고 황제가 내려야 할 하사품 등을 마음대로 측근들에게 줬습니다.”라고 휘종과 증포를 포함한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그의 부정을 폭로했다. 당연히 자신 면전 앞에서 모욕을 받고 탄핵당한 증포는 얼굴까지 빨개져 휘종 앞임에도 크게 화를 내며 이성마저 잃어가면서 채경을 논박하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대신들은 증포의 무례함을 지적했고, 휘종 역시 증포가 앞뒤 안 가라고 황제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당연히 증포는 조사를 받은 뒤 채경의 폭로가 사실로 드러나자 파면되어 지방으로 쫓겨났고 잠시 명예를 회복했으나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윤주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채경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면 신구법 인물에 상관없이 약 300여 명을 모조리 몰아내고 나아가 그 자손들까지 연좌제로 과거응시금지 등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조치 등을 무기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여 조정 전체를 장악했다.
그런데 상태후가 얼마 안 가 갑자기 죽고 채경이 등장하자 정국은 다시금 요동쳤다. 평소 그림 그리기와 회화첩을 좋아한 휘종에게 총애를 받은 환관 동관이 휘종의 명으로 항주로 가서 회화첩을 가지러 올 때마다 그 옆에서 비위를 잘 맞추던 채경은 신법당이었지만 장돈 등 당시 집권 대신들이 신용 없는 인사로 평가하여 파직되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휘종의 측근 환관인 동관의 추천과 평소 채경과 친했던 휘종의 후궁 유씨의 도움으로 채경이 다시금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후 채경은 증포의 도움과 추천을 통해 대명부지사를 시작으로 계속 승진했으며 휘종의 신임을 얻어 재상이 되었다. 그리고 16년 동안 재상으로 권력을 쥐게 된 채경은 증포를 시작으로 자신에 반대된다면 구법당이고 신법당이고 모조리 몰아내버렸다.
증포를 탄핵할 때 채경은 “재상 증포가 부정한 뇌물들을 받고 황제가 내려야 할 하사품 등을 마음대로 측근들에게 줬습니다.”라고 휘종과 증포를 포함한 대신들 앞에서 대놓고 그의 부정을 폭로했다. 당연히 자신 면전 앞에서 모욕을 받고 탄핵당한 증포는 얼굴까지 빨개져 휘종 앞임에도 크게 화를 내며 이성마저 잃어가면서 채경을 논박하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대신들은 증포의 무례함을 지적했고, 휘종 역시 증포가 앞뒤 안 가라고 황제마저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화를 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당연히 증포는 조사를 받은 뒤 채경의 폭로가 사실로 드러나자 파면되어 지방으로 쫓겨났고 잠시 명예를 회복했으나 지방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윤주에서 사망했다. 이외에도 채경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자신들을 반대하면 신구법 인물에 상관없이 약 300여 명을 모조리 몰아내고 나아가 그 자손들까지 연좌제로 과거응시금지 등 불이익조치를 취하는 조치 등을 무기 삼아 반대파를 제거하여 조정 전체를 장악했다.
우선 선대 황제였던 신종과 철종이 왕안석, 장돈 등의 개혁안을 받아들여 국고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놨는데, 이걸 고귀하신 황제께서 예술활동한다는 이유로 파탄내버렸다. 그러자 채경 등 신하들이 나서서 백성들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거둔다거나, 소유문제가 애매한 토지들을 일괄적으로 국고에 환수시키는 방식으로 파탄난 국고를 채워나갔다.
![]() |
기암괴석을 그린 송 휘종의 그림. |
그리고 휘종은 예술품을 좋아하여 예술품 수집을 위해 명금국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전국의 진귀한 예술품들을 수집하게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수집을 담당하는 관리들의 행패가 극심했는데 그들은 황제가 예술품을 원한다는 명목으로 부자들과 백성들의 예술품을 강탈하는 것은 물론이고 황제의 새로운 정원을 꾸민다는 이유로 백성들에게 부역을 마구잡이로 부과하여[11] 강제로 징발해 일을 시키면서 숲을 밀어버리고 운하를 따라 기석들을 운반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가는데 집이 있으면 집을 무너트리고 논과 밭을 뒤엎고 길을 내기도 했다. 워낙 이 기암괴석을 싣고 가는 배가 많아서 '화석강(花石綱)'이라고도 불렀다.[12][13] 이 정도면 말 그대로 암군.
