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가 장자를 해석할 때 인용한 주석서의 저자인 박세당은 50대에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금기시되는 노자, 장자에 대한 주석서를 간행하고, 송시열 등을 비판한 것에 의해 사문오적으로 몰렸다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의 손자, 대사헌, 대사간, 이조참판을 지낸 박정(朴炡, 1596 - 1632)의 넷째 아들이다.[2][3][4] 이름이 비슷한 박세채와는 8촌 사이이다. 박세당은 박응천의 증손, 박세채는 박응복의 증손인데 응천ㆍ응복은 모두 박소의 아들로서 형제이다. 육촌인 박세성(조부 박동선의 형 박동민의 손자)의 5대손이 순조의 사친(생모) 수빈 박씨이다.
1629년 이조정랑 후보 물망에 올랐던 나만갑이 갑작스런 김류의 디스에 이은 인조의 파직 명령으로 이어졌고, 뜬금없이 그와 가까운 관계였던 부친 박정은 남원부사로 좌천된다. 박세당은 부친의 임소인 남원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1632년(4세)에 부친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1635년(7세)에 큰 형 박세규가 23세로 병사한다. 다음해에는 병자호란이 터지며 원주와 청풍을 거쳐 두 형과 조모, 모친과 함께 안동으로 피난하였고, 다음해까지 청주와 천안을 떠도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다. 글도 10세가 넘어서 둘째 형인 박세견(朴世堅, 1619 - 1683)에게 배웠고, 13세부터 고모부인 정사무에게 배우며 학업을 시작한다.17세에 의령 남씨와 혼인하였고 형편이 좋지 않아 십여년 처가살이를 한다. 동갑인 처남 남구만과 한 집에 살며 절친하게 지내고 함께 공부하며 학문, 시사 토론, 시문을 쓰며 큰 영향을 주고 받는다. 1648년 장남 박태유[5]가 출생하였고, 1649년 모친이 1650년에는 셋째 형 박세후가 사망한다.[6] 1654년 차남 박태보가 출생한다. 1654년 중형 박세견이 문과에 급제하였고[7], 박세당은 32세인 166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 병조좌랑 역임 후 1662년 사간원 정언이 된다. 당시 대간의 일에 충실하며 지위나 당론에 관계 없이 의견을 표명하였다. 공조판서 김좌명, 대사성 이은상 제수를 비판하였다.링크 이어 인사 추천을 한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링크[8] 1663년에는 지평으로 도승지 임의백을 강력하게 탄핵하였다.링크 친분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탄핵으로 박세당을 둘러싼 시선은 곱지 않아지고 있었다.
이어 공의, 사의 논쟁이 발발한다. 교리 김만균이 조모가 호란 당시 사망한 일로 청의 사신 영접을 거부한다며 사직한다. 도승지 서필원이 국왕의 행사 배종을 거부한 것은 공사 구분을 못한 지나친 처사라며 그를 비판하였고, 송시열의 서인 산당 계열에서는 북벌 명분론을 유지하기 위해 김만균을 지지한다. 박세당은 서필원을 강하게 지지하였고, 산당에게 박증휘, 조원기, 오시수, 윤심과 함께 오사(五邪)로 지목된다.[9]링크 현재로 비유하자면 좌표 찍힌 것이다. 송시열과 산당의 배척을 받으며 한계를 절감한 박세당은 1664년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생을 목도하고 소를 지어 올린다. 1666년에 부인 의령 남씨가 사망하였다.[10] 그 와중에 현종에게 應求言疏를 올리며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한다. 40세의 박세당은 문신들이 매월 제출해야하는 월과를 3차례 짓지 않으며 파직되어[11] 결국 관직에서 물러난다.[12] 낙향해 경기도 양주 수락산의 남쪽 골짜기인 석천동으로 물러나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이후 2차례만 출사했는데. 1670년 통진 현감(通津 縣監)으로 백성 구휼을 위해 부임한 것과 1673년 영릉(寧陵)의 천장[13] 임무를 2개월 수행하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는 생활이었고 실제 농부가 되었다. 농부, 야인들과 어울리며 종일 논밭에 살았다고 한다. 가난에 시달리며 조정에서도 그를 구휼하자는 논의가 종종 올라왔다. 출사하라는 명이 내려와도 다시 나아가지 않았고, 1668년에는 벼슬을 거부한다며 장형에 처해진 바도 있었다.링크[14]
49세에 박태보가 유배되었다. 52세(1680년)에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며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2세에 대학사변록, 53세에 노자사변록, 59세에 장자사변록, 중용사변록, 60세에 논어사변록, 61시에 맹자 사변록, 63세에 상서사변록, 65세에 모시사변록을 간행한다.[15] 그러나 이 기간 동안 1686년에는 박태유가 사망하고 1689년에는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 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추국을 받고 사망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였고,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1703년 박세당이 74세에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비판한 것으로, 과거 사변록의 내용까지 탄핵의 대상이 되어 김창협. 김창흡 형제를 위시한 노론의 공격을 받고 사문난적으로 지목된다. 박세당은 삭탈관직되어 전라도 옥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판윤 이인엽이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의 절개를 생각할 것과 고령의 박세당에게 유배를 보내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는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다음해에 다시 문정(文貞)이라고 개시(改諡)하였다.