게다가 새로운 정원과 별궁을 짓기 위해 개봉부 '북동쪽' 성벽을 헐어버려서 이후 정강의 변 당시 개봉이 금나라에 의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관련 링크 이 별궁과 정원이 아래에서 후술하는 만수산이다.
결국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다 못한 민중들이 폭발하여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가장 대표적으로는 수호전의 주인공인 송강과 최종보스격인 방랍이 있다. 방랍의 난이 점점 격화되고 방랍이 아예 독립 국가를 세우는 수준에 이르자 요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조성하였던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 그 결과 반란을 진압할 수는 있었지만[14], 송나라의 국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백성들 민심을 수습하고자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화석강 수집을 그만 두었으나, 방랍의 난이 진압된 지 두 달도 안 되어서 또 화석강 모으기를 시작하였다.
물론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고 백성들도 반발하였으나 송휘종은 암석 모으기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유배 보내고 백성들 반발을 억눌렀다. 특히 송나라 관군이 진압 도중 남부의 백성들을 300만 명이나 학살했고 당연히 송의 남부지역은 송왕조와 조정에 반감이 심했다. 이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의 고종이 북벌하는데 간접적으로 방해요소가 된다. 불과 몇 년 전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라 언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후방이었던 것. 오죽하면 악비를 죽인 권신 진회가 재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불안한 남부지역을 폭압적이기는 해도 안정시킨 공이 인정되기 때문일까?.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15]
물론 많은 신하들이 이를 반대하고 백성들도 반발하였으나 송휘종은 암석 모으기를 반대하는 신하들을 파직하거나 유배 보내고 백성들 반발을 억눌렀다. 특히 송나라 관군이 진압 도중 남부의 백성들을 300만 명이나 학살했고 당연히 송의 남부지역은 송왕조와 조정에 반감이 심했다. 이는 정강의 변 이후 남송의 고종이 북벌하는데 간접적으로 방해요소가 된다. 불과 몇 년 전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라 언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불안한 후방이었던 것. 오죽하면 악비를 죽인 권신 진회가 재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불안한 남부지역을 폭압적이기는 해도 안정시킨 공이 인정되기 때문일까?.
이 와중에 금나라가 건국되자 이이제이책으로 금나라와 협력하여 요나라를 박살낸 후에 또 요나라 패잔병들과 협력하여 금나라를 박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의 힘 및 자신의 세력의 규모 정도는 확인하고 이이제이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머리가 나쁜 휘종은 그런 건 관심이 없었고, 역시나 요나라 마지막 황제로 여기저기 도망치던 천조제가 결국 패하여 붙잡히면서 이런 진실이 드러나고 만다. 게다가 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15]
이를 알고 분노한 금태종이 군대를 파견하자 휘종은 깜짝 놀라 적장자이자 황태자인 조환(흠종)에게 제위를 물려주어 현실의 모든 책임을 아들에게 떠넘긴 뒤, 자신은 도군황제(道君皇帝)가 되어 동관, 채경 등을 데리고 장강 이남의 안전한 남쪽으로 도망쳐 종교적인 믿음에 의존하려 하였다.[16] 결국 금나라와의 화의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시간을 끄는 사이 흠종은
영토할양, 배상금 지급 등의 요구를 수용해서 황실종친, 절 등에서 금은보화를 각출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면서 사태수습을 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쳤던 휘종을 개봉으로 다시 데려오는 바람에, 휘종은 결론적으로 위험한 개봉에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러나 휘종은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예술활동을 하며 연회를 즐기고 후궁들과 어울리는 등 평상시와 같은 생활을
했다.
하지만 금군이 물러가자마자 주전파 신료들이 일제히 강화 반대를 외쳤는데,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흠종은 주전파 신료들의 의견을 덜컥 수용해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금 송나라를 침공했다. 그리고 금나라한테 박살나고 수도 함락 직전까지 몰린 송나라의 군사력이[17]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복구될 리는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금군한테 깨끗하게 갈려나갔다. 수도 개봉에는 수비군으로 금군(禁軍) 3만 명이 있었지만 그네들조차 형편없다보니 금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방비하기는커녕 대부분이 도망갔기에, 개봉 또한 손쉽게 금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피신하지 못한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혀 황후, 후비, 황자, 황녀, 친왕, 왕비 등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녘의 금나라 영토로 끌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정강의 변 문서로.
끌려간 황족들 중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 같은 이들의 첩이 되었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졌는데 이는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거주하던 황족들 대부분이 금나라로 끌려갔을뿐더러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했다. 그리하여 남송에서는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18]를 내려 조롱하였다.
다만 남송이 멸망하면서 송이 실질적으로 망한 애산 전투에서는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의 송말삼걸을 시작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가 10만 명에 달했다. 북송이 무너질 때 그런 이가 얼마 없던 이유는 남송이 아직 건재하여 금과 계속 맞서고 있기에 충신들과 인재들이 남송으로 탈출해 싸운 것도 있지만, 휘종이 워낙 한심한 암군이었기에 그런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금군이 물러가자마자 주전파 신료들이 일제히 강화 반대를 외쳤는데,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흠종은 주전파 신료들의 의견을 덜컥 수용해버렸다. 그러자 분노한 금나라는 다시금 송나라를 침공했다. 그리고 금나라한테 박살나고 수도 함락 직전까지 몰린 송나라의 군사력이[17] 전직 황제 하나 새로 데려온다고 복구될 리는 만무했으니, 결국 송군은 금군한테 깨끗하게 갈려나갔다. 수도 개봉에는 수비군으로 금군(禁軍) 3만 명이 있었지만 그네들조차 형편없다보니 금나라 군대가 공격해오자 방비하기는커녕 대부분이 도망갔기에, 개봉 또한 손쉽게 금나라 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피신하지 못한 휘종은 아들 흠종과 함께 금나라의 포로로 붙잡혀 황후, 후비, 황자, 황녀, 친왕, 왕비 등 여러 황족들, 역대에 걸쳐 모든 재물, 금은보화, 그림, 서적 등등의 전리품과 함께 북녘의 금나라 영토로 끌려갔다. 자세한 내용은 정강의 변 문서로.
끌려간 황족들 중 휘종의 딸이나 황후를 제외한 후비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다.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 같은 이들의 첩이 되었다.
자칭 유복공주라는 사람이 자신이 금나라에서 탈출한 고종의 누이라고 사칭한 이야기가 인터넷에 퍼졌는데 이는 정사가 아니라 야사이다. 송사 환관 풍익전에 유복공주를 사칭한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머지 자세한 이야기는 그냥 민담이다.
원래 송태종의 자손들은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거주하던 황족들 대부분이 금나라로 끌려갔을뿐더러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마저 자손 없이 사망했다. 그리하여 남송에서는 송 태조의 자손들이 대대로 황제가 되었다.
금태종은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휘종의 정신이 혼미하기 때문이라면서 혼덕공(昏德公)이란 작위[18]를 내려 조롱하였다.
다만 남송이 멸망하면서 송이 실질적으로 망한 애산 전투에서는 문천상, 육수부, 장세걸의 송말삼걸을 시작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이가 10만 명에 달했다. 북송이 무너질 때 그런 이가 얼마 없던 이유는 남송이 아직 건재하여 금과 계속 맞서고 있기에 충신들과 인재들이 남송으로 탈출해 싸운 것도 있지만, 휘종이 워낙 한심한 암군이었기에 그런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봄이 적절할 것이다.
결국 금나라의 땅 오국성[19]에 끌려가 한 칸짜리 방에 수감되어 살다가 1135년에 죽었다.[20] 그나마 아들 고종이 협상 끝에 유해를 송환받을 수 있었다. 남송으로 송환된 휘종의 유해는 고종이 황릉 지대로 정한 소흥 일대에 마련한 영우릉에 묻혔다. 고종 역시 이 일대에 묻혔으며, 이 후 도종까지 남송의 역대 황제, 황후, 후비, 제왕 등 황족들은 대대로 이 지역에 묻혔다.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중국)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소뼈, 말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21] 아래에 묻혔다.[22]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가 한번 더 있었고 이때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명나라 시기에 복구된 석물의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차 밭이 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낙양 근처 공현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질 않았다.