1629년 이조정랑 후보 물망에 올랐던 나만갑이 갑작스런 김류의 디스에 이은 인조의 파직 명령으로 이어졌고, 뜬금없이 그와 가까운 관계였던 부친 박정은 남원부사로 좌천된다. 박세당은 부친의 임소인 남원 관아에서 출생하였다. 1632년(4세)에 부친이 37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고, 1635년(7세)에 큰 형 박세규가 23세로 병사한다. 다음해에는 병자호란이 터지며 원주와 청풍을 거쳐 두 형과 조모, 모친과 함께 안동으로 피난하였고, 다음해까지 청주와 천안을 떠도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다. 글도 10세가 넘어서 둘째 형인 박세견(朴世堅, 1619 - 1683)에게 배웠고, 13세부터 고모부인 정사무에게 배우며 학업을 시작한다.17세에 의령 남씨와 혼인하였고 형편이 좋지 않아 십여년 처가살이를 한다. 동갑인 처남 남구만과 한 집에 살며 절친하게 지내고 함께 공부하며 학문, 시사 토론, 시문을 쓰며 큰 영향을 주고 받는다. 1648년 장남 박태유[5]가 출생하였고, 1649년 모친이 1650년에는 셋째 형 박세후가 사망한다.[6] 1654년 차남 박태보가 출생한다. 1654년 중형 박세견이 문과에 급제하였고[7], 박세당은 32세인 166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한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 병조좌랑 역임 후 1662년 사간원 정언이 된다. 당시 대간의 일에 충실하며 지위나 당론에 관계 없이 의견을 표명하였다. 공조판서 김좌명, 대사성 이은상 제수를 비판하였다.링크 이어 인사 추천을 한 원두표를 탄핵하기도 했다.링크[8] 1663년에는 지평으로 도승지 임의백을 강력하게 탄핵하였다.링크 친분과 대상을 가리지 않는 거침없는 탄핵으로 박세당을 둘러싼 시선은 곱지 않아지고 있었다.
이어 공의, 사의 논쟁이 발발한다. 교리 김만균이 조모가 호란 당시 사망한 일로 청의 사신 영접을 거부한다며 사직한다. 도승지 서필원이 국왕의 행사 배종을 거부한 것은 공사 구분을 못한 지나친 처사라며 그를 비판하였고, 송시열의 서인 산당 계열에서는 북벌 명분론을 유지하기 위해 김만균을 지지한다. 박세당은 서필원을 강하게 지지하였고, 산당에게 박증휘, 조원기, 오시수, 윤심과 함께 오사(五邪)로 지목된다.[9]링크 현재로 비유하자면 좌표 찍힌 것이다. 송시열과 산당의 배척을 받으며 한계를 절감한 박세당은 1664년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 암행어사가 되어 민생을 목도하고 소를 지어 올린다. 1666년에 부인 의령 남씨가 사망하였다.[10] 그 와중에 현종에게 應求言疏를 올리며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한다. 40세의 박세당은 문신들이 매월 제출해야하는 월과를 3차례 짓지 않으며 파직되어[11] 결국 관직에서 물러난다.[12] 낙향해 경기도 양주 수락산의 남쪽 골짜기인 석천동으로 물러나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했다. 이후 2차례만 출사했는데. 1670년 통진 현감(通津 縣監)으로 백성 구휼을 위해 부임한 것과 1673년 영릉(寧陵)의 천장[13] 임무를 2개월 수행하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하는 생활이었고 실제 농부가 되었다. 농부, 야인들과 어울리며 종일 논밭에 살았다고 한다. 가난에 시달리며 조정에서도 그를 구휼하자는 논의가 종종 올라왔다. 출사하라는 명이 내려와도 다시 나아가지 않았고, 1668년에는 벼슬을 거부한다며 장형에 처해진 바도 있었다.링크[14]
49세에 박태보가 유배되었다. 52세(1680년)에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며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52세에 대학사변록, 53세에 노자사변록, 59세에 장자사변록, 중용사변록, 60세에 논어사변록, 61시에 맹자 사변록, 63세에 상서사변록, 65세에 모시사변록을 간행한다.[15] 그러나 이 기간 동안 1686년에는 박태유가 사망하고 1689년에는 박태보가 인현왕후의 폐위, 훗날 경종의 원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추국을 받고 사망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였고,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 지중추부사에 제수되나 나아가지 않았다.
1703년 박세당이 74세에 지은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비판한 것으로, 과거 사변록의 내용까지 탄핵의 대상이 되어 김창협. 김창흡 형제를 위시한 노론의 공격을 받고 사문난적으로 지목된다. 박세당은 삭탈관직되어 전라도 옥과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판윤 이인엽이 박세당의 아들인 박태보의 절개를 생각할 것과 고령의 박세당에게 유배를 보내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는 상소를 올려 유배는 면할 수 있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다음해에 다시 문정(文貞)이라고 개시(改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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