휘종의 무덤인 영우릉은 남송이 멸망한 후 원나라 세조때 다른 남송 황릉과 함께 라마승이었던 강남(중국) 석교 총통 양련진가에 의해 도굴당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황제들의 유해와 함께 황야에 버려졌고 소뼈, 말뼈와 함께 섞여 상자에 담겨져 진남탑(鎭南塔)[21] 아래에 묻혔다.[22]
그 후 폐허가 된 소흥의 남송 황릉 지역은 명나라 때 주원장이 복구를 명했고, 청도 전 왕조를 계승하는 측면에서 이를 존중했지만 나라가 개판이 된 청나라 말기에는 다시 폐허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뒤 1960년대 문화대혁명의 파괴가 한번 더 있었고 이때 석재를 사용하기 위해 명나라 시기에 복구된 석물의 석재를 빼내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며 1970년대에는 구릉 일대가 차 밭이 되었다. 그나마 1989년이 돼서야 낙양 근처 공현 일대의 북송 황릉 지역과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받았다. 그나마 북송 황릉은 봉분이라도 남아 있는데 비해 남송 황릉은 개간되어 봉분의 흔적이 거의 남질 않았다.
송나라 중엽의 재앙은 장돈과 채경이 원흉이었고, 조양사가 재앙의 근원을 이었다. 그러나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휘종이 아직 즉위하지 않았을 때, 장돈은 휘종의 가볍고 경박한 모습이 천하를 아래에 두는 임금으로써는 불가하다고 말하였다. 요나라의 천조제가 패망하고 장각(張覺)이 평주(平州)를 바치며 귀순해오자, 조양사는 장각을 거두어들이면 금나라의
신용을 잃어버리고 반드시 외국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만약 장돈과 조양사의 계책을 행하여, 송나라가 휘종을 세우지
않았거나 장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금나라가 비록 강성하였으나 어찌 틈을 노려서 송나라를 정벌할 수 있었겠는가? 이로써 변고가
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는데, 비록 소인도 역시 능히 알 수 있었지만, 군자는 어느 정도 능히 막지 못하였다. 휘종이 나라를 잃은 이유를 상고해보면, 만약 진나라의 혜제의 어리석음과 오나라의 손호의 폭정이 없었고 또한 조조와 사마의의 찬탈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휘종은 특히 그 사사로운 지혜와 잔꾀를 믿으며 한편으로 치우치며 마음을 썼고, 의로운 선비를 멀리하고 물리쳤으며,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가까이 하였다. 이에 채경이 경박하고 교묘하게 아첨하는 자질로, 휘종의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음탕하게 노는 뜻을 도왔다. 허황된 것을 맹신하고, 꾸미며 노는 것을 숭상하여,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력이 곤궁하여 없어졌다. 임금과 신하가 멋대로 즐기고 놀며 서로 방종하여, 국정을 게을리 하여 돌보지 않았고, 하루 종일 터무니없는 짓을 행하였다. 동관이 권력을 잡자, 다시 전쟁과 예술에 탐닉하여, 재앙을 초래하여 혼란을 가속시켰다. 훗날 나라가 무너지고 몸에 치욕을 당하여, 결국 석진의 석중귀와 같은 죄를 저질렀으니, 어떤 핑계를 셈할 수 있겠는가? 옛날 서주 시기에 나라를 새로 만들면서, 소공은 오히려 무왕에게 무익한 해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유익하게 하였고, 진귀하고 기이한 물건도 쓸 물건이 아니라면 천하게 여겼다. 하물며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치며 송나라를 다스려야 하거늘, 희녕(熙寧)·원풍(元豐)·소성(紹聖) 연간의[23] 정치를 경계로 삼아야 하거늘, 휘종 또한 두 일의 폐단을 몸소 행하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임금이 놀면서 뜻을 잃고 욕망을 좇아 법도를 무너뜨리면 망하지 않는 자가 드물었는데, 휘종은 심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특별히 저술하여 경계로 삼는다. - 『송사』 |
주 유왕, 한 영제, 유자업, 유욱, 소소업, 해릉양왕, 수 양제, 당 의종, 만력제 등과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들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군주로, 예술에 심취해 나라를 말아먹었기에 조선 포함 후세의 성리학자들이 군주의 예술 활동을 반대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됐다. 명나라 만력제의 스승인 장거정은 '황제는 글씨만 쓸 줄 알면 됐지. 예술에 심취하면 송 휘종처럼 될 수 있다.'며 만력제의 예술활동을 반대했다. 문제는 만력제에게 파업이라는 선택지도 있었다는 점은 생각을 못한 것. 이는 중국만 아니라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미쳐 조선 성종도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휘종이다! 휘종이 하던 짓이다!'라고 비판받아야 했다. 연산군이 예술에 좀 심취하긴 했지만 말로는...
물론 취미생활을 즐기면서도 나라를 잘 다스린 군주들도 얼마든지 있다. 정치가로서 일을 열심히 하고 뛰어난 시인이기도 했던 조조가 있다. 또한 예술가로서 재능이 있을 뿐더러 나름대로 명군으로 평가받는 선덕제라든지 예술에 심취했거나 사치가 심했지만 십전무공이라는 공적으로 강건성세를 완성한 건륭제, 셀주크 제국을 세운 토그릴 베그,[24] 수학과 천문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고 치정에도 재능을 보인 티무르 왕조의 울루그 베그,[25] 역시 팔방미인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 같은 군주들처럼. 하지만 휘종은 명나라 말에 취미 생활로 국정을 내팽개친 천계제의 프리퀄 격으로 천재 예술가인 동시에 역대급 암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휘종의 업적이 없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휘종 시기의 북송과 이후의 남송의 미술은, 미술사학적으로 중국 미술의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휘종의 예술 사랑은 궁내 도화원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어졌고, 재야 미술가 발굴과, 송나라 이전 미술품들의 평가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북송 시기에 이성과 범관 등 걸출한 미술가는 물론, 휘종 자신도 서예 뿐만 아니라 그림에 능해, 미술가로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때문에, 송나라의 그림은 중국 미술사에 남을 걸작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중원의 황제는 일개 제후국의 왕과는 다르다. 한 마디로 산이 생기고 없어지는 와중에, 그는 그 막강한 힘을 예술과 사치품에만 쏟았다. 그의 예술사랑은 북송은 물론이거니와, 남송 대에 풍부한 예술자원과 위대한 예술가를 탄생시켰으며, 중국이 자랑하는 도자기 문화도 그 기법이 완숙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자산과 개봉의 불야성과 송의 막대한 경제력에도 한 몫했을 것이다. 중국의 다양한 레시피도 송 대에 완성되었다고 할 만큼, 문화적으로 완숙된 시기였으며, 현대에도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으나, 그것은 곧 '사치'를 의미하며, 사치는 언제나 망국에 다다르는 요소 중 하나였다. 송 휘종은 중국 미술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임에는 분명하나, 그는 동방을 아우르는 천자였다.
중국 미술과 문화의 활로를 열었지만, 북송의 망국의 길도 열어버린 황제이다. 대국적인 경영과 경제 측면에서 고려한 문화 융성이 아닌, 개인의 단순히 취미와 사치를 위해, 대륙을 뒤엎는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고로 휘종은 북송을 망국으로 몰아간 대가로 끝내 역대제왕묘에 배향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비참한 말로를 맞은 이야기는 후대 동아시아 왕조(중국, 한국, 베트남 등)들의 제왕학 교육에서 약방의 감초같은 반면교사 소재가 되었으며, 태자(세자)가 공부 대신 예술과 무예를 즐길 때마다 탄압[26]하는 스승들의 훌륭한 무기(?)가 되었다.
휘종은 문인이자 예술가로서 확실히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기도 하였으며, 시서(詩書)에 능한 인물이었다. 휘종이 개발한 서체인 수금체(瘦金體)는 자획을 가늘고 길게 뽑아 날렵하면서도 우아하며 가냘픈 것이 특징인데, 후대의 역사가나 감정가에게 '글자에 기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유약한 서체'라고 까이기도 한다. 물론 이런 평은 그가 암군으로 역사에 남았기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한 것이다. 만약 휘종이 명군이 됐다면 '우아하고 아름다운 서체'라고 칭찬을 받았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북송을 무너뜨린 금나라 황제들과 상류층들조차 휘종의 수금체를 애호했다.#,#
그림 실력이 출중하고 도자기 수집, 또는 가끔 조각도 했다. '계산추색도' 같은 걸작을 남기기도 했다. 문제는 안타깝게도 이 그림은 후대에 고서화 수집가이자 테러리스트로 악명 높은 청나라 건륭제의 손에 들어가 큼지막한 도장이 여기저기 찍히고[29][30], 좌측 상단부에는 엉터리 시까지 적히는 등 많이 훼손되었다. 사실 건륭제가 예술활동을 한답시고 망쳐놓은 고서화가 한둘이 아니다.
고려 예종이 지은 안화사에 친필로 편액을 써서 보내준 적이 있다. 또한 '직접' 국서를 써서 사신편에 전달한 적도 있다. 고려에 송나라의 아악인 대성악과 음악을 연주하는데 필요한 악기를 보내주기도 하였다. 이 대성아악은 고려시대에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도 근근이 유지되다가 조선 세종이 다시 대대적으로 정비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휘종은 한국의 국악 발전에도 상당한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려 인종 때 화가 이령(李寧, ?~?)의 예성강도를 보고 그 솜씨를 극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천수사남문도'를 그리기도 한 이령은 전주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인종 때 추밀사 이자덕을 따라 송나라에 갔을때 휘종을 만났다. 이때 휘종은 한림대조 왕가훈, 진덕지, 전종인, 조수종 등에게 명을 내려 고려에서 온 이령에게 그림을 배우도록 하면서 이령에게 고려 예성강을 그리게 했는데, 이령이 예성강도(禮成江圖)를 그려 휘종에게 바쳤다. 휘종이 이 그림을 감상한 뒤 "근래 사신을 따라온 고려 화공이 많았지만 이령의 솜씨가 가장 뛰어나다." 하고 감탄하고는 이령에게 술과 음식 및 화려한 비단옷과 명주실로 짠 비단을 하사하였다고 한다.[31] 여러모로 예술과 연관이 많은 임금.
하여간 중국사에서 손가락에 꼽을 암군이긴 하지만 시서화, 음악 등 동양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친 만능 예술인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휘종의 일화로 유명한 일화 중에 '황실 예술 아카데미를 세워 손수 후학들을 가르쳤다.'는 것이 있다. 왕희맹 같은 명화가도 휘종에게 그림을 배워서 천리강산도 같은 명작을 남겼다. 이렇게 꼭 휘종의 직계 제자가 아니더라도 북송~남송 초에 이름을 날린 화가, 서예가 대부분은 휘종이 커리큘럼을 세운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한다.
다례에서 만든 점다법(點茶法)의 규범은 이후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식 다도와 말차로 발전했고, 수석의 감정기준을 세웠으며, 도자기 공납 기준을 바꿔서 업체별 경쟁체제를 중국사 최초로 확립하여 중국 도자기의 품질을 증진시킨 것 등, 정말로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만큼은 통치력과 본인의 예술적 재능의 모조리 쏟아부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이 때문에 중국 쪽에선 북송이 망하지 않고 휘종이 후원한 예술이 계속 발전했다면 중국에서 리얼리즘 화풍이 자생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if 놀이도 할 정도라고 한다.
시서화에 다 능하였음은 물론 원림조경 쪽에서도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한번은 휘종이 만세산[萬歲山, 후에 간악(艮岳)이라 다시 명명]이란 원림을 세웠던 적이 있었는데, 워낙 잘 만들어서 너도나도 만세산을 모방하였다. 이 덕분에 중국의 원림 조경은 송휘종의 만세산 이전 / 이후로 세대가 나뉜다. 사물의 배치, 기암괴석의 감별, 산수의 형세 등등 그냥 기준점을 새로 세웠다고 보면 된다. 명나라의 서원(현재 중난하이)과 청나라 이화원도 저 영향력에서 못 벗어날 정도이다. 그리고 악기 '제작' 쪽에서도 미학적 재능이 빛을 발했는지 송석간의(松石間意)라는 고금을 만들었는데, 천하의 명금이라 송나라 황제들은 물론이고 후대 왕조 내내 전승되면서 보물 취급을 받았다.[32] 아무리 봐도 황제가 아니라 평범한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나거나 돈 많고 잘 놀면서 예술을 후원하는 황족 겸 예술가로 태어났어야 하는 인물이라는 평이 딱 적절하다.
황족이나 왕족은 반란의 구심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론 공직에 나가지 못하고 명예직이나 받아서 평생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게 일반적이다. 조비의 두 동생인 조식과 조창은 출중한 능력과 야망에도 그의 즉위 이후 출세길이 끊겼다. 그러나 휘종처럼 시 쓰고 그림이나 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을뿐더러, 그 누구도 이런 (통치자로서) 무능력자를 추대하지 않을 것이므로 안락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굳이 가치부전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유쾌한 당대의 풍류인으로만 기억되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계승권 논쟁 문단에서 적은 대로, 휘종은 황위 계승 서열에서 멀리 떨어져서 원래대로라면 황제가 될 일이 없었을 사람이었다. 휘종은 태자가 요절하고 선황도 일찍 붕어하는 바람에 후계를 급하게 세워야 해서 세운 황제였고, 당시에도 "어차피 예법상으로도 어긋나고, 그분 노는 거 너무 좋아하는데 황제로 세워야 합니까?"라는 말이 나왔는데도 태후가 억지로 옹립한 황제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이런 (통치자로서) 무능력자를 추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깨져버린 것. 당시 상황으로도 휘종은 황제가 되면 안 되었고, 그냥 부유하게 살면서 예술을 후원하며 놀고 먹는 편이 당사자에게도, 송나라에도 좋았다.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되었을 때 휘종이 지은 연산정(燕山亭).
裁剪氷綃 새하얀 비단 마름하여 輕疊數重, 사뿐히 몇 겹을 접어서 冷淡胭脂匀注。 가볍게 연지를 골고루 칠한 모양 新樣靚妝, 새로운 유행의 화장이라도 했는가 艷溢香融, 한껏 예쁜 자태 향기 감돌고 羞殺蕊珠宮女。 예주궁의 선녀가 무색하구나 易得凋零, 그렇지만 이 꽃은 시들고야 말겠지 更多少無情風雨。 또 몇 번이나 모진 풍우 겪어야 하겠는지. 愁苦。 아, 이 괴로움! 問院落凄涼, 이 처량한 뜨락엔 幾番春暮。 봄이 몇 번이나 지났던가. 憑寄離恨重重, 겹치고 겹친 상실의 서러움 전하고 싶지만 這雙燕, 이 제비 한 쌍이 何曾會人言語? 사람의 말을 어찌 알 수 있으랴 天遥地远, 멀고먼 하늘 저 멀리 萬水千山, 첩첩한 산과 강을 건너서 知他故宮何處? 예전의 궁궐 그 어디에 있는가 怎不思量, 어찌 생각이 나지 않으랴 除夢裡有時曾去。 깨어서도 몇 번이나 가보았건만 無據。 이제는 의지할 데 없구나. 和夢也新来不做。 어이하여 요즘은 꿈에도 보이질 않느냐. |
여진의 포로 신세가 된 휘종의 심란함이 드러나는 시. 절절하기 그지없다.
화가로도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는데, 실제로 휘종이 그린 그림들을 보면 단순히 황제가 그려서 좋은 평가를 받았던 게 아니라 진짜로 그림을 잘 그렸다.
"답화귀거마제향 踏花歸去馬蹄香"(뜻: 꽃을 밟고 돌아가는데 말발굽에 향기난다)이라는 제목을 화제로 내걸었더니 다른 화가들이 모두
어리둥절할 때 한 화가가 나비떼가 말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림을 그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이 시절 이야기. 이후 여인을 태운 말을
따르는 나비의 구도는 하나의 정형이 되었다.
문제는 그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황제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유능한 이를 등용해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예술을 즐겼거나, 나라를 평안케 한 뒤에 노후에 소일거리로 즐기는 정도에서 끝냈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휘종은 국정은 외면하고 예술활동에만 심취한 나머지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게다가 그냥 예술활동에 심취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저걸로 백성들 등골까지 빨아먹었다. 훗날 명나라의 천계제와 비견될 만한 행보이지만, 천계제는 목수질에만 심취했을 뿐 예술품 수집 등으로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휘종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33]
문제는 그의 직업은 예술가가 아니라,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황제였다는 것이다. 차라리 유능한 이를 등용해서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예술을 즐겼거나, 나라를 평안케 한 뒤에 노후에 소일거리로 즐기는 정도에서 끝냈다면 상관이 없었겠지만 휘종은 국정은 외면하고 예술활동에만 심취한 나머지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게다가 그냥 예술활동에 심취하기만 했다면 모를까 저걸로 백성들 등골까지 빨아먹었다. 훗날 명나라의 천계제와 비견될 만한 행보이지만, 천계제는 목수질에만 심취했을 뿐 예술품 수집 등으로 사치를 부리지는 않았고,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변명이라도 가능하지 휘종은 그것조차 불가능하다.[33]